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1-27
▣ 믿음의 시련-야고보서 1장-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시험하는 가장 좋은 것 중의 하나는 환란이다. 그리스도인이 개인적인 시련들을 통과할 때 그가 참으로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시련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품을 발전시킨다. 야고보서의 대상자였던 그 유대인들은 시련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는 그들을 격려하고자 하였다.
이상한 일은 야고보가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는 점이다. 1절에 나오는 “문안“이란 단어는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문제들의 와중에서도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야고보는 제1장에서 그리스도인이 환란의 때에 갖게 되는 확고부동함을 보임으로써라고 이에 대답한다.
1. 하나님의 목적을 확신할 수 있다(1:1-1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경험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롬 8:28). 우리는 이 세상 일들을 관할하시며 모든 사건의 배후에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 사랑의 하늘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시련들이 밀어닥칠 것을 예상해야 한다. 야고보는 “만일 너희가 여러 가지 어려운 시험에 빠지면“이라고 말하지 않고 “만나거든“이라고 말하고 있다 1장 2절에 나오는 “시험“이란 “검사, 연단“의 의미가 있는 반면, 1장 13절의 시험은 “악을 행하도록 유혹함“이라는 뜻이다.
시련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온전케 하는 데에 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성숙(온전)하기를 원하시며, 성숙함은 인생이라는 실험실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시련들은 견딤을 뜻하는 인내를 산출하며(롬 5:3), 인내는 다시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깊이 성숙하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치자로 세우시기 위하여 그에게 13년간이라는 시험의 기간을 두셨다. 베드로는 모래에서 반석으로 변화하기까지 시험의 학교에서 3년간을 보냈다! 바울은 많은 시험들을 통과하였으며, 그 모든 시험들은 그의 성품을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중에 하나님을 신뢰하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중에 거룩한 목적을 지니고 계심을 알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더욱 순복하게 된다.5-8절에서 야고보는 이러한 믿음의 문제를 다루며, 믿음이 기도 중에 표현된다고 본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목적들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은 정말 돌보시는가?“라는 물음으로 우리를 자주 유혹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도가 개입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께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실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망설임, 또는 의심을 암시하며, 문자적으로는 “두 영혼을 품다“라는 뜻이다. 두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은 시련을 겪는 동안 안정을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요동한다. 한 순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음 순간에는 하나님을 의심한다. 시련 중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반드시 안정을 찾게 한다(벧전 5:10).
야고보가 편지를 보내는 회당들에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있었으나(2:1-9/5:1), 야고보는 시련들이 그들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고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시련은 주 안에서 그들이 부요하다는 것과 더이상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부자에게는 감히 부를 위하여 살거나 부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2절은 우리가 시험과 시련의 때에 주장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과 약속이다."
약 1:13-20
2.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할 수 있다(1:13-20)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에게 고난을 허락하시거나 시험당하도록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새로운 축복을 경험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들이 이같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련들과 시험들을 통과하는 데에 있다. 이 구절들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며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 대하여 반항하는 그리스도인을 경고한다(1:13/1:20).
우선, 야고보는 시련과 시험(유혹)을 조심스럽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은 시련들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주신다(아브라함의 예-창 22:1). 그러나, 사단은 유혹을 보내어 우리 안에 가장 나쁜 것을 가져다 준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범죄케 하는 시험(유혹)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죄를 “낳는다“고 묘사한다. 외부로부터 미혹됨으로써 내부에 욕심이 일어나며,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게 되고, 결국 죄는 죽음을 초래한다! “끌다“와 “꾀다“는 사냥 용어들이며 그 말들은 무엇인가 잡기 위해 유혹의 미끼를 사용하고 있는 사냥꾼이나 낚시꾼을 상상케 한다.다음으로 야고보는 하나님은 좋은 은사만을 주시며, 좋은 은사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그의 선하심은 멀리 떨어져 있는 별과 같이 깜박거리는 것이 아니며, 일식에서처럼 회전함으로 인해 생기는 그림자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며,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가운데 첫열매들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일어날 일의 “본보기“이다(롬 8:2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련이 올 때 말하거나 불평하는 데 빨라서는 안 된다. 오히려 말씀을 듣는 데 빠르고, 말하는 데 더디며 성내는 데에도 더디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인내할 때, 그리고 화를 내지 않을 때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그의 뜻을 성취하신다."
약 1:21-27
3.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할 수 있다(1:21-27)
“듣기는 속히 하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문제를 대두시키며, 이 문제는 이 부분의 주제가 된다. 야고보는 “첫열매“와 “심긴 도“(말씀)에 대하여 말할 때 농사에 대한 예화를 들고 있다. 그는 마음이 밭에 비유되며 말씀이 심겨진 씨로 비유되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가리키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마 13:1-9/마 13:18-23).
만일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받고 시련 가운데서 말씀으로부터 힘을 얻으려 한다면 가라지들을 뽑아내야만 한다! “넘치는 악“은 가라지, 곧 “무성하게 자라난 사악함“으로 번역될 수 있다! 마음의 밭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의 생활에서 죄를 짓고서도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통분히 여긴다면 그는 그것으로 인해서 말씀과 축복을 받을 수 없다.
22-25절에서 야고보는 비유를 바꾸어, 도(말씀)를 거울(유리)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거울이 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떠한지를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말씀을 살필 때에 그는 자신을 바라보게 되어, 마음을 살피고 죄를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말씀을 들여다보고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읽은 말씀에 순종해야만 한다.
23절에서 그는 거울을 무심결에 힐끗 쳐다보아 자신의 얼굴이 더럽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기 일을 계속하는 사람을 묘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 그들은 성경을 잠깐 훑어보고 그들의 삶에서 일어난 죄들을 살핀 후에도 그대로 성경을 덮고 자기의 일을 계속한다. 이러한 태도는 자기 기만이다. 실제로 그들은 스스로를 해치고 있는데도 자신이 영적으로 더 나아졌나고 생각한다.
25절은 우리가 말씀을 조심성없이 힐끗 들여다 볼 것이 아니라 주의깊게 주시하고 연구하며, 그것을 통하여 자신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음으로는 말씀이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에게 복이 될 것이다.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은 성경을 읽는 일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말씀을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영적 자유를 산출하기 때문이다(요 8:30-32).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속박이 아니라 놀라운 자유인 것이다!
22-25절은 말씀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신자의 사적인 생활을 묘사했고, 26-27절에서는 말씀을 실천하는 것으로 신자의 공적인 생활을 묘사한다. “경건하다“는 말은 “종교의 외적 실천“을 뜻한다. 성경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종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의 기적이요, 새로운 출생이며, 신성한 생활이다. “만일 자신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생활로써 그것을 입증하라“고 야고보는 말한다.
순전한 종교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절제(재갈물린 혀-3:2)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며, 정결한 생활 등이다. “돌아 본다“는 말은 필요에 처한 사람들을 희생적으로 돌본다는 뜻을 암시한다. 참된 종교는 형식이나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통제받는 혀, 희생적인 봉사, 그리고 정결한 생활의 문제인 것이다.
야고보는 본 장에서 여러 번 “온전한“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1장 1-12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을, 1장 13-20절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을, 1장 21-27절에서는 하나님의 온전한 율법을 본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역은 우리를 성숙케 하는 하나님의 사역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은 시험의 때에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의 선하심이며 그의 온전한 율법은 우리를 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붙들어 주는 말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