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성
코타키나발루
Kota Kinabalu
열가지 향신료를 닮은 도시,
산이 높다는 것, 그 이상이 있다
코타키나발루 시내 중심가는 동서로 2km,남북으로 200m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반나절 만에 다 돌아 볼 수 있는 크기이다.
첫날 도착하면 왜 여행객들이 끊임없이 몰려드는지 금금증이 떠오른다.
코타키나발루에서 이틀을 보내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인천행 비행기를 타기위해 공항으로 향할 때는 짧은 일정을 아쉬워한다. 이 작은 도시는 여러 겹으로 칠해진 다양한 색깔을 알아 갈수록 궁금증이 더해지는 것이 매력 포인트다.
코타키나발루는 말레이시아 사바주(州)의 주도(州都)로,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항구도시다. 19세기 말 해적들에게 자주 습격을 받던 작은 해안마을이었지만, 북 보르네오가 영국령이 되면서부터 항구도시로 탈바꿈했다.
이후 키나발루 산과 코타키나발루 교외를 뒤덮고 있는 밀림에서 채취한 목재, 고무등 풍부한 자연 자원을 발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847년 영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제셀톤(Jesselton)"으로 불렸고, 1963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현재의 코타키나발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오스트레일리아군 과 일본군의 격전지가 되어 폐허가 되었다가 전후 재건된 터라 역사가 깃든 명소는 거의 파괴되었다. 시내 중심가에는 몇몇 엣 건물만 남아 코타키나발루의 과거를 짐작하게 한다.
해안도시에서 항구도시로
코타키나발루 시내에 내 걸린 간판은 적어도 두 개의 언어로 되어있다.
말레이어를 영어로 옳긴 것 하나, 중국어로 써둔 것 하나, 코타키나발루 인구의 40%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전체에서 화교의 비율을 따진다면 30%남짓 이지만 이곳에서는 특히 더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원주민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종족은 아니다. 30여개로 분류되는 다양한 말레이 인종과 필리핀에서 이주해온 이민자, 강렬한 인상의 인도계, 그리고 말레이사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는 화교가 모두 뒤섞여 있는 곳이 코타키나발루이다.
코타키나발루를 둘러보자면, 끊임없이 내비치는 이 도시의 새로운 얼굴에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의 특징이겠지만, 이곳은 유독 더 하다.
고층빌딩과 골프코스 뒤로 상하수도조차 없는 수상가옥이 건재하고, 오픈카로 달려야할 것만 같은 잘 정비된 해안도로가에 근엄한 모스크가 버젓이 세워져 있다.
코타키나발루가 말레이시아로 반환된 것은 불과 50년 전, 그때부턴 자란 이 도시에 모습은 외지인의 눈에 신기하기만 하다.
키나발루 산 MT. Kinabalu
4.095m ,동남아시아 최고봉
높은 해발고도 때문에 구름이 깨끗이 걷힌 날에야 비로소 영험한 봉우리를 볼 수 있다. 1.800m까지 차로 오르면서, 구름이 걷히기만을 기다렸지만 얕은 구름이 오후 늦도록 시야를 뿌옇게 흐렸고, 가파른 능선을 통해 뾰족하게 솟아 있을 세인트존스 파크 (St. John's park)를 상상하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조상과 산이 말하는...
키나발루는 조상을 뜻하는 “아키”와 산을 뜻하는 “나발루”가 합쳐져 생겨난 말이다. “조상의 산” 혹은 “영혼의 산”이라는 뜻이다. 말레이 원주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키나발루 산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4.000m가 넘는 산이라 일찍이 유명해졌을 법도 한데, 최근 들어 세계에 알려진 까닭은 역시 원주민들의 믿음과 연관돼 있다. 영혼이 깃들었다고 믿었기에 산을 경외시했고, 산 정상 오르는 것은 금기시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20세기 초 영국등반대가 처음 이산을 오른 것이다. 키나발루 산에 살고 있는 카다잔두손족은 요즘도 매년 산제사를 지낸다. 세속의 발이 정상에 닿게 된 것에 산이 분노하지 않도록 달래는 의식인 셈이다.
코타키나발루 시내에서 트래킹의 시작 지점인 키나발루 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까지 걸리는 시간은 2시간. 1,800m 지점에 관리사무소가 있는데, 트레킹이 어려운 관광객은 보통 이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하루 알정으로 산을 다녀간다.
키나발루 산은 온대. 아열대. 열대의 식생을 모두 품고 있다. 산 초입에는 열대 식물들이 군집해 있고, 해발 1.500m을 넘어서면 갈대, 소나무, 잣나무,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부근에는 고산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생물군 덕분에 키나발루 산이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지정될 수 있었다.
멋진 일출을 선사하는 곳
관리사무소까지 가는 길에 산간마을이 간간이 보였다. 가파른 산비탈에 집이30체 정도가 장난감 부록처럼 몰려있다. 이 산간마을에 사는 원주민이 재배한 야채, 과일류 등을 내다파는 작은 규모의 노점상이 길가에 열린다.
사바주의 신선한 야채들이 신선도를 자랑한다. 사정상 트래킹을 못하는 여행객이라면, 느긋하게 산간마을을 구경하며 구름 속을 유영하듯 즐겨봐도 좋다.
키나발루 산을 등반할 수 있는 인원은 하루에 300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정상까지 트래킹을 계획한다면 최소한 한 달 전에 산장을 예약해야 한다.
3.000m 정도까지는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길이 이어지다가 그 이상 높아질수록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하는 험한 코스가 많아진다. 새벽등반으로 정성에 올라 일출을 맞아본 사람은 그 기억에 다시 이곳을 찾을 만큼 최고의 일출을 선사하는 곳이다. 굳이 히말라야처럼 만년설은 없다하더라도,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한다.
코타키나발루의 명물중 명물
과거로 떠나는 기차여행 ㅡㅡ
기차역에 도착하자 영국식민지시대 복장인 반바지에 반양말 슈바이처 모자차림에 유니폼을 입은 승무원이 낡은 기차로 승객을 안내한다. 승객들은 증기기관차에 타는 것에 매료된 듯 출발시간이 다되도록 사진을 찍느라 밖에서 서성인다.
삑 ∼삑 ∼ 출발 음이 들려오면 분주해지는 승객들의 발걸음.
코타키나발루가 제셀톤(Jesselton) 이라고 불리던 영국식민지 시절, 커피. 코코넛, 담배 등을 수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북보르네오 열차, 당시 원활한 농작물 수송을 위해 열대 밀림 구서구석까지 철길이 놓였다.
1970년대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증기관차는 운행을 중단했고, 증기기관차가 자연스레 사라졌다.
30년 만에 부활한 이 열차는 과거의 영화를 재현하듯 코타키나발루의 명물로 자리 잡게 됐다.
2000년1월 수트라하버 리조트와 사바철도청이 합작해 북보르네오 열차를 관광용으로 재탄생 시켰다, 기차기 지나는 루트를 살펴보면, 말레이시아의 폭넓은 열대림, 동물 군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나 볼 수 있다는 점, 코타키나발루의 교외의 풍경을 찬찬히 볼 수 있는 가장 낭만적인 교통수단이라는 점 등이 북보르네오 열차가 다시 달리겐 된 이유다.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기차여행을 원하는 승객들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덕분에 갈수록 더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기차의 첫 량은 새까만 색으로 된 기관차로, 엣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 푹푹 찌는 기관실로부터 나무 태우는 냄새가 객실까지 그대로 전해진다.
객실 역시 옛스러운 분위기로 꾸몄다. 네 명이 마주보고 않도록 좌석을 배치했고, 중앙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어 편리한 기차여행이 가능하다. 테이블마다 조명도 있어 온화한 느낌이다. 좁은 통로를 통해 여섯 량의 객실을 지나면 맨 마지막 객실은 뒤가 뻥 뚫려 있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북 보르네오 열차의 기관실에 5초만 있어도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체감온도 50도는 넘을 듯, 실내 온도는 매순간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끝도 없이 올라간다. 잘 말린 장작을 열차한량에 가득 싣고, 옛날 방식 그대로 증기의 힘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때 그 시절이 오늘 현재를 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