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문학관] 푸른 골짝을 은하가 이어 흘러, 古山최학규
푸른 골짝을 은하가 이어 흘러
古山최학규(崔鶴奎.1910∼1975.9.23.)
성산공원으로 들어가는 비탈길을 숨차게 올라가니, 입구에 김제 향토 시인 최학규 선생의 ‘金山寺’ 시비가 반긴다. 김제시 교동에 근린공원으로 조성된 성산공원은 시민들의 휴식 및 운동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시비는 1981년 11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김제지부 주관으로 건립됐다. 단단하고 우직하게 서 있다. 아쉬운 점은 짙은 색의 화강암에 음각으로 새겨져서 바짝 다가서야 내용을 읽을 수 있다.
위쪽으로 단풍나무 시과가 날아와 시든 채 붙어있어, 손바닥으로 쓸어내렸지만 잘 떨어지지 않았다. 뒷면에 햇빛이 들어 환하길래 뒷모습도 한 장 찍었다. 뒷면에는 이 고장 청하면에서 출생하셨고 오직 향토의 정서로 시심을 가꾸며 ‘길’ ‘빛과 사랑의 시’ ‘모과(木果)’ ‘이색풍토’ ‘우러러 사는 풍토’ ‘三月의 모음’ 시집을 남겼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학처럼 살다 가신 시혼을 기려 뜻을 모아 비를 세웠다’ 고 새겨져 있다. 50 여분의 발기인 성함도 보인다
<김제 성산공원에 있는 시비 앞, 뒷면>
최학규(崔鶴奎 1910- 1976)시인은 호가 古山이다. 생전에 직접 뵌 적은 없으나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은 선이 굵어 대범하고 꼿꼿한 성정이 느껴진다. 전북 김제시 청하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1927년 정읍농업학교 재학시절 조선일보 학생문예에 시가 당선된 바 있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신병 때문에 곧 귀국하였다. 그 후 도내 중학교에서 15년 남짓 교직 생활을 하였으며, 시인의 나이 54세 되던 해인 1963년에는 『현대문학』에 시 「나의 문」을 발표했고, 1964년 「꽃」이 추천되었다.
시인은 50대 중반에 등단한 늦깎이 시인이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고 절실했다. 당시 익산에는 “남풍”이라는 시 동인회가 있었는데, 시인은 이 동인회에서 좌장을 맡기도 했다. 대부분 현직교사인 그들은 모임이 있는 날이면 한 사람도 빠지지도 않고 모두 나와 활발하게 시와 문학을 논의했다고 한다. 특히 그들은 당시 아름다운 토속어가 많이 죽어버린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자고 다짐하곤 했다.
<우러러사는풍토> 시집에서 찾은 젊은 시절 사진
시인은 1962년 3월 한국문인협회 전북지회 이사로 선출되어 전북 문단 활성화에 이바지하였고, 1965년 3월에는 김제 최초의 동인지 『향토문학』을 발간하기도 했다. 1954년에는 처녀시집, 『길』을 출간하였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66년에는 제2 시집 『빛과 사랑의 시』을 출간했다. 홍석영은 발문에서 그의 시를 “세정(世情)에 조련찮은 시인의 생리로 하여 산고를 겪으면서 인간의 절실한 내적 필연성에서 움트게 된 생명의 소박한 발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시인은 1970년 11월 한국문협 김제지부를 창립하면서 초대지부장으로 선임되어 김제 문단 활성화와 김제 문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70년에는 시집 『모과』를 냈고, 1971년에는 시집 『우러러 사는 풍토』와 채규판, 강상기 시인과 함께 3인 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하였고, 1975년에는 여섯 번째 시집 『3월의 모음(母音)』을 출간했다.
시인의 시적 태도는 첫 시집에서 여섯 번째 시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었다. 특히 그의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보듯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속에서도 변함없이 자신만의 삶을 가꾸려고 한 것 같다.
시인과 함께 공동시집 『이색풍토』를 출간한 채규판(원광대 명예교수)은 「고산 최학규 선생을 생각하며」 (전북문단 통권 제7호, 1990)에서 그의 시를 평가한 바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형식에도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시 쓰는 데 몰입하였고 항상 자연스러운 이야기로 진행하였다. 시인의 시에는 어떤 게으름과 오만함도 없었으며, 한순간도 심미적 자아 성찰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시인은 1971년 11월에 제5집을 『우러러 사는 풍토』를 낸 뒤, 3년간 쓴 작품 중에서 새로 66편을 골라 시집 『3월의 母音』을 내면서 그 서문에서 “시의 바탕은 따뜻하고 싶다. 원래 고독한 인생은 더욱 따뜻한 사랑을 추구하는 시심에서 이리라. 시대가 달라졌다. 시대를 따라가기도 바쁘다. 이런 의미에서도 젊고 싶다. 세월은 가는데 낡은 것은 싫어진다. 이런 의미에서도 시는 새롭고 싶다.” 라며 한순간도 ‘새로움’을 궁구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한 ‘ 이런 태도는 시를 쓰는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시인은 원광대 채규판 교수와 아주 각별하였던 것 같다. 그와 만나면 밤을 새워 시와 문학을 논했다고 전해진다. 1975년 추석을 앞두고 시인은 그와 만나기로 했다. 시인은 그를 만날 기쁨에 아침부터 서둘러 농약을 하다가 그만 농약 중독사고를 당했다. 결국, 시인은 유명을 달리했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채 교수는 매우 놀라면서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시인과 공동시집을 낼 만큼 가깝게 어울렸던 채 교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한없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채 교수는 시인을 “시를 천직(天職)이라고 뼈아프게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 시인”이라고 했다. 시인은 그렇게 떠났지만, 그를 따르던 동료와 후생들은 시인의 삶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1년 11월, 김제시 교동 성산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웠다.
여기까지는 그동안 발굴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스토리텔링은 작고하신 작가들의 작품 세계와 삶의 궤적을 재조명하고, 축적된 역량을 확산하여, 지역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하는데 의의가 있다 하겠다. 필자는 문학관에 보관되어있는 것과, 기존에 조사된 자료를 찾아보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큰 배움이었다. 거기에 한 줄이라도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 후대에 큰 복이라고 여겨져 더욱 관심을 갖고 찾아보게 되었다.
현재 비어있는 최학규시인 생가(대청1길 38)
무엇보다도 생가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포기하지 않고 장산리 일대를 수소문한 결과 제상마을에 아직도 생가가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마을에서 쭉 살아오신 이승0(89세)님은 생전에 시인과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나포로 이사 간 후에도 고향을 자주 찾아오셨고 아버지와도 친하게 지내셔서 우리집에도 자주 들리셨는데, 주역의 한문을 잘 풀어서 가르쳐주셔서 큰 깨우침이 되었다’는 말씀도 해주셨다. 인상이 어떠하셨는지 여쭈었더니 키는 중키이고 명석하여 한문에 능통하고 인상이 순하셨다고 하셨다. 일본 유학에서 곧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신병은 결핵이었는데 한의사인 작은아버지의 치료로 극복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부친이신 최병제님은 한학자로 청하초등학교를 설립하신 초대 교장선생님이셨다. 전국에서 시인들이 자주 찾아와 함께 한시를 짓고 읊었다고 같은 마을 사람들이 전했다.
전라북도문학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자료 / 최근 발견된 자료(인터넷 장서각문고)
또한 자손들이 번성하여 가까운 전주에서 살고 있는데, 돌아가신 큰아들(최종순)의 큰아들인 종손이 전주 한마음병원 최경수 원장(전북대 의대 72학번)이라는 것을 알게 돼, 찾아가서 만났다. 미발행 친필시집, 그리고 여러 유품이 인터넷에 판매 목적으로 나와 있는 안타까움을 전하고, 찾아서 제대로 보존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보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꿈을 꾸고 싶다. 생가 복원과 아울러 문화콘텐츠 활용 방안도 활발히 연구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