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9일 연중 제28주일 (루카 17,11-19)
"아예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관심의 병"
오늘 먼저 좀 엉뚱한 이야기부터 꺼내 볼까 합니다.
(몇 번 드렸던 말씀이지만) 저는 서품 받은지 30년이 넘도록 보좌신부가 없는 본당만 다녔기 때문에,
매주 어린이 미사, 중고등부 청소년 미사를 드리다 보면 강론을 따로따로, 2개나 3개의 강론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가끔 신자들에게 “매주 강론을 따로 준비하는 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린이 미사 강론이 참 어려울 수도 있지만, 반면에 의외로 쉬울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병이 낫게 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른 분들은 이 나병(한센병)이 어떤 건지 이미 다 알고 있기때문에, 따로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이 지나가지만,
어린 학생들 경우는 “이 나병(한센병)이 어떤 병이고, 예수님 시대에는 어떻게 받아들여졌고, 또 ‘문둥병’이란 말은 나쁜 말이니까 써서는 안 되고 차라리 ‘나병이나 한센병’이란 용어를 써야 한다” 등등...
어린 친구한테는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해주고 가르쳐줄 ‘이야기 꺼리’가 더 많다는 거죠.
더 쉽게 예를 들자면, 제가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중에 민속명절 ‘한가위 추석’ 얘기가 나왔다고 할 때, 우리나라 사람한테는 굳이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상대가 우리 전통을 잘 모르는 외국인 친구였다면, ‘우리 한국인한테 추석은 어떤 의미이며...’하는 것들을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짝 옆길로 새는 이야깁니다만, 제가 느끼기에 요즘 학생들은 ‘최소한의 상식’ 같은 게 너무 빈약하다는 거...저희 세대는 어떤 얘기를 들으면 그걸 ‘나의 지식’으로 애써 내 머릿속에 ‘저장’하는 데 비해서, 요즘 아이들은 네이버 ‘검색’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굳이 머릿속에 ‘저장’하려고 하질 않는 것 같습니다. ‘검색해 보는 것’과 ‘저장하는 것’의 차이겠죠?)
여하튼 몇 년 전 어린 친구들에게 나병(한센병) 설명을 하다가, 저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흔히 우리는 나병에 걸리면 손과 발, 코나 귀, 살이 괴사(썩어들어가) 손가락 발가락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몹쓸 병으로 생각을 하지만,
사실 나병균이 손발을 괴사시키는 게 아니라, 나병균은 우리 ‘피부신경을 마비’시켜서 상처를 입어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고 방치하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제2차 감염에 의해서, 주로 손가락과 발가락 끝... 살이 썩어들어가서 결국엔 아주 흉한 몰골이 되는 것이 나병(한센병)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병이 무서운 것은 ‘통증을 못 느낀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요즘 현대인의 고질병이 있다면 아예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병’(무관심의 병)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들은 아픈 통증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경미한 나병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또 다른 나병환자’가 되어가는 데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나를 그렇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소득이 늘어나는 것, 즉 ‘소득 증대’가 곧 행복해지는 거”라고 배웠고, 또 그렇게 배운 대로 소득을 늘리기 위해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까, 어느새 우리는 점점 그런 ‘무감각증 환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 하나 살아남기도 힘들고, 내 식솔 먹여 살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의 일 같은 데에 일일이 신경 쓸 수도 없고, 신경 쓸 필요도 없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청소부 노동자들의 시위나 농민들,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의 시위 같은 것도 ‘본인 탓’이라느니, ‘개인 책임’이라는 댓글들이 인터넷에 뜨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옛날엔 우리가 이렇지 않았습니다.
주변 이웃의 일에 관심이 많았고, 누구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당연히 일으켜 줄 줄 알았고, 모내기나 추수 같은 때는, 너도나도 나서서 거둘 줄 알았고, 적어도 직접 도와주진 못할망정 이웃의 불행에 대해 함께 가슴 아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하고, 삶의 형태가 바뀌면서 우리 사람을 그렇게 낭만적으로 놔두질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금 이런 우리 삶의 태도 (이런 경제체제)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제일 염려스러운 것이 ‘연대성 부족’, 즉 쉬운 말로 하면, 너무나 심해진 ‘무관심’을 지적합니다.
남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 불감증 증세, 즉 나병 증세를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나병환자들 (신경마비증 환자들)을 치유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는 복음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엄청난 은혜를 받은 열 명 중에 단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표했다는 이야기라던가, 여러 가지 교훈을 숨겨두고 있습니다만
그중에 무엇보다 사회에서 쫓겨나 (교황은 이걸 ‘배제’라고 표현합니다.) 저쪽 변두리(바깥 언저리)에 머물면서 덥썩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저 ‘멀찍이서’ 눈치만 보고 있던 그들을 다시 공동체 일원으로 회복시키셨다는 것...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쪽’이 아니라, 그들을 계속 바깥으로 ‘밀어내는 쪽 사람’은 아닌지 반성해보았으면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