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는 경주의 표암바위를 시조의 발상지로 하여, 여기에 기념비를 세우고 제각과 典爵을 추중 製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慶李는 스스로 이씨중에 최고 성씨라하고, 오늘날의 이씨들은. 즉 전주 성주 합천 우봉등등
모든 이씨들은 경이의 분적이고,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다. 알평을 시조로하는 경이는 경주의
표암바위를 시조의 탄생지로 기념한다. 이의 근거로 삼국유사와 사기의 신라 건국 설화 6촌에서
급량양산촌의 이를 근거로하여 그 후손들이 기념하는 것이다.
알평은 6촌의 촌장으로 신라왕을 옹립하고 벼슬은 아찬에 이른다는 것과 이후 세계가 실전되,
통일신라말 소판 이거명을 1세로 한다는 기록은 경이 족보의 기록이다
경주 표암의 경모비와 제각과 부속 경사들은, 언제 건립된 것인가, 모두 조선조 이후의 것이다
즉 이분들의 후손들이
건립하여 모시는 것이다. 우리광이는 이것을 알아야한다.
광이는 족보상의 기록과 전문의 기록으로
삼한시대 기원전 서남부 일대 발흥한 족으로(자성이족)
내물왕조에 이르러 이자성을 시조로 한다.
죽 자성이족은 자성족으로 내내 신라 20여 개 성읍국의
하나의 촌주이다
신라가 박 석 김으로 이어져 오다가
金족이 지속 집권한 시기가 내물 마립간 시대부터다
자성성읍국의 자성은 내물의 집권에 기여한 분이다.
그래서 율정초보는 시조를 내물왕조 이자성이라했으나 기실 삼한시대의 자성국 왕이다
즉 내사령이다, 광주이씨의 시조의 내사령은,
이사금의 변형설과 내사령 설이 있으나
이사금 변형설이 맞다
.(연구서 참조)
그래서, 자성이 내물 마립간 일 수도 있다는 가정도 해본다.
우리 이족만이 유독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한 이유는, 적어도 신라중앙 정부의 본류이고,
왕권과 가까운 一族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성족을 제가 貴族족이라고 한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방의 호족장 즉 칠원성백만의 신분이라면, 당시 전국을 통일한 궁예국의 왕건을 따라을 것이다.
나주 충주 대전 직산 강릉등등 많은 지방의 호걸들이 궁예와 왕건의 휘하로 자진하여 복속하였다
궁예를 이은 왕건은 한반도 납부를 통일한 강력한 국가급 세력으로 당시 지방의 누구도 당할 자가 업었다
그런데 우리 이족은, 경순왕과 신라중앙권부 귀족세력들의 항복을 거부하고 항전한 것이다
마의태자나 성주의 이순유 장군등은, 온건적인 귀부에 반대하였으나 온건한 반대였다, 서라벌을 떠나 철원/금강산으로
상주로 갔지만,, 자성이족은 칠원성을 근거지로하여 병력을 모아 이한희 장군을 중심으로
고려에 선전포고하고 무력 항쟁을 한 것으로 보아
적어도 신라왕계 아니면 중앙 권력층이라 할 수가 있다,
이한희공은 15세에 급제하여 등관 이후 후손들은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였다,
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후손들이 대대로 고관대작을 역임하였다는 문구이
(연구문은 나중에 불초가 기술함)
기록의
홍빈을 보아서는 그만큼 한희족들이 권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왕권이 박석김의 교체로 이어져 오다가
내물마립간(마립간은 연맹국가중 우두머리 국가의 칸이란 뜻이다)
부터 김씨족에서 왕을 이어져왔고 나중에는 金족의 왕권형태가, 나중에는
부부 친족등 친소관계의 친족으로 교체된 형태로, 경순왕까지 이른 것이다.
우리 자성족 칠원족은, 신라조정의 막강한 실세로 이어 왔다는 徵징이다,
우리 자성족은 이후 군린 용수시대등을 거쳐서
신라말 고려초의 시조로,이한희 공이며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자, 족보에, 대대로 칠원성백을 하다, 칠원성에서 고려군과 대규모 항전하다가
함락당하여 이한희공과 유민들이,
경기도 한산주 회안일대로 이주(정향이속) 당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광이는 자성이족 칠원이족 광주이족이라 한다,
---
우리나라에서 오늘날과 같은 성과 이름의 사용은 신라 진평왕 이후의 시대이다.
그 이전에는 오늘날 김부식이니 김춘추이니의 이름은 없었다
단지, 얼.님, 마마 님금 이사금(이자성) 칸(용수 군린) 건 밝음(박혁거세. 김알지)
알(경주이씨 이알평) 새 바위등을 사용한 것이다. 고구려나라/고족의, 지방의 주몽이라하여 고주몽이고
부여 나라 부여족의 융이라하여 부여융등 백제왕의 성과 이름을, 중국의 사서와 고려시대 삼국사기에 기록한다.
신라 쇠의 나라 서라벌의 금국의 왕들은 김이고 김춘추 김진평 김무열이다. 경이의 시조 알평은
왕으로부터 이를 하사받았다하나,
실은, 고기에 전하는 연명 국가의 일원, 즉, 성읍국가의 일원인 급량촌의 촌주 이사금으로
칭호로 李로 한 것이 전재되어, 李가 된 것이다, 손 설.배 정등 6촌의 성씨들은 대부분 존칭어, 관리, 부족의 상징어들이다
촌의 외칭으로 李씨가 된것이다. 후세에 사가들이 이를 기록하기를 알평은 박혁거세시대의 인물로
李촌의 알평이란 것이다.,즉 알평 임금 이사금 우두머리란 의미의 전래이다. 고대는 마을 부족연맹의 나라이다
삼국사기에 이르기를 마한은 54개의, 신라 진한 지역은 27개의, 가야 변한 지역은 12개의, 소국들이 분립한 것으로 기록한다
즉 각지방의 촌주들이 소국을 운영한 것이고 오늘날 대부분의 성이 신라에서 기원한 것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매, 신라시대의 촌주나 지방 우두머리들이 이어져오니 김.이, 박, 손, 정의 성이 많아진 것이다.
자성의 어원은 쇠이다. 쇠는 신라의 금이란 지방 명칭이다. 신라초기 우리족은 자성족이다
이러한 자성족 중에서 내물왕대에 이르러
중앙권력의 중심에 선 분이 이자성인 것이고
이자성을 시조로한다 관직은 내사령이다 내사령은 당시대로 보면 집사부의 수장으로 총리격이다
즉 촌주중에서 중앙정부에 실력을 미치는 우두머리의 이사금이란 뜻이다. 신라가 내물왕대에 최초로 당과 교류를 한다
즉 당의 직제를 참고하던 시대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유리, 역사책에서 가르키는, 신라시대의 관제와
지방구성의 직제는,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것들이고 당과 교류후의 편제이고
고려초기에 정제된 것이고
김부식이 고려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만약 백제가 통일하였가면 백제의 부여라는 성이 제-일많아졌을 것이고
고구려가 통일하였다면 高가 제일 많아 졌을 것이다. 자성은 어원이 쇠를 기본으로
신라와 같고, 金국과 같다. 이는 前記에서 언급한 것 처럼 관리 수장 우두머리 촌주라는 개념이다.
(성본의 유래, 이씨의 유래참고)
통일신라말과 고려에 이르러서야 통용된 것이다.
---
전승의 사실, 傳聞은 역사연구의 중요한 사실이고 중대한 증거이다
대부분 족보나 씨족이나 고대의 史實에 대한 고증은 전문, 전언, 언전잡기를
토대로 한다 우리이족은 조선조에 전해지는 이이만가의 초보별보권과 율정의 초보
사온주부공의 묘지명, 강주 이지효등의 사돈가의 기록등을 볼때
우리 선대는 신라시대 초기의 자성족이고, 내물왕대에 이르러, 내사령급의 부족이고
이후 대대로 이어져오다가, 칠원성에서, 고려에 져서 한산주로 이주한 것등등의
언전과 전문과 별보초보와 율정초보기록등을
사실로 인정되어야할 것이다,
우리 자성이족의 시조님의 고향은 어디이며 발상을 어디에 둘것인가
문중의 시조는 정신적인 고향이자 숭모의 바다이다.
경이가 경주의 표암바위에 이알평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 것처럼
우리는 어디이어야하는 가
신라지방의 자성족의 어디일 것인가 어디가 시조의 발상지이고 실제의 시조제를 올릴 것인가
이것은 한 분파의 문제가 아니라, 전 門中의 門員이 합의하여 마음을 모아서
정립하고 鞏固히하여,
움직여야한다는 것이 불초의 소신이다.
마지막 이사금 이한희공의 칠원지역일 것이고
한산주에 이르러, 염현에 팔면비를 세우고, 조상들의 이거내력과 조상 이름을 비에 새기고
매년 조상에 제사를 지낸 염현-광주-한산일 것이다.
문중은 시조의 표상에 대한 입지와 기각의 세움은,
전문중의 합일이 중요하다.
---
우리도 2천년 역사를 자란하는 유일한 문중이다.
.......................이민영
==============
이종서 교수 "초기엔 성씨가 혈족 구별 기능..말기엔 성씨집단 해체돼"
경주 배동 삼릉.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성의 왕 3명이 묻힌 무덤이라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경주 배동 삼릉.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 등 박씨 성의 왕 3명이 묻힌 무덤이라고 전한다. [문화재청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신라 초기 왕은 대부분 박씨(朴氏)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혁거세를 시조로 하는 박씨는 약 230년 동안 아달라 이사금(재위 154∼184)까지 7명이 신라를 통치했다.
박씨 왕조에 균열을 가한 성씨는 석씨(昔氏)였다. 탈해 이사금(재위 57∼80)이 제4대 왕에 올랐고, 아달라 이사금 이후 7명의 석씨 왕이 배출됐다.
박씨와 석씨가 왕위를 양분하던 신라에 새롭게 등장한 성씨는 김씨(金氏)였다. 미추 이사금(재위 262∼284)이 김씨로는 처음 제13대 왕이 됐고, '마립간'이란 왕호를 최초로 쓴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부터는 김씨만 왕좌를 차지했다.
김씨 왕조는 통일의 과업을 달성한 문무왕(재위 661∼681)을 거쳐 효공왕(재위 897∼912)까지 550여 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신라가 멸망하기 직전, 신덕왕(재위 912∼917)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다시 박씨에게 넘어갔다. 공고했던 김씨 왕조는 왜 갑자기 무너진 것일까.
이종서 울산대 교수는 학술지 '역사와 현실' 최근호에 실은 논문 '신라 진골 성씨의 성립과 기능 변화'에서 "한때는 성씨가 하나의 혈족집단을 표현하는 역할을 했지만, 후대에는 점차 성씨집단의 개념이 약화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신라에서 최초로 성씨를 칭한 인물은 진흥왕(재위 540∼576)이라고 주장했다. 이전까지는 성(姓)에 대한 관념이 없었는데, 진흥왕이 처음으로 '김진흥'(金眞興)이라는 이름을 대외 관계에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에는 초창기 혁거세, 알지, 탈해를 시조로 숭앙하는 귀족 혈족집단이 있었을 것"이라며 "진흥왕이 김씨를 칭하면서 혁거세를 추종하는 집단은 박씨, 탈해를 섬기는 집단은 석씨를 성으로 채택한 것 같다"고 추정했다.
김씨는 세 성씨 가운데 가장 강한 권력을 갖게 됐고, 혈족집단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하지만 왕권이 강화하면서 임금은 혈족집단에 의존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결과 왕이 특정인에게 성을 하사하기도 했다. 가야계인 김유신이 김씨 성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 교수는 "후대에는 김씨가 단일한 성씨집단이 아니라 분열된 상태였다"며 "이러한 사실은 9세기 중반에 김씨인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이 서로 살육하며 왕위를 다퉜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9세기 초반의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은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에 제사했다"며 "성씨별 분립 의식이 소멸해 혁거세가 김씨를 포함한 진골 귀족 전체의 선조로 숭앙됐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김씨 사이의 동질의식이 희박해지자 박씨도 왕이 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박씨인 신덕왕은 김씨인 효공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을 때 추대 형태로 왕이 됐다. 평화로운 왕위 이양이었던 셈이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효공왕의 왕비가 박씨였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성씨집단이 해체하면서 결국 개인을 기준으로 한 혈연의식이 강화됐을 것"이라며 "박씨 국왕의 재등장은 김씨와 박씨로 구성된 진골이 혈연을 통합적으로 인식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신라 말기에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따르는 '양측적 혈연의식'이 확대됐고, 이는 '양측적 친속조직'으로 발전했다고 덧붙였다. 즉 진골이라는 귀족 집단이 중요했을 뿐, 성씨는 더 이상 특정 세력을 가르는 기준으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 후기에는 혈연의 친소만 따졌고, 성씨의 같고 다름은 신경 쓰지 않았다"며 "고려 지배층에서 확인되는 양측적 친속관계의 연원은 신라 하대 진골까지 소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sh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