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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畊山人 박희용의 葵禪軒 독서일기 2024년 11월 14일 목요일]
『대동야승』 제11권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기묘명현 신원소장(伸冤疏章)]
가정 정유 십이월 태학생 등 상소(嘉靖丁酉十二月太學生等上疏) 중중
엎드려 생각건대, 종사(宗社)에 경사가 있어 큰 간흉이 이미 제거되니 조정에서는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두려움을 풀고 사림에서는 원망하고 미워하는 분노를 씻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정(邪正)을 가리고 시비를 분별하여 묵은 것을 개혁하고 새것으로 고치어 태평을 보전할 기회입니다. ……신은 지위가 정치를 꾀할 만한 것이 못되고 책임을 말할 만한 것이 없으나, 구구한 마음에 분수를 모르고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진실로 충심에 의해 격발된 마음은 피차 다름이 없으며, 공론에 따라 발언한 것은 존비(尊卑)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시골 사람의 과격한 말과 꼴이나 베는 자의 얕은 견해를 진달하여 조금이라도 전하의 의견을 듣자는 두터운 소망에 보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나라에 대한 사기(士氣)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원기와 같아서, 원기가 허약하면 백 가지 병이 침노하고 사기가 위축되면 백 가지 간사함이 틈을 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밝은 임금은 사기를 붙들기에 급급합니다. 사기는 천지의 양명(陽明)을 나타내고 의(義)와 도(道)를 배합하여 삼강(三綱)을 지탱하고 오륜을 붙들어 항상 우주의 동량(棟樑)이 되므로, 곧게 길러서 해가 없으면 가히 명분을 정할 수 있고 기강을 세울 수 있으며 공사를 분별할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획정할 수 있으며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수 있고 간사한 것과 바른 것을 변별할 수 있으므로, 사심 없는 의론이 확장되고 탐관오리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군자는 이 기운을 보호하여 반드시 진작시키기를 생각하고, 소인은 이 기운을 꺼리어 반드시 꺾으려 하니, 오직 임금이 배양하고 변별하는 여하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기운이 평화로운 세상을 만나면 온유해지고 돈후(敦厚)해지며, 위태한 세상을 만나면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지나니, 배양할 즈음에 만일 그 중도(中道)를 잃는다면, 온유돈후해져야 할 때에 혹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져 그 폐단이 격한 데 지나치고, 강함을 나타내어 굳세어져야 할 때에 혹 온후해지면 그 폐단이 지나치게 고식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정치에 해로운 것입니다.
공경히 생각하건대, 우리 조정에서는……연산조의 혼란으로부터 인심이 흐려져서 여러 조종조의 배양한 사기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도 오히려 다행히 남은 실머리가 혹 존속하는 것이 있었으므로 당시에 일을 보던 권간(權奸)이 이를 깊이 꺼리어 한 번 무오년(1498)에서 꺾고 두 번 갑자년(1504)에서 꺾어서 모조리 탕진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하늘의 운수는 회복하지 않음이 없는 이치와 조종의 묵묵히 돕는 돌봄에 힘입어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오래 물든 풍속을 고치고 일대의 정치를 새롭게 하게 된 것입니다. 온유돈후한 사기가 팔짱을 낀 남면(南面)한 임금 밑에서 묵묵히 운행되어 종횡으로 뻗어나가고 나뭇가지처럼 자라나 과격하지도 않고 투안(偸安)하지도 않으므로 거의 근사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중흥을 일으키던 처음의 피폐된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 사심 없는 의론이 모두 베풀어지지 못하고 탐관오리가 다 없어지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특별히 오래된 버릇이 졸지에 변경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불행하게도 신진들이 ‘왕자(王者)가 있어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어질어진다.’는 말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하루아침에 고쳐 발분하여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독립하여 고결한 지조를 품고 강개한 뜻을 드러냈으나, 이때의 사기는 드디어 격(激)에 이르렀습니다. 격의 이름이 비록 투(偸)보다 나으나 그 해(害)가 되는 데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본심을 살펴본다면, 일호(一毫)의 나쁜 마음은 없어 오직 임금이 있는 것만 알고 자기 몸이 있는 것은 알지 못하였으며, 오직 나라 있는 것만 알고 집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교화(敎化)를 일으키기에 뜻을 날카롭게 하시어 친애하고 믿으셔서 자신의 허물을 듣기 좋아하고 간함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셨고, 그 계책 듣기를 좋아하여 건의 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따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이 스스로 성명(聖明)을 믿고 지치(至治)를 나타내어 우리 임금을 요순(堯舜) 같은 임금이 되게 할 수 있고, 우리 백성을 요순시대의 백성으로 만들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인의 글을 읽고 부질없이 옛일을 사모하며 시속의 쇠한 것을 슬퍼하나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느 일이든 옛일을 가지고 지금에 시행하려 하였습니다.
옛적에는 사람이 낳은 지 8세가 되면 모두 소학(小學)에 들어간다 하여 대체로 처음으로 배우는 선비는 반드시 소학을 익히게 하셨고, 옛적에는 남전(藍田) 여씨(呂氏)의 향약(鄕約)의 법이 있다 하여 그 법을 온 나라에 유행하게 하였으며, 옛적에는 현량과(賢良科)가 있다 하여 또한 그런 과거를 설치하였으니, 이와 같은 유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대체로 모두 옛것을 이끌어다가 현대 일을 똑같게 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조정의 정사를 어지럽힌다는 이름을 얻었으니, 이것은 비록 그 사람들의 죄이지마는 또한 전하께서 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이 각별하였고 사림(士林)이 그 사람들에게 열복(悅服)한 것도 또한 그 사람들이 유속(流俗)에서 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도 또한 스스로 생각하기를, 지금의 때를 당해서는 오직 우리만이 큰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는 또 행실을 꾸며 명성을 구하는 무리가 있어서 때를 타서 붙어다니며 군중의 형세를 조성하고 국론을 마음대로 하였으므로, 칭찬받는 자라고 반드시 모두 어질고 옳은 것이 아니요, 비난받는 자라고 반드시 모두 불초하고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이런 버릇이 날마다 자라서 온유하고 돈후한 기운이 태반은 사라졌으니 이것이 모두 과격의 폐단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가만히 들으니, 《논어》에 이르기를,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어짊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신 등도 또한, 이 사람들의 허물을 보고서 이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등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진실로 하나둘이 아니었습니다. 무리 지어 나아가기를 요구하고, 득실을 근심하는 무리들이 불만스럽게 뜻을 얻지 못한 분함으로 틈을 엿보아 공격하기를 기다린 것이 오랩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어진 이에게 일임하는 정성이 조금 의심쩍게 되자, 간사한 무리들이 그 틈을 타서 날마다 참소를 올려 은밀히 화의 장본을 만들어 놓은 연후에 가만히 신무문으로 들어가서 임금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움직이니, 이것이 이른바 호리(狐狸)와 같은 태도를 드러내고 시랑(豺狼)과 같은 횡포를 자행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정과 사림이 일망타진되었으니 만일 충성스럽고 곧은 대신이 뇌정(雷霆)과 같은 위엄을 무릅쓰고 눈물을 흘리며 극진히 간하지 않았더라면, 잠깐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들의 죄를 확정하고자 하셨다면 마땅히 탁 터놓고 밝히 들으시고 널리 여러 의논을 받아들여 모든 국민과 함께 죄를 주더라도 조금도 불가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두 가지는 간사한 무리들의 속이는 말을 믿으시어 그날 밤으로 일을 일으켜, 조정이 이때문에 쑥밭이 되어버렸으니, 이것이 당고(黨錮)를 죄주고 청류(淸流)를 물에 던지는 화와 어찌 다릅니까. 그러나 권세 있는 간흉배들이 막아 가리고 대궐문마저 굳게 막혔으므로, 충성을 다하여 의분하는 사람들이 한갓 상통(傷痛)과 울분(鬱憤)을 더할 뿐, 팔뚝을 걷어붙이고 원한을 삼키면서도 마침내 감히 아뢰지를 못하였습니다.
다만 관학(館學)에 있었던 선비들만이 그 충성 때문에 간흉들에게 화를 당하고 정직함 때문에 배척을 당한 것을 애달피 여기어 대궐에 엎드려 소장을 올리고, 궐문을 밀치고 곧장 들어가서 대궐 뜰에서 부르짖어 울며 금부에 갇히기를 다투면서 아무것도 사양치 않는 바가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유생들의 즐겨하는 바이겠습니까. 진실로 전하께서 깊이 현혹되었음을 민망히 여겨서 만에 하나라도 깨닫기를 바랐던 까닭입니다.
전하의 의혹이 비록 어지럽고 급한 때라 깨닫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만일 한가하고 조용한 때에 깨달으신다면 사정(邪正)은 거의 가려질 것이요, 시비가 거의 밝혀질 것이며 언로(言路)가 열릴 수 있을 것이요, 사기가 진작될 수 있을 것이며, 조정의 화평한 복이 이로부터 비로소 싹을 내려 후일 권간의 화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된 뜻이 있는 선비는 항상 전하께서 깨닫지 못할까 근심하고, 권간의 무리는 오히려 전하께서 혹시라도 깨달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권간의 말은 쓰임이 되고 충성된 뜻이 있는 선비는 날로 멀어졌으므로 전하께서 권간을 믿는 것은 더욱 심하여지고 권간이 전하를 속이는 것은 더욱 굳어져서, 비록 전하를 깨우치고자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즐거이 무익한 말을 하여 권간을 미워함으로써 그 화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이로부터 사기는 날마다 투박(偸薄)하여져서 엄벙덤벙하여지고 사정(邪正)은 혼돈되고 시비는 뒤집혀져, 권간은 더욱 기탄없이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마음대로 행하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습관이 되어 뇌물이 공공히 행하여지고,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욕심을 순순히 품게 되니, 각각 서로 권세를 다투어 사(邪)로써 사를 공격하여, 한 권간이 비록 제거되나 또 한 권간이 이어 나와, 전하께서 전날 권간을 믿던 마음이 또 뒷날 다른 권간에게로 옮겨지게 된 까닭이 된 것입니다.
김안로는 흉측하고 간사하며 탐욕스럽고 독살스러운 괴수로서 위로는 슬그머니 전하의 뜻을 엿보고, 아래로는 자기의 무리들을 사주하여 조정에 뿌리를 서리고, 위엄과 복을 마음대로 희롱하며 바른 것을 핑계하여 간사한 것을 팔고, 공사를 빙자하여 사사를 영위하여 큰 권세의 자루가 손바닥 속에 옮겨지자 온 조정이 감히 자기를 의논하지 못하게 되므로, 좋아하고 미워하고 옳고 그른 것이 모두 그 입에서 나오고, 살리고 죽이고 폐하고 두는 것이 모두 그 손을 연유하여 착한 무리를 배척하고 추방하는 것이 전날의 권간보다 더 심합니다.
그래서 일국의 신민들이 발을 포개고 눈을 기울여 임금의 세력이 날마다 위에서 고립되는 것을 앉아서 보면서도 입을 다물고 혀를 굳히면서 감히 한마디도 아뢰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절개 있는 선비가 그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아서 그랬겠습니까. 진실로 사기가 매우 떨어져 떨치지 못하는 것은 실상은 전하께서 기묘(己卯) 사람들은 간사한 신하가 아닌 것을 깨닫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그 당시에 깨달으셨다면 전날의 권간이 또한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였을 것이요, 만일 전하께서 권간을 죄주던 때에 깨달으셨다면 후일의 권간이 또한 스스로 번성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신 등은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전일의 권간을 죄준 뒤에 혹 기묘에 벌을 당한 사람을 가까운 곳으로 옮기시고 써 주실 뜻이 있으시다면 거의 깨달은 것입니다. 김안로가 제 심복으로 재상 지위에 있는 자를 몰래 사주하여 이미 제기된 공론을 꺾어 개인적인 의견으로 돌려버리자 전하께서는 또 전교하시기를, “이제부터는 입을 닫고 기묘의 일을 말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야의 사림(士林)들이 시비를 분명히 알지 않는 이가 없으면서도 건의하기가 어려워서 감히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 천하에는 양쪽이 옳은 법이 없고 또한 양쪽이 그른 것도 없는 것입니다. 권간이 그르다면 권간이 아닌 자는 반드시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쾌히 깨닫지 못하십니까. 권간의 막고 가리는 화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근일의 세 간흉들이 항상 사기가 혹 떨칠까, 언로가 혹 열릴까, 저희들의 간사한 정상을 혹 은폐시키기 어려울까 두려워하여, 터무니없는 죄를 만들어 일국의 원로를 배척 방축하여 거의 죽을 땅에 빠지게 할 뿐 아니라,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모두 치고 씹으려 하여, 심지어는 대궐 뜰에서 제술(製述)하는 사이에 한 말이나 여항(閭巷)에서 술에 취하여 희롱하는 가운데의 이야기까지도 모두 혹독한 법문을 이용하여 마침내 큰 죄에다 뒤집어 씌우니, 이것은 부질없이 조정에서 사기를 꺾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초야(草野)에서까지도 몹시 꺾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공론이라는 것이 한결같이 세 간흉의 목구멍으로부터 온 것이니, 시비와 사정에 있어서 그 곧은 것을 캘 수가 없습니다.
진우(陳宇)가 임하(林下)에서 죽은 뒤로부터 공론이라는 것이 아주 없어져서 보통 때에도 이야기가 시국 일에 미치면 눈짓을 하여 서로 쳐다보고 입을 다물어 벙어리가 됩니다. 그래서 부형이 경계하는 것 중에는 말을 삼가라는 것이 최고입니다. 소탈한 무리가 있어 혹시 잘못 말하기만 하면 옆의 사람이 서로 돌아보고 실색을 하여 문득 지적하여 근심거리를 만듭니다. 아, 사기의 저상됨이 이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권간의 무리가 어찌 번성해지고 방자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공자가 이르기를, “나라에 도가 있으면 위태한 말과 위태한 행실을 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실은 고상하게 하고 말은 공손하게 하라.” 하였는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나라 다스리는 자가 선비로 하여금 말을 공손히 하게 한다면 어찌 위태하지 않으랴.” 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세 간흉이 뜻을 얻었을 때에 안팎의 신하가 쌓인 위세를 두려워하고 겁내어 남의 전답과 집을 빼앗아도 검색할 줄을 모르고 남의 비복을 취하여도 감히 변명하지 못하며, 심지어는 재물을 실어 들여 벼슬을 사고 물건을 바치어 총애를 사는데, 간혹 공정하고 청렴하여 권세가를 섬기지 않음으로써 세 간흉에게 거스름을 당하면, 비록 효행이 탁연하여 칭송할 만하여도 이미 표창(表彰)된 정문(旌門)도 보전하지 못합니다. 이것도 또한 권장하는 데 깊이 방해가 되고 풍속을 해치니, 사기가 꺾이는 것이 또한 여기에 관계가 있습니다.
사기의 지나친 것과 사심 없는 의논이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가상한 점이 있지마는 지나치게 투안(偸安)한 뒤로부터는 염치가 아주 없어지고 탐하고 더러운 것이 풍속이 되어서, 해가 생민에 미치고 나라의 근본이 단단하지 못하여 한없는 말류(末流)의 폐단을 다시 구제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신의 명령을 받든 자가 장사치의 천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중국에 가서 이익을 도모하여 중국 사람들에게 더럽게 보여 명예와 지조를 떨어뜨리고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고 나라를 더럽히니, 이것이 비록 한 귀퉁이의 일이지마는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사기(士氣)에 관하여 근원을 추구하여 보건대, 기묘(己卯)의 과격(過激)함은 세도를 진작하는 일을 자임하여 병이 난 실수이고, 기묘 이후의 지나치게 투안에 빠진 것은 권간이 서로 이어 임금을 속인 데에서 생긴 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비록 모두 폐단은 있으나 만일 그 마음씀이 어느 것이 바르냐 거짓이냐를 캐어 본다면 시비는 분명하여 집니다. 또 소인으로서 극히 간악한 자는 평상시에는 음흉한 꾀가 총명을 속이려고 하지 않지마는 다른 때에는 간계를 가릴 수 없는 것이고, 군자로서 미숙한 사람은 지나친 행동이 없을 수 없으므로 비록 한때에는 질책을 당하지만 마침내는 만세에 이르도록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부질없이 기묘 사람의 과오만 책하고 권간이 기묘 사람을 무함한 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시비에 있어서 어찌 되겠습니까.
대개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심정(沈貞)과 이항(李沆)은 전에 처벌되고 세 간흉도 후에 이어 죽음을 당하였으므로 온 나라의 혈기있는 자가 기뻐 날뛰며 서로 경하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는 지금까지 불쌍히 여기는 탄식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지하의 썪은 뼈에게 아첨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두어서 그렇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모든 일을 권간의 예로써 본다면 한때의 공론이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충신과 간흉의 자취가 장차 후세에 혼동이 되어서 시비가 어느 편을 따라야 할지 모르므로, 권간이 스스로 서로 공격할 것이니, 위태하고 망하는 기미가 어찌 또 이로부터 싹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적에 서한(西漢)의 습속(習俗)은 그 폐단이 지나치게 투안(偸安)하였는데, 망할 적에는 왕망(王莽)이 신기(神器)를 도적질하여도 천하가 숨을 죽이어 감히 말을 못 하였고, 동한(東漢)의 습속은 그 폐단이 격(激)에 지나쳤으나, 쇠할 적에는 조조(曹操)의 간사함으로 나라를 차지하고자 하였지만 마침내 신하의 칭호를 버리지 못한 것은 당시의 기절(氣節)이 오히려 아래에서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투(偸)와 격(激)의 환란이 예전에 있어서도 감계(鑑戒)할 수 있으니, 기묘 사람의 본심을 구하고 권간의 흉한 꾀를 살피어 사정(邪正)을 정하고 시비를 밝히고 사기를 진작시켜 과격하지도 않고 투안하지도 않은 아름다움이 있게 하는 것은, 특별히 전하의 한 번 생각하는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전하의 마음에 진실로 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공부가 있어 본체의 밝으심이 거울과 평평한 저울이 공평한 것처럼 되신다면 고운 것과 흉한 것이 도피할 수가 없고, 가볍고 무거운 것이 저절로 차이가 나게 되고, 사정과 시비가 정확하게 상고될 수 있어서 임용하는 즈음에 취하고 버리는 것이 마땅함을 얻고, 조정 사이에 충(忠)과 간(奸)이 저절로 분별되어 전날에 권간을 추종하던 무리들로서 비록 법망에서 빠진 찌꺼기일지라도 또한 마땅히 향할 바를 알아서 장차 세상을 따라서 변화할 것입니다.
사(邪)와 정(正)이 분별되면 시비가 혼동될 근심이 없고, 조정이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류가 분립하는 근심이 없어서 국맥(國脈)이 연장되고 사기가 진작되는 것이 장차 여기서 시작될 것입니다. 전날에 권간이 삼경(三經)의 설(說)을 주장하고 시비를 혼동하여 들고 일어난 것은 성상의 총명을 은폐하고 현혹시키며 조정을 억눌러 흉한 꾀를 도모하려는 술책이었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권간의 흉계를 통촉하시고 시비의 표적을 밝게 살피어 사정을 분별하고 조정을 화합시키어 오늘날의 사기를 과격에 병들지 않게 하고 과투(過偸)로 패하지 않게 하소서. 그 요결(要訣)은 다만 전하께서 더욱 성학(聖學)을 힘써서 뜻이 진실하여지고 습성이 바르게 됨으로써 편벽된 사정을 끊어 없애고 본체의 밝음을 보존하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신 등은 모두 보잘것없는 자로서 부질없이 나라의 녹을 소비하면서 전하의 천지사방에 두루 베푸시는 화육(化育) 가운데에서 유영(游泳)한 지가 하루나 한 달이 아닙니다. 평소에 청사(靑史)를 목격할 때 간사한 무리들이 인군을 속인 것을 보고 오히려 책을 덮어 놓고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이 세상에서 보았는데야 어떻겠습니까.
마침 여론을 수집하시는 때를 당하여 지식이 얕은 것을 스스로 혐의하지 않고 문득 한 가지 얻은 어리석음을 바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옵소서.
- 윗글은 생원(生員) 윤희성(尹希聖)이 지은 것인데 뒤에 장원에 뽑히어 벼슬이 이조 좌랑에 이르렀다. 칠림(漆林)ㆍ윤수(尹壽)의 아들이다.-
[팔경논주]
충과 효가 절대적 가치인 왕조시대를 사는 생원 윤희성의 구구절절 충심이 빼곡하게 찬 명문이다. 그러나 행간마다 어려운 시대를 사는 선비의 고민이 숨어 있다. 하지만 정곡을 차마 찌르지 못하고 있다. “왕이시여, 당신이 벌인 참극입니다” 말하지 못한다. 기묘사화는 왕권의 위협을 느낀 중종 이역이 스스로 일으킨 친위정변이었다. 조광조와 많은 사대부가 화를 당하였다. 하늘 같은 왕이 다스리는 세상을 조심스레 살아가야 하는 신하들과 백성들. 입 한 번 잘못 놀리면 당장에 목숨이 떨어진다.
백성들이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무사무탈이지만, 생각과 의식을 가진 사대부들은 한참 능력이 떨어지는 임금을 모시며 벼슬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르쳐도 맹하고 간언을 드려도 팅한 임금, 그저 내가 왕이야 뽐내는 임금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아야 하는 신하들의 속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벼슬을 버리고 산림에 묻히려 해도 호구책이 막막. 그러므로 둥글둥글 구르는 게 가장 좋은 벼슬살이였다.
왕조를 시작할 때 왕위 계승법을 합리적으로 세웠어야 했다. 8촌 이내의 왕족들이 모여서 왕자들 중에서 가장 똑똑한 자를 세자를 간택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독자인 왕자가 시원찮으면 6촌 내에서 후계자를 간택해야 했다. 그랬으면 태종과 세조 때처럼 신하들이 떼로 죽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