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쯤 집을(수유리) 나섰다.
전철역까지 걸어 4호선을 타고 서울역에 이르니 8시가 다 되었다.
1호선으로 갈아타고 수원역을 지나 9시10여분에 병점역에 도착 한
다음, 후문으로 나와 수원 시내버스 34번을타니 10분만에 용주사
현판이 붙은 건물 앞에 내려 놓는다.
장마 기간중이라 태양이 빼꼼이 고개를 내밀다가 예고없이 소나기를
퍼 부울것 갇아 한손에 들려진 긴우산이 부담 스럽다.
3단접이식 우산이면 배낭옆에 꽂으면 간단한데 카메라에 비가
드리치는 것을 염려 하여 궁여지책으로 긴우산을 들게되다 보니
사진을 찍을때마다 옆에 내려 놓았다 다시 집어 들어야야 하니까
여간 귀찮은 것이아니다.
그건 그렇고 용주사에 왔으니 용주사에 대한 연혁을 살펴보기로 하겠
읍니다,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로 병자호란 때
소실된후 폐사 되었다가 조선시대 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제자
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읍니다
28세의 젊은나이에 부왕에의해 뒤주에 갇힌체 8일만에 숨을거둔 사도
제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
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듯고 이에 크게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 하기위해
경기도양주 배봉산에 있던 (지금의 서울 시립대학교)부친의 묘를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능원 (뒤에융릉으로승격) 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
화주로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로서 비명에 숨진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읍니다.
낙성식 날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 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로 불렀으며 그러한 면면들이 이어져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지금에 이르고 있읍니다.

용주사 안내 글 이나 가람 배치에는 일주문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위치만 일주문이고 건축 양식이나 내부 형식은 천왕문 이다.

천왕문의 내부, 오른쪽에 동방지국천왕과 남방중전 천왕이 봉안 되어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과 북쪽을지키는 다문천왕은 천왕문 내부 왼쪽에 봉안 되어 있다.

홍살문, 궁전, 관청, 묘따위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한 문인데 홍살문을 용주사에 세우게된것은 정조대왕께서 사도제자의 명복을 빌기위하여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사도제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며 용주사에서는 사도제자와 헌경왕후(헤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년에 여섯번의 재를 모셔 왔다고한다 1907년 을 끝으로 일제 강점기이후로 중단 되었는데 제246주기 제향을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 하였다

효행박물관, 홍살문이 있는 왼쪽에 새로지은 건물인데 전통과 문화가 있고 효행과 정진이 함께 어우러 지는 곳으로 특히 청소년들에게 잊혀저가는 효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박물관 이라 하겠다.

효행박물관 뜨락에있는 5층석탑,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전체높이 4.5m인데 우리나라 대개의 석탑이 가람의 입구나 법당앞에 위치 하는데 이 석탑은 용주사 가람의 앞쪽에 자리하고 있어 부근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 임을 알수 있읍니다,

삼문1, 천왕문을지나면 다른 사찰에서는 볼수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을 보게 되는데요,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문이 나 있어 삼문 이라고 합니다.

서쪽행랑에서 본 삼문, 삼문은 창건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차례의 개수를 거쳐 현재 15평 이고 좌우에 행랑은 총 40평에 달합니다.

삼문정문앞에 놓인 해태상, 문 앞에 화마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2마리가 있는데 용주사가 왕실의 원찰이라는 점을 감안할때 궁궐 양식을 활용한것으로 여겨 집니다.

삼문의 도리위에 걸린 용주사 편액, 죽농 안순환의 글씨로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글씨가 인상적입니다.

천보루, 삼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면 한눈에 대규모 누각이 정면에 나타난다 누각의 좌우로 7칸씩의 나타유실(동쪽)과 서쪽에 만수리실이 회랑에 연결 되어 있다, 회랑이란 건물과 건물사이에 지붕이 있는 터널형식의 통로이다.

삼문과 천보루사이에 있는 세존사리탑, 삼문과 천보루사이에 높이 4m의 세존사리탑이 있는데 1702년에 성정스님께서 부처님의 진신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안치 하였다고 합니다.

천보루 아래층에서 보는 대웅보전의 모습,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서 6섯개의 목조기둥아래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2층에서는 대웅보전에서 드리는 참배를 볼수있는 구도여서 왕실의 래왕이 잦은 사찰 건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천보루를 앞쪽에서 본 모습, 천보루를 앞쪽에서 보면 홍제루라는 편액이 붙어있어 한 건물에 앞 뒤로 2개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원래는천보루였고 후대에 홍제루라는별호가 추가 되었는데 이는 밖에서는 하늘이 보호하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는 뜻 이라고 합니다, 홍제루의 편액은 차우 김찬균의 글씨 입니다.

홍제루에서 대웅보전에서 거행되고있는 사시예불에 동참하고 있읍니다,
홍제루의 건물은 대웅전 예불에 참석할수없는 수행자들을 배려한 건축 양식으로 궁궐 출입이 잦았던 강남의봉은사, 삼각산에 있는 진관사에서도 같은 형식의 건축물이 있읍니다.

홍제루좌측 측면에 걸려있는 목어, 조선 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잉어모양의 목어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있읍니다, 목어는 불전사물의 하나로 현세에는 범종각을 크게 짖고 범종, 법고, 운판과 함께 봉안하는 추세에 있다 목어를 치는 까닭은 물에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 하기 위해서이며 눈을 뜨고있는 물고기처럼 부지런히 정진을 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용주사에는 범종각과 불음각이 있는데 목어를 홍제루에 봉안하고 있는데는 일기가 고르지 못할때
회랑이 있는 홍제루에서 밖으로 나가지않고 칠수있기 때문 인지도 모른다 확인은 못했지만 운판이홍제루와 회랑으로 연결된 만수리실에 보관 되어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한 추측을 하게된다

나유타실에서 본 대웅보전과종각, 그리고 천불전, 가람의 배치가 안정감이 있고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선조님들의 안목에 감탄하게 되고 이러한 건축물이 잘 보전되고 있다는사실이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대웅보전의 정면, 대웅보전은 1790년에 세워진 이후 여러차레 보수와 개축이 있었으나 창건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한다, 대웅보전의 편액은 22대 임금이신 정조임금님께서직접 쓴 글 이라고 합니다.

대웅보전의 내부, 대웅보전에 삼세불상은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입니다.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었으며 재질은 목재로서 높이 110cm이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입니다
삼존불 뒤로 보이는 후불탱화는 세로 440cm, 가로 350cm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진 것 입니다
김홍도의 주관아래 25명의 스님이 함께 그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기록이 아니고 타당성이
있는 추론일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대웅전 닫집 천장의 모습, 닫집이란 대웅보전이라는 불전속에 들어있는 또 하나의 불전 입니다
부처님은 한없이 존귀하고 성스러운 분이므로 감히 세속의 중생이 부처님 코 앞에 다가간다는 것은 용인되지 않았으므로 건물의 정 중앙에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가까이서 뵙고자 불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뒤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용주사 대웅보전의 닫집은 섬세한 솜씨로 조각 하였는데 천장에는 극락조가 날고 좌우에는 구름속에 동자의 비천모습이 정면을 향해 있으며 각 기둥에는 5섯마리의 용이 불단을 보호하고 있읍니다.
불단, 후불탱화가 각각 불국토의 세계를 표현 하는 것 이라면 닫집 또한 또하나의 불국토를 의미합니다.

가까이에서 본 삼존불 입니다,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아미타불, 세분모두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앉아 계시는데 아미타불은 전라도 지리산 파근사 통정봉현이, 동방약사여래는 강원도 간성 건봉사 통정 상식이, 석가여래는 전라도 정읍의 내장사 통정 게초가 각각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석가, 약사여래, 아미타부처님은 우리나라 불교사의 흐름에서 보면 민중의 신앙으로서 꾸준히 신앙 되어왔으며 약사신앙은 중생의 질병 구제와 장수를 기원하고, 아미타신앙은 염불 만으로도 서방 극락 왕생이가능하다고 하는 이행도로서 크게신앙 되었읍니다
용주사에 대한 자료가 많다보니 2편으로 나누어 쓰고, 여기 까지를 1편으로 마침 합니다.
selag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