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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우리의 자랑 황룡사9층목탑
이장희 추천 0 조회 171 14.04.08 18: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註 이 글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여러 웹문서들과 문화재청에서 미륵사지를 발굴.조사한 김홍식님의 글을 토대로 작성하였으며 이 땅에서 이름없이 묵묵히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며 그 맥을 이어가고 있는 무명 목수님들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1. 글 머리에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인 서기 645년에 신라의 수도, 서라벌 남쪽 벌판에 높이 80m가 넘는 거대한 목조 건물이 탄생했다. 그것은 당시 삼국 중 가장 국력이 약했던 것으로 보여지는 신라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주변의 9개국을 견제하기위해 즉,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진, 9층은 예맥을 진압하기위한 호국의 상징으로 당나라에 유학했던 자장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건립되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황룡사 호국룡(護國龍)은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 목탑이 탄생된 지 20여 년 후, 삼국 중 국력이 제일 약하다는 신라는 외세의 힘을 빌어 삼국을 통일하였고(고구려 멸망 668년)  이후 서기 935년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항복문서를 왕건에게 바치기까지 270년, 고려가 건국되고 400여 년, 도합 700년 동안을 이 목탑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이 명멸하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서기 1238년 몽고군의 말발굽이 한반도를 짓밟고 들개기름에 젖은 그들의 더러운 손으로 이 목탑이 화마(火魔)속에 영원히 사라지던 그 순간까지.


2. 황룡사목탑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

가. 익산 미륵사지의 목탑과 동.서석탑

미륵사지석탑은 석조로 된 동.서탑과 목조인 중앙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석탑의 창건 년대는 백제 무왕 때이다. 삼국유사에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절의 건축을 도왔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서 백제 무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600년에서 641년이고 진평왕의 재위 기간은 서기 579년부터 631년이므로 두 사람이 겹치는 기간은 서기 600년부터 631년까지이다.

또한 고문서에 백제 무왕이 한때 이곳 익산의 왕궁리로 천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이 탑은 무왕대인 7세기 초 즉, 미륵사의 규모상 많은 재정과 엄청난 인원이 동원되어야 축조가 가능할 것으로 보아 무왕 정권이 굳어진 610경부터 630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현재 6층의 일부까지 남아있는 서탑을 토대로 동탑이 현지에 복원되어있는데 그 사이에 목탑지가 있고 이 목탑은 축조 년대가 석탑인 동.서탑보다도 훨씬 이전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 일본의 호류사5층목탑



일본에는 우리 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백제 장인들의 솜씨가 살아 숨쉬고 있는 문화재가 많이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세기 이후 백제의 장인인 사공, 맥반박사, 와박사, 화공 등이 일본으로 상당수 건너갔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면 670년경에 세워진 호류사의 목탑이 백제 장인의 혼이 담긴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호류사 5층 목탑은 다른 일본의 목탑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즉, 일본의 다른 목탑, 이를 테면, 흥복사5층탑이나 동사5층탑 등은 자로 잰 듯 아래 위 각 층의 처마의 길이가 일정한 크기를 취하고 있는데, 이렇듯 체감비가 없는 것이 바로 전형적인 일본의 탑이다. 그러나 호류사5층탑은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체감비가 있는데, 이것은 바로 경주 남산 마애 9층탑의 체감비와 비슷하다. 이러한 사실은 이 호류사목탑의 양식이 일본보다는 백제나 신라의 그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호류사 5층탑은 초기 불탑의 형태로 내부가 폐쇄되어 있어 사리를 모시는 역할에 충실한 구조이다. 밖에서는 5층으로 보이지만 안에서는 맨 상층까지 뚫려 있는 구조이다. 이에 반하여 중국의 응현 목탑은 층마다 계단이 연결되어 있고, 각 층마다 여러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일본 호류사의 대표적인 유물로는 백제 목탑의 영향을 받은 이 5층목탑, 백제 공예가가 만든 비단벌레 불상궤, 지금은 화재로 훼손되었지만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의 벽화, 그리고 백제의 작품인 석가삼존상과 백제관음상, 구세관음상 등이 있다.


다. 중국의 응현목탑


중국 서북지역에 위치한 산서성 응현. 바로 이곳에는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는 높은 탑이 하나 서있다. 목탑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응현 목탑이다. 정식 명칭은 불궁사석가탑(佛宮寺釋迦塔)이다. 서기 1056년 요나라때 건축된 이 응현목탑은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이 손수 쌓아올린 탑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거대함에 압도된다. 목탑은 무엇보다 규모가 세계 최대급이다. 안테나까지 포함한 높이가 67.31m, 1 층 지름이 30.27m이며, 총무게가 자그마치 743만 377t이나 된다고 한다. 더욱 기이 한 점은 모든 건축 부재가 목재이며, 쇠못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구조면에서 겉모양은 5층이나, 각 층 사이에는 또 다른 층, 즉 암층이라는 것이 하나씩 숨어있다. 그래서 이런 구조를 중국학계에서는 명오암구옥 (明五暗九屋)이라고 한다. 즉, 겉에서 보면 5층이지만, 1층과 2층사이, 2층과 3층사이, 3층과 4층사이 그리고 4층과 5층 사이에 암층이 있어 안에서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모두 합하여 9층의 목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탑에서 가장 경이로운 대목은 거의 1천년 전 모습을 거의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응현에 서경(西京)이라는 작은 도읍을 설치한 요(遼) 왕조는 청수(靑守) 2년(서기 1056)에 이 목탑을 건립했다. 당시 이곳 사찰은 이름이 보궁선사(寶宮禪寺)였다. 이후 금(金) 원(元) 명(明) 청(淸)왕조를 거치면서 증.개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초기 때의 원형을 한 번도 잃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응현목탑은 황룡사 목탑보다 400년 이후에 지어진 목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룡사9층탑은 바로 이 응현 목탑보다 무려13m나 더 높다. 황룡사 목탑이 몽고군에 의해 소실되지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다면 분명코 세계 최고 높이의 목탑이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라. 경주 남산의 부처바위에 새겨진 목탑

경주 남산의 한 골짜기 탑곡에는 높이가 9m, 둘레가 30m에 이르는 부처바위가 있다. 이곳에는 명랑이라는 신라의 고승이 삼국 통일 후 당나라를 몰아내기 위해 불상과 황룡사 9층탑을 이 바위에 새겨 놓고 기도를 올렸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바위에는 탑이 새겨져 있는데, 학자들은 이 마애 9층탑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황룡사 9층탑을 본뜬 것이거나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 당시 목탑의 양식을 본 따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과연, 마애 9층탑의 모습은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까? 경주 사람들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믿고 있는 부처바위에 새겨져 있는 탑을 보면 황룡사 목탑과 마찬가지로 9층인 것을 알 수 있다. 상륜부가 단순하게 처리되는 석탑과 달리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이 목탑임을 보여 주고 있고,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들이 목탑임을 명확하게 해준다.

물론 확정적인 자료가 없어 이 마애 9층탑이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라고 확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가장 가까운 모습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마애탑은 그 형태가 부조라는 점, 그리고 바위에 새겨 넣어 단순화되어 있는 표현으로 인하여 세밀한 묘사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황룡사 목탑의 완전한 모습을 추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마. 개성 불일사의 금동소탑

황룡사 목탑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은 이 마애 9층탑밖에 없는 것일까? 얼마전 북한의 문화재 도록인 "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국내 유일의 목탑 양식을 한 9층 금동소탑이 발견되었다. 고려 초기에 세워진 개성 불일사 5층 석탑 2층 내부에서 발견된 이 금동소탑은 높이 37cm, 기단 부분의 길이 13.8cm로 옥신과 옥개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 4면에 걸쳐 8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탑 1층에는 3면에 걸쳐 8개의 문을 달았으며 각 층마다 창문을 낸 전형적인 목탑 형식의 금동탑이었다.

이 9층 금동탑은 황룡사와 같은 시기에 백제 사람에 의해 조성된 호류사 목탑처럼 처마가 밋밋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신라 목탑의 양식을 충분히 계승하고 있는 고려초기의 금동소탑이다. 또한 금동탑이 출토된 불일사는 고려 4대왕인 광종이 어머니 유씨(신명순성왕태후)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하는데, 광종은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부인인 낙랑공주와 형제간이다.

어머니의 원당을 세우는 과정에 여동생의 남편인 경순왕도 일정부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 과정에서 경순왕의 발원으로 금동탑이 조성되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경순왕은 경주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고 따라서 황룡사 9층 목탑 모습의 영향을 받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황룡사는 위의 금동소탑과 마애탑을 기본적인 모습으로 상상하는데서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황룡사 목탑의 규모

황룡사가 소실된  이후 700여 년간을 폐허가 된 채 논밭과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을 1964년에 마을을 철거하고 황룡사지 발굴을 시작해 많은 유물을 발굴하게 되는데 그 중에서 사리구를 간직했음직한 심초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심초석 위에 놓인 장방형의 돌을 들어올리고 심초석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사리공 안에 있어야 할 사리구는 도굴이 되어 텅 비어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발굴당시의 조사위원이었던 황수영 박사는 낯선 사람으로부터 진귀한 물건을 감정해 달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도굴된 황룡사의 바로 그 사리구였다.

황수영 박사가 받은 사리구 중에는 가장 작은 사리 그릇과 네모난 청동 소함, 사면으로 이루어진 사리 내함이 있었다. 사리 내함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이 심했지만 무엇인가 탑의 비밀을 밝혀 줄 만한 기록들이 빼곡히 씌여져 있었는데 내함의 삼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9층탑의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가 적혀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찰주본기에 황룡사9층탑의 높이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9층탑은 철반 이상의 높이가 7보(42자), 그 이하가 30보3자(183자)이다. 총 225자다."
이것을 지금의 수치로 환산하면 철반 이상은 높이가 14.96m이고, 철반 이하가 65.20m. 그러니까 탑의 총 높이는 80.18m가 된다. 지금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해당되는 거대한 높이이다. 


사리구를 통해 밝혀진 탑의 높이 외에도 황룡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은 또 있다.

1976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면서 황룡사 터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발굴품이 금당터 기와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수 십 개로 조각난 상태로 버려졌던 치미가 바로 그것이었다. 발굴 위원들은 조각난 치미를 5년에 걸쳐 정성스레 이어 붙여 치미를 복원시켰는데 그 크기가 1m 82cm였다(국립 경주박물관)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치미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것이다. 치미는 지붕 위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던 기와인데, 복원된 치미는 황룡사 금당에 올려져 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치미의 크기와 건물은 비례하기 하기 때문에 이것으로 건물의 규모를 가늠 할 수 있는 것이다.

황룡사의 규모는 종(鍾)의 크기로도 유추할 수 있는데 지금도 종루터가 남아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고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황룡사의 동종은 49만7천근의 구리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이 크기는 현존하는(국립 경주박물관) 우리 나라 최대 크기인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이른다.

황룡사 경내의 배치는, 양옆으로 종루와 경루가 있었고, 탑 뒤로 금당이 셋이 배치되어 있었다. 금당 뒤로는 강당이 있고, 회랑이 둘러 처져 중문과 이어졌으며, 다시 남문과 담장이 절과 속세를 구분하는 경계 구실을 했다. 그리고 그 절 한 가운데 9층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룡사의 경내 넓이는 8800평이므로 불국사의 8배에 해당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황룡사가 소실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규모 면으로나 내용 면에 있어서 가히 세계적인 대 사찰이었을 것이다.

4. 황룡사 목탑의 외부 모습

황룡사 목탑의 외부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가까이에서 본 황룡사 목탑은 일단 그 높이에서 사람들을 압도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아파트 높이로 30층이 넘는 거대한 목탑의 위용은 당시에는 가히 경이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의 한반도에서는 백제의 미륵사 목탑을 비롯한 법주사의 팔상전 등, 많은 목탑들이 이미 건립되어 있었고 황룡사의 목탑이 백제의 장인인 아비지의 손을 빌어서 건립된 것을 볼 때 규모 면에서 미륵사목탑 이상의 규모였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이 목탑은 서라벌은 물론 신라 전체의 landmark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고, 또한 이 목탑에서는 수도인 서라벌은 물론 멀리 근동에까지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層層梯繞欲飛空                                                                            
萬水千山一望通                                                                               
俯視東都何限戶                                                                               
蜂穴果蟻穴轉溟                                                                              
이 글은 고려시대 문장가 김극기가 황룡사 9층 목탑에 올라서 느낀 감상을 쓴 시이다.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강과 일천산이 한눈에 트이네
굽어보니 동도에 수없이 많은 집들
벌집과 개미집처럼 아득히 보이네


또한, 고려 후기의 승려 혜심이 황룡사 목탑에 올라서 쓴 등황룡탑(登皇龍塔)을 보면
一層看了一層看
步步登高望漸寬
地面坦然平似削
殘民破戶平堪觀


한층 다보고 또 한층 보면서
걸음걸음 올라 점점 넓게 바라본다.
지면은 깍은 듯 평평한데
쇠잔한 백성의 무너진 집을 차마 볼 수 없네.


고려 무신정변의 한 주역으로 나중에 전제적 정권을 가지게 되는 고려 상장군 이의민은 그 부모의 태몽에서 황룡사 목탑에 오르는 꿈을 꾸고 태어났다고 하였을 정도로, 그 당시 경주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고 영검한 탑으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처마는 끝부분이 높게 올라가지 않는 형태였을 것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건물은 처마의 끝부분이 높게 올라가지 않고 밋밋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일본의 고대 건물의 특징과 흡사하다. 또한 각 층의 처마 지붕은 일정한 체감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을 것인데, 이것은 마애 9층탑이나, 불일사 금동소탑에서 보는 바와 같았을 것이다.

우리나라 목탑의 처마는 일정한 체감비를 가지고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륵사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인데, 이에 반해 전형적인 일본의 목탑은 아래층과 위층의 처마 지붕의 길이가 같아 체감비가 없어 불균형하게 보이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각 층마다 처마 끝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을 것이고, 창문이 매 층마다 있어 밖을 바라보기 위해 여닫이가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맨 위층에는 14미터가 넘는 거대한 철주가 박혀 있었고, 이 철주의 모습은 마애9층탑과 불일사 금동소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매우 아름다운 장식으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 석탑엔 주로 철주의 모습을 한 상륜을 남기고 있는 예가 많다.

남원 실상사삼층석탑 상륜은 거의 완벽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외적의 침입이 잦아 탑의 상륜부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 나라의 탑들은 어느 탑에나 일정한 모습으로 설치되었었는지 아니면 각기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훼손이 덜한 일본 탑들의 철주 상륜 모습은 거의가 비슷하다. 대체로 호류사5층목탑 철주 상륜의 모습을 닮은 예가 많은데, 따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황룡사 목탑의 철주 상륜도 호류사 상륜과 비슷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5. 황룡사목탑의 책임 도편수 아비지

아비지는 생몰년대를 알 수 없는 백제의 장인이다. 아비지(阿非知) 이름은 아비(阿非)이며 지(知)는 이름 뒤에 붙은 미칭(美稱)으로 신라의 이름표기법에 의한 것이다. 자장(慈藏)이 중국 당나라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그의 건의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은 황룡사에 목조구층탑을 건립하기로 하여 서기 643년(선덕여왕 12), 백제에 건탑(建塔)기술자를 요청하였는데 아비지가 발탁되었다. 황룡사구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에 의하면 이찬(伊飡) 용춘(龍春)이 주관한 이 탑은 645년에 건립되었으며, 아비지가 소장(小匠) 200여명을 거느리고 1년 여의 작업 끝에 탑이 완공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진은 익산 미륵사지의 추정복원입면도와 비교사진(1989)


이 시기의 백제 땅 익산에는 이미 미륵사에 목탑을 비롯한 좌우의 석탑이 완공되어 있었고(서기 610년에서 630년 사이) 목탑의 건설을 위해 신라라는 이웃 국가의 요청으로 발탁될 정도라면 백제의 최고 장인이 선발되어 파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아비지 또한 동시대의 인물임으로 그가 백제 왕궁의 대공사였던 미륵사목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고 200여 명의 백제 장인이 참여한 것으로 보아 미륵사목탑과 황룡사목탑의 기술적 계보와 구조 또한 매우 연관성이 짙을 것이란 짐작은 쉽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6. 황룡사목탑의 복원 가능성 여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황룡사목탑과 미륵사목탑은 그 계보를 같이 할 것이란 추정이 가능하였다. 동 시대에 건립된 이 두 목탑은 유사성이 매우 있을 것이고 미륵사의 석탑이 목탑의 기법을 좇아서 목조에 사용되는 각종의 부재가 많이 쓰여진 것으로 보아 먼저 건립된 미륵사목탑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현재 일본에 있는 호류사의 목탑은 여러가지 정황들로 보아 백제의 장인들이 건립한 것이라 한다. 다만 황룡사목탑이 계단을 따라 맨 위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맨 위층까지 뚫려있는 통층 구조를 하고있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백제의 기법을 따랐음을 알 수가 있다.

중국의 응현목탑이 구조적으로 겉모양은 5층이나 각 층 사이에는 또 다른 층, 즉 암층이라는 것이 하나씩 숨어있어서 명오암구옥 (明五暗九屋)이라는 사실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만약에 우리의 황룡사목탑이 이런 암층이 존재하였다면 명구암십칠옥(明九暗十七屋)이 되어 내부는 17층이 되는 것이다. 한옥의 특징이 지붕의 하단과 상단의 길이가 크다는 것인데 이 공간을 활용하여 구조적으로 강한 내부의 암층을 모색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면 응현목탑과 같은 내부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90년대에 지어진 충북 진천의 보탑사에 재현된 3층목탑은 내부에 암층을 두어 공간을 활용하고 구조걱으로도 강한 목골조를 유지하기 위해 지어졌다고 하는데 그 높이가 상륜부를 제외한 순수한 탑신(목구조)이 33m에 달해 9층까지 예상한다면 100m 가까이 되어 황룡사목탑의 높이 즉, 상륜부(철반)의 높이 14.96m를 뺀 순수 목구조의 높이 65m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이것을 무게하중을 지탱해 주는 기둥 및 각종 수직부재들의 길이를 조절하여 각 층마다 4m 정도씩 낮춘다면 각 층에서 사용되어진 많은 수직부재의 무게를 줄일 수 있을 것이고 부재의 길이가 짧아진 만큼 보다 더 무거운 하중을 받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현재 우리가 동원 가능한 여러 가지 사료 및 기타 정황들을 고려해서 노력한다면 우리의 황룡사목탑은 있었던 그대로를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기 알려진 대로의 재현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 땅위에 다시 탄생되어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

7. 맺는 말

황룡사목탑의 복원 가능성 여부에 관해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역설적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사료가 거의 없어 추정이 불가능한 다른 문화유산에 비해 훨씬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추상적이긴 하지만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 있고 주변에 추정할 수 있는 사료들이 많이 있음이 그것이다.

다만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비슷할지언정 80m가 넘는 거대한 목구조물을 최첨단의 과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이 땅에 사는 현대인들이 세울 수 있느냐의 여부가 제일 큰 관건이 아닐까 싶다. 세계 최고의 목구조물을 보유했던 우리가 지금도 목조건축에 있어서는 크나 큰 자부심을 갖고있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과거의 조상들이 여기 저기에 세웠던 목탑 하나를 두고 가타부타하는 것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요 수치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국경을 넘나들며 장인정신을 발휘했던 조상님들과는 달리 작은 기술 하나를 보듬고 그것이 마치 자기 생명인 양 쉬쉬하다가 그 사람의 생명과 함께 그 기술도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하는 저급하고도 슬픈 장인정신, 기능인들을 냉대하고 경시하는 이 시대의 많은 암적인 요소들, 더우기 公敎育의 場에서 우리의 전통건축이 무시되어 아예 등장도 해보지 못한 서구 지향성 교육제도와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문화재와 관련한 각종의 시험제도 등이 1400년 전에 이 땅위에 우뚝 서서 그 위용을 자랑했던 우리 문화유산의 재현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 글은 필자가 운용하는 인터넷 카페 http://cafe.daum.net/trajob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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