최한기(崔漢綺, 1803~1877)는 19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기존의 동서양의 학문적 업적을 집대성한 수많은 연구 저서를 내고 한국의 근대사상이 성립하는데 큰 기여를 한 실학자이다. 최한기가 살았던 19세기는 17세기 이후 조금씩 밀려오던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조류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큰 파고를 만들어 내던 시기였다.
19세기 서세동점을 인식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정약용, 김정희, 최한기, 박규수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최한기는 ‘기학(氣學)’이라는 학문 체계를 통해서 동서양의 학적 만남을 꾀했고 이를 통해 조선이 처해있는 난국을 헤쳐나갈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개성 출신의 무과 집안에서 자라다
 최한기는 1803년 최치현과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삭령이다.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본가와 외가는 여러 대에 걸쳐 개성에서 거주한 집안이었고, 최한기 또한 개성에서 출생하였다고 전한다. 자는 지로(芝老)이며 호는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등을 사용했다. 최한기 집안은 조선전기 대학자인 최항(崔恒, 1409~1474)의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혈손은 아니다. 직계로 보면, 8대조인 최의정이 음직으로 감찰직을 지냈다고는 하나, 증조부 최지숭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문무과는 물론이고 생원진사시에도 합격자를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었다.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그러나 부친인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이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꾸준히 신분 상승을 도모하던 최한기 집안이 상층 양반이 된 것은 아들 대에 와서였다. 최한기는 1825년에 생원에 급제하였지만, 벼슬길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의 아들 최병대가 186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왕의 시종신이 되었다.
번 돈을 책 사는 데 쓰다
 최한기는 인생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보냈다. 개성이 고향인 그가 서울로 오게 된 것은 양부인 큰집 종숙부 최광현을 따라 서울로 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19세기 초반에 서울에 온 최한기는 서울 서부 회현방 장동(현재의 충무로 1가)에 살았다고 한다. 1834년 김정호가 남촌 창동 최한기의 집에서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를 판각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1830년대 초에는 장동에서 창동으로 이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 있는 최한기의 준호구에 기록된 주소지는 1852년 기준으로 서부 양생반 송현계 제3통 제3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최한기는 장동에서 창동을 거쳐 송현계에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최한기 집안의 경제력은 막연하게 부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최한기의 선대가 개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개성지역이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라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다. 앞서 언급한 1852년 준호구를 보면, 가족으로 부인 반남 박씨, 장남 최병대, 차남 최병천과 며느리 손자가 있고(슬하에 2남 5녀를 두었다), 집안 노비로 여자종 11명과 남자종 13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아주 안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안정이 필수다. 벼슬 생활을 하지 않은 최한기가 먹고사는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온갖 책을 사보며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학문을 대표하는 [기학(氣學)]과 [인정(人政)]이 경제적 기반이 탄탄했던 시기에 쓰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많은 책을 사서 보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1860년 이후 최한기는 경제적으로 기울기 시작하여 1870년 중반에 와서는 귀중한 책과 물건을 전당 잡힐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조선의 미래를 걱정한 19세기 지식인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과 어울리지 않고(현실적으로도 쉽지는 않았겠지만)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하였다. 이들은 분명 19세기 조선사회의 선각자들이었다.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 앞날을 전망한 새로운 지식인들이었으나, 당대에는 그들을 받아들일 풍토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의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해 최한기는 기학이라는 학문을 제창했다.
최한기는 근대사회의 가교 역할을 한 인물로 개화사상과도 연관이 있다. 최한기의 학문적 관심은 당시 학문의 주류였던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심의 성리학이 아니라 십삼경(十三經)이었고 나아가 기학이라는 자신만의 학문체계를 형성하였다. 또한, 서구의 근대과학기술로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최한기는 19세기 초반 개성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활하면서 19세기가 원하는 새로운 양반으로서 살았다. 대대로 벼슬이나 탐하고 성리학이나 읊어대던 구태의연한 양반이나 학자들과는 그 근본바탕이 달랐다. 당론이나 따지며 행세하는 서울양반이나 조상의 신주나 들먹이는 시골양반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파와 상관없이 오직 현실에 충실하며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최한기는 과거 유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던 유교경전보다는 눈앞에 펼쳐지는 인간의 경험과 인식을 중요시했다. 다산 정약용이 탈성리학을 외쳤다면, 혜강 최한기는 탈경전을 외친 것이다. 그는 학문을 하는 목적을 지구 상의 모든 나라들이 하나로 어울리는 ‘만국일통(萬國一統)’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 19세기에 이미 세계화를 외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의 현실은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화에 직면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한기는 동서의 만남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전 지구가 하나가 되는 이상론을 설계했다. 만국일통은 장밋빛 환상이 아니라 지식인들의 주체적 각성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19세기 중엽 동아시아는 서양 세력의 진출로 전통적인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깨져가고 있었다. 1842년 남경조약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무너져 내려갔고, 서양 침략을 겪은 중국 지식인들은 서양을 정확히 알아야 서양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서세동점은 이미 17세기 초반부터 시작되었지만, 중화사상에 젖어 있었던 청과 조선이 위기의식을 느낀 것은 19세기 중엽에 와서였다. 무너져 내리는 거대한 용, 중국의 몰락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최한기는 그 누구보다도 국제 질서의 변화에 깊은 우려를 가졌다. 그가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영환지략(瀛環志略)]을 깊이 연구하여 세계지리서인 [지구전요(地球典要)]를 편찬한 것이나 중국과 서양각국이 맺은 외교 조약을 필사하여 소개한 것은 서양의 사정을 정확하게 조선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도 멀지 않은 장래에 중국처럼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을 날이 분명히 다고 오고 있음을 예측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그러한 국제 조약을 맺을 준비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국제 정보에 어두웠고 지배층들은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해 있었다. 당시 정부가 서양 학문에 밝은 최한기에게 자문했던 것도 통상개방의 방법보다는 서양을 물리칠 방법에 가까웠다.
최한기는 전쟁과 불안이 아닌 화합과 안정을 추구한 인물이었다. 최한기 사상의 주요 골자라 할 수 있는 ‘운화(運化)’ ‘치안(治安)’의 개념은 바로 상생과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평생 부단히 학문에 열중했고 그 성과를 현실에 적용해 보고자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는 19세기의 참다운 지식인이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세계 인문·지리·천문·의학 등 실로 다양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저술을 종합하면, [농정회요(農政會要)], [육해법(陸海法)],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 [추측록(推測錄)], [신기통(神氣通)], [기측체의(氣測體義)], [의상리수(儀象理數)], [심기도설(心器圖說)], [우주책(宇宙策)], [지구전요(地球典要)], [기학(氣學)], [인정(人政)], [명남루집(明南樓集)] 등 20여 종에 달한다. 그가 다양한 책을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경험을 중시하면서 사물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실학의 어느 계파에도 닿지 않으면서 저술로 과학적 문명사회를 지향한 최한기는 우리 역사 전환기에 ‘실학과 개화사상의 가교자’임에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