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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질문하게 하는 어떤 문제들ㅡ죽음, 절망, 응답 없는 기도-이 당신에게 발생한 적이 있는가? 만일 있었다면, 당신은 이미 그러한 문제에 수반되는 어떤 분노와 혼란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은 다음과 같은 까다로운 질문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일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을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그것을 간섭하시고 금하지 않으셨을까?",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신다면, 왜 나는 그분을 느끼지 못할까?", "혼전 성교가 나쁘다면, 왜 하나님은 그것을 커다란 유혹으로 허락하셨을까?", "만일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에 어떤 차이점을 두셨다면, 왜 나는 위선적인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될까?"
만일 당신이 아직 믿음이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해 보지 않았다면 주의하라! 당신의 삶 속에 있는 사건들을 이어 주는 정상적인 끈이 풀리는 날이 올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 줄을 다시 이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도 역시 나처럼 어려운 질문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물론 의심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의심에 대해 진지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는 그 대답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을 진실과 부딪히는 것을 피하기 위한 연막으로 사용할 수 있다. 혹자는 실제로 전혀 기독교의 진리를 의심하지 않을 때도 의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에 순종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의심도 있다. 이런 의심은 궁극적으로 더 큰 이해와 더 깊은 신앙과 또한 하나님과의 더 가까운 관계로 인도한다. 진짜로 의심하는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에 대하여 획일적으로 대답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의심이 자신을 괴롭힐 때 그들은 진리를 깨닫기 위해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과 토론한다. 그들은 진리에 헌신된 사람들이다.
당신이 처음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어떻게 인생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선과 악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죽음 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죄책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 하는 질문을 했고, 결국은 대답을 발견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와 같은 질문과 다른 많은 질문들에 대한 만족할 만한 대답들은 성경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창조하셨고, 당신이 그분의 뜻을 구할 때 당신의 인생에 의미를 주신다고 알려 준다. 성경은 당신이 살아갈 지혜를 가르쳐 준다. 당신이 죄를 지었을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며 당신을 대신하여 벌을 받으셨기에 당신을 용서해 주신다고 말한다. 성경은 또 당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신약에도 역시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분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이신지 의심했다(마 11:2-6 눅 7:18-23). 예수님은 요한을 비난하지 않으시고 증거를 보고 믿음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조차도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불확실함을 표현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여 십자가 외에는 다른 길은 없나이까 정녕 내가 죽어야 합니까?"라고 기도하셨다. 또 십자가 위에서 고통 중에 모든 성경 말씀 중 가장 뇌리를 떠나지 아니하는 말씀을 하며 울부짖으셨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막15:34. 본래는 시 22:1에 쓰여 있다.
또 한 사람은 성경에서 의심 많기로 유명한 의심하는 도마이다(요20:24-29). 그는 대담하게도 예수님을 보고 그의 상처에 손을 대보지 않고는 예수님이 정말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외쳤다. 마침내 도마가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런 예수님은 계속해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도마가 의심한다고 그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도마의 의심에 대해 대답하시고 미래의 다른 사람들은 믿음을 갖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경고하셨다.
확실히 이런 모든 성경 속의 인물들이 정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의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의심하는 자들과 질문자들을 환영하신다고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의심하고, 해답을 찾고, 진리를 구할 자유를 주신다(결국 그분이 진리시다). 따라서 당신 자신에게도 똑같은 자유를 부여하라. 그러면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감정은 항상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당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정확한 권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거나 꼭 껴안고 싶은 충동을 따라 행동하는 것은 종종 멋진 일이지만, 어떤 사람을 때리고 싶은 충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 행동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 감정은 여전히 진실하다.
당신이 직면하는 많은 갈등들은 뭔가를 하고 싶다는 감정과 당신이 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 사이에서 겪는 갈등으로 간추릴 수 있다. 당신은 감정에 따라 너무 성급히 행동하는지 아니면 감정에서 완전히 분리된다. 당신은 감정을 무시해 버리든지 무조건 따른다. 그러나 어느 반응도 건전한 것이 못된다. 생활에서 부딪히는 가장 큰 도전 중의 하나는 감정과 원칙 중 어느 한쪽의 중요성에도 손상을 주지 않고 양자를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을 화나게 했을 때, 먼저 당신의 감정에 귀기울이고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화가 났을까. 상처를 받았을까 하는 것 등등)이 건전한 반응이다. 그런 후에 우선 그 감정의 직접적인 원인을 다음에는 그 저변에 잠재된 원인을 밝혀내는데 힘을 쏟으라.…
중요한 것은 감정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그것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배우고 성장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신과 같은 존재였다"고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인 스코트 (M. Scott Peck)은 말하고 있다. "부모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그 일이 전 우주에 틀림없이 영향을 미치는 방식처럼 보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처음 가지게 된 관념(애석하게도 그것은 종종 유일한 관념이다)은 부모님의 본질의 단순한 연장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의 단순한 혼합이요, 혹은 그들의 대체물에 불과하다. 만일 자애롭고 너그러운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우리는 자애롭고 너그러운 하나님을 믿기가 십상이다. 그리고 성인의 관점에서 세상은 어린 시절처럼 양육하는 곳으로 보인다. 만일 부모가 엄하고 징벌하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엄하고 징벌하시는 괴물 같은 하나님의 개념을 지닌 채 성숙하기가 쉽다. 만일 부모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았다면, 우리는 세상을 단순히 보호하지 않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기가 쉽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부모에 대해 가졌던 감정으로 하나님을 투사하는 경향이 있다. 당신의 부모는 당신이 어렸을 때 어떻게 다루었는가? 당신의 부모는 어떤 종류의 세계관에 입각하여 당신을 양육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과거를 살펴보면 당신은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현재 감정을 잘 설명하는 근거를 발견할 것이다(부모의 실제 행동이 그들의 말보다 훨씬 더 당신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명심하라).…
부모를 비난하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 쓸데없이 부모를 비난하려 들기보다는 그들로부터 배우라. 당신의 가족을 회고하는 데는 한시간 또는 한나절, 심지어 일주일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가족과 세계관의 역동성을 다룰 수 있게 되는 데는 몇 년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신은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감정이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될 뿐만 아니라 보다 심오한 이해로 인해 당신의 감정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의 믿음이 개인화되어 간다고 해서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결코 갈등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도 자기 자신이나 하나님을 철저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일치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는 없다. 당신은 여전히 허공에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당신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안다' 할지라도 당신은 여전히 죄책감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은 무척 외로운 나머지 왜 하나님이 그 외로움을 가져가시지 않는지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감정. 당신의 믿음. 당신의 지나온 삶 등을 검토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믿는 바를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당신의 친구나 연인과의 관계처럼 다양하다. 좋은 감정을 발전시키고 깊어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요한다. 때로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신이 항상 동일한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서로를 알고 이해하게 된다. 물론 대인관계와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님은 관계에서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당신이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하나님은 항상 동일하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의심에 싫증을 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이 어떻게 느끼든지 상관없이 당신과 당신의 감정을 이미 철저히 알고 있고 당신을 완벽하게 사랑하신다.
*유혹은 당신을 속이기 위해 당신 머리 속에서 속삭이는 음성이다
• 유혹은 속삭인다. 너는 쓸모 없는 놈이야 노력해서 뭐하니?"
• 유혹은 속삭인다. "내가 당한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앙갚음해야 해. 그들은 그렇게 당해도 괜찮아!!
• 유혹은 속삭인다. "그것을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어?"
•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에 의심을 품게 하고 반쪽 진리를 마음 내면에 뿌리는 등 내면에서부터 발생한다
이것이 유혹의 가장 파괴적인 면이다. 유혹하는 대상과 압력을 주는 상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들이 생각 속으로 들어와야만 유혹이 된다. 확실히 당신은 자신의 생각에서 도망칠 수 없다. 당신은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교회에서 혼자 있을 때, 광야에서 (사실상 예수님이 가장 심하게 유혹 받은 곳이다) 유혹받을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유혹을 피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에서 유혹을 차단시키려 애쓴다. 그들은 오로지 안전한 파티와 안전한 영화만 보러 간다. 또 안전한 친구만 사귄다. 그들은 해변과 비기독교적인 서적을 멀리하고 유혹이 그들의 인격 안에서 결코 틈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스스로 규칙을 세워 그것을 엄격하게 지키려 한다. 이런 모든 행위는 때로는 적절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책은 어떤 것이든 두뇌를 다루는 것이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 자신의 사고 속에 유혹이 없다면, 당신의 삶 속에서 친구들과일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
*심해 물고기 - 어떻게 그것들은 그런 압력 속에서도 자유로이 생존할 수 있을까? 그 비밀은 외부 압력과 물고기 몸 속의 압력이 동일하다는 데 있다.
현실 세계에서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두꺼운 강철판을 둘러침으로써 유혹의 압력을 이기려고 한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하고, 좁은 공간에 자신을 꽁꽁 밀폐시킨 채 밖을 살핀다. 그들은 그 안에서만 안전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물고기의 경우처럼 그 이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상을 강철판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해 지킨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모든 유혹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주신다.
잘 알려진 구절인 로마서 12장 2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밖으로 부터의 압력은 당신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되도록, 즉 순응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나님의 영은 당신의 마음을 통해 내면에서부터 그것과 반대로 행사한다.
유혹이 존재하지 않는 체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만일 당신이 다이어트 중에 있다면 월귤(blue berry) 파이 한 조각에도 마음이 끌린다. 물론 여기에는 사악한 것이 없다. 죄란 사실은 전혀 재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죄는 재미있다. 한동안은.
그러나 죄를 재미없게 만드는 것은 죄에 수반되어 나오는 결과들 때문이다. 오늘 한 조각의 파이를 먹을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내일 체중계 위에 올라서는 것이 고역스럽게 된다. 당신은 오늘 자기 연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지속하면 자기 연민이 당신이 즐기는 유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에게는 친구가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당신의 양심은 위에 대해서 이와 동일하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의 삶에 잘못된 것이 있으면 색감은 당신으로 하여금 그 쓰라린 곳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일을 못하게 한다. 하나님이 죄에 대해 느끼시는 동일한 방식으로 당신도 느끼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나 가지 커다란 문제는 당신의 양심은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로 양심은 죄에 대한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메시지를 보낸다.
대조적으로 당신의 통증을 느끼는 체계는 꽤 믿을 만하다. 만일 당신이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면 거의 틀림없이 거기에는 상처가 있다. 그러나 가상의 고통도 정말로 존재한다.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있지도 않은 환각의 손발로 인해 대단한 고통을 느낀다.
이런 가상의 문제들은 종종 당신의 양심과 관련되어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혼전 성관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편의점에서 훔쳤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반면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댄스 파티에 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설명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느끼는 체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당신의 양심은 대부분 인간이 만든 것이다. 우리는 양심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사실 수많은 해를 거듭하면서 형성된 그리고 우리의 경험에 의한 부모와 사회의 음성이다. 만일 당신이 빈약하게 양육되었거나 수년 동안 양심의 경고를 흘려 버렸다면 당신의 양심은 아마 신빙성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달리 말하면 실제와 죄의식은 죄책감과 같지 않다. 캐시 같은 사람들은 거의 거짓의 실제가 아닌 색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들은 과민한 양심을 지니고 있는데, 그 양심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가르침의 실제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혹자는 캐시에게 "이것은 진짜 죄책감인가요? 아니면 가짜인가요?"라고 물을 필요가 있다. 종종 부정적인 자아 형상을 지닌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확대하기 위해 거짓된 혹은 가상의 죄책감을 이용한다.
*유혹을 이길 때마다 당신은 더욱 강해진다. 즉, 유혹에 승리할 때마다 그것은 당신을 세워 나가는 훈련이 된다. 아마 이것이 하나님이 유혹을 모두 제거하기보다는 그것을 허락하신 한가지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유혹은 당신의 영성을 강화시키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혹에 빠져 있을 때, 당신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유혹을 물리칠 때, 당신은 선택했던 방향에 대해 아무 의심도 갖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는 것은 놀라운 것이다.
당신이 이 땅에서 사는 한 유혹은 항상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다. 유혹과 실패 양자를 통해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위해, 또한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위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신을 향한 그분의 계획을 분명하게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이 생겨서 마침내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 죄 말입니다. 바로 오늘 아침 말씀드렸던 그것 말예요."
"나는 아무 죄도 기억하고 있지 않단다."
심지어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말라. 단지 이렇게 질문해 보라. 하나님은 내가 무시해 왔던 것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이 나를 위해 원하시는 것이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렇게 행하라. 죄사함을 놓고 너무 오랫동안 눈물을 짜며 기도하지 말라. 단지 당신의 행위를 바꿔라.
*그러나 당신은 치유받을 필요가 있다. 당신이 넘어져서 상처를 입었을 때, 더 이상 부주의하게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해도 약을 발라야 할 무릎의 상처는 그대로 있다. 죄 또한 약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용서와 돌보심이라는 약이 필요하다. 여기에서도 요한일서의 말씀은 도움이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이 말씀을 뭔가 대단하고 자기 분석적인 논쟁으로 만들지는 말자. 그것은 쓰여 있는 그대로 단순한 것이다. 단지 요구되는 바는 당신의 고백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고 당신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죄로 인해 더럽혀졌습니다. 슬픕니다. 저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올바른 궤도로 저를 인도해 주시겠습니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요한일서는 그렇게 고백하면 하나님이 모든 죄에서 당신을 깨끗케 해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80퍼센트만 깨끗케 하신다거나 오랜 시일에 걸쳐 깨끗케 해주시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당신을 깨끗케 해주신다.…
성경은 다르게, 즉 좀더 크게 그림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서 당신은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죄를 세어 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간단명료하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죄 사함은 갑자기 찾아온다. 즉, 100퍼센트 죄인이 갑자기 100퍼센트 죄가 없게 된다. 온전하고 전적인죄 사함은 원하는 누구에게나 값없이 주어진다.
*예수님의 말씀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보다 깊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왜 그것들은 불가능한가? 그것은 사람들이 상반되는 요구를 간구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은 양쪽 다 응답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남북전쟁시 아브라함 링컨 (Abraham Lincoln), 스톤윌 잭슨(Stonewall Jackson), 로버트 리 (Robert E. Lee) 같은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그리고 빈번히 승리를 위해 기도했다. 그러나 남과 북이 모두 승리할 수는 없지 않은가. …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한 것을 응답받지 못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이라면 제발 다른 방법을 찾아 그의 고통을 덜어 달라고 간구하셨다(막 14:32-42). 종종 기본적인 사실이 기도에 대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는 배제된다. 삶의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고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완전한 신앙을 지닌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도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께 고통을 덜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죽임을 당했다. 우리가 아무리 믿음으로 충만해도 어떤 기도들은 거절당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바울도 그가 '육체의 가시라 불렀던 신체적 병에서 비롯된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고후 12:7-9 참조). 고통을 제거해 달라는 세 번의 간구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간구는 거절되었다. 따라서 나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항상 모든 기도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기도에 대해 포괄적인 주장을 했던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기 때문에 나는 그분이 드렸던 기도의 종류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하나의 경향에 나는 놀랐다. 나는 이제껏 기도는 나, 즉 기도하는 사람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기도하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초점이 기도를 받는 분, 즉 아버지께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통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하시고, 능력을 간구하는 시간으로서 기도를 사용하셨다. 그는 또한 세상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도움이 필요한 그분의 친구들을 알리기 위해 기도하셨다. 그것은 쇼핑 목록이 아니고 대화였다.
찰리 쉐드(Charlie Shedd)는 기도를 가장 절친한 친구와의 내면적 대화라 일컬었다. 그런데 나는 기도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휘두를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기도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기도에 대해 고찰하면서 성경을 읽어 나갔을 때, 나는 간구가 기도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기도는 경배이고, 어떤 것은 회개이며, 어떤 것은 찬양이다. 예를 들어, 시편은 시로 표현된 일련의 기도들이다. 시편을 죽 읽어 보라. 그러면 그것들 중 소수만이 본질적으로 간구하는 기도임을 알 것이다. 기도는 적절한 상품을 뽑을 수 있는 자동 판매기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버지께 우리를 도와 달라는 외침이다.
기도의 동기는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 이것은 당신의 뜻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의 능력 밖에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라는 것이어야 한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은 그것을 "나라이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표현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심지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 않은 기도도 들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분은 가장 터무니없고 이기적인 간구도 주의깊게 고려하신다. 자녀들이 현명한 부모에게 "잠을 안자고 심야 쇼를 봐도 될까요?" 혹은 "내가 비록 열두 살이지만 운전하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라고 어리석은 요구를 할 때는 항상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대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더 잘 알고 있다.
*이런 대담한 기도들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왜 어떤 사람들의 기도는 일정하게 응답을 받는 반면에, 나의 기도는 침만 튀기는가? 나는 신앙생활의 다양한 시기에 기도를 영적인 운동으로 생각해 왔다. 나는 믿음을 팔굽혀펴기와 유사한 것으로 여겼다. 만일 당신이 날마다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한다면 팔의 근육은 더욱 굳세질 것이며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확실히 이와 같지는 않다. 믿음은 요가의 명상처럼 열심히 집중함으로써 분발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안다. 왜냐하면 내가 보았던 가장 극적인 기도 응답 중 몇 가지는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실 것이라고 진실로 믿을 만큼 충분히 무지하고 순진한 새로 입교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뿐만 아니라 온 우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들이 어떤 범주에 속하는가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기도에도 응답하실 것이라는 환불 보증서처럼 읽을 수가 없다. 찰리 쉐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모르는 응답을 가지고 계신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실 때 이것을 의미하신다고 믿는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하다. 네가 여기에서 본 것은 융단의 아랫면에 불과하다. 그것은 완성된 면만큼 그리 아름답지 않다. 너는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무엇이 최선인 줄 알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럴 때 지금부터 천 년이 지난 후에 아마 아아! 그렇군요.' 라고 말할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고 했다. 조니 에렉슨 (Joni Eareckson)은 다이빙 사고로 불구가 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다. 치유해 달라는 그녀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격려하는 데 책과 영화를 통해 지금 그녀의 삶의 이야기를 사용하고 계신다. 그녀의 고통은 선의 원인이 되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전쟁이 우리 주위에서 그리고 우리 안에서 격렬히 치러지고 있다. 우리는 몇 분 간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선의 편에 있음을 큰 소리로 보여 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심과 그분의 뜻에 연합된다. 우리는 우리의 왕과 교제한다.
*"믿음은 잘 보관된 하나님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공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하시든지, 혹은 나로 하여금 힘든 시간을 인내하게 하시든지 간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흔히 '믿음의 장' (Faith Hall of Fame)이라 불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거장들이라고 하는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원했던 바를 거의 얻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혼수와 바로와 사자로부터 생명을 구조받았지만, 다른 이들은 죽기까지 맞았고, 채찍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몸이 동강나기도 했다.
이 두 그룹 모두 강력한 믿음을 가졌는데, 이는 우리의 모범으로서 크게 환영되고 있다. 믿음은 반드시 그들의 문제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게 했다. 믿음은 하나님의 주의를 끌기 위해 퍼부으면 부풀릴 수 있는 수량(quantity)이 아니다. 믿음은 밖에 있는 우리 자신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에 참여케 하는 신뢰의 질(quality)이다.
종종 하나님이 나의 간구를 거절하신 것처럼 보일 때는 하나님이 간접적으로 응답하신 것이다. 위대한 기독교 교부인 어거스틴(Augustine)의 어머니는 이를 경험했다. 모니카(Monica)는 매일 밤마다 그의 아들이 이탈리아로 가는 것을 막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녀는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어머니를 속이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그녀의 기도는 상달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이탈리아에서 회개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요 지혜로운 분이시다. 그분은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축복하기 위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 수 있다.
*위선자들은 믿는 것과 사는 것은 별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기준에 의하면 나는 위선자이고, 당신 또한 그렇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위선자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런 말씀들이 인생의 기준인 것에 동의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그런 말씀에 따라 살고 있지 않다. 나와 토머스 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내가 내 믿음에 따라 살고 있느냐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보면 나 역시 실패자다. 차이점은 실패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두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첫번째 사람은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로서 그가 살아온 도덕적 특성-규범을 상당히 뛰어넘는-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다른 한 사람은 악명 높은 사기꾼으로서 자신을 부끄러워하여 하나님께 간신히 말씀을 드릴 정도였다. 그는 아무 것도 감사드리지 않았다. 그가 구한 것은 자비뿐이다. 예수님은 첫 번째 사람이 아니라 두번째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해석했다. 그 사람은 죄를 적게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겸손한 태도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 각자를 우리의 내면에서 모순된 모든 것과 억지로 타협하도록 하실 수 있었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인지 의문이다. 대신,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잘못들을 한 번에 하나씩 가져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싶다면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은 자유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언제나 위선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바꿀 때, 그리고 하나님의 규례가 우리 삶 속에서 작용할 때 그분은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는 체 가장하는 것을 그만 둘 자유가 있다. 위선자는 문제들이 존재하지 않는 체하면서 그것을 내면에 숨기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들을 밖으로 표출하고 그것을 날마다 하나님께 맡길 만큼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이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비뚤어진 다양한 사람들을 아셨다. 교활한 세리, 매춘부, 도둑, 잔인한 군인들, 그러나 예루살렘과 다른 유대 도시들을 여행할 때 특별히 한 무리가 그분을 성나게 한 것 같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장 강력한 공격을 했다. ‘독사의 자식들’, ‘어리석은 자들', '위선자’.'눈먼 인도자', '회칠한 무덤’. 그분은 이렇게 그들을 불렀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격노하게 만든 사람들은 오늘날로 보면 출판계에서 바이블 벨트(Bible-Belt. 미국 남부의 신앙이 두터운 지역)의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이었다. 이 무리는 바리새인들이며 하나님을 따르는데 그들의 삶을 바쳤다. 그들은 십일조를 정확히 바치고, 매순간 구약에 있는 율법에 순종하고, 새로운 회심자를 얻기 위해 선교사를 파송했다. 바리새인들 간에는 성적인 죄나 폭력적인 범죄가 거의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유형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분의 반응은 그분이 율법주의를 얼마나 심상치 않게 보셨는지를 나타내준다. 바리새인들은 규범적이고 외적인 규칙의 목록들을 다룸으로써 하나님의 용납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율법주의는 특별히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외관상 그것은 아주 존경할 만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확실하고 순수하고 경건하게 따르는 사람들을 배격한다.
*내가 믿기로는 바리새인들은 진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러한 것처럼 거룩함을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제한하는 특권을 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지 않는 신자도 속물적이라고 거부했다. 그들은 진리와 유사하기 때문에 쉽게 다른 사람들을 미혹한다. 유사한 대용품을 진리로 혼동하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용납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있는 규칙의 목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생각에는, 하나님은 그분의 승인의 인 외에는 결코 어떤 것을 주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거룩함을 하나님의 선물로서 알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은 물론 거룩함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율법주의를 조심스럽게 피하셨다. 사람들은 여러 번 예수님께 특별한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대개 고분은 구약의 율법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분은 율법 뒤에 있는 원리를 지적하셨다. 그들은 부자에게 그의 소유의 18.5퍼센트를 나눠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간음을 실제의 성교라고 정의하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분은 남자가 마음으로 간음하도록 여자를 성적인 대상으로 사용하는 원리를 비난하셨다. 사랑? 그것은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 살인? 나는 이에다 첨가하겠다. 자신의 집에서라도 단지 화를 내기만 해도 그는 이미 심판의 위험에 놓여 있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성경대학의 그것보다 더 엄격하게 율법의 목록을 진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 율법에는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율법주의적 채무를 전문적으로 말소하셨다. 그분은 결코 나의 목적들을 더 쉬운 것으로 대체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불가능한 것으로 대체하신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관심을 갖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정말로 돌보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의 삶을 인도해야 할 원리들을 계속해서 지적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선한가 하는 명예의 목록을 절대 나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율법주의를 심하게 책망하신다. 명예는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로 간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의 치료약이 될 수 있는 '은혜’ 라고 불리는 단어를 사용한다. 은혜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이 아무 조건 없이 무료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율법주의와 정반대이다. 은혜는 예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이다. 그리고 지금도 주시는 것이다. 은혜는 예수님 자신이 선물이다.
*내가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나는 뭔가 일하기 때문에 성취하는 데 익숙하다. 비록 나 자신을 혹사한다 할지라도 좋은 평점을 얻거나 테니스 팀을 만들거나, 혹은 물품을 판다. 그래서 나는 은혜 역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다. 차라리 하나님의 호의를 획득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은혜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내가 얼마나 영적인지를 알리려고 노력하면서 여기저기 갈 필요가 없다. 은혜는 나로 하여금 쉬게 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고, 그분이 이미 나를 그가 기뻐하시는 선물 (엡 1:11) 이라고 부를 만큼 충분히 감동받으셨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준다. 이것이 조쉬가 나로 하여금 강하게 생각나도록 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직 우리와 관계를 끊지 않으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거칠고 제멋대로이며 심술궂으나, 그분은 여전히 우리가 마치 그분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처럼 다루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자신의 몇몇 문제들을 해결해 주고 또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구분해 주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 우리는 조쉬가 말했듯이, 우리와 세상 나머지 사람 간의 유일하게 변치 않는 차이점은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임을 잊어버린다. 우리 안에 있는 유일한 선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결과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4).
*물론 예외가 있다. 어떤 고통은 행위와 뚜렷한 연관이 있다. 마약 중독과 성병 환자들은 그들의 고통에 대한 '메시지'를 알아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 우리 대부분이 처했던 고통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하는 곳을 보지 못했다.
왜 옳은 고난을 받았을까? 왜 그 남자는 눈이 먼 것을 견뎌야만 했을까? 왜 그 사람들은 무너지는 망대에 치였을까? 성경은 이런 질문에 대해 아무런 적절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우리가 바라는 대로 성취되지는 않는다. 어느 편이냐 하면 욥기서는 해답이 인간의 이해 밖에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왜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것은 바보가 아인슈타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관되게 성경은 이 논쟁을 원인의 질문에서 반응의 질문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공평하실까?" 라고 묻는다. "그것이 어떻게 보이든지 내 손 안에 있다"가 하나님의 유일한 대답이다. 그런 후에 그분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신다. "너는 나를 신뢰하느냐?
*슬픔의 관찰」(A Grief Obsered)이라는 책에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실까. 이것은 가장 불안한 징후 중의 하나이다. 당신이 행복할 때는 너무 행복해서 그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만일 당신이 찬양으로 그분께 향하면 당신은 팔을 벌려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필요가 절실하고 다른 모든 도움은 소용이 없을 때 그분께 가면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는가? 오르지 당신 면전에서 문이 꽝 닫히고 안에서 이중으로 빗장을 잠그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다음은 침묵뿐이다. 당신은 돌아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하나님의 사람은 의심했다. 한 번도 하나님이 (그때보다) 더 멀리 있거나 무관심하게 보였던 적은 없었다. 하나님은 정말로 사랑하셨을까? 그렇다면, 그런 비통한 시간에 그분은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루이스가 묘사한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비통한 시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특별히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표현한다. 그분은 우리가 느끼는 고통을 초월하도록 도와주는 신비스런 위로를 주실 수 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가끔은 그분이 완전히 침묵하시는 것 같다. 그 다음은 무엇을? 하나님은 어쨌든 그의 위로를 느끼는 사람만 돌보시는 것일까?
*성경에서 가장 친숙한 구절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고난받고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위로받았음을 항상 느낄 것이라는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빈둥거리며 옆에 앉아서 우리가 홀로 고난받는 것을 구경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하셨고 지상에서의 그의 대부분의 생애 동안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면서 그분은 고통이 없는 미래의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승리를 거두셨다.
동정 (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함께 고난받는다는 뜻을 지닌 두개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담당하셨을 때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동정을 보여 주셨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셨다.
예수님은 대부분 고난받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지내셨다. 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계신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친구가 죽었을 때 우셨다. 매우 빈번히 - 직접 요청 받을 때는 언제든지 - 그분은 병든 자들을 고쳐 주셨다.
우리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실까?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슬픔과 비애로 반응하셨다. 그분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다가가 고통의 원인을 치유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은 관심을 갖고 계실까?"와 같은 질문으로 자신들을 괴롭혔을지 의문이다. 그들은 매일 예수님이 돌보신다고 보이는 증거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그분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할 때 그분을 지켜봤다.
*왜 하나님은 보다 명백하지 않으실까? 나는 회의적인 나의 친구들이 하나님의 행위를 보고 결코 그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잘 조화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을 행하시기를 원했다. 문제는 기독교적인 행위들기도하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다른 사람과 믿음을 나누는 것,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독교가 사실이라고 누구에게나 확신시킬 만큼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가 진실로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거대하고 전세계적으로 경의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자연주의는 밑바닥으로 실추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이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정말로 놀라게 한 수십 가지의 예화가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이 그것이다. 세실 데밀(Cecil B.DeMille)은 그것을 모방하느라 많은 돈을 썼다. 그의 영화는 엉터리처럼 보인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가? 5백 명 이상이 그분이 죽음에서 살아나셨음을 증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하나님 자신이 지상에서 33년 동안 가르치고 놀랄 만한 기적들을 행하면서 동행하셨다. 그러나 그분을 청종한 사람 중에 오직 소수만이 그분을 믿었다.
*물론, 인간 예수는 두 개의 세계가 하나로 기능하는 본원적인 본보기다. 그분은 땀샘, 머리, 손톱, 입술 등 인간을 정의하는 모든 특징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몸 안에서 사셨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다. 우리는 단지 그것에 대해 잊어버릴 뿐이다. 논쟁, 관계, 직업, 학교의 세계, 심지어 교회와 기도회라는 '종교적 세계가 우리의 마음을 다 태워 버린다. 만일 하나님이 어떤 선을 위해 우리를 사용할 때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곁에 서서 "나는 사탄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노라"와 같은 말을 속삭여 준다면, 우리는 보다 잘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의 세계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하는 행위들-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사랑하는 행위들은 배타적으로 초자연적이거나 혹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동시에 양쪽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심은 어떠한가? 그것은 최소한 성경에 존재한다. 욥의 불타는 질문에서부터 ”나에게 보여 달라“는 도마의 당황스럽고 고집 센 요구까지, 의심은 솔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의심하는 자들은 의심을 질문할 만큼 용감하다. 사실상 모든 대답을 아는 체하면서 의심하는 자들의 입을 막아 버림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분노하게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니라 경건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때, 무엇이 의심 가운데 있는지 바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해답을 찾기 전에 당신의 문제를 분석하라. 그리고 대답은 진실하게 찾아라. 기독교 신앙이라는 벽을 아주 강하게 민다고 해서 그 안에 구멍을 낼 만큼 얇지는 않다. 만일 당신이 솔직하게 질문한다면 대답을 찾을 것이다. 비록 원했던 대답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라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그분이 제자들에게 한 약속이었다. 그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선택했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땅을 세우신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그들이 구하고 찾으려 하는 한 영원히 그들을 당황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 생애 동안 단 한 가지도 잘못한 것이 없으셨다. 그분은 결코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를 내면서 자신을 변호하셨을까? 혹은 자신을 죽이지 않도록 설득하셨을까? 혹은 간청하셨을까?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재판에서 그분은 계속 자신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지를 질문 받으셨다. 그분은 자신을 변호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누가복음 22장 67. 68절에서 예수님은 그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다“...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니라." 심히 불공평하고 괴로운 죽음의 위협 아래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셨다. 그분은 그들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아셨다. 그분은 세상의 재판장이고,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의 재판에서 바꿔서 행사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게임에 걸려들지 않으셨다.
그것은 오만이 아니다. 사실이다. 오히려 비현실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주신 지위를 권세로 번복시키려 했던 그 재판이다. 그분은 온전한 자유인으로서 그의 죽음을 맞이하셨다. 심지어 십자가상의 무시무시한 고통 중에서도 그분은 그분 자신이셨다. 그분은 자신의 몸이 죽어 가고 있음을 느끼는 동안에, 그 마지막 고통스러운 시간에 무엇을 하셨을까? 그분은 강도를 용서하셨다. 그분은 요한과 자신의 어머니를 가족 관계로 맺어 주셨다. 그분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