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내 머리 속에서 부산의 녹동마을을 지나 사배야길[지경고개]를 넘어간다. 조선통신사 일행의 상행길이 바로 이 길을 통해 밀양으로 향했고 그 중심에 양산천이 있어 양산천을 어떻게 건넜을까하고 의문을 가져보았더니 아래의 글을 통해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되어 옮겨 싣는다.
물론 임란 당시 고니시가 이끄는 왜군 제 1진 18,700명이 이곳을 지나 삼랑진의 작원관으로 갔다. 이곳에서 삼랑진의 주민 300여명이 왜군과 싸워 상당한 전과를 올린 것이다.(1592.4.17) 작원관은 바로 그곳이기도하다.( 2018.1.7일)
[화요살롱]양산지역 통신사 옛길의 복원
2010년 03월 16일 [양산시민신문]
근자에 조선시대 국가간선도로망이었던 ‘영남대로’에 대한 답사기가 몇 권 나온 것이 있으나, 우리지역에 대한 묘사가 소략한 부분이 많아 우리 지역의 옛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필자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면서 1912년 최초로 측량한 지적원도와 이를 근거로 제작된 지형도를 따라 통신사 옛길을 답사하고 소개한다. 우리 지역의 역참을 연결하는 대로는 두 갈래이다. 한 갈래는 ‘동래→양산→황산역을 거쳐 밀양→대구→조령→서울로 이어지는 길(영남대로)’과 또 한 갈래는 ‘동래→용당역을 거쳐 울산→경주→조령으로 이어지는 길(영남좌로)’이다.
조선시대 일본에 파견된 외교사절은 임란이전까지 모두 62회, 임란이후에는 12회였다.
조선전기의 사행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드물고, 임란 이후에는 사행기록들이 여러 건 남아있으며 양산지역을 통과하며 남긴 기록도 12곳에서 보인다.
영남대로를 따라 가보다
동래를 출발한 영남대로 황산역길은 우리 지역 사배야(沙背也)고개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사배마을 지경고개이다. 지경고개는 경부고속도로와 지방도로로 시원하게 뚫려 있다. 지경고개에서 시작된 길은 동쪽 산기슭을 따라 사배마을 안을 흐르는 개울이 지방도와 만나는 곳까지 비스듬히 비탈을 내려온다. 여기서 부터는 사송천 동안(東岸)을 따라 외송마을을 지난다. 내송마을을 못미쳐 나지막한 산봉우리(내송 공동묘지) 남쪽자락을 돌아 내송천을 건넌다. 내송 아랫마을을 지나 동면농협 앞에서 찻길과 만난다. 여기서 부터는 지방도를 따라 정진바위 아래를 돌아 다방마을 부자주유소 동편으로 난 버스길을 따른다. 이어서 다방 삼거리, 올고개(시청 앞), 옥곡사거리, 경동탕, 남부시장을 거쳐 읍성 서문(북부동 424번지)에 이른다.
서문 골목을 따라 등기소 앞을 지나면 동헌에 이른다. 서문을 나와서 황산역을 향해서 가는 길은 구 손규열외과 앞을 돌아 재생한의원을 지난다. 재생한의원 부근에 계원교가 있었고 이 계원교는 1648년 8월에 처음으로 돌다리로 짓고, 그 후 1759년 4월과 1882년 4월에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는 현재 향교에 옮겨져 있다. 외환은행 앞과 운동장사거리를 지나서 곡포(曲浦)다리(현 영대교)를 만난다. 곡포다리를 건너면 곡강(양산천)변에 오리정(五里亭)이 있어 나그네를 맞이하였다고 한다. 신주동 마을까지 산모퉁이를 돌아가며 신주동 마을 앞을 지나 범어리(현 소방서 앞)에 들어선다. 여기에서 남정리 마을(현 부산대한의대병원)까지 비교적 평탄한 길이다.
종고개 남쪽 나지막한 봉우리 앞자락을 돌면 가촌마을을 만나고 신기마을 동부마을이 이어진다. 물금우체국 앞길을 따라 서부마을 골목에 이르면 하마비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과 황산역(물금리 690번지)이 나그네를 맞는다.
황산역 서편 기슭에 일아정(日哦亭)과 환취정(環翠亭)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황산역을 출발하여 경부선기찻길을 건너 구물금(舊勿禁)에 이른다. 구물금 낙동강변에 김해 상동(上東)과 연결되는 물금나루가 있었다. 상동면에 포장도로가 생기기 전까지는 상동사람들의 주요 교통로였다. 1970년대까지 상동사람들이 물금장을 이용하였으나 지금은 상수도취수장(取水場)이 들어서 있다.
물금나루를 지나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낙동강을 향해 산자락 아래 고즈넉이 자리잡은 용화사(龍華寺)가 있다. 이곳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1호)이 있다. 여기서 부터는 기찻길과 나란히 황산강변을 따라가게 된다. 용화사 앞에서 황산강변의 물금잔도(棧道)를 지나게 되는데 토교까지는 약 2.5km로 걸어서 3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지금은 물문화관 건물로 막혀 길이 끊어졌다)
물금읍과 원동면과의 경계지점에 이르면 경파대(鏡波臺)가 있어 절벽위의 임경대(臨鏡臺)와 함께 황산강의 풍광을 완상할 수 있다. 임경대는 고운(孤雲)선생이 유상하던 곳으로 ‘황산강 임경대’란 시를 남겼다.
강의 동쪽 산기슭은 물금광산자리다. 삼국시대부터 철광석을 채광하던 곳으로 1970년대까지 국내 주요 철광산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폐광이 되고 그 자리에는 레미콘공장이 들어서 있다. 물금광산을 지나 토교에 이르면 화제천(花濟川)과 만나는데, 화제천을 건너는 다리 앞에 석교비(石橋碑)가 내를 건너는 수고를 덜게 해 준 일을 기록하고 있다. 비는 처음 토교다리 옆에 있었는데 다리 확장공사를 하면서 마을 안으로 옮겼다.
토교에서 원동역까지 기찻길과 낙동강사이의 농로를 따라가는데 신주마을에서부터 원동역까지 약 3km 구간은 중간 중간에 기찻길로 끊어진다. 원동에서 내포천을 건너는 원동교를 지나 철길을 따라 가다가 신곡마을 앞에서 천태암을 뒤로 철길 지하통로를 건너 낙동강 쪽으로 나오면 가야진사(伽倻津祠)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밀양 경계까지 농경지사이로 농로길이 이어진다. 밀양경계 부근에서 작원관까지 약 2km는 잔도길이 끊겨있어 걸어가려면 철길과 철도굴을 지나야 한다.
영남대로의 복원을 제안한다
황산역길(영남대로)은 낙동강 동안(東岸)의 기찻길로 인해서 군데군데 끊어져 있다. 이 구간은 임경대 경파대를 비롯하여 가야진사 천태암과 낙동강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역사의 숨결을 간직한 곳이다. 그러나 용화사에서 토교 구간, 신주마을에서 원동역 구간, 용당 경계에서 작원관까지는 그동안 사람이 왕래하지 않아 잡목과 풀이 우거져 있고 군데군데 낙강(落江)되어 지금은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다.
마침 이 지역은 ‘4대강 살리기 사업’에 포함된 곳이기도 하므로 복원계획을 사업에 반영하여 선인의 옛 자취
경부선 철도와 낙동강
작원관 복원 기념비
이곳 작원관은 옛날 원(院), 관(關), 진(津)의 역할을 겸하던 곳으로 교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군관민 300여 명이 왜적 1만 8천7백 명을 상대로 결사항전(1592년 4월 17일)을 벌였던 전적지(戰跡地)로서 구국충혼(救國忠魂)이 잠들어 있는 성지이며, 수백 년 동안 피땀을 흘린 지역민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원래의 자리에서 밀려나 낙동강 변에 그 터를 잡았으나, 1936년 대홍수에 휩쓸려 그 후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를 복원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었다. 선생께서는 작원관의 역사적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작원관을 복원하는 일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그 복원을 보지 못하고 타계(他界)하셨다.
뒷날 선생의 작원관에 대한 깊은 사랑과 지역민의 노력으로 지금과 같이 우뚝 서게 되었으니 이를 기념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조국과 민족 사랑을 실천하고 선조(先祖)들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한 작은 의지로 이 비(碑)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