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 다니엘손의 『세계 그 자체』, 세계는 분명히 실재한다
가. 이 책은 고전이 될 것이라는 평자의 극찬
가. 이 책은 고전이 될 것이라는 평자의 극찬
울프 다니엘손의 『세계 그 자체』는 내 수준에서는 매우 어렵지만 도발적인 책이다. 저자는 도발의 의도를 책을 시작하자마자 들어내고 있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물리학 또는 세계를 보는 관점은 깡그리 잊어버리라고 하는 듯하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이렇게 현대 과학을 정면으로 딴죽을 거는 학자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어떻든 그가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그 비밀이 바로 이 책의 목차이다. 이에 대해 한 평자는 “‘세계 그 자체’는 과학적 세계관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다. 이 책은 고전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꼭지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그 하나하나가 논쟁을 유발할 수 있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 책의 통찰은 대단하다. 모든 것은 본래부터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다만 우리가 그것에 이러저러한 의미를 부여하며 심각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 모든 것은 물리학이다.
우리는 자주 수학적 모형과 실제 물리적 세계가 동일한 것으로 혼동한다. 그러나 수학은 그저 우리가 우주에서 발견한 것을 기술하는 수단일 뿐이다. 모형과 실재의 동일시는 인간의 의식이 세계 자체보다 우월하다는 이원론적 존재론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원론은 생명 없는 물질과 살아 있는 인간 자아가 대립하는 세계가 진화론의 등장과 함께 무너졌다. 진화는 단계적으로 일어나지만 상당한 연속성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빅뱅의 뜨겁고 빽빽한 플라스마에서부터 인간의 의식에 이르는 연속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리학이 이 모든 과정을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의식을 환각으로 치부하며 살아 있는 유기체를 기계로 묘사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의식이 영원히 설명 가능하지 않고 정의상 물리학의 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나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형태로든 그것의 현대적 대체물인 정보의 형태로든, 자아가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둘 다 희망 사항일 뿐이며 동화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이며, 우리를 정의하는 특징은 의미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란 썩을 운명을 전제한다. 오늘날의 세계는 우리에게 세계가 환각이라고 속삭이지만, 분명 세계는 실재한다. 환각에 지나지 않는 것과 피와 살로 이루어진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이 밈meme을 도입했지만 이 논리는 부호를 읽어줄 사람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유전부호와 그것을 읽는 프로세스의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다.
우리 인간은 유난히 효과적인 방법을 발명해 수천 년간 써먹었다. 우리가 일평생 경험하고 배우는 것들에 대한 정보는 기억이라는 형태로 뇌에 저장되며, 이 정보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뇌로 전달될 수 있다.
한편,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수학 원리에 따라 구성되었다고 상상한다. ‘본질적으로 다른’ 현상들이 ‘동일한’ 기본 법칙을 따른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전 세대들은 이를 어떤 신성한 공학자의 존재와 연관 지었다.
기계를 특징짓는 것은 설계인데, 설계는 발명가가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서 기계를 제작하고 조립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외부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에는 의미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지만 현대 생물학은 조물주 없는 세계에서 아름다움이나 완벽함을 찾아야 하는 고충으로부터 자유롭다. 단순하고 주먹구구식으로 건설된 생명 세계에는 내재적 가치가 전무하다. 따라서 생물학의 유기체는 기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기체는 진화를 통해 생겨나고 설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기체는 그 자체로 원인이자 결과다. 부분이 전체를 만들고 전체는 부분을 좌우한다. 유전체는 무형의 정보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로 이루어졌다. 유전체는 수십 억 년간 진화한 세포계의 일부다.
라. 우주는 수학이 아니다.
이론적 연구는 주로 수학적 개념의 세계를 이용해 세계 자체를 이해하는 행위다. 뉴턴의 법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은 모두 수학을 이용해 우리가 자연에서 관찰하는 것을 기술한다. 즉 입자물리학의 형태로 물질 내부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은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거창하고 정교해 보여도, 입자물리학을 특징짓는 것은 놀라운 단순함이다. 온건한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물질을 지배하는 것은 물질적 우주 바깥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수학적 법칙이다.
이런 세계관은 본성상 이원론이며, 관찰자가 세계 바깥에서 세계를 통제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이것은 위대한 수학자인 신이 법칙을 창조했다는 종교적 세계관과 전적으로 부합하며 그것을 가정하다시피 한다.
적어도 수학을 훈련받은 물리학자는 신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바깥에서 신의 생각을 읽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제비가 파리를 잡거나 축구 선수가 득점할 때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은 현상을 이해할 애쓰는 가련한 물리학자이 뇌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유용성을 내세워 수학적 개념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물리학은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데서 출발하지만 자연법칙 역시 수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우리의 기술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뇌 속에 순전히 물리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사라지면 함께 사라진다. 따라서 수학은 우리의 생물학적 본성에 의존하는 생물학적 구성물이다.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은 우리 머릿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이를 이용하여 주변 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한다.
마. 모형은 실제와 같지 않다.
물리학에서의 혁신은 종종 누군가가 모형과 실재의 관계에 의문을 품을 때 일어난다. 그러려면 모형의 어떤 측면이 실재와 일치하지 않는지를 밝혀야 한다. 뉴턴이 도입한 절대 시간은 알고 보니 현실 세계에서 대응물을 찾을 수 없는 부실한 수학적 구성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으로 시간과 공간을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통합했다. 상대성이론에서는 시간이 절대적이지 않고 관찰자의 운동에 의해 결정된다. 저자는 자신이 실재론자라고 말한다.
“세계가 나의 존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내가 밝혀내고자 하는 진리가 세계에 존재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가운데 일부는 옳다고 확신한다. 다른 것들은(어느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틀린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실재론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과학자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 바깥에 우리의 생각과 선입견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세계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의 형태는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덩어리일 수밖에 없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실재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의 모든 거시적 물체는 알고 보면 임의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 낸 환각일 뿐이다.
우리가 마침내 실재의 참된 성격을 밝혀내고 지금부터 관계 맺어야 하는 유일한 대상을 찾아낸 것은 오로지 물리학의 최신 성과들 덕분이다. 모형과 세계 자체는 심대한 차이가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특징이라고 선언했다. 자신에게 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몸과 실질적으로 구별되며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라고 토를 달았다.
요즘 우리는 나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두개골 안에 있다고 믿는다. 의식은 물질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뇌 같은 신체적 장기에 깃들지 않은 채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함에도 데카르트의 오래된 이원론은 그 매력을 잃지 않고 현대 컴퓨터과학의 사고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별하는 방식은 몸과 정신을 바라보던 방식과 놀랍도록 비슷하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의식은 내면의 주관적 관점, 즉 ‘자아’다. 자신의 자아를 바라보는 것은 확실히 독점적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다. 모든 것이 물리학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은 물리학 이론에 들어맞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이 그 밖의 물리적 현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의식이 어떻게 물질로 표현되는지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오직 관찰하고, 계산하고, 보이는 것에 대해 모형을 만든다. 천문학자들은 정교한 컴퓨터 연산을 이용해 항성을 모형화할 수 있다.
의식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우리는 이미 우리가 관찰하는 것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데모크리토스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자와 진공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면 당신은 원자, 진공, 방정식에 들어맞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설 자리가 없어 보이는데도 어떻게 자아가 엄연히 존재할 수 있는가. 과학이 밝혀낸바 의식은 진화에 의해 설명되는 환각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 인간은 특별하지 않으며 자유의지도 없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서 저자는 결국은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했지만 저자는 ‘움직이기 때문에 존재하다’고 말한다. 달리기를 할 때 가끔은 ‘나’는 사라지고 ‘달리기’만 남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아의 존재가 산술 능력이나 언어능력을 비롯한 지능에만 달렸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움직임을 의식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더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위임이기는 말하기 못지않은 위업이다. 움직이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자의 말대로 인간이 특별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자유의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자유의지가 존재하려면 자엽법칙 바깥에서 행동하고 자연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를 상상해야 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정신이 물리법칙 바깥에서 행동한다는 것은 신이 기적을 통해 개입한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연법칙은 세계의 모형을 만들려는 우리의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시점은 제한적이며 끊임없이 진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