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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10 - 신(新) 나라의 황제인 왕망을 멸하고 후한을 세운 광무제!
한(漢)나라의 건국 부터 왕망의 치세 까지가 서한, 혹은 전한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기간 동안 한나라
수도는 장안(시안시)이었으나.... 기원 25년에 황제가 된 광무제의 치세 기간 부터 한나라의 수도는
동쪽의 낙양으로 바뀌었으며 광무제의 재위 부터 한나라의 멸망 까지가 동한, 혹은 후한이라 불립니다.
광무제 유수(劉秀)는 23년 곤양에서 왕망군을 무찌른 후에 경시제를 황제로 옹립했는데, 전한 경제
의 자손 경시제는 한나라를 되살리려고 했고 장안을 수도로 삼았으나... 그 역시 적미의 난에 의해
암살당하고, 반란군들은 유분자를 황제로 내세웠지만 적미의 난은 결국 호족들에 의해 진압 됩니다.
광무제는 경제의 7남이자 무제의 이복형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의 5대손으로, 남돈현령을
지낸 유흠(劉欽)의 아들인데 부모를 여의고 숙부 유량 밑에서 자랐지만 행동이 신중하고 품격
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身長七尺三寸, 美須眉, 大口, 隆準, 日角。
키가 7척 3촌이며 눈썹이 아름답고 입이 크며 코가 우뚝하고 이마가 튀어나왔다. “후한서 광무제”
전설에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조상 양공이 잡지 못한 장끼(숫꿩)가 달아나다가 그의 고향
남양군(완) 근처에 앉았고 그대로 돌이 되니 그 돌꿩을 사람들이 사당에 모셨는데...
덕분에 훗날 그 동네에서 태어난 유수가 황제가 되었다고 하니, 청년 시절에는 장사를
하면서 태학에서 공부를 할 비용을 마련했다는데 도참설을 믿고 황제를 꿈꾸었다고 합니다.
왕망의 신(新)나라가 적미(赤眉)의 반란으로 붕괴 위기에 처하고, 각지에서 군웅이 일어서자
유수도 한나라의 회복을 명분으로 군대에 참가하니 이때 말이 없어 소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데.... 지도자인 형 유연은 녹림병·신시병과 함께 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얻은 후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을 추대하고는 그의 신하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왕망은 급히 왕읍, 왕순으로 하여금 각지의 정예 병사 43만명을 모아서 곤양으로 향하게
했는데 성을 지키던 녹림군은 9천명에 불과했으니 왕망의 부대가 새카맣게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많은 장수들이 철수하자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이때 적군을 피해서 도망
치면 완성을 공격하던 주력 부대가 적군의 앞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상황 이었습니다.
이에 유수는 여러 장수를 설득하여 성을 지키면서 지원군을 기다리도록 하고 자신은 13기를
이끌고 밤을 틈타 성을 탈출하여 언현, 정릉으로 가서 구원병을 모집했는데 왕읍, 왕순은
압도적인 병력을 과신한 탓에 부하로 부터 완성의 포위를 푸는 것이 중요하니 곤양의
수비군에게 도망갈 기회를 주자는 건의를 따르지 않고 성을 공격하나 쉽게 함락하지 못합니다.
6월 초하루 유수는 근 10,000명의 구원병을 이끌고 곤양으로 돌아왔는데 유수가
직접 지휘한 선두 부대의 1,000여명은 왕망의 군대와 4, 5리 떨어진 곳에
진을 펼쳤는데, 왕순은 병력 수천명을 보내어 공격하자 유수는 선두에서 칼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1,000여명의 적을 죽이고는 왕망의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유수는 완성이 함락되었다는 소문을 성은 물론이고 왕망의 군영에도 퍼뜨렸으니 성내 수비병들은
사기를 얻었고 왕망 군대는 사기가 흔들렸는데... 유수는 3,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비밀리에
곤수를 건너 왕망의 군대 측면과 후방으로 우회하여 강습해 왕망군의 본진을 맹공하자 왕읍과
왕순은 각 부대에 위치를 사수하게끔 명령하고 스스로 1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응전하였습니다.
유수가 이끄는 정예부대가 용맹하게 싸워 왕읍, 왕순의 군대는 열세에 몰리는데 각 주둔병은 왕읍이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하였으므로 아무도 감히 먼저 움직여서 구원하러 가지 못했으니 왕망군
의 중심부는 붕괴되어 왕순이 전사했고 곤양의 수비군까지 출성하니.... 왕망의 군대는 협공에
당황하여 도망치다가 폭우가 내려서 불어난 강물에 물에 빠져 죽은 자가 10,000명이 넘었습니다.
왕읍은 수천명만을 데리고 낙양으로 도망쳤는데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40만을 칭할수 있었던
대군이 1~20,000명의 군사를 이기지 못하고 전멸당했으니 열세를 역전시키고, 적은
수로 수십배의 적군 주력을 섬멸시킨 곤양대전을 대학자 왕부지는 후에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한번의 전투로 종묘를 지키고, 이어 천하의 광복을 가져오게 되었다. 광무제는 불세출의 인물이다.”
마오쩌둥도 1936년《중국 혁명의 전략 문제》 및 1938년《논지구전》에서 두번이나 '남양
에서 작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이기고 약한 병력으로 강한 병력을 이긴' 곤양대전을 언급했습니다.
얼마후 경시제 유현은 유연과 유수가 황제 자리를 놓고 자신과 쟁탈할 것이 염려되어 부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연을 죽이니 형이 처형됐다는 소식을 들은 유수는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걸 자각하고
즉시 완성(宛城)으로 달려가 죄를 청하고 형 유연이 죽어 마땅할 죄를 지었다고 말하며 빌었으며
형 유연을 위해 상복을 입지도 않고 밥 먹고 술 마시며 담소를 즐기면서 전혀 상심해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곤양 대전의 상황을 물으면 그는 그것이 모두 장수와 병사들이 힘써 싸운 결과이지
자신은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으나 밤이 되면 그는 이불 속에 누워서 형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무자비한 유현을 원망하였으니 이러한 유수를 제거할
구실을 찾지 못한 유현은 하는수 없이 그를 중용하지는 않고 파로대장군(破虜大將軍)에 임명합니다.
왕망이 망하고 유현이 집권하여 다시 한나라가 세워졌으나 현한(玄漢 23년 ~25년) 인데...
유수는 명성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위험인물로 취급되어 다른 군벌인 왕랑이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화북 지방을 평정하도록 보내지는데 소수 병력만을 가지고 여러
군벌이 난립하는 화북으로 보낸 것은 사실상 사지로 보내려는 경시 조정의 의도였습니다.
하지만 유수(劉秀)는 유주의 상곡, 어양 두 군의 강력한 기병과 진정왕 유양의 10만 병력을 기반
으로 한단의 제위 참칭자 왕랑을 주살하고, 동마, 청독, 대동, 우래, 녹림, 신시 등의 농민군
세력과 여러차례 격전 끝에 화북지방을 평정하였으며, 후한 건국 1등 공신 등우를 만나게 됩니다.
유수(劉秀) 가 하북 북벌에 성공하자 한나라에서는 토사구팽하려고 했는데... 유수가 눈치채고는
하북을 기반으로 경시제 유현에게서 독립했고, 장안의 경시제는 적미군의 서진으로 붕괴
하여 버리자 유수는 본래 기반인 남양 근처인 낙양을 근거로 삼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황제가 된 것은 30세 였으니 역사상에서 실질적인 창업군주가 이런 젊은 나이에 제업을 이룩한 경우는
극히 드문데 같은 유씨 한나라를 봐도 고조 유방이 50대에 제위에 올랐고, 소열제 유비는 60세에
제위에 올랐으며 상나라와 주나라등 고대 사회에서도 이런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후 하남, 강회,
형초, 관중, 파촉순으로 제패해 거병한지 10여년 만에 각지의 군벌들을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훗날 제갈량은 조식과 논쟁하면서 쓴 글에서, "한나라 고조의 개국 공신들은 광무제의 개국 공신들
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광무제가 너무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에
공신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지만 능력이 부각될 만한 위기상황이 적었던 것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사에서 적의 사정도 봐주면서 전쟁을 하는 황제는 광무제가 유일했는데 물론 그 적이 한고조가
상대한 항우 급에는 한참 못미치지만.... 유림이라는 사람이 광무제에게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재빨리 수공을 쓰면 이들을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자 그런 잔인한 방법은 쓰지 않겠다면서 거절하고는 그러면서도 천하를 여유롭게 제압했습니다.
광무제의 공신중 대표적인 인물은 베트남을 원정한 마원인데 '노익장' 고사의 유래가 된 인물이며
또한 '운대 28장' 이라 하여 훗날 당 태종의 능연각 24공신처럼 광무제를 도와 나라를 세운
28명 공신들의 초상화를 그려 걸어 놓기도 했지만 마원은 운대 28장에 들어가지 않으니....
광무제의 며느리 "마 황후" 가 공신들이 득세할 것을 염려해서 황제에게 부탁했기 때문 이라네요?
한나라는 사실상 중국 최초의 통일 대제국이었으며 중화의 중심이었으니 당시에는 유가사상
과 함께 황제는 유씨만이 할 수 있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지배한지라 조조 조차도 자신의
세력 내부에 남아있는 한나라의 황제, 국성 유씨에 대한 존경심을 경계하며 끝내
본인 생전에 위왕에서 그쳤는데 그러한 분위기의 시작은 광무제 유수부터 라고 할수 있습니다.
전한 말기에 왕망이 제위를 강탈할 때만 하더라도 유씨가 국성이라는 느낌보다 황제이니 존경
한다라는 분위기였으며 전한이 무너지자 다들 왕망에 반항하기는 했지만 군벌들이 왕이나
황제를 자처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또 제위에 오른 것은 광무제라는 희대의 영웅이었고
다시 황성이 유씨가 되자..... 하늘이 유씨에게 한족의 황제위를 주었다는 분위기가 성립됩니다.
전한 · 후한 교체기의 반란은 전한이 이미 왕망에게 망하고 나서 각 군벌들이 왕이나 황제를
칭하며 일어났지만 후한말의 군웅 할거때는 유우를 황족으로 내세우려 했던 원소나 헌제
를 황제로 모셨던 조조 또 유씨인 유표나 유비가 황제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때문에
세력이 약하면서도 촉한이 유씨의 한나라를 계승한 명분으로 삼국시대의 한 축이 되었습니다.
후한은 국가에서 민간에 할당하던 부역의 양도 크게 줄었고 징병제이던 군사제도 역시 모병제
로 바뀌었으며 노비 해방 및 대사면령을 몇차례에 걸쳐 실시하고 자유민을 늘려 전한 말엽
이후 무너진 농촌 생산력 향상과 민심 확보에 힘썼으며 둔전병(屯田兵)을 운용해, 생산과
수요의 균형이 무너짐으로서 발생한 기근이나 변경으로의 식량 수송 문제를 완화시켰습니다.
광무제는 조세를 기존의 1/3 수준으로 감면해 주었는데 감세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둔전 시행
으로 병사의 식량을 확보할수 있게 된 것도 한몫하였으며 또 징병된 병사들을 귀농시킨뒤,
39년에는 경지 면적과 호적에 대한 전국적 조사를 시행하여 국가통치와 재정 기반을 확립합니다.
관료체계도 여러 직책이 폐지되고 간소화되었으며 대사도, 대사공, 대사마 삼공을 정치의
최고 책임자로 두었으니 실무상에서는 황제의 비서격인 상서(尙書)가 중용되었으며
재정 기관의 재편성으로 황실 재정을 국가 재정에 포함시키거나, 대사농 직속이었던
국가 재정의 중요한 기관인 염관(鹽官), 철관(鐵官)을 지방 군현에 속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또 후한(後漢 동한) 사회는 전한(서한) 보다 유가적인 분위기가 강해진 모습도 보여주니 광무제
부터가 태학을 다니던 학생이었기에 태학을 설치했고, 노비 해방령을 여러차례 내리며 노비
를 함부로 살해하는 것을 금했고 매인법과 약인법을 발표하여 인신매매를 규제하기도 했습니다.
건무 11년(A.D 35년)에는 '하늘과 땅의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귀하다(天地之性、人爲貴)'
는 문구로 시작하는 조칙을 내려 노비와 양민의 형법상 평등을 선언했으며 또 군국제
를 채용하면서도 봉읍은 전한에 비해 줄어들었으니 제후왕의 봉읍은 1개 군을 넘지
못했고..... 공신을 후로 봉하는 일도 많았지만 그것도 몇 개현 만을 봉해줄 뿐이었습니다.
또 왕망이래 후한 초기까지 조악한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으나 건무 A.D 40년에는 한무제 이후의
오수전 주조가 다시 시작되어 화폐 제도도 정비되었으며 동쪽으로는 낙랑군을 다시 한나라
의 수중에 넣었고 서쪽으로는 마원을 시켜 강족을 제압하여 천수, 농서 지역에 정착하게 했습니다.
남쪽으로는 마원을 시켜 교지(북베트남) 쯩 자매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농업을 진흥시키며 현지법
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역을 안정시켰으며 북으로는 분열되던 흉노 중 남흉노의 귀순을 받아
내고 이민족들의 복종을 받아 내어 사방을 안정시켰고..... 또 왕망의 신나라가 고구려를 후로
낮추었는데, 광무제는 고구려 대무신왕(서기 32년) 시기에 고구려에게 다시 왕호를 부여했습니다.
지방 호족들은 난세에 일어난 터라 배제할 수가 없었으니 고려의 왕건과 비슷한 경우인 데...... 순전히
유수 개인 세력만으로는 천하통일을 이루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참작의 여지가 있으니 특히
광무제가 봉기했던 남양의 경우는 호족 영향력이 더욱 컸기에 불가항력적인 부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후한은 철저히 유교 사회로 이행했으나 광무제 개인은 도참 사상에 심취했으니 후에 일어난 수많은
도참 사상이 황제로서 그 시발점이 되었다고 볼수도 있으며 호족에 대한 견제가 실패한게 훗날
문제가 되는데 광무제도 남양 출신의 호족으로 천하를 통일하는데 도움을 준 이들은 전한
시기에 중앙 권력에서 밀려나거나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대토지 소유 호족들 입니다.
등우, 경감, 두무 등의 공신들 역시 이런 남양 호족 출신이었으니 후한 정권은 시작부터
호족 연합 정권의 색채를 띄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광무제는 호족에게 강경한 정책
을 쓰지 못하니... 건무 15년 광무제는 경지와 호적의 조사를 실시했으나 부정 조사로
관련자들을 처벌하니 하북 지역에서는 이에 반발한 호족들의 대규모 봉기가 일어납니다.
후한의 호족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를 바탕으로 소작농을 부리고 사병을 키우는등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갔으며, 후한 말기에 사실상 이러한 호족들이 중앙 관리를 능가
하는 세력이 되어 환제 대에는 호족들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었으며 후한 정권의 지방 통제력은 크게 약화 되었습니다.
후한 멸망의 직접 원인은 외척과 환관의 전횡이니 장제의 무능함과 장덕황후 두씨의 전횡 탓이 컸으니
장제에게는 유경이란 태자가 있었는데 황후는 유경의 어머니 송귀인을 모함해 죽여버리고 유경마저
폐태자 시켰으니 장제가 죽자 조정의 실권은 장덕황후와 오빠인 두헌(竇憲) 에게 넘어갔으며.... 견제
하기 위해 화제는 환관을 중용해 두헌을 제거하지만 죽은후 권력은 화희황후 친정 등씨에게 넘어갑니다.
전한 때 실시한 향거리선제의 영향으로 지방의 호족들은 인재를 선발하는 인사권마저 틀어쥐고
있었으니 전한 후기 호족의 세력이 강해지는데 한몫을 했는데 왕망이 지나치게 호족을 견제
하다가 각지의 반란으로 살해당했으며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호족에게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호족을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광무제가 사냥을 하다가 밤 늦게 성문에 도착했는데 성문을 지키는 질운은 밤이 늦어 황제인지 확인할
수 없으니 성문을 열어줄수 없다고 하자, 한참 돌아서 다른 성문으로 들어갔는데 날이 밝자 질운이
상소를 올려 하루종일 사냥을 하시니 종묘사직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하며 질타하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베 100필을 하사했으며 어젯밤 다른쪽 성문을 열어 준 신하는 대신 벼슬을 낮춥니다?
광무제의 누이 호양공주의 충복인 노비가 사람을 죽여 동선이 체포하러 왔는데 호양공주가 노비를
숨기고 내어주지 않자 동선이 큰 소리로 질책하고 끌어내어 사형을 집행했는데, 체면이 깎이고
망신을 당한 호양공주가 동생인 광무제에게 동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자 광무제도 화가나서
불려들였는데 동선이 오히려 황제를 질타하는 말을 하자 30만 전이라는 큰 상금을 내렸다고 합니다.
중국 통일후 유수는 전쟁을 싫어하니 군국병제(郡國兵制)를 폐지하고 전국민 군역의무가 폐지되고
직업군인(상비군) 위주로 국방을 담당하는데 지역 장기근속 지휘관들에게 군인들이 충성하는
현상이 발생했고 후한 말에 이르면 군벌들이 군웅할거하는 원인이 되었으며 직업군인 제도
로 유목민족 등 이민족의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해 5호 16국이 도래하는 원인중 하나로 작용합니다.
광무제는 도참사상을 추종했으니 환담은 도참사상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가다가 죽었고,
정흥은 도참사상을 믿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가 죽을뻔 했으며 가규는 도참 글에 주석을 달음
으로써 후대를 받았는데... 후한 사회에 참위설이 퍼지면서 태평도(황건적), 오두미도등 도교
계열 종교가 사회적으로 세력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민심을 동요케 했다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다른 황제들이 소득도 없는데 자존심 때문에 유지했던 요동군등 옛 조선 지역의 주둔 병력들을
골치 썩이느니 포기하는게 좋다고 해체한 것을 보면 현실적인 군주라 볼수 있지만 낙랑군
(樂浪郡) 만큼은 다시금 장악한 군주기도 했으니, 왕조(王調)라는 인물이 한나라에서 보낸
태수를 살해하고 반기를 들고 독립하려 들자 현지인들은 결국 한나라 진압군에게 귀부합니다.
왕조(王調)라는 인물은 후한서의 왕경전(王景傳)에 등장하는데 그는 낙랑의 토착인이라고 하며,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중국 중원(中原)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동란기(動亂期)
에 한나라에서 파견한 태수 유흔(劉憲)을 살해하고 자립해서 '대장군 낙랑 태수' 를
자칭한 인물인데 고조선의 주민 혈통이나 중국 문물의 영향을 받아 한화(漢化)된 인물로 봅니다.
토착인이라는 용어는 대개 그 지역의 이민족 토착 세력을 지칭하지만 성씨가 중국식이라는게 그
증거이니.... 아마 이러한 배경을 믿고 처음에는 중국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를 제거하고
자립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토착 세력들은 왕조가 믿을만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진격해 오는
후한군에게는 싸워서 이길수 없다고 보았는지 왕조에게서 돌아서니 반란은 5년만에 진압됩니다.
30년 후한에서 임명돼 파견된 낙랑태수 왕준(王遵)이 군사를 이끌고 요동(遼東)에서 출발하여 낙랑에
이르렀을 때, 낙랑의 한인군리(漢人郡吏)들이 왕조(王調)를 죽이고 반란을 평정하여, 낙랑군은 다시
후한 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해 후한은 낙랑군 동부도위를 철폐하여 영동 7현을
포기하고 그 곳의 토착민 거수(渠帥=우두머리)를 봉(封)해 현후(縣侯) 로 삼아 자치(自治)토록 합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서기 44)조에는 “가을 9월에 동한(후한) 의
光武帝(광무제)가 병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郡縣
(군현)을 만드니 薩水(살수)(청천강) 이남은 동한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보다 앞서 대무신왕 14년(서기 37)조에는 “ 고구려의 왕 撫恤(무휼 :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그것을 멸망시켰다. 그나라(낙랑국) 사람 5천명이 투항하여 오므로 여섯 부락으로 나누어 살게
하였다” 라 하였으니.... 한사군인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2가지 설이 있으니 고려 중엽 부터
조선을 통해 이어오는 정통 학설은 낙랑은 평양지역이고 최리의 낙랑국은 함경남도 안변지역 입니다.
윤내현 교수는 낙랑군은 고조선과 기자조선 및 위만조선의 옛 터인 요서지방에 있었고 낙랑군과
연계된 평양의 낙랑국이 망하자 고구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후한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평양을 점령하고 낙랑군을 세웠으며, 훗날 남부 지역을 떼어내어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며..... 기존의 요서 낙랑군은 신(新)나라 왕망때 이름이 낙선군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이 시점에 대입해서 이때 낙랑군을 점령하고 있었던 고구려까지 쫓아냈다
는 이야기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부정되며..... 흔히 낙랑공주와 호동왕자 설화로 알려진,
대무신왕이 점령한 '낙랑국' 은 대체로 함흥~원산만 일대인 동옥저에 위치했던 소국으로
보지만 후한군이 낙랑군을 수복했을 때 이 지역은 이미 낙랑군으로 부터는 분리 되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낙랑군을 완전히 점령한 적은 없다는 것인데, 이러한 얘기가
나온 이유는 삼국사기에서 기원후 44년경 고구려가 점령한 '낙랑' 을 후한에게 빼앗겼다는
기사가 등장하기 때문(대무신왕 27년조) 이었는데, 그러나 이 기사는 일종의 착각이라고 여겨집니다.
고구려 본기에서 이전 기사(기원후 32년)에 '낙랑' 이라는 정치체제를 고구려가 점령하였다고 나와
있으며, 이것을 삼국사기 찬자가 중국의 낙랑군과 동일하다고 보았기 때문으로 따라서 고구려가
점령해서 멸망시킨 낙랑군이 후한 때 멀쩡하게 등장한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가 일단 점령했다가 이후 후한의 광무제에게 빼앗겼다는 구도를 세웠던 것이라 봅니다.
'후한과 고구려가 살수(청천강)로 경계를 삼았다' 라는 구절은 고구려 영역이 확장돼 살수 까지 진출
했거나, 후한이 기원후 44년까지 살수 이남의 낙랑군의 체제 재정비를 완료했다고 보는데...
고구려는 대무신왕대에 낙랑군 본토인 평양을 손에 넣은적이 없으니 고고학 자료는 물론이고,
사료상 교차 검증으로도 고구려가 대무신왕대에 낙랑군을 완전 점령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후한서 광무제기를 보면 건무 8년 (서기 32년) 12월에 "고구려왕이 공물을 바쳤다."
라는 기록이 실려 있으니 연도로 계산하면 이때 광무제 한테 공물을 바친 고구려왕은
고구려의 3번째 임금인 대무신왕 무휼이고 또한 광무제기의 건무 25년(서기 49년)
10월자 기사에는 "부여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라는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왕망의 신나라가 고구려를 후로 낮추어 하구려후(후작)로 불렀는데, 광무제는 고구려의 대무신왕
(서기 32년) 시기에 고구려에게 다시 왕호를 부여했습니다. 2005년에 선양에서 백두산으로
가는길에 지안에 들러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이며 환도산성등을 보고 오회분을 가쳐
지안현 박물관에 들러니 고구려를“下句麗 (하구려)”로 표현한 것이 눈에 그슬렸던 기억이 납니다.
주몽이 동부여에서 아이를 임신한 부인과 헤어져 오이, 마리, 협보 3명과 함께 탈출해 남쪽 비류수
에 정찰한후 졸본부여 연타발의 딸로 우태가 죽어 과부인 소서노와 재혼해 비류와 온조를
낳는데, 옛 나라 이름이“句麗 (구려)”인지라 높을 고(고)자를 덧붙여 새 나라 이름을 고구려
(가우리)라고 했으니 흉노를 항노(降奴)로 불렀던 왕망이 하구려(下句麗)로 낮추어 부른 것입니다?
단재 신채호의“조선상고사”에 보면 동부여에서 예씨부인과 유리가 찾아와 왕비 자리와
태자 자리를 뺏기니.... 격분한 소서노는 고구려 건국의 공이 자신에게 있다며 추모
(주몽)와 담판을 벌여 금·은·주보(珠寶)를 나누어 가진후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 18명과 함께 낙랑국을 지나서 마한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유수는 젊은 시절 황제의 행렬 앞에서 화려한 집금오를 보고, "벼슬을 한다면 집금오, 아내를 얻는다면
음려화." 라고 했다는데... 후에 황제가 되고 이름난 미녀였던 음려화를 아내로 얻었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황후는 곽성통이 됐으나, 광무제는 음려화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정도로 총애
했고 후에 음려화가 아들을 낳고 곽 폐황후가 이를 질투하자 이를 구실로 황후를 음려화로 교체합니다.
이때 태자도 장남 유강에서 음려화의 아들 명제로 바뀌었지만 곽씨 가문 및 곽 폐황후 소생
자식들을 모조리 죽인다거나 하진 않고 적절히 대접해 주었으니... 황후에서 폐하긴
했어도 대우 자체는 황후 수준을 유지했다고 까지 하는데, 음려화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살아서 황태후가 됐고 죽어서는 광렬황후란 시호를 받았으며 광무제의 능에 합장되었습니다.
자식은 폐황후 곽성통이 5남 3녀를 낳았고 광렬황후는 5남 1녀인데 광무제 후손 중 영제, 소제, 헌제
등 황제들을 제외하고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이 2명이 있으니... 광무제의 6대손인 유우와 또다른
후손 유엽으로, 유우의 5대조가 곽 폐황후의 소생이자 광무제 장남 동해공왕 유강(劉彊)인데 원래
황태자였으나 음려화의 소생 명제에 내주었고 유엽은 광무제 7남 부풍질왕 유연(劉延)의 후손입니다.
왕망을 멸하고 중원 지역이 평정되었을 즈음 광무제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농서 진(秦) 지방의
외효와 촉(蜀) 의 공손술만이 남게 되자 신하들은 하루속히 토벌해야 한다고 간했으나
광무제는 "중원은 이미 평정된 지 오래니 그들은 이제 문제시될게 없소 (度外視)"
라며 느긋하게 대처했으니'도외시(度外視)' 는 이러한 광무제의 말에서 유래된 단어 입니다.
촉 지역에서 황제를 자칭하며 저항하던 최후의 적 공손술을 격파하기 전에 뤄양의 후한 황궁 에는
황제의 집기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지만 광무제는 만들지 말라고 하면서... "이미 성도에
모두 만들어져 있으니 가져오기만 하면 된다." 고 말했다는데, 성도는 예나 지금이나 촉 지역의
중심지로 공손술이 황궁을 짓고 있었으니 공손술을 격파하고 모두 빼앗아 오면 된다는 의미 입니다.
이때 유수가 한 말이 득롱망촉 (得隴望蜀). '농 땅을 이미 얻었는데 촉 땅을 바라고 있다' 라는
말은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표현한 고사성어가 되었는데... 고사성어 장본인인 광무제는
바로 이듬해에 계획을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이걸 실패한 예로는 한중을 얻고도 유엽과
사마의 간언을 무시했다가 촉을 얻지못하고 오히려 유비에게 한중을 빼앗긴 조조가 있습니다.
황제가 되었을때 과거 글공부 같이 하던 친구 엄광을 찾아서 후하게 대접하고 옛날 얘기를 같이 했는데,
그가 옛날에 하던 것처럼 자신을 막 대하고 자면서 다리를 올리고 레슬링 기술을 걸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나중에 웬 떠돌이 별(객성)이 황제의 별을 범하는 것을 보고 헐레벌떡 달려온
점성관에게 "친구 엄광이 내 배 위에 다리를 올리고 자서 그렇다." 라며 허허 웃고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함석헌은 이것을 보고 엄광에게 권력에 주눅들지 않는 들사람(野人 야인)의 기개가 있다고
평가했지만, 이보다 황제라는 존귀한 지위에 올랐어도 그 지위나 권위에 연연하지 않고
옛 인연을 한결같이 벗으로서 대해준 광무제의 관대함에 초점을 두어야 하지 싶으며.....
광무제의 누이인 호양공주의 일화도 유명하니 “조강지처”라는 말이 그녀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광무제의 누이 호양공주의 충복인 노비가 살인죄를 저지르고도 공주의 위세 때문에 다른 관원들은
감히 그를 체포하지 못했지만... 동선은 이런 위세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노비가 공주
가 탄 수레를 몰고 나오자 그 자리에서 체포하고 공주에게 호통을 쳤으니, 체면이 깎이고
망신을 당해 화가 난 공주는 광무제에게 고자질했고 광무제는 당장 동선을 잡아들이라고 명합니다.
그런데 끌려온 동선은 전혀 주눅들지 않고 '폐하께서 천하를 일으키셨다지만 겨우 가노 따위가 살인
하는 걸 놔두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신은 자결을 하겠습니다.' 라고
당당하게 나서며... 궁궐의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서 자살을 시도하니 깜짝 놀란 광무제는 이를
말리고 동선에게 '그만하고 공주에게 머리숙여 사죄라도 해라' 명했지만 이 조차 따르지 않았습니다.
광무제가 신하들을 시켜서 억지로 동선의 머리를 숙이게 하려 했지만 끝까지 저항하자, 이 모습을
본 호양공주는 어찌 천자가 명령 하나 제대로 못 내리냐며 기막혀 했고...... 광무제는 웃으면서
'고개 뻣뻣한 현령(强項令) 은 이만 나가도록 해라' 며 35만전의 상금을 수여하고 내보냈다고 합니다.
광무제가 적미를 토벌할때 잔당들은 자신들이 죽을것이라고 생각했으니 그 이유는 장안에 들어서며
광무제의 조상들이 묻혀있는 전한의 황릉들을 도굴했기 때문인데 조상의 무덤이 털렸다는 것은
후손 입장에서는 치욕이나 다름없었고 적미들 입장에서는 조상들의 무덤을 도굴한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나 광무제는 대인배스럽게 주동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풀어주었습니다.
조조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식은 제갈량과 서신을 통해 현대로 치면 키보드 배틀을 펼친 적이 있으니
조식은 광무제를 추켜세우며 자기 아버지 조조를 광무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냈는데,
반면에 제갈량은 자기 주군 유비를 한고제에 비견하는 의도를 드러내어 한고제를 칭송했다고 합니다.
광무제 치세기간 동안 한나라는 재건되었으니 25년에 낙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고 27년
장군이었던 등우와 풍이에게 명하여 적미군을 물리치게 하고 그 우두머리를 반역죄
로 처단했으며... 26년부터 36년까지 광무제는 황제임을 자처하는 다른 지역의 군주
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고 이들을 모두 물리친 후에야 한나라는 다시 통합될 수 있었습니다.
한나라(후한) 군대는 73년 하미에서 흉노족을 물리친뒤 흉노족을 투루판에서 쫓아내고 바리쿤호
까지 추격한 후 하미 지역에 수비대를 배치했지만... 그러나 75년 카라샤르와 쿠처에 주둔
하고 있던 흉노족 군대에 의해 수비대의 대장이 살해당하고 난 후 하미의 수비대는 철수했습니다.
87년 한의 사주를 받은 선비족의 공격으로 흉노 일부는 남흉노에 투항했고 89년에는 한나라 장수 두헌이
흉노족을 물리쳐 북흉노는 알타이 산맥으로 후퇴했으며 91년 흉노족이 이리강으로 달아난 후 서천해
유럽에 나타나니 훈족이며..... 선비족이 흉노땅으로 들어와 부여의 국경 근처에서 부터 오손족이 살고
있던 이리강 지역까지를 점령했으며 한때는 중국군대를 물리칠 정도로 강세를 보였으나 이후 몰락합니다.
한나라의 장군 반초는 카스시와 동맹 소그디아나를 공격하기 위해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쿠샨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90년 한나라와 결혼
을 통한 동맹을 맺길 원했던 비마 카드피세스의 요청이 거절당하자 그는 반초를 공격하기 위해
와한지역에 군대를 보냈지만 쿠샨은 물자 부족으로 후퇴했으며 91년 반초는 서역지방에 파견됩니다.
쿠샨제국과 파르티아, 미얀마지역의 왕, 왜국의 통치자에게도 조공을 받았고 또한 97년에 감영을 사신
으로 보내 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맺고자 했는데 166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가 보낸 사절단
이 환제에게 도착했다고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단순히 상인들이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많은
여행자들이 후한에 왔으니 간다라의 지루가참이나 파르티아의 안세고와 같이 불교 승려도 있었습니다.
장제 이후 환관들은 외척을 상대로 권력다툼에 개입하기 시작했으니 화제는 환관 정중의 도움을
받아 장덕황후를 가택에 가두었고 외척을 몰아냈으니 이것은 장덕황후가 장제의 어머니
였던 공회황후를 제거하고 숨긴 것에 대한 복수였는데 화제가 죽은뒤 그의 아내였던 화희
황후는 경제 위기와 107년 부터 118년 까지 지속된 창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섭정을 시작합니다.
화희황후가 죽은뒤 환관들은 화희황후와 가족들이 반역을 꾀했다고 안제에게 고하자 안제
는 화희황후 가문 사람들을 요직에서 내쫓고 망명을 보낸뒤 다수에게 자살을 하도록
명했으며..... 안제가 죽은뒤 그의 비였던 안사 황후는 정권을 잡기 위해 어린 소제
를 황제의 자리에 앉혔지만 환관 손정은 소제를 밀어내고 순제를 황제로 만들었습니다.
안사황후는 가택에 감금되었고 그녀의 친척들은 살해당하거나 유배되었으며 동맹을 맺었던 환관들은
모두 살해당했는데 순제의 비였던 순열황후의 오빠였던 섭정 양기는 엄청난 권력을 누렸으나
결국 환제의 환관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태학 학생들은 환관들에 대항하여 많은 시위를 했습니다.
환제는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고 경제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궁들을 들이면서 관료들을
멀리하고 환관들을 가까이 했으니 환관들은 관료들과 태학 학생들을 반역죄로 몰아 감금
했는데 167년, 대장군 두무는 사위였던 환제를 설득해 관료들을 풀어주도록 설득했지만 환제
는 이응을 비롯 많은 관료들을 영원히 관직에 나오지 못하게 명했으니 당고의 옥의 시작이었습니다.
환제가 죽은 뒤 두무와 진번은 후람과 조절등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환관들은 환사황후
와 진번을 가택에 감금했으며 환관들의 편이었던 한나라 장수 장환은 두무와 전투를 벌였으니
결국 두무는 패배하고 살해당했으며 영제의 재위기간 환관들의 권력은 더 커졌으니 대부분의
정치는 환관인 조충과 장양이 맡았고 영제는 후궁들과 놀면서 군사행렬을 보며 세월을 보냅니다.
당고의 옥은 184년 황건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이 일어나자 끝났는데 관료들이 이런 난에
참여해서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을 환관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황건의 난과
오두미도의 난은 모두 도교와 관련 있는 반란이었는데, 그 우두머리는 장각과 장로였습니다.
쓰촨성에 자리잡고 있던 오두미도는 215년이 돼서야 진압되었으며 황건의 난은 수년 안에 한나라
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그후 수십년 동안 작은 봉기가 계속되었는데 비록 황건의 난이 진압
되었지만 장군들은 자신의 군사들을 해체하지 않고 왕조의 영향권 밖에서 힘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영제의 비였던 영사황후의 오빠 하진은 원소와 함께 환관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으니
영사황후에게 환관들을 살해하자고 편지를 보냈고 영사황후는 이에 동의했지만 189년 하진이
환관들에게 암살당하자 원소는 원술과 함께 궁궐을 포위했으니 환관 2,000여명이 살해당했는데,
장양은 즉시 소제와 유협(헌제)을 데리고 도망치자추격당해 결국 장양은 황하에 몸을 던져 자살합니다.
황제와 동생 유협이 시골에서 방랑하고 있던 것을 동탁이 발견했으니 그는 황제를 데리고 낙양
으로 돌아와 정권을 잡았고 원소는 그를 피해 도망쳤는데, 동탁이 소제를 밀어내고 헌제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또한 소제를 암살하자, 원소는 반 동탁 연합을 조직해 그에 대항했고
결국 동탁은 191년 5월에 낙양에 불을 지르고 장안으로 도망쳐 그곳을 새 수도로 삼았습니다.
동탁은 192년 왕윤의 계획에 의해 양자였던 여포에게 암살당했으니 헌제는 195년
장안에서 낙양으로 도망쳤으며 196년 조조의 설득에 따라 헌제는
수도를 허창으로 옮겼으니 원소는 황제를 얻기 위해 조조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200년 관도 대전에서 조조가 원소를 크게 이긴 후에는 원소의 세력은 줄어들어
원소가 죽은후, 조조는 형제들과 후계자 다툼을 하던 원소의 아들 원담
을 살해했고 207년 공손강은 원상과 원희를 살해한후 그 목을 조조에게 보냅니다.
208년 조조가 적벽 대전에서 패배한 후 중국은 3개의 나라로 갈라졌고, 조조는 북쪽을, 손권은
동쪽, 유비는 서쪽을 각각 지배했는데 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하자, 12월 조조의 아들 조비는
헌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내놓게했고 결국 위 문제가 되었으니 이로써 한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