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어느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자 제자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주께서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눅11:1)
여기에서 먼저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발견 하는 것은 예수님은 “아주 평온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척 바쁘신 분인데, 어디를 보나 "바쁘다"는 인상이 전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이 너무나 바쁘게 보여요? 바로 내가 그 사람이예요.
예수님은 홀로, 새벽 미명에, 아니면 밤이 맞도록 기도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위로가 되고, 편안해 져요. 예수님은 바뿐가운데 에서도 예수님은 인기를 멀리 하고, 대중을 떠나서, 조용히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주고 (눅11:2~3)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알아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다 보면, 한 소리를 하고, 또 하게 되지요. 이것을 우리는 <중언 부언이라>고 합니다.
또 염불같은 기도를 하기 쉬운데, 기도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 = 주기도문)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세요. <아버지?>라고...
1)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2)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즉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뜻입니다.
3)“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하소서..." 죽,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기도를 하게 하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기도를 하게 합니다. 또 신앙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지요.
4) 기도의 중간에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면서 내 삶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건강도 구하고, 배고플 때에는 "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웃기는 사람의 얘기는 맨날 기도하면서 하나님 에게는 “달라”고 만 하니까 식상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안 한데요.
5)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것같이, <나도 남을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죄도 용서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중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눅11:4)
우리 기도 가운데 <영적인 문제>는 아주 중요해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에게 덤벼들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지요.
<마귀>는 우스운 존재도 아니고, 겁먹을 존재도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존재입니다.
이런 것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기도의 태도>는 어떻해야 하나요?
5절을 보십시오. 너희중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친구가 한 밤중에 찾아와서 “빵 3개만 꾸어 주게”라고 말하면, 그에게 “나를 괴롭히지 말게, 가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들었으니, 지금 일어나 뭘 줄수 없네“라고 거절 할 수 있겠느냐? 친구라는 이유로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 때문에 나는 일어나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눅11:5~8)
여리고성의 소경은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이 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눈 뜨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게 <비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린아이 처럼 말하라>는 거예요. 자녀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은 당당한 <권리>이고, 자녀의 <도리>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눅11:9~10)
이 말은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두드리는 사람 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은 고상한 말만 하지 않고, 이렇게 필요한 얘기를 해 줍니다.
예수님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빙빙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단도 직입적으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11절~13절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비유로 너희중에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며,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있겠는가?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눅11:11~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셋째, <기도>는 성령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 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완전하신 분이 기도를 하셔야 했을까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1. <기도>는 하나님과 호흡하는 것이고,
2.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며,
3.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마음의 병>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이 곧 <염려>입니다.
이런 <염려>는 근심과 걱정이고, 이것을 하나님께 기도제목으로 올려서 기도하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나의 어려움이나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이 기도하면서 스스로 반성을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염려가 생겼을 때,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원망합니다.
문제가 나타났을 때, 이것이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탓이 아니고,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예로써 내가 남의 차를 손상 시켰을 때,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가 “자기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여 <그 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아요.
그러나 "남으로 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염려와 걱정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살았지만, 왕궁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마음이 편한 사람이 되었고,
사울은 왕궁에 살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지켜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누구를 지켜 주십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지켜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늘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면서도 매일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사역하도록 만들어 주는 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자신 있을 때,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교만하면,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자신이 있어서 잘 나갈 때에도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내가 교만하다”고 느껴질 때에도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의 뜻>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설명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 안될 때에 막판에 가서야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포기하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니고, <주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개입하여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하루 세끼 식사를 해야 하듯이, 예수를 오래 믿었더라도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과 호흡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집니다. 기도하면, 모든 준비를 모두 다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에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37.<귀신의 특징, 비움보다 채움이 좋다>눅11:14~29, 말씀: 하용조 목사님
불교의 주제는 <비움>입니다.
기독교의 주제는 <채움>입니다.
기독교에서도 <비움>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자기를 비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비운 마음에 <성령>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비운 마음에 <말씀>으로 채우는 거예요.
비운 마음에 <사랑>으로 채우는 거예요.
<사랑하면>......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고,
<미워하면>...... 안보고 있어도 꼴 보기 싫은 거예요.
친정 엄마와 시어머니의 차이를 아세요?
딸이 시집가서 손님이 많이 왔는데, 밥을 짓지 못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상황을 두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지요.
친정 엄마는 "얘야! 내가 가르켜 주지 않았으니까, 당연하지! 미안하다"라고 말하지만,
시어머니는 "너!, 시집오기 전에, 밥이나 해 봤냐?" 라고 핀잔을 줍니다.
기독교는 믿고 <구원 받는 종교>이고, 불교는 자신이 득도하여 <성불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성령 받는 순간에 <득도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나이 많은 고승일찌라도 <득도한다>고, 오늘도 불상앞에서 <참선>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또 기독교는 <창조론>에 근거하지만, 불교는 <진화론>을 믿어요.
<진화론>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어떤 물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진화하여, "이렇게 되었다"고 설명을 해요.
그러면 "그 무엇이 무엇인가요?"
그것을 계속해서 따지고 올라가면, <그 무엇이?> 무엇인지 답이 안 나와요.
"답이 없다"면, 결국은 <그 무엇은?> "창조 되었다"는 결논이 나오지 않아요.
하나의 예로, 물이 H2O라면, H 두개와 O 한개가 만나서 물이 되는데, "그럼, 애초에 있는 H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것에 대한 답을 못해요.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창조되었다> 는게, 결론이기 때문이지요.
이와같이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를 한 것>입니다.
그 순간에 <성령을 받은 것>이지요.
오늘의 본문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말 못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계셨습니다. 그 귀신이 나오자, 말 못하던 사람이 말하게 되었고,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눅11:14)
여기에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귀신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귀신은 종류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 귀신은 한가지 일만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가지로 개입합니다.
귀신이 사람에게 들어가면, 사기꾼도 되고, 폭력꾼도 됩니다.
예로써 거짓말 하는 <더러운 영>이 들어가면, <거짓말 장이>도 됩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사람은 귀신이 입에 붙어서 말을 못하게 하는 <벙어리>가 되었어요.
1절에서 또 "예수께서 그 귀신을 쫓아냈다"고 했으니까 <귀신은 쫓아 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2. <귀신은 쫓아내면, 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안에 도둑이 들면, 어떻게 하나요?
도둑을 보는 순간, 큰 소리를 지르고, 쫓아 내야지요.
귀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기서 "쫓아낸다"는 뜻은 <귀신은 항상 숨어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3. 귀신의 특기는 <숨어있고>, <자기가 귀신이 아니다>고 반대로 우깁니다.
귀신은 갑자기 자기의 정체가 들어나면, 먼저 <귀신아 아니라>고 발뺌을 합니다.
그리고 발각되면, 능력이 없어져서 슬그머니 도망쳐서 그 자리를 모면하지요.
귀신에게 <귀>를 붙잡히면 [귀머거리]가 되고, <입>을 붙잡고 있으면 [벙어리]가 돼요.
4. 귀신을 쫓아내면, 병이 낫아요.
귀신때문에 생긴 병은 귀신을 쫓아내야 병이 낫아요.
귀신때문에 오는 병을 보면, 노이로제와 자기를 비관하는 우울증이 많아요.
이런 병들은 사탄이 여러분을 장악했기 때문에 생기는 <병>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영>은 떠나가라!"고 소리치면 귀신이 물러가요.
15~16절을 보세요.
그러다가 어떤 사람은 말했습니다. 예수는 귀신의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를 시험할 속셈으로 하늘의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기도했습니다.(눅11:15~16)
여기에 두가지 사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귀신이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 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늘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예수를 시험합니다.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은 분명한데, 귀신의 힘(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쫓아 내려고 하지만, 그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사탄은 자기가 사탄이란 사실이 들어나면, 오히려 "네가 사탄이다" 라고 대들어요.
5. 귀신은 자기 <정체>를 숨겨요.
사탄은 자기 정체를 숨겨요.
그러나 자기 정체가 드러나면, 오히려 뒤집어 씌워요.
여러분! <어둠>이 <어둠>을 쫓아낼수 있겠어요?
그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둠>은 빛이 오면, 자연히 없어 집니다.
<어둠>에게 <어둠>이 또 오면, 오히려 더 어두워 져요. 그러므로 귀신을 쫓을수 없어요
무당이 굿을 하여 "귀신을 불러 온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기 모순>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맞지가 않아요.
귀신이 귀신을 불러서 귀신을 쫓으면, 처음에는 가능한 것 같은데, 한참을 지나보면, 그것이 아니예요.
<자기 모순>에 빠져서 답이 없어요.
17절을 보세요. 그러나 예수께서 말슴하셨습니다. 어떤 나라든지 서로 갈라져 싸우면 망하게 되고, 가정도 서로 갈라져 싸우면 무너진다. 사탄도 역시 서로 갈라져 싸우면 무너진다. 사탄도 역시 서로 갈라져 싸우면 사탄의 나라가 어떻게 설 수 있겠느냐? 너희는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고 하니, 내가 바알세블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쫓는다면, 너희 아들 (귀신을 내쫓는 사람)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눅11:17~19)
귀신이 서로 사랑하면, 그건 귀신이 아니지요.
귀신은 서로 싸우게 되어 있어요.
귀신이 서로 싸우면 망하게 되어 있어요.
6. 귀신의 특징은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욧점은 20절에 나와요.
20절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어, 귀신들을 내 쫓는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 (눅11:20)
여기에서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요.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다"는 얘기 입니다.
마태복음12장 28절에도 "내가 하나님의 여을 힘 입어 귀신들을 쫓아 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온 것이다. (마 12:28)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지식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요.
그러면, 귀신도 자존심이 있는데, "니까짓게 나를 무시해!" 라고 조롱하며 쉽게 나가지 않아요.
귀신은 내 노력으로 쫓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성령>의 힘으로 쫓아야 해요.
<어둠>은 <빛>이 와야 해결돼요.
선거 때가 되면, 거짓말의 <영>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나라는 <거짓말 천국>이 됩니다.
귀신을 쫓을 때에는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야 해요.
나는 가끔 거울을 쳐다보면서 나도 모르게 내게 들어온 귀신에게 얘기해요.
" 귀신아! ~ 얼른 물러가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해야 합니다.
귀신이 나에게 오는 것은 어쩔수 없어요.
그러나 귀신이 내게서 오래 머물도록 하면 안돼요.
귀신이 집을 짓고, 살기 이전에 빨리 그 귀신을 쫓아 버려야 해요.
귀신도 울 때에는 눈물을 안 흘려요.
우는 것만 흉내를 내는 귀신도 있어요.
귀신이 나갈 때에는 "내가 어디로 갈까?"라고 물어요.
그때 "지옥으로 가라"고 소리치세요
7. 귀신을 오래 끼고 있으면, <귀신의 문화>가 생겨요.
그 문화에 오래 젖어 있으면, <귀신의 성격>이 또 생겨요.
그래서 으례히 자기가 거기서 살아도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해요.
8. 귀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방황>이예요.
귀신도 자기와 코드가 맞아야 같이 살아요.
방황하는 사람에게는 <악령>이 스며 들어요.
<가시나무새>라는 노래가 그렇게 갈 곳이 없어.....
이 노래는 <방황하는 자기 모습>을 표현한 노래예요.
9. 귀신은 쉴 곳을 찾다가 없으면, 다시 옛날 집으로 돌아와요.
그러나 옛날 집에 돌아와 보니, 너무도 집이 깨끗하고, 청소가 잘 되어있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으면,
귀신이 들어 오려고 하다가, 못 들어 와요.
10. 귀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더러워야 머물러요>.
귀신은 인격도 더러운 곳에 붙어 살고, 환경도 더러운 곳에 붙어 지내요.
그런데 돌아다 보니까 지난 번과 달리 깨끗이 청소되어 있으면, 귀신은 "이제 틀렸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집에 들어오지 못해요.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청결하게 몸과 마음을 유지하고, 환경도 깨끗하게 정리 정돈을 잘해야 합니다.
백악관이 예뻐서 유명한게 아니라, 대통령이 살기 때문에 유명한 거예요.
집은 예쁜데,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허가 되지요.
집은 주인이 살고 있어야 해요.
그러므로 내 마음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을 <주관>해야 해요.
그러나 내 마음에 <귀신이 주인>이 되어 주관하면, 그게 <귀신들린 사람>인 것이예요.
그래서<비움>보다 <채움>이 더 좋은 거예요.
불교에서는 "자기를 비워서 열반에 이른다"고 하지만, 자기를 비운 곳에 <빛>으로 채워야 해요.
자기를 비운곳에 <말씀>으로 채워야 해요.
자기를 비운곳에 <성령>으로 채워야 해요.
자기를 비운곳에 <사랑>으로 채워야 해요.
27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실때 한 여인이 소리쳤습니다. "선생님 을 낳아 젖을 먹이며 기르신 어머니는 정말 복있는 분입니다. 예수께서 <정말 복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눅11:27~28)
맞습니다. 가족이 소중하시죠.
내 몸에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이 넘쳐야 귀신과 마귀가 머물수 없는 거예요.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소중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더 소중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눈 형제> 이기 때문입니다.
구정 명절을 잘 보내시고, 항상 승리하는 생활이 되시기 축원합니다.
38.<종말에 사는 지혜>눅12:49~59, 말씀:하용조 목사님
예수님은 <희망의 메세지>를 전해 주지만, 가끔은 칼날같은 <비수의 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좋은 말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만, 잘 못된 것은 바로 고쳐야 합니다.
몸에 암 덩어리가 자라면, 그것을 수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온 몸 전체에 퍼집니다.
추수할 때 알곡은 집안으로 들이지만, "쭉정이는 불에 던져 진다"고 말씀했어요.
그것이 <사람>의 생각이지요.
우리는 교통신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빨강, 노랑, 파란 불이 <우리를 간섭한다>고 생각 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건 아니예요. 어떤 때는 빨리가고 싶은데 빨간 불이 켜지면, 속이 불편해 져요.
그러나 반대로 그 빨간 불이 나를 지켜주는 거예요.
그 빨간 불이 우리 모두를 지켜 줄 때도 있어요.
질서는 더디게 가는 것이 아니고, 바르게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다릴 줄도 알고, 떠나야 할 줄도 알아야 해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것은 고치고, 바로 잡아야 해요.
도려낼 때에는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나쁜 것은 수술해서 없애 버려야 해요.
우리 집에 있는 <쓰레기>는 버려야 해요. 그래야 집안에 냄새가 안나요.
그러므로 반드시 <심판>은 있어야 해요.
심판이 없으면, 세상의 질서가 무너져요.
세상은 뒤죽 박죽되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수 없어요.
요즘 세상은 가짜가 진짜처럼 살기때문에 더욱 더 그런 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심판>이 필요한 것이지요.
<심판>은 잘못된 것을 수술해서 도려내는 것이예요.
<심판>은 잘못된 것을 끊어내는 것이예요.
농사꾼은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봄철에 꽃이 필적부터 필요 없는 것은 솎아내야 해요.
그래야 좋은 열매가 맺혀요.
누가복음 12장 49절을 보세요.
내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는데, 이미 그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눅12:49)
나는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 그런데 이 불이 벌써 붙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불을 지르러왔다"고 했어요.
이 말은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의 의미>인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한 거예요.
<고난>은 새로운 차원의 축복을 주기 위한 것이므로 나의 거품과 나의 잘못을 제거시켜야 해요.
그러므로 <고난>은 나의 잘못된 것을 없애는 작업이예요.
50절을 보세요.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눅 12:50)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바라는 세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불과 물의 세례가 아니고, <고난의 세례>입니다.
여기에서 <고난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고난>도 각오하면 쉬워 져요.
<고난>이 어려운게 아니고, 고난을 겪어야 하는 <두려움>이 힘든 거예요.
사람은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걱정이 앞섭니다.
그 <걱정>과 <두려움>이 사람을 힘들게 만들어요.
"돈이 없다"고 죽는게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생각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거예요.
여기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돈이 없는것" 보다, 그 <그 두려움에 떠는 인간> 이예요.
십자가는 <지기로 결정할 때까지가 어렵지! >, 일단 결정하고나면, 그 때부터는 쉬워져요.
나는 이북에서 1.4 후퇴 할때에 입은 옷과 성경책 1권을 들고 나왔어요.
그래도 우리는 지금까지 잘~ 살고 있어요.
이 일이 <내가 져야할 십자가>라고 생각하면, 모든 것을 다 이겨낼수 있어요.
예수님도 이런 <고난의 세례>를 다 아시고, 그렇게 사셨어요.
그래서 달관하는 모습으로 얼굴에는 빛이 나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던 거예요.
51절을 보세요.
"내가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눅12:51)
너희는 "내가 평화를 주러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지만 "오히려 나는 분쟁을 일으키려고 왔다"고 말씀했어요.
이 말씀에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나오는 <분열>은 망가 뜨리러 온게 아니라, 진짜 평화를 위해서는 가짜 평화를 없애야 해요.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는 불의를 떨쳐 버려야 해요.
그래야 진짜 평화가 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분열과 평화를 섞어놓지 말고, <분명히 구별하라>고 했어요.
우리 몸 속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함께 섞어놓지 말고, <더러운 것은 없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평화>를 분리하여, <가짜를 없애라>는 뜻이예요.
여러분. 축복을 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축복이 아닌 것을 걷어 내세요.
그래야 <진정한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52절을 보세요.
이제부터 한 집안에서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둘과 싸우고, 둘이 셋과 싸울 것이다" (눅12:53)
여기 표현이 참 재미있네요.
"집에 있는 5식구가 분쟁하는데, 셋이 둘과, 둘이 셋과 다툴 것입니다."
이 말은 어떤 때는 불의가 더 커 보일수도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정의가 승리해요.
부부 간에, 부자 간에, 고부 간에 <싸운다>고 해도, 어찌 헤어질수 있겠어요?
이들은 헤어질수 없는 관계이므로, <정의와 불의를 확실히 구분해야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함께 섞어 있으면, 기적을 만들어 낼수 없어요.
결국은 <헌것>은 버리고, <새것>이 힘을 내는 것입니다.
53~57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싸워 갈라질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군중을 향해,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 나는 것을 보고, 소나기가 오겠다>고 하면,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날씨가 덥겠다>고 하는데, 그것도 그렇게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왜 이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눅12:53~57)
여기에 서풍과 남풍의 얘기가 나와요.
이것을 우리는 <자연현상>이라고 해요.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든것은 56절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떻게 지금 이 시대는 분간할 줄 모르는가?"(눅12:56)
너희 위선자들은 자연 현상을 알면서, 왜 <시대정신>은 이해하지 못하느냐?
즉, <시대 정신을 이해하라>는 말입니다.
즉, 시대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과거 노무현 정부는 친북 좌파가 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지만, 그 시대가 지나 가니까, 이제 조용해 졌어요.
처음에는 불이 났어도 “금방 끄겠지!” 그러나 허둥대는 바람에 다 타 버렸어요. 그것은 재난에 대비한 훈련미비입니다.
3. 임진왜란도, 6.25의 포화도 다견뎌 냈는데, 어찌 한사람의 나쁜 마음이 이렇게 무참히도 ......
그 사람은 누구인지 몰라도 그렇게 저항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4. 불에 탄 기와가 마지막으로 와르르~~~ 무너질 때, 우리의 마음도 한꺼번에 무너 졌어요. 그것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회개 하지 않으면,<우리 모두 다 멸망한다>는 신호이구나!
5. 이명박 정부가 시작하면서 <실속있는 나라를 만들라!>는 [경고의 메시지] 이구나!
성도 여러분! 주변의 사건을 보면서 원망과 불평의 눈으로 바라 보지 말고, 회개의 도구로 삼으세요. 내가 더욱 더 정신을 차리고, 더 성실하게 일해서, 좀 늦더라도 바르게 살기 바랍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한 그루 심었습니다. 그는 열매가 열릴까 해서 매일 보았지만,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도원 지기에게 말했다.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보려고 3년 동안이나 와 보았지만, 하나도 없으니, 나무를 베어 버려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겠느냐? 그러자 그 종이 대답했습니다. “주인님, 한해만 그냥 두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혹 내년에 열매가 열릴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때베어 버리십시오(눅13:6~9)
포도원에 무화과 나무를 심었고, 주인이 <3 년을 기다렸다>고 했어요.
그러나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었다”는 것은 <유대인들>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방인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된 민족, <선민>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민으로 선택해서,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기대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거역했어요.
오히려 그들은 이방인들의 접근을 막았고, 구약종교를 자기들의 전유물로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자기들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독점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 = 유대인들)은 복음을 자기의 율법으로 만들고, 이방인들을 개처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방인들은 접근을 못하게 하면서 자기들만 구약 종교에 빠진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타난 사람이 <사도바울>이어요.
<하나님의 꿈>은이 세상 끝까지, 땅끝까지, 미전도종족에게 까지도 <구원의 소식>을 전하길 바랬어요.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3 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없었다고 했어요.
여기에 나오는 7절을 보면, 재미난 표현이 나와요. "하나님은 열매를 바랬지만, 아무런 열매도 없었다.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겠느냐?> = 왜 땅만 못살게 하느냐?"
이 말은 <하나님은 믿고 맡겼는데, 열매가 없으니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어요. 그것은 <종의 멋진 대답>입니다.
“주인님?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제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듬 해라도 열매가 맺으면, 좋은 일 아닙니까? 혹시 그렇게 하고서도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가서 잘라 버리시지요“
이것이 <중보기도>이고, <중보자>입니다. 이 분이 예수님처럼 의미 있는 사람이예요.
“주인이 나무를 베어 버리겠다”고 한 것은 잔인한게 아니고, 당연한 거예요. 그러나 <종>의 생각은 달라요.
주인의 태도가 옳지만, 그러나 3년을 기다렸는데 <1년만 더 기다려 달라>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또 종의 생각은 <그냥 1년을 지내며 보겠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거름을 주고, 정성껏 가꾸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으니, "그때가서 결정 하자"는 의견이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셨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 보고 있어요.
“3년을 기다렸는데, 맨날 술만 먹고, 화토만 치고.......
하나님은 이제 그런 사람은 <기다려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요! 저놈은 아주 쓸모없는 놈이예요." "그 놈은 기다려 봤자 말짱 헛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그냥 쓰어 버리세요"라고 혹시나 옆에서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데 그 반대로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러나 이 놈은 그렇지 않아요.
또 다른 사람은 <그는 그렇지 않아요>라고 부인하며 이 사람을 두둔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일대일>도 가르치고, 1년 후에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키우 겠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고 지켜 보세요.”라고 당신의 곁에서 건의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니까 내 입장에서 나를 변명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이 여러분의 곁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해줄 사람은 없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그가 <중보자>입니다.
오늘도 승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40.<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눅13:10~15, 말씀:하용조 목사님
누가복음 13장 10절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에 관한 얘기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거기에는 18년동안 <병을 일으키는 영>에게 시달리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허리가 굽어 똑바로 설수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여인을 보고 앞으로 불러내어 “여인아 네가 병에서 해방 되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여인에게 손을 얹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눅13:10~13)
여기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불구의 몸>이 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허리가 꼬부라져 허리를 쓸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이 <병을 일으키는 영>이 허리에 붙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펼 수 없는 허리 꼬부라진 병에 걸렸습니다.
귀신도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붙어서 생활을 합니다. 병을 일으키는 <영>, 즉 <귀신>이 다리에 붙으면 앉은뱅이가 되고, 입에 붙으면 <벙어리>가 되지요.
이런 것을 우리는 <귀신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귀신병>은 귀신을 쫓아내면 낫게 돼요.
그러나 연필을 깍다가 칼에 손을 베었으면, 그냥 옥도정기를 바르면 낫아요. 그런데 여기다 데고, <귀신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지 마세요.
그동안 저는 병치레를 아주 많이 하고 있는데, "나도 <내병>을 잘 안다"고 자만해서 병을 키웠어요.
의사가 "혈압 약을 먹으라"고 했을 때에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았으면 금방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고쳐 보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내 병을 키워 왔던 거예요.
그냥 운동을 하고, 약을 잘 먹으면 될 일을 괜히 오래도록 고생을 했지요. 그건 순전히 나의 잘못된 판단 때문이었어요.
그런 <경고>를 수없이 많이 받았는데, 나는 어리석게도 <믿음으로 해결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몸이 망가졌지요.
어찌 되었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나 저러나 우리 인간들은 한동안 살다가 죽어요. 그러나 언쨋든 죽긴 죽지만, 건강하게 살다가 죽어야 해요.
이 여인은 18년동안 허리에 귀신이 붙어 허리를 굽게 만들었어요. 허리 굽은 사람은 허리 펴지는 것이 소원이예요.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회당장은 <안식일 날 병을 고쳤다>고 야단이예요.
일주일이 6일이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안식일 날 병을 고쳤냐?"고 큰소리를 쳐요.
1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안식일 날 병을 고친 것이 화가난 회당장이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일할 날은 엿새나 있다." 그러니 그날에 와서 병을 고치고, 안식 일에는 하지 마시오“(눅13:4)
이 회당장의 안목은 <병고치는 일>은 관심이 없고, <안식일에 왜 그런 일을 했느냐?>는 거예요. <사람>과 <병>은 관심이 없고, <안식일> 이라는 [제도]에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형식>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형식>을 위해서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조금만 제도가 다르면, <이단>이라고 몰아 붙여요. 그 사람이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관심도 없어요.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를 짓고 나서, 카페트를 까는 문제에서 교인들이 두갈레로 갈라 섰대요? 빨간색 카페트는 <보혈파>이고, 파란색 카페트는 <시편 23편파>로 나누어 졌대요.
교회에서 이렇게 중요하지도 않는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면 되겠어요? 실제로 <교회 안의 내분으로 그랬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로 주장을 달리하면 안되지요.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고, 교회 안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고, [예수님]이 보여야 해요. 결국 [사람]이 중요한 거지요.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 위선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황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끌고 나가 물을 먹이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인이 18년 동안이나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풀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그를 반대하던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 했습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께서 행보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보고 기뻐했습니다(눅13:15~17)
<위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에 소와 나귀를 끌고가서 물을 먹이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18년 동안 고생한 딸을 품어줘야 하지 않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두 부끄러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식>보다는 <내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세요.
<본질>이 아니면 서로 다투지 마시고, 그냥<통과>하세요.
그러나 <본질>은 꼭 붙잡아야 합니다.
또 <믿음>을 철저하게 복음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문화>는 적당히 타협해도 괜찮아요.
<문화>는 "머리에 무스를 바르느냐? 마느냐?"라 든지, "옷을 이렇게 입느냐? 저렇게 입느냐?"는 것은 시대의 조류에 다라 적당히 타협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질>인 예수는 꼭 붙잡고 가야합니다.
오늘의 성경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도 베데스다 연못에서 병에 고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병에 걸린지 38년이나 되는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서 걷게하신 기적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은 구약 종교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구약종교에는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습니다. 구약 종교에는 <율법>은 있으나, <해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약속은 하셨지만, <율법에 메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직 구원받기 위해 행동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목마름>이 컸기 때문에, 날마다 제사를 드리고 메시아를 기다렸어요.
예수님은 하나님과 같은 영적 <권위>나 생명의 <능력>을 갖고 계시므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날이 <안식일이므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구약 종교는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이 <안식일 날에 병을 고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 쉬지 않고, 예수님이 병 고친 사실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는 병이 고쳐졌으므로 너무 좋아서 어쩔줄 모르는데,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유대인들은 배가 아파 합니다.
그래서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안식일인데 왜 하필 그날 병을 고쳤느냐?"는 것이지요.
병을 고치려면 안식일, 다음날 고칠 것이지,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그렇게 했느냐?" 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 날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율법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구약종교의 신봉자들은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의 껍데기만 가지고, 그걸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으면서도 진짜 메시아가 오니까,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구약종교를 숭상하면서도, 그들의 종교 감정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행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면,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구약 종교의 <형식 속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그게 [믿음]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인 이 사람들의 유일한 목적은, 그들이 믿던 유대 구약종교를 그냥 그대로 믿는것 뿐입니다.
여러분! 이런 현상은 유대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직장에서도 유대인과 같이, 해 온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득권자인 자기 자리를 지키려고만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은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럼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관심은 이 38년이나 지난 앉은뱅이가 "잘 걷기는 하는지?" 또는 "얼마나 힘들게 걸을까?"하는 것입니다.
병자의 고독이나 돈 없는자의 무력함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기에, 그 <영혼>에 대하여 오로지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쉰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일한다>는 뜻입니다.
소극적인 안식일은 <쉰다>는 의미이고, 적극적인 안식일의 뜻은 <일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면 주일날 한시간 일찍 오셔서 교회 청소하시고, 쓰레기도 줍고, 화장실도 돌봅시다.
그리고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고, 예배 마치고 나면, 특정 분야에서 열심히 봉사하십시요.
안식일 날은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말씀을 읽고, 즐겁고 기쁘게 자원하여 내 자신이 아닌 다른사람을 위하여 봉사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은 나만을 위해서, 나의 쾌락을 위해서, 즐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게하기 위해서, 주일날인데도 쉬지 않고, 남을 가르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그런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41.<하나님 나라의 비유>:겨자씨와 누룩, 눅13:18~21, 말씀: 하용조 목사님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항상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고향과 같은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고, [천국]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산다"는 뜻으로 이승인 <이땅>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 나라>는 마음 속에 있는 <저땅>입니다.
여기에서 <이땅>과 <저땅>은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땅>과 <저땅>은 둘로 구분된 것이 아니라,
<이땅> 안에 <저땅>이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이땅>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인 <저땅>에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요?
<이 땅에 살고 있다>는 사람은 눈물과 고통을 느끼고, 어려움으로 한계를 느끼며 살아 갑니다.
그러나 <이땅>에 살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품고 사는 사람은 두 가지 세계를 왔다 갔다 하기때문에, 너무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눈을 감으면 <저땅>인 [새 하늘과 새 땅]이고,
눈을 뜨면 <이땅>인 [세상 나라]가 보여요.
그래서 아주 신나게, 멋있게, 살수 있는 것이예요.
이 세상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다"고 하여도,
<하나님 나라>를 품고 있는 사람은 콧노래가 나오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서 성장하는 것을 꿈꾸는 부모님들의 기쁨과 같은 거예요.
어린 아이가 자라서 [큰일]을 할 것을 상상하면,
부모들은 너무나 <가슴벅찬 일>입니다.
그런 상상, 그런 기대감, 그런 희망은 <크리스챤의 기쁨>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가 내 마음속에 심어지면,
그것이 씨앗과 같이 싹을 틔우고, 큰나무로 성장하게 되지요.
오늘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두가지 비유를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겨자 씨의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나라>는 [겨자 씨와 같이] 아주 작게 비유해요.
누가복음 13:18~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같은가? 그것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누군가 가져다 자기 밭에 심은 <겨자 씨>와 같다. 그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면,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둥지를 튼다. (눅13: 18~19)
이스라엘을 여행한 사람은 <겨자 씨>에 관심이 많고, 또 거기서 판매도 합니다.
겨자 씨는 아주 작은 씨앗으로 직경이 1mm 미만으로 <아주 작은 것>의 상징입니다.
들에서 재배되는 식물인데, 씨앗을 씹으면 맵고 향기가 나서 음식에 사용하는 기호식품입니다.
배추과에 속하고, 다 자라면 1m~3m정도의 나무와 같이 크게 자랍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을 심으면, 3일 만에 싹이 트고, 크게 자라므로, <하나님 나라>에 비유해서 자주 사용합니다.
여기에서 "심는다"는 표현은 첫째, <섞어진다>는 말이고, 또 <숨는다>는 뜻도 있어요.
아주 작은 씨앗이지만, <섞어져서 큰나무로 성장한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태가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적어도 <나라>라면, 국토가 있어야 하고, 국민이 있고, 주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그런 땅이 하늘 저편에 있는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영적인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영적인 세계>이므로 태양도 필요 없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태양이니까.......
<하나님 나라>는 지도에 나오는 지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다스리느냐?"는 통치권의 문제입니다.
즉, <통치와 지배>의 권한이 가장 큰 이슈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이 다스리면, <하나님 나라>이고,
내 마음을 귀신이 다스리면, <귀신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이므로, 내 안에 하나님이 있으면,
그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와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했어요.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기 있고, 오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영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다함께 섞여있는 거예요.
<희망>은 희망으로 가는게 아니고, 희망으로 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통치하는 곳이 <하나님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믿음있는 우리에게는 이미 <와 있고>
또 <여기에 있고>
또 믿지않는 사람들에게는 <오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가 내 안에 들어와서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에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감동을 받는 사람도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별로 특별한 감동없이 그저 그렇게 평범하게 믿는 사람도 있어요.
이것은 아주 작은 보잘 것 없는 <겨자 씨>를 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그 씨앗이 심어져서,
<착근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예수가 <접붙임>되는 거예요.
이것은 계란의 <유정란>과 같아요.
생명이 있는 <유정란>은 암닭이 품으면, 병아리가 나와요.
그러나 <무정란>은 암닭이 아무리 오래 품어도, 그냥 썩어 버려요.
"생명이 있다"는 것은 새싹이 나와야 하지요.
생명이 없으면, 새싹이 나오지 않아요.
여러분! <진짜 꽃>과 <가짜 꽃>의 차이를 아세요?
<진짜 꽃>은 나비가 찾아와요.
그러나 <가짜 꽃>에는 나비가 날아 오지 않아요.
최근에는 기술이 좋아져서 향기도 요즘은 집어 넣는 시대가 되었어요.
생명은 신진대사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해요.
이것은 마치, 여자가 임신을 하는 것과 같아요.
여인이 임신하면, 자궁 속에서 태아가 자라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럭 무럭 자라거든요.
3개월까지는 겉으로 표시도 나지 않지만, 속에서 자라나요.
어떤 사람은 10년을 교회나왔는데 <하나님 나라>를 느끼지 못 하는 사람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자라다가 성장을 멈추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믿는 순간에 "확"달라지는 사람도 있어요.
씨를 뿌리자마자 싹이 나오고, 쑥쑥 자라는 사람도 있지요.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내 마음 속에서 <심겨져서> 자라는 거예요.
<씨를 뿌린다>는 것은 첫째는 <자란다>는 의미이고,
둘째는 <성장한다>는 의미가 있어요.
우리가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장년기,노년기로 자라는 것과 같아요.
예수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성장하고 "확, 변해야 해요.
10년후에 그사람을 보면, 더 성숙해지고 <확> 달라 져야 해요.
"어 ! 사람이 변했네..." "당신 달라졌어! "라는 인사를 받아야 해요.
얼굴 빛이 달라지고, 걸음 걸이가 달라지고, 말씨가 달라지고, 가치관이 달라져야 해요.
예수님의 생애를 보더라도 30년동안 준비를 하고, 3년동안 사역을 하셨어요.
그동안 예수님도 수 없이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병자도 고쳐주고, 어려운 이웃도 돕고, 귀신들린 자도 쫓아주고, 사람들을 만나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고, 성령님이
되어 오늘에 까지 왔어요.
지금 나는 미숙하고 유치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져야 해요.
지혜롭고, 총명하고,멋있고, 아름답게 늙어야 해요.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내 안에서 자라기 때문이예요.
과거를 벗어던지고, 뱀이 허물을 벗듯이, 옛사람을 벗어 던지고, 새롭게 거듭 태어나야 해요.
둘째로, <하나님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했어요.
20~21절을 보세요.
"하나님 나라는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가져다 가루 3사톤에 섞었더니, 결국은 부풀어 올랐다" (눅13:20~21)
<누룩>은 보이지 않는 가루이지만, 조금만 들어가도 부풀게 하는 물질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영향력을 주어, 아주크게 부풀게 하여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이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날마다 변하고,
날마다 성장하여, 날마다 완숙하게 변해 가야만 합니다.
여자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머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머리를 기르고, 자르고, 다듬고, 또 기르고, 자르고, 또 다듬는 일들을 반복해요.
지지고 볶고, 또 지지고 볶아서 언제나 새롭게 변화를 가져오고, 그런 변화에 아주 민감해요.
<누룩>은 반죽을 발효시키기 위해 첨가하는 물질입니다.
여기서 <사톤>이라는 단위는 아랍에서 유래된 곡물의 측정단위를 말합니다.
<3 사톤>은 사람 10명이 먹을수 있는 밀가루를 발효시킬 량으로, 우리 말로 번역하면 <서말>정도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자란다>. 예수를 믿으면, <완숙해진다>.
예수를 믿으면, <극대화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산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에게 목사님이 다이아몬드를 주면서 "당신은 쓰레기 같은 존재가 아니고, 보석과 같은 존재입니다"라고 말했더니,
"본인이 스스로 깜짝 놀랬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주 작은 <겨자 씨>가 큰 나무로 자라듯이,
그 영향력은 강력한 것입니다.
<누룩>도 아주 적은 양을 넣더라도 밀가루 반죽을 크게 부풀립니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는 그 권세와 영향력이 놀라울 정도로 크게 확장되고, 세상 곳곳에 크게 스며 듭니다.
42.<좁은 문의 교훈>눅13:23~30, 말씀:하용조목사님
23절을 보십시오. "어떤사람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받은 사람이 적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했어요. "너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려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 할것이다"(눅 13:23~24)
세상에는 <넓은 문>과 <좁은 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구원은 <좁은 문>과 같습니다.
옛날에 성벽에 <큰문>이 있었는데, 그 옆에 <좁은 문>도 있어요.
<큰문>으로 못들어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좁은 문을 이용하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좁은 문>이라는 소설도 나왔어요.
또 요즘 은행을 보면, 오후 5시에 <정문>을 잠그면, 그 후에는 <좁은 문>으로 드나 들어요.
이슬라엘에 가 보았더니, 오히려 문이 <반쪽>으로 만들어 놨어요.
그 문에 들어 가려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지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허리를 굽히고 겸손히 들어 가라>는 의미랍니다.
구원은 숫자가 아닙니다.
[좁은 문]의 교훈은 <주여! 구원받을 사람이 적습니까?>라는 질문에서 부터 비롯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처럼"
<구원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을수 있느냐?"라는 숫자를 따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위해tj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큰 신작로 길(대로)나 High way 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이것은 <겸손>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기절제>와 <자기포기>를 의미해요.
25절을 보십시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는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면서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라고 말 할것이다. 그러나 주인은 "너희가 어디서 왔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눅13:25)
여기서 "주인이 문을 닫아 버렸다"는 것은, <구원은 영원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예요.
이것은 <다~ 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때가 지나면 다 소용없다>는 뜻이지요.
지금은 <구원받을 때> 입니다.
때가 되었으니, <그 때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하면, <문을 두드려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늦게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초대 받았다고 하여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대한 통찰력과 참회의 기회를 잃어 버린 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너희는 "저희가 주인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또 주인님은 우리 동네 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눅 13:26)
나는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나를 모른다>고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알수 있도록, 기도를 확실히 하세요.
이런 <천국 유머>도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3 번을 놀랜다>고 합니다.
첫번째로 놀래는 것은, <꼭 올 사람이 없다>는데 놀라고,
두번째로 놀라는 것은, <저 사람은 안 올줄 알았는데 왔다>는것에 놀라고,
셋번째로 놀라는 것은, <내가 거기에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보기에는 좋은데,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내가 보기에 좋다>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 곤란합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다를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대답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각>을 찾기위해 기도를 통해 물어 보아야 합니다.
<내 비젼>과 <하나님의 비젼>을 혼동하여 속단하지 마세요.
<내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고, 겸손하세요.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되면, <내뜻>을 빨리 바꾸세요.
그 결론은 30절에 나옵니다.
"보라! 나중에 시작했으나 먼저 될 사람이 있고, 먼저 시작했으나 나중에 될 사람이 있다" (눅13:30)
지금은 뒤떨어져 있어도 나중에 앞서고, 지금 앞섰다가도 나중에 뒤떨어 질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영적인 질서 중에서 결론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마세요.
우리는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절제하세요.
오늘의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히듯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는 <타이밍>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비록 <그 자리에 초대되었다>고 해도,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추어 정확하게 그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지금 바로 예수님에게 향하지 않으면, <좁은 문>이 굳게 닫힐수도 있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지금 서둘려서 바로 하나님에게 향하십시오.
하나님의 축복이 온누리에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43.<예루살렘의 탄식>눅13:31~35,말씀:하용조목사님
우리의 <믿음>은 미래형입니까? 과거형입니까?
그 대답은 <과거 완료형>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앞으로 미래에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고,
현재 믿고 있고, 과거에 예수를 믿어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으로 [과거형]입니다.
그러니까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앞으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아니고,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확정형]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에게는 <저주가 떠나 갔어요>
그래서 <치유가 일어 났어요>. 그래서 <성령은 오셨어요>.
이렇게 <믿음>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써 모두 끝난 [과거 완료형]으로 변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의 위치가 이제는 달라 졌어요.
우리는 이제 <문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문안>에 있는 [주인]이 되었어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란 [자기 위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인 누가복음 13장 귀절을 보십시오.
"그때 몇몇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했습니다.
"여기서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눅13:31)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바리새파 사람들도 예수를 전부 미워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우리 편이라"고 다 좋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 중에는 스파이도 있을수 있어요.
그때 예수께서 32절과 같이 얘기를 합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 내고, 사람들을 고쳐 줄것이다. 그리고 셋째 날이 되면, 내뜻을 이루리라.(눅31:32)
여기서 예수님이 잘쓰지 않는 말을 했어요.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 같지 않은 표현입니다.
이것은 마치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한 것과 같아요.
우리들도 가끔 이렇게 <욕>을 하고나면, 잠시는 시원하지요.
저는 여기서 우리 어머니가 하신 <욕>이 생각나요. 한동대사건 때에 벌어진 일 입니다.
"내가 외화?도피했다. 교회 재정을 횡령했다. 대마초를 피운다"는 등 헛소문이 나돌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어머니가 어디에서 그런 소문을 듣고, 나에게 추궁하는 거예요.
"너, 교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것을 대라"는 거예요.
"저는 별 일이 아니지만, 이런 저런 얘기가 있다"고 얘기해 주니까
"어떤 놈이야? 내가 그놈의 아가리를 찢어 버릴꺼야!"라고 <욕>을 하셨어요
나는 그때, 우리 어머니 입에서 욕한 것을 처음 보았어요.
그러면서 "역시, 어머니는 어머니이구나!"를 느꼈어요.
저는 어머니 입에서 <그런 욕이 나올 것이라>는 것은 저는 상상도 못했어요.
아마도, 우리 엄마는 그 말을 하고 속이 시원했을꺼예요.
32절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그래도 태연하게 귀신을 쫓고, 병을 고쳐 주실 자신의 사역을 소개해 줍니다.
이 얘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다>는 싸인을 우리에게 미리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세요.
"그러나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나는 마땅히 내 갈 길을 가야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을 수 없는 법이다." (눅13:33)
여기서 예수님은 마땅히 그가 가야 할 길을 침착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의 앞에는 여러가지 장애물도 있고 시련도 있지만, 우리의 목표가 분명하면 꾸준히 그길을 걸어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십자가를 지는 일> 입니다.
인생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기 목표를 세우고, 묵묵히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가장 존경스런 사람은 예수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인입니다.
그 여인에게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남편을 예수 믿도록 인도하며, 결국엔 승리하는 여인이 될 것입니다.
이제, 34절에서 예수님의 탄식소리를 들어 보세요.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제 새끼를 낳도록 알을 품듯이, 내가 얼마나 너희 자녀들을 모으려고 했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눅13:34)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면서 울면서 탄식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자기 앞으로 전개될 운명을 미리 여견하고, 보았던 거예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도성을 보면서, 앞으로 전개될 피빈린내 나는 <영적 전쟁>을 미리 읽었어요.
사람들은 잘난척하고, 문화생활을 즐기지만,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처형하는 잔인한도시가 되었어요.
저는 가끔 남산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서울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란 도시는 어떤 곳일까?
우리는 서울에 살면서 서울의 운명을 보지 못해요. 다만 서울의 현상만 보고 있지요.
서울은 어떤 의미가 있는 도시일까?
과연 서울의 미래는 밝은 것인가?
혹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은 아닌가?
성경에 비춰진 예루살렘과 갈릴리 지방은 어떻게 다른가요?
<예루살렘>은 화려하고 피투성이가 일어나는 싸움터의 도시이고, 예수님을 죽인 도시가 되지만,
<갈릴리 지방>은 조용한 해변도시이고, 아주 시골스런 <촌동네>이지만, 낭만적인 도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서울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서울에 예수님이 있으면 <갈릴리>이고, 서울에 예수님이 없는 곳이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아요.
예수님은 34절에서 <예루살렘아?예루살렘아?>라고 울부짖으며 탄식합니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죽이는 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네자녀를 모으려고 한적이 있느냐? 그러나 너희가 나를 원하지 않았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네가 나를 거절 했으므로, 너에게 심판에 이르게 되었구나!>라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그 도시의 앞날을 예측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미리 알고 계신 것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이제 너희의 집은 황폐한 채로 남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분은 복이 있다"라고 말할 때까지 너희가 다시는 나를 보지 못 할것이다"(눅13:35)
이 말씀을 정리하면
1. 너희 집은 황폐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2. 너는 내가 올때까지 나를 보지 못 할것이다.
어떤 집은 지금은 잘 살고 화려한 집안이지만,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황폐하게 망해가는 집안이 있어요.
그러나 반대로 지금은 별 볼일 없는 것 같아도, 점점 불처럼 일어나는 집안이 있어요.
이것은 기업도 마찬가지이고, 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의 집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에 따른 것입니다.
"지금이 좋다"고 해서, 모든게 다 좋은게 아닙니다.---> 미래가 더 찬란하고 아름다워야 합니다.
<지금은 미미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말씀과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족은 하나님이 있기 때문에, 지금 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실 것으로 기대해 보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옆에 계시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새로워지고,
변화가 이루어 지고,
기적이 일어나서,
여러분의 생활에 열매가 맺히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뜻>을 읽을 읽으십시오.
여기서 예루살렘은 <죽음으로 올라 가는 길>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자신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부하여, 결국 황폐해 질 것을 미리 알고 통곡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