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집총간 > 정관재집 > 靜觀齋先生續集卷十 > 附錄 > 이단상
만사〔挽詞〕[공조 참의①송시철(宋時喆)]
대대로 가성을 이어 기품을 보존하였으니 / 奕世家聲器宇存
②상서의 어진 아들이요 상공의 손자라오/ 尙書賢子相公孫
문장은 일찌 감치③음하의 체재를 터득하였고 / 文章早得陰何體
④분전으로 끝까지 성리의 근원을 탐구했다네 / 墳典窮探性理源
고요함을 지켰으니 애초부터 벼슬을 경시하였고 / 守靜本來輕紱冕
한가함에 깃들었으니 전원 때문이 아니라오 / 棲閑非是爲田園
⑤품계가 후설에 올랐으니 천은이 성대하고/ 秩陞喉舌天恩渙
⑥지위가 논사에 으뜸이니 지망이 보존되었도다/ 位冠論思地望存
⑦성학을 장차 도와서 계옥하리라 기대하고/ 聖學將期資啓沃
⑧형구에서 마침내 한껏 비등하나 했더니만/ 亨衢會見藹騰騫
⑨오래 끌어온 고질은 배사인가 의심스럽더니 / 沈綿痼疾杯蛇惑
훌쩍 가버린 부생은 극사가 치달리는 듯/ 奄忽浮生隙駟奔
⑩옥수의 빼어난 자태 깊은 땅에 묻히거니와 / 玉樹英姿埋厚壤
청전의 물려온 가업 높은 문을 우러르리라/ 靑氈遺業仰高門
⑪가슴 아파라 황폐하고 쓸쓸한 저 지동 / 荒涼芝洞傷心處
반 이랑 텅 빈 못에는 달빛만 비추리라/ 半畝虛塘月一痕
① 송시철(宋時喆) : 1610~1673.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숙보(叔保), 호는 설촌(雪村)이다. 송극인(宋克認)의 아들로, 1633년(인조1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53년(효종4)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 좌랑, 정언, 예조 정랑, 밀양 부사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현종 때 헌납, 장령, 집의, 사간 등을 거쳐 1667년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 뒤 좌승지, 형조 참의, 공조 참의를 거쳐 원주 목사로 내려가 문운(文運)을 크게 일으켰다.
② 상서(尙書)의 …… 손자라오 : ‘상서’는 이조 판서를 지낸 부친 이명한(李明漢, 1595~1645)을 가리키고, ‘상공’은 좌의정을 지낸 조부 이정귀(李廷龜, 1564~1635)를 가리킨다. 이명한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천장(天章), 호는 백주(白洲),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1610년(광해군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16년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았다하여 파직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남양 부사,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대제학, 이조 판서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아버지 이정귀, 아들 이일상(李一相)과 더불어 3대가 대제학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저서에 《백주집》 등이 있다. 이정귀의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ㆍ보만당(保晩堂), 치암(癡菴), 추애(秋崖), 습정(習靜),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조 때의 명신인 이석형(李石亨)의 현손으로, 1590년(선조2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대제학, 병조 판서, 예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으며, 문장에 뛰어나 신흠(申欽),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사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다. 저서에 《월사집》이 있다.
③ 음하(陰何) : 저본에는 ‘음하(陰河)’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음하’는 남조(南朝) 진(陳)나라의 시인인 음갱(陰鏗)과 양(梁)나라의 시인인 하손(何遜)의 병칭으로, 두 사람은 똑같이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음갱’은 자가 자견(子堅)으로 사전(史傳)에 박통하였으며 오언시에 더욱 능하였다. ‘하손’은 8세에 이미 시에 능했고 상서수부랑(尙書水部郞)을 지냈으며 저서에 《하수부집(何水部集)》이 있다. 참고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해민12수(解悶十二首)〉 가운데 일곱째 수에 “이사의 능사를 가졌음을 익숙히 알거니와, 음하의 용심을 괴로이 함을 자못 배우노라.[熟知二謝將能事, 頗學陰何苦用心.]”라고 하였다. ‘이사(二謝)’는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사영운(謝靈運)과 제(齊)나라의 사조(謝脁)를 가리킨다. 《全唐詩 卷230 解悶十二首》
④ 분전(墳典) : 삼분오전(三墳五典)의 준말로, ‘삼분’은 삼황(三皇)의 글이고 ‘오전’은 오제(五帝)의 글인데, 전하여 옛 전적을 가리킨다.
⑤ 품계가 …… 성대하고 :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된 것을 두고 한 말로, 정관재는 1669년(현종10) 1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발탁 제수되었다. ‘후설(喉舌)’은 목구멍과 혀로, 왕명의 출납을 맡는 승지(承旨)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시경》 〈대아(大雅) 증민(烝民)〉에 “왕명을 출납하니, 왕의 후설이다.[出納王命, 王之喉舌.]”라고 하였다. 《靜觀齋年譜 卷2》
⑥ 지위가 …… 보존되었도다 :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된 것을 두고 한 말로, 정관재는 1669년 3월에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였다. ‘논사(論思)’는 의논하고 생각한다는 뜻으로, 임금이 근신(近臣)들과 학문을 토론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주로 홍문관 관원에게 쓰는 말이다. 《靜觀齋年譜 卷2》
⑦ 성학(聖學)을 …… 기대하고 : ‘성학’은 일반적으로 성인의 학문, 곧 유학(儒學)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임금의 학문을 뜻한다. ‘계옥(啓沃)’은 선도(善道)를 개진하여 임금을 인도하고 보좌하는 것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그대의 마음을 열어서 나의 마음에 부어 달라.[啓乃心, 沃朕心.]”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書經 說命》
⑧ 형구(亨衢)에서 …… 했더니만 : ‘형구’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대로로, 여기서는 활짝 트인 관로(官路)를 의미한다. 《주역》 〈대축(大畜)〉에 “상구는 하늘의 거리이니, 형통하다.[上九, 何天之衢, 亨.]”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문의 ‘등건(騰騫)’은 높이 날아오르는 것으로, 벼슬길에서 뜻을 펼치며 관직이 높이 오르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당나라 두보(杜甫)의 시 〈기악주가사마육장파주엄팔사군양각로오십운(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에 “공과 같은 이 모두 준걸들이니, 뜻이 반드시 날아오름에 있으리라.[如公盡雄俊, 志在必騰騫.]”라고 하였다. 《全唐詩 卷225 寄岳州賈司馬六丈巴州嚴八使君兩閣老五十韻》
⑨ 오래 …… 듯 : 오랫동안 고질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을 두고 한 말로, 덧없는 인생을 한탄하여 한 말이다. ‘배사(杯蛇)’는 ‘배궁사영(杯弓蛇影)’의 고사에서 온 말로, 의심으로 인해 생기는 병을 비유한다. 후한(後漢) 때 두선(杜宣)이 술을 마시다가 술잔에 뱀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으나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여서 술을 그대로 마셨는데, 술을 마신 뒤에 복통이 일어나 다방면으로 치료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았다. 그 뒤에 벽에 걸려 있던 활 그림자가 술잔에 뱀 모양으로 비쳤다는 것을 알고는 병이 즉시 나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원문의 ‘엄홀(奄忽)’은 갑자기라는 뜻으로, 죽음을 가리킨다. ‘극사(隙駟)’는 틈새를 지나는 사마(駟馬)라는 뜻으로, 순식간에 흘러가는 덧없는 세월을 비유한다. 《묵자(墨子)》 〈겸애(兼愛)〉에 “사람이 땅 위에서 사는 기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이, 비유하자면 마치 사마가 달려서 틈새를 지나는 것과 같다.[人之生乎地上之無幾何也, 譬之猶駟馳而過隙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風俗通 怪神》
⑩ 옥수(玉樹)의 …… 우러르리라 : 빼어난 인품을 지닌 고인이 영원히 세상을 떠나가도 훌륭한 자손들이 남아 대대로 전해온 가업을 이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옥수’는 전설상의 선수(仙樹)로, 깨끗한 인품과 빼어난 풍모를 지닌 인재를 비유한다. 진(晉)나라 때의 명상(名相) 유량(庾亮)이 죽자, 하충(何充)이 장례(葬禮)에 참석하여 “옥수를 지하에 묻으니, 사람의 슬픈 정을 어찌 억제할 수 있으리오.[埋玉樹於土中, 使人情何能已已!]”라고 탄식하였던 고사가 전한다. ‘청전(靑氈)’은 푸른 모포로, 대대로 전하는 구물(舊物)이나 세업(世業)을 가리킨다. 진(晉)나라 왕헌지(王獻之)가 어느 날 밤 서재에 누워 있었는데, 도둑이 들어와 물건을 죄다 훔쳐가려 하였다. 이에 왕헌지가 천천히 말하기를 “도둑아, 청전은 우리 집에 대대로 전해 오는 물건이니, 그것만은 놓아두어라.[偷兒, 靑氈我家舊物, 可特置之.]”라고 하니, 도둑이 놀라서 달아났다는 고사가 전하는데, 여기에서 온 말이다. 《晉書 庾亮列傳, 王獻之列傳》
⑪ 가슴 …… 비추리라 : 정관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읊은 〈유시(遺詩)〉를 바탕으로 한 말이다. 〈유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병이 갑자기 이와 같으니 / 此疾遽如此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 斯人而至斯
장수와 요절 모두 꿈처럼 허망하니 / 彭殤都是夢
삶과 죽음을 다시 어찌 슬퍼하랴 / 生死復奚悲
초초하게 덧없는 세상 하직하자니 / 草草辭浮世
망망하게 장대한 마음 울울하도다 / 茫茫鬱壯思
오직 지동의 달만이 남아서 / 惟餘芝洞月
천년토록 빈 연못을 비추리라 / 千古照虛池
《靜觀齋集 卷3 遺詩, 年譜 卷2》 ‘지동(芝洞)’은 양주(楊州) 쌍수촌(雙樹村) 자지산(紫芝山) 아래에 있는 골짜기인 ‘영지동(靈芝洞)’으로, 정관재가 말년에 은거하여 강학하던 곳이다. 참고로 주자(朱子)의 시 〈관서유감2수(觀書有感二首)〉 가운데 첫째 수에 “반 이랑 네모난 연못 한 거울처럼 열렸는데, 하늘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배회하네. 묻노니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는가. 근원에서 활수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라네.[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라고 하였다. 《朱子大全 卷2 觀書有感二首》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최병준 (공역) | 2020
이단상(李端相) 1628년(인조 6) ~ 1669년(현종 10)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서호(西湖). 할아버지는 좌의정 이정구(李廷龜)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이명한(李明漢)이며, 어머니는 금계군(錦溪君) 박동량(朴東亮)의 딸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시에 장원했다. 다음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대교·봉교·부수찬·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서연(書筵)에 나아갔다.
여러 차례 이조·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의정부사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1655년(효종 6)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 구애됨이 없이 정론(正論)을 밝혔다.
전라도 지방을 두루 살펴 기근이 심한 고을을 구제하게 했다. 효종이 죽고 정국이 변하자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잠시 청풍부사를 지냈다. 이어 응교를 거쳐 인천부사가 되었다. 1664년(현종 5) 집의가 되어 입지권학(立志勸學)에 관한 다섯 조목을 상소하고 스스로 관직을 떠났다.
홍명하(洪命夏)·송준길(宋浚吉)·조복양(趙復陽) 등이 이단상의 학문과 덕행을 인정해 경연관(經筵官)에 추천했다. 그러나 이를 사양하고 양주 동강(東岡)으로 은퇴했다. 그 뒤 승지와 병조참지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했다. 1669년 부제학으로 서연관을 겸했으나 곧 사양하고 물러났다.
1680년(숙종 6) 민정중(閔鼎重)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兩館提學: 홍문관·예문관의 제학)에 추증되고, 다시 이조판서로 증추되었다. 이단상의 문하에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와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임영(林泳) 등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대학집람(大學集覽)』·『사례비요(四禮備要)』·『성현통기(聖賢通紀)』·『정관재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