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선생은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를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1924년에 집필된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씌어진 본격적인 근대 역사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써, 이 시기에 그가 이미 서구의 근대 역사이론과 사회과학이론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래(舊來)의 한국사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하여 한국사의 자주적 체계화를 새롭게 시도하고 있는 선생의 포부와 구상이 잘 드러난 역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선생은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삼는 주체성의 문제를 한국사 체계나 사관(史觀) 정립(定立)에 있어 기본전체로 삼고,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라고 정의하였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鬪爭) 사관이라는 격렬한 문제의식은 이 시기 그의 사회관이나 민족운동노선과 일정하게 대응되는 것으로서, 조선사를 서술할 때 조선민족을 아(我)의 단위로 설정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한국사의 범위와 그 서술방법을 역사론적으로 밝혀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선민족 중심의 역사인식이 [낭객의 신년만필]이란 글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표현되었는데 이것은 외래문화의 무분별한 수입에 대한 경고로서 오늘날에도 교훈적이다.
우리 조선은(…)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해 통곡하려 한다.
선생은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 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일경에 피체되어 10년 형을 받고 여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