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악산은 옛날 경기 5악(송악, 감악, 심악, 북악, 관악)으로 유명한 산이다. 이 산은 상봉과 중봉(3태봉) 끝봉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란히 솟아있는데 봉우리마다 자그마한 내령이 뻗어있다. 이 산 아래 교하 산남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宋祀連이란 노총각이 있었다. 어느 날 거북바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래 내령 거북뫼(고양 구산리)에서 두 마리의 청룡과 황룡이 올라와 자기 가슴에 안기어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 날 밤 安塘 정승댁에 기고가 있어 일을 도와준 뒤 집으로 들어왔는데 비녀(연일정씨)가 제사음식을 가 지고 홀로 있는 자기방으로 들어오자 여종과 관계한 후 , 송익필 송한필 등을 낳았다" 라 적혀 있다.
그러나 『여지승람 』한성부에
"대은암大隱巖 바위 곁에 옥랑屋廊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작은 집)이 있는데,
바로 송구봉 익필이 태어난 곳이며, 낭옥은 지금도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송익필은 한양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송익필은 언제부터 구봉산 아래서 살았으며 안당 집안과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
이를 알아보기 위해 송익필의 「연보」를 검색해 보기로 하였다.
그의 어린시절은 비교적 유복하였으며 나이 7-8세 때 이미 글재주가 뛰어나
"산비탈 조촐한 띳집에 달빛이 어른거린다- 有山家芽屋 月參差之句-"는 글귀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동생 한필과 함께 초시初試에 합격하고 1558년 벼슬길에 나가고자 대과大科에 응시하지만 사관史官이해수 등이 상소를 올려 " 송익필의 부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니 그 상직賞職을 없애야 한다. 그 자식들 역시 얼손孼孫(서출)들이니 법을 어기고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고 상소하여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송익필을 왜 얼손이라라 했는가?.
원래 송익필의 할아버지 송린은 직장 直長(조선 때 관직 종7품관) 벼슬을 했으나 중종 때 좌의정이었던
安塘 집안 노비 출신 첩의 딸(서녀)과 결혼하였다. 그래서 송사련도 송익필도 숙명적으로 얼손이란
멍에를 대물림 받았다. 성리학과 예학을 국가이념으로 했던 조선조 사회에서 얼손은 출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했던 송사련은 1521년 마침내 '신사무옥' 일으킨다.
?는 중종시대 , 개혁정치를 표방했던 조광조 등이 기묘사화로 제거 당하고. 남곤 .심정 등 수구파가 권력을 잡자
조광조와 가깝다는 이유로 안당과 아들 안처겸 등을 파직 시킨다,
어느 날 안처겸이 남곤 등이 권력을 남용하고 있으니 이들 무리를 제거해야 국가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말을 했다. 이말을 엿들은 송사련이 안처겸의 모친상 조객록弔客錄과 발인할 때의 역군부役軍簿를 내밀며 이들이 무리를 이루어 반란을 꾀하려 한다고 고발했다. 그결과 안당·안처겸 등 많은 사림士林들이 처형당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사사롭게는 서고모부인 안당 일가를 무고한 송사련은 당상관으로 승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1566년 명종말엽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안당 가문의 상소로 송사련의 무고가 세상에 알려지고 노비로 환천되었으며, 세상 사람들의 비난이 쏟아지고 가솔들은 뿔뿔이 헤어져 숨어살게 되었다.
송익필이 파주 구봉산 아래 은거하게 된 것은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그의 호인 龜峯은 이 산 이름을 딴 것이다.
파주가 서울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 이이 .성혼. 정철 등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파주에 살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인연이 아니었을까. 설상가상으로 송익필은 동.서 분당의 당파싸움으로 파벌 정치가 극심하던 당시 정여립의 '기축옥사' 막후 세력으로 지목받아 미움을 받았으며 , 정철의 건저문제建儲問題 때는 희천으로 유배되기도 하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으로 이를 극복하여 학문적으로는 성리학과 예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 문학적으로는 당시 백광훈. 최경창과 더불어 8대 문장가로 뛰어난 시문을 남겼다.
특히 전기체 글 「銀娥傳」을 송익필이 썼다는걸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무렵 李珥가 구봉산으로 송익필을 찾아가 쓴 시 「龜峯草堂 風雨徹曉」가 있다.
잠 못드는 길손 빗소리에 깨니 /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문을 두드리네
밤새껏 쏟아진 비는 얼마나 내렸는지 / 몇자 쯤 구봉산은 낮아졌을까
이 시는 서얼차별을 하던 당시의 냉혹한 사회를 ,늦가을 찬비바람에 비유해서 표현한 글로
두 사람의 우의가 얼마나 돈독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송익필의 사람됨에 대해 이런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날 洪慶臣이 형 가신可臣 에게 투정 섞인 어투로 말했다.
“형님은 어찌 송익필 같은 사람들과 벗을 하십니까? .제가 송익필을 만나면 면전에서 모욕을 주겠습니다.”라고 하자, “결코 자네는 그렇게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얼마 후 송익필을 만난 홍경신은 자신도 모르게 섬돌 밑에 내려가 큰절을 하면서 말했다.
“제가 절을 한 것이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굽혀진 것입니다.”라고 겸손한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또 趙憲은 "늙도록 학문에 힘써 학문이 깊고 경經에 밝았으며, 행실이 방정하고 말이 정직하여 아버지의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성우계ㆍ이율곡 두 선생이 다 외우畏友로 대하였고, 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도 상대를 잘 일깨우고 분발시켜 느껴서 뜻을 세우게 하였다.”
또 申欽은 “천품天稟이 매우 높고 문장 또한 절묘했다.”
송익필이 죽은지 150 여년이 지난 후 신분이 회복었으며 충남 당진 원당리에 묘소가 있다.
요사이 kbs에서 방영되는 드라마 '징비록'에 송익필이 등장하고 있다.
첫댓글 이름 정도만 기억하는 송익필을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래에서 여덟번째 줄
<얼마 후 홍익필을 만나난-얼마 후 송익필을 만난> 의 오타입니다
KBS 역사드리마'징비록'한번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징비록 꼭 보십시오. 유익한 역사 드라마입니다.
송익필 하면 선조 이후 조선 역사의 흐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 들은 기억이 있는데
숨은 이야기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산남리 심학산 둘레길을 늘 갔지만 이처럼 역사가 있는 곳인줄 몰랐는에
다시금 음미하면서 가 보아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