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조의 S.T.Life
이영준(큐레이터,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
엔조에 대해
엔조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그림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먹고 살기 힘들고 취직은 상상하기도 어렵기 때문이었다. 엔조 뿐 아니라 많은 젊은 신인들이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과는 무관하게 그림을 그만두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작업을 하고 있다. 대학원도 진학하고 벌써(?)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생각처럼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지원들도 많아졌고 비록 정규직은 아니지만 이리저리 강의도 나가고 혼자 작업하기엔 크게 무리가 없었다. 막상 작가의 길을 나서고 보니 엔조는 더없이 행복했다. 그 무엇보다 세상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말 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 무엇보다 기뻤다. 한때 엔조가 예술에 대한 회의를 하고 있었을 때 작업을 하는 선배들을 매우 부러워했다. 그 부러움 속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용기 있게 선택했던 선배작가들에 대한 찬사의 의미도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원망도 숨어 있었다. 예술가라는 것이 우리의 질서 속에서는 하나의 직업군으로 분류되겠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술적 행위는 늘 세상과 언어의 질서 그 ‘바깥’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적 가치나 사회적인 기준으로 예술 혹은 작가를 온전히 규정해 버리면 곤란하다. 이제 엔조는 예술적 행위의 소중함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런데 왜 엔조인가? 본명이 ‘김종현’인데 어릴 때부터 친구들이 늘 엔조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언어적인 여러 뉘앙스가 느껴지는 이 단어가 좋아 그냥 자신을 ‘엔조’라 부르기로 했다.
S.T.Life 그리고 스트라이프
엔조는 지난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현대인의 일상을 특유의 드로잉 감각이 스며있는 부조형태의 작업을 선보였다. 이 형상들은 다름 아닌 SNS를 통해 드러난 타자들의 모습들이다. 볼에 바람을 채워 넣은 여인이나 핸드폰과 합일된 여성, 그리고 핸드백을 들고 어디론가 떠나는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 남자 토르소를 제작하고 비니를 쓴 아이를 만들었다. 이들은 모두 사실적인 재현을 거부하고 주요한 부분만 강조된 단순화된 이미지들이다. 현대인의 일상이 가장 함축적으로 녹아있는 공간이 바로 SNS이다. 작가는 이 공간의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 삶의 이면을 살펴왔다. 이번 S.T.Life전에서도 여전히 일상적 삶에 주목하는 작가의 시선은 유지되고 있다.
사실 작가 엔조에게서 보이는 가장 특징적인 면은 언어적 감각이다. 시각예술을 하는 작가에게 언어적 감각이 뛰어나다고 하는 것은 문학으로 장르를 바꾸라는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엔조’라는 자신의 별칭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이미 짐작 할 수도 있지만 그의 작업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 진다. 예컨대 작업을 하는 행위는 언어적인 감각과 무관하지 않다, 뿐 만 아니라 인간은 언어적으로 사유하고 언어적으로 욕망하고 언어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적극적인 언어적 유희는 언어적 삶을 벗어나는 하나의 장치가 될 수도 있다. 작가는 언어적 유희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오히려 작업과정에서 떠오르는 자연스러운 키워드들을 자신의 전략으로 활용한다. 가령 사이트 투 라이프와 스트라이프는 유사한 기표를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 두 언어를 개인전의 주제로 삼았다. 이번전시에는 일상적 삶을 보여주는 다양한 형상들이 스트라이프와 결합되어 있다. 작가는 스트라이프 무늬의 유래와 변천과정에 대한 자료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무늬가 십자군 전쟁의 산물이었고 폄훼와 숭배를 오갔던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도 연구를 했다. 스트라이프는 시작과 끝이 같으며, 일정한 양식이나 형태와 유형으로 반복되는 선으로 이루어진 패턴이다. 야생의 세계에서는 약자가 강자의 눈을 속이기 위한 보호색의 역할을 하며, 광고나 의류계통의 디자인에서도 사람들이 선호하는 디자인이다. 예를 들어 얼룩말 무늬는 포식자의 눈을 교란하기 위한 장치였으며, 해군에서 이 패턴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던 이유는 파도와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면에서 스트라이프는 감춤과 드러냄의 이중적인 역설이 숨어있다.
특히 이번전시에 적극적으로 드러낸 주제는 인간의 욕망과 연관이 있다. 그 중에서도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남성적’이라 불리는 욕망을 이야기한다. 엔조는 영국최초의 팝아티스트 R.해밀턴(Richard Hamilton 1922-2011)의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을 패러디하고 있다. 그 우람한 형상에 앤디워홀, 바스키아, 키스헤링의 바나나, 왕관, 건전지, 애완견을 통해 지배와 소유의 관성으로 점철된 남성들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패티쉬> 시리즈에서는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의 속옷들을 스트라이프로 처리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트라이프는 드러냄과 감춤의 역설이 숨어있다. 일상 속에서 본능적으로 드러나는 성적 욕망과 이를 억압하고 숨겨야하는 남성주체의 분열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그라비아> 시리즈도 이와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 할 수 있지만 거대하게 제작된 <승마>와 <오토바이>라는 작품 앞에서면 혼란스럽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말과 오트바이를 소유하는 행위는 남성적인 기질과 무관하지 않다. 말은 12지신 중 남성을 상징하는 동물이고 기계와 속력 그리고 자유를 상징하는 오토바이는 남성적 욕망을 은유적으로 대변하는 기계이다.
엔조의 언어 그리고 시선
엔조가 패러디했던 R.해밀턴의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등장했던 남성과 엔조가 그리고 있는 남성적 욕망은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대중문화의 물질적인 천박함에 시선이 집중되었던 헤밀턴의 눈에는 대량소비시대의 사치품들이 비판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남성적인 자의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엔조는 잘 단련된 육체를 하고 등장하는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욕과 속물성을 훨씬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엔조는 이번전시를 통해 남성적 욕망의 형태들을 추적한다. 그리고 상징적 형태로 내재화 되어있는 남성적 욕망의 이미지들를 호출해 냄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로망의 덧없음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물론 헤밀턴의 작품은 팝아트라는 장르를 열게 한 역사적인 작품이지만 엔조는 이 작품을 통해 남성적 욕망의 버릇을 상상해낸다. 그 수많은 사치품, 더 나아가 여성조차도 소유하려는 남성들의 왜곡된 욕망을 그려낸다. 그것이 세상의 단면을 바라보는 엔조의 시선이자 S.T.Life이다. 엔조는 조그만 계기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일어남’을 통해 서사를 구축할 줄 아는 감각과 세상을 바라보는 뚜렷한 시선을 느낄 수 있는 흔하지 않은 신진작가이다. 그래서 엔조의 다음전시가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