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두부 이야기
설날 탕국을 끓이다가 아무렇지 않게 두부를 자르고 있는 일이 참 신기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젠 두부가 내 상처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그렇게 나의 상처까지도 보듬어 주는 약입니다.
이렇게 글로는 한 번도 그 이야기를 쓸 엄두가 나지 않던 두부이야기를 쓰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주택 200만호 건설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는 그때 서울 을지로에서 제일양회라는 시멘트 대리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친구에게 사기를 당해 어렵게 되어도 시멘트 회사에서 그의 성실성을 인정하고
회사 간부들이 출자를 해 다시 서울 대리점을 내어 주었어요.
그렇게 열심히 한 덕분으로 세 시멘트 회사의 대리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지금도 자랑질 하는 국내 최고의 판매실적을 낼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사업이란 게 늘 불안불안이어서 저는 강님 개나리 아파트상가에서 방배동 집으로 자리를 옮겨 논술 학원을 하고 있었어요
아이들이 많아서 점심을 우유 한 잔과 빵 한 조각으로 때우면서 초등학교 학생부터 고3, 재수생까지의 논술을 밤 12시 까지 가르치고 있을 때였어요.
시멘트 공장을 짓지도 않고 주택 200만호 계획부터 실천하기 시작하니 당연히 시멘트 파동이 났지요.
중국에서 시멘트가 들어오고 바다 모래로 시멘트를 만들어 문제가 되기 시작했지요.
회사에서는 대리점 별로 몇 포씩 배당을 주기 시작했어요.
회사에서도 대리점을 통해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데 고위층에서 청탁으로 들어오는 시멘트 물량은 대리점에 이미 배당한 것처럼 해서 주었어요.
그 배당만큼은 세금계산서가 없으니 대리점에서 알아서 만들어야 했지요.
대리점에서는 정부 고시가격으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것이 법이었지요.
그러나 가격이란 게 수요와 공급에 따라 달라지는 게 시장법아니던가요?
우직한 남편은 절대로 법을 어기거나 다른 데로 물건을 빼어 돌려 비싸게 팔지 않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인정은 많은 사람이라 물건 구하기 어렵다고 친구가, 동창이, 성당에서, 심지어는 지리산 골짜기에 스님이 변소를 짓는다고, 시멘트를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어요.
조금씩이지만 어려울 때 도와야 하는 거라고 그분들에게도 보내드렸지요.
물론 그분들도 세금계산서를 만들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단골 시멘트 소매점으로 세금 자료를 나누어 끊었습니다.
그건 엄연히 불법이지만 그 전에도 그렇게 해 왔던 관습이었지요.
너무나 심한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서 정부에서는 시멘트 대리점 두 곳을 잡아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강력반이 동원되고 가장 판매실적이 많은 두 곳이 지목되었어요.
물론 남편의 제일양회와 함께요.
저는 장부를 가져간 경찰에게 사정을 하자고 했어요.
좀 미안하지만 다른 대리점도 많으니 인간적으로 부탁해서 장부를 다시 돌려받자고 말했지요. 남편은 자기가 잘못한 게 없으니 괜찮을 거라고 큰소리를 쳤어요.
비싸게 받지는 않았으니 그의 말은 당연했지만 털어 먼지 안 나는 곳이 어디 있던가요?
세금계산서를 다른 사람 앞으로 끊은 것은 ‘사문서 위조’라는 법으로 다스려졌어요.
시국의 안정을 위해 만들어진 조처에 대해선 어떤 힘을 들이대어도, 아무리 유명한 변호사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텔레비전에, 신문에 참으로 부끄러운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기사는 미리 시나리오를 만들어 둔 것에 이름만 끼우는 형식이었지요.
빨리 끝을 내기 위해선 무조건 예, 예 잘못했습니다로, 토를 달지 말라고 검찰청에 사무관으로 있는 대자가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척들도 우리가 무슨 시멘트 대리점으로 축재나 한 벌레처럼 보는 것이었어요.
선생님으로 존경하던 제자들도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저는 그래서 지금도 절대로 신문기사를 다 믿지 않습니다.
숨어있는 트릭이 얼마나 많을 지부터 먼저 생각합니다.
양심적인 기자 분들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요.
남편은 참으로 이름조차 말하기 싫은 그 곳에서 조사를 받아가며 40일을 견뎠습니다.
저는 그의 사면을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어요.
우선 탄원서를 만들기 위해 성당신부님을 찾아갔고 그의 봉사실적을 서류로 만들었고
그리고 교우들의 연판장을 얻어야했습니다.
모르던 사람들도 그 일을 제가 스스로 알리는 일이 더 못 견디게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세금계산서를 끊은 소매점 사람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평소에 너무 흔하게 하던 일이었는데 합의서라는 걸 받아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단골로 굽신거리며 시멘트를 얻으려고 애쓰던 사람들이 아주 고자세로 도장하나 찍는 일에 인색했습니다.
더운 여름, 저는 애가 닳아 죽을 지경으로 수십 군데의 소매점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남편의 법적 처리를 원치 않는다는 합의서를 받아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K 신부님은 유신시대 학생들을 숨겨준 죄목으로 구치소에 가셨던 경험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내가 수도자이지만 그곳은 참기 힘들었어. 하루에 수십 번을 벽을 치고 나가고 싶었거든. 아무리 어려워도 매일 면회를 가야해. 면회를 가고 오는 시간이 하루에 그가 쉬는 시간이야.
그도 나처럼 아무 죄 없이 들어갔으니 얼마나 미칠 지경이겠어.
아마 밖에서 안또니아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지도 몰라. 그러니 아이들 가르치는 걸 포기 하고서라도 매일 일과처럼 면회를 가야해.“
그 말씀은 제게 정말 치명타였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이들의 시험기간이 걸리거나 아니면 그 시간에 아이들이 다음날로 수업을 미루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그곳을 들락거렸습니다.
큰 아이가 대학 3학년, 그 아이도 너무나 충격을 받아 그 학기의 성적 한 학점 때문에 국비 장학생 심사에 탈락되었었습니다.
아이도 저와 함께 그 혐오스러운 곳을 거의 매일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그 당시 본당 신부님이시던 지금의 접니다 님도 정부 고위 인사를 만나 남편의 사면에 대한 부탁을 했습니다.
그도 이 사건 만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더랍니다.
남편은 그 안 소년범죄자들의 방에서 아이들을 교화하는 사람으로 발탁되어 좀 편히 지냈다고 합니다. 교사경력으로 아마 검찰청에 다니는 대자 덕분이었겠지요.
그런 말이든 저런 말이든 그곳에 있었던 일은 제게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날 것 같고 먹는 게 소화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거든요.
남편에게도 그 일은 청천 벽력이었갰지요.
결국 그는 2년 집행유예 처벌을 받고 사건이 접수된 지 약 45일만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가 나오는 날는 남들처럼 두부 한 모를 사 가서 먹게 했습니다.
그 두부가 여태 제 목에 가시처럼 걸려 두부 요리를 해야 할 때마다 눈물이 나려했었습니다.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생각한 후의 결정이었는지 알만하지만 남편은 멀쩡한 은행당좌거래를 끊어버리고 대리점 세 곳을 자진 반납했습니다.
소매상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거기 포함되었겠지요.
그 때 남편의 나이 50. 그는 그 때부터 일이란 걸 다 놓아버리고 공부만 하러 다녔습니다.
사진, 동양학, 서예.
저는 아직도 학습도중에 있는 두 아이와 제 손을 바라는 두 조카와 남편의 취미활동과 학비, 그리고 제 학비를 벌기 위해 열심히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지요.
그래도 모자라 결국 빚에 방배동 집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격변기의 한국이 우리를 살린 셈이지요.
팔아버린 방배동 집을 줄여서 산 변두리의 방 아홉 개짜리 다세대주택이 재개발이 되어 그걸 하나씩 팔아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정책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또 살리기도 하더군요.
두부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여행을 어떻게 많이 다녔는지 많이 궁금해 합니다.
집을 팔아 다 까먹고 다닐 정도의 여행광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남편은 그 이상한 곳에서, 사는 것이 별 거 아니더라는 진리를 깨친 것 같아요.
그래서 몇 년간은 오직 여행만 다니려고 기를 쓰고 살았고 저는 그를 따라 다니며 여행을 노동으로 알고 다녔습니다. 설명이 되는지 모르지만...
그런데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도 없는데 지금도 세계지도를 보면서 유럽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찾아보고 지료를 모으고 있네요.
제가 가장 억울한 일은 남편이 그 이상한 집 속에 있을 때, 그 뜨거운 여름날을 제가 얼마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얼마나 수모를 겪으며 얼마나 부끄럽고 치사스러웠는지, 아무 죄도 없으면서 그런 기분을 가졌어야 했는지, 제가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를 남편은 다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의 일에 대하여 그는 정말 참 억울하고 분했겠다. 참 안쓰럽다 말하지만 그 때 제가 어떤 일을 감당했는지 어떻게 힘들었을 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는 사람도 없고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상해도 남편의 단순하고 대충하는 성격에 제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50 살에 일에서 해방한 그 결단력을 스스로 너무 잘한 일이라고 지금도 정말 잘한 일이라 여기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그의 그 결단 때문에 무거운 십자가 같은 삶을 등에 지고 동분서주 해야 했습니다.
이쯤 이야기를 마무리하렵니다.
그래도 두부 요리는 두 끼니는 먹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영양가치가 높다고는 하지만...
첫댓글 네.......태무님께서 언제인가 대강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지금 이 글을 읽으며 가슴이 저립니다. 잘못도 없이 못견디게 부 끄러워야하고 옳고도 다 변병처럼 설명을 해야 하는 치욕들.......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알지못하는......그러나 태무님!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겠지요?그 각박한 와중에도 후덕하신 인품을 보유하고 계신 태무님을 존경합니다. 두부 한 모.....오늘 고추장 두부찌개 끓여서 성당식구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두부를 먹을 때마다 태무님리 떠오를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