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자료집을 제작하기 위하여 교우들의 삶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박용문 안수집사님의 일대기입니다...
박용문 안수집사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으로서 설움을 당하였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살았다. 소학교에서 약한 학생들의 편에 서서 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들에게 맞섰다. 그에게는 선배도 무섭지 않았다. 일본의 패망 후에 아버지와 함께 부산으로 가는 배에 올랐으나 풍랑을 만나 대만까지 떠내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경상도에 도착해서 거기서 살았다. 의지할 데 없는 낯선 땅에 와서 아버지는 가족이 살 집을 직접 만들었다.
한국전쟁 중에 아버지는 폭격에 돌아가셨다. 장남으로서 박용문 안수집사는 어린 시절에 동생들을 위해 구걸하며 동네를 다녔다. 그런데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어에 서툴렀기 때문에 비웃음과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소년 박용문의 마음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쌓여 갔다. 그래서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체육관에서 몸을 단련하기도 했다.
군대에 입대할 때는 운전병으로 들어갔는데 장교의 차를 운전하면서 가족을 돌볼 수 있는 호의를 입기도 했다. 제대 후에는 시내버스 운전을 하기도 하고, 개인택시를 운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행정상의 문제로 택시 운전을 위한 자격증을 발급받을 수 없게 되자 자신의 택시를 친한 동생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 동생은 감사의 말도 없이 아무도 몰래 이사를 가버리고 말았다.
박용문 안수집사는 김춘자 집사를 만나 2남2녀를 낳아 양육했다. 김춘자 집사는 지난 2020년 7월 10일에 승천하셨다. 오랜 세월동안 당뇨병으로 고생을 하다가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박용문 집사는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인생의 문제를 연구하려고 사주팔자를 연구하기도 했다.
신앙을 가지게 된 배경은 질병이다. 방광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하면서 환상 중에 산신령이 나타나 반드시 교회에 나가라고 명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평생 신앙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매일 새벽예배에 참석하면서 30년을 기도에 바쳤다. 박용문 안수집사는 선교헌금에도 성실하게 동참했으며, 명절에는 담임목사에게 선물이나 용돈을 주기도 했다.
박용문 안수집사의 일생은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에 한국에 와서 한국전쟁을 경험하고 자녀들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자녀들 중에는 소아마비와 간질을 앓은 이들이 있었다. 그것을 치료하려고 집을 세 채를 팔아야 했다.
김춘자 집사는 말없이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했다. 그런데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누구보다 용감하게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일어섰다. 그 일은 담임목사의 교체 시기에 옳지 않은 방식으로 강단을 차지하려는 목회자가 교회를 어지럽게 하던 일이었다. 그 때 김춘자 집사는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일어서서 크게 호통을 쳤다.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김춘자 집사는 지난 2020년 7월 10일 금요일 오후 5시에 별세했다.
박용문 집사의 장남은 흥주 씨로서 법대를 나와 경북 청송에서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사과를 재배한다. 가을이면 사과즙을 보내와서 교우들과 나누어 먹기도 했다. 박성철 집사는 박용문 집사의 차남으로 주일예배시간에 컴퓨터를 맡아서 영상을 스크린에 보여줌으로 예배를 돕는다. 주일학교 서기의 일을 오래 맡기도 했다.
박용문 안수집사는 2020년에 치매가 악화되어 구리에 있는 요양원에 입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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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5년 5월 18일 박용문 안수집사의 일대기에 대한 녹취 기록이다:
박용문 집사님의 일대기 녹취 요약본1
1945년 해방을 맞이하던 해 나는 일본에서 4학년이 채 못 마친 상태였다. 그 후 씨름을 좋아하는 아버님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였다. 일본을 떠난 배는 화물선이었는데, 그 때 귀국선[연락선]은 자리가 귀해 화물선이라도 타고 귀국하려고 한 것이다. 배는 현해탄에서 풍랑을 만나 대만까지 밀려갔고, 거기서 16일만에 다시 생필품을 구한 뒤 부산을 거쳐 순천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바다에 빠져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그 때 우리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6남매였으며 여동생이 5살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와서 막내 남동생이 태어났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 이웃집에 사는 부친 친구 아들이 반란군 14연대 소속이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난리를 면하기도 했다. 그이는 우리 집에 와선 닭을 보고 총을 난사했다. 아버지는 닭 몇 마리를 잡아 주었다. 그 반란군은 사실 순진무구한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무상공급과 평등사회가 온다는 공산주의 사상에 넘어간 것이다. 누런 황금물결이 넘실대는 가을에 경찰이었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러 죽이던 일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1950년 6.25가 일어나던 해 나는 17살이었는데, 아버지 집이 폭격을 맞아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져 친척집에 가서 살게 되었고, 아버지는 그 와중에 병사하셨다. 우리 남매들은 7, 8, 9, 10세의 어린 나이였는데, 둘째 여동생과 나는 외삼촌 집에 들어가 살았다.
전쟁 후 농사 일은 큰집에 맡기고 군대에 입대했다. 그 때가 24살이었고 12월 30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 동안 본의 아니게 군기피자 신분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흔히 21세에 군에 입대하였는데, 나는 집안을 돌보다 보니 24세 때에서야 자수를 하여 입대하게 된 것이다.
사실 그 전에 순천의 외갓집을 나와 기술을 배우러 남원의 이종 형님 집으로 갔다. 그는 자동차부대 수송부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남원에 가고 얼마 후에 형은 대구로 발령이 나 떠나갔다. 나는 졸지에 오갈 데가 없어서 두 달간 여관 일을 보다가 중국집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군 후생사업 차 조수로 일하던 친구를 만나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것은 중국집 근처에 있는 헌병대에서 자동차 기술을 배우고자 함이었다.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거나 나무 싣는 사업자들이 군용 차량을 빌려 사업을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던 중 설 연휴를 맞아 고향 순천에 내려갔다가 모친과 동생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남의집살이라도 해서 부양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의 집에 들어갈 때 쌀 한 가마니, 그리고 일년 동안 일한 뒤 나올 때 쌀 두 가마니를 받고 일을 했다. 일년 후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하는 허진연 씨라는 부잣집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했고, 박 씨 집에서 일년을 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막막해서 자수하여 입대하게 된 것이다. 군대를 마치지 않으면 운전면허 시험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 복무를 마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해방 후에 11살 때 한국에 와 아버지와 집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한글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자라 언어도 서투르고 글을 모르니 참 답답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 훈장에게 가서 한자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가요책을 얻어 그것을 가지고 한글을 공부했다. 그 실력으로 군대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제대하면서 일반 면허로 변경했다.
군대에서 나는 원주에 있는 1군 사령부에서 바로 운전병으로 복무하면서, 영관급 차량을 운전하게 되었다. 그 때 나는 작전과 교육과장을 모시고 다니면서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그 때 교육과장은 8기생 조창배 씨였다. 나는 시골에서 외삼촌으로부터 온 편지를 그분께 보여드렸고 그 후 나의 가정사에 도움이 될 일들이 일어났다. 교육과장은 교육검열을 다니면서 휘발유를 한통씩 팔아먹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검열을 나갈 때마다 5갤론씩 넣어 부대에 돌아와서는 남은 휘발유를 팔았다. 그렇게 해서 돈이 벌리자 휴가 때 어머님을 모시고 원주 시내에 방을 얻어드렸다. 막내 동생이 그 당시에 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나는 퇴근하는 과장을 집에 태워드리고 집에 들러 어머님께 돈을 갖다 드렸다. 그렇게 2년 8개월가량의 군복무를 통해서 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나는 원주에서 살다가 제대 동기를 따라 여주에 와서 마르보스 차를 운전하다가 그만 두고, 서울 이종 형에게로 왔다. 당시에는 돈이 좀 있어서 왕십리 안정사 절 앞에 집을 샀다. 나는 5.16 쿠데타 이후에 제대를 했는데, 내가 모시던 분들이 정보과 등지에 있어서 나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 주었다. 나는 그 덕에 왕십리 지역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자 했다. 그 중에 성동 경찰서에서 안정사 골짜기로 큰 길을 내려고 했는데, 집을 헐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람들의 반발이 빗발쳤다. 그래서 나는 그 계획을 취소했다. 나는 치안국, 중정 등에 아는 이들이 있어서 그 일을 시행할 수도 취소할 수도 있었다.
왕십리에 온 나는 운전하는 이들에게 부과하는 벌금딱지가 부담스러워 다른 일을 하려고 했다. 그 중에 동대문 시장에서 냉차장사를 하기도 했다. 나는 그 후 쇠뿔로 구두칼을 만드는 일을 종로5가에서 배웠다. 담뱃대도 만들고 그것으로 빗도 만들었다. 나는 참빗도 만들어 팔았다. 그러다가 한글을 더 배워 소형 면허를 대형면허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돈을 얼마 쓴 후에 대형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나는 외삼촌의 중매로 순천에 가서 결혼을 했다. 내가 대형 면허를 취득하고 나자 운전자들에 대한 벌금 부과가 좀 줄어들었기에 나는 다시 운전을 했다. 그것이 나의 시내버스 운전의 출발점이다.
1967년에 흥주를 낳았고, 그 아이가 첫돌에 홍역인데 잘 모르고 주사를 맞아 전신마비가 오게 되었다. 소아마비가 된 것이다. 그래도 아들은 경기 법대를 졸업하고 선배를 따라 경북 청송에 가서 우체국에서 일하다가 그만 두고 사과농사를 하는 농사꾼이 되었다. 아마 그 선배와 함께 학생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아들은 쌀을 대주고 있다.
그 후에 둘째 아들 성철이가 홍역 후에 간질이 왔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생 남을 도우면서 살아온 내가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생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