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수필】
‘좋은 글귀’를 만나는 즐거움
― 『천자문』에서 유독 눈길 사로잡은 글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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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수필】
‘좋은 글귀’를 만나는 즐거움
― 『천자문』에서 유독 눈길 사로잡은 글귀는?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손자를 둔 칠십 대 노인이 천자문(千字文)을 쓴다. 서당에 갓 들어간 학동(學童)처럼 천자문을 펼쳐놓고 중얼거리면서 붓을 놀린다.
심심한 노인네가 집안에서 할 일 없으니 ‘붓을 가지고 노느냐?’고 나무랄 사람도 없다.
▲ 필자의 「습자일기」 ‘천자문 편’ 표지
손자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닐 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손자 돌보는 일이 할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그와 같은 중요한 하루 ‘밥값’ 할 일이 없어졌다.
‘손자 돌봄 임무’ 마저 사라지니 한가한 시간이 많아졌다. 텅 빈 집안에 혼자 있을 때가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운동’이다.
◆ 노년의 두 가지 ‘운동 방식’
노인에게는 두 가지 운동이 필요하다. ‘두뇌 운동’과 ‘육체 운동’이다.
내가 택한 육체 운동은 ‘산책’과 ‘등산’이다. 돈 들이지 않고 얼마든지 시간만 나면 할 수 있는 운동이다.
두뇌 운동은 ‘독서’와 ‘글쓰기’이다. 나는 거의 매일 글을 쓴다. 글쓰기는 주로 노트북을 이용한다.
원고 청탁으로 쓰는 수필이나 칼럼의 경우는 긴장감이 매력이다. 느슨한 의식에 생기를 불어넣는 요소가 있으니 긍정적인 두뇌 운동 효과가 있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마찬가지다. 독자의 시선을 의식하면 긴장감이 따른다. 이 세상엔 심미안을 가진 ‘좋은 글 감별사’들이 많다.
이른바 ‘좋은 글’이란 무엇인지, 진가를 저울 없이도 한눈에 달아내는 강호(江湖)의 고수(高手)들이다.
어느 한 대목이라도 유익한 요소가 있는지 단번에 가려내는 ‘족집게 감별사’들. 그들의 현미경 같은 눈을 의식하면 긴장하면서 고민해야 한다.
저 잘난 멋에 착각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으로 글을 쓰면 ‘두뇌 건강’에도 좋다고 생각한다. 정신건강이란 고무줄 같은 느슨한 것보다는 연(鳶) 줄처럼 팽팽한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집중력이 높아지는 까닭이다.
나는 책임감 있는 글을 쓰기 위해 ‘얼굴 사진’을 내 건다. 원고의 상단 글 제목 밑에 필자 얼굴 사진부터 걸어 놓고 글을 쓴다. 긴장감을 높이는 일이다.
◆ ‘천자문 쓰기’는 ‘두뇌 운동’의 하나
노트북 원고 쓰기와는 달리 또 하나 집중력을 요구하는 두뇌 운동이 ‘붓글씨 쓰기’다. 붓을 잡으면 우선 호흡을 가다듬게 된다.
호흡을 조절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들뜬 마음,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붓글씨의 매력. 역시 두뇌 운동을 활발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집중력은 긴장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천자문’은 글자 수가 많으므로 세필(細筆)로 써야 한다. ‘천자문’이라고 하면 1천 개의 글자를 말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천자(千字)의 글자를 해설한 문장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수백, 수천 배가 늘어난다. 아니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겠다.
◆ 명절에 손자와 즐기는 ‘한자 게임’
이런 한자 학습은 명절에 손자를 만나면 실력을 발휘하게 된다.
초등학생 손자가 먼저 <한자놀이 게임>을 제안한다. 한자의 음과 뜻을 하나씩 말하면 상대가 이어가는 방식이다.
중복해서 말하거나 더는 이어가지 못하면 지는 게임방식이다.
고향에 가는 차 안에서 손자와 주고받는 이 같은 <한자 게임>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매번 지는 게임이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있고 손자가 간간이 웃길 때는 폭소도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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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한자공부는 실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다. 순전히 ‘두뇌 운동’ 방식이다.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격식 없이 자유롭게 쓰는 붓글씨는 어떤 ‘작품’의 개념이 아니다. 액자 글씨처럼 표구해서 남기려는 서예의 경지가 아니다.
단순히 서당의 학동처럼 기초적으로 익히는 ‘습자(習字)’ 수준이다. 그러니 고급 화선지가 필요 없다. 부담 없이 손쉽게 다룰 수 있는 A4용지가 좋다. 먹물이 번지지도 않고 종이 규격이 작아 편리한 점이 있다.
◆ ‘한석봉 어머니 떡 썰듯’ 정신 집중하라
붓글씨를 쓰는 순간은 잡념이 사라진다. 용지에 줄이나 칸이 인쇄된 것이 아니라서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글자가 고르지 않고 삐뚤빼뚤 나간다.
붓글씨를 쓰는 일은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다.
아무리 하찮은 습자라도 정신부터 가다듬지 않으면 아까운 종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TV 소리마저도 소음처럼 방해가 된다.
집안 분위기가 산만하고 어수선하면 집중도가 떨어진다. 써 놓은 붓글씨를 보면 안다. 글자가 삐뚤고 줄 간격도 고르지 않은 것은 정신 집중이 안 된 상태를 말한다.
‘한석봉 어머니 떡 썰 듯’이란 말이 있다. 불을 끄고 떡을 썰어도 고르게 떡을 써는 한석봉 어머니. 명필 석봉도 처음에는 어머니의 능숙한 솜씨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석봉이 천하의 명필(名筆)이 된 것은 어머니가 몸소 보여준 엄격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백지에 천자문을 쓰면서 글씨가 제대로 안 될 때는 한석봉 어머니의 꾸지람이 떠오른다.
◆ 좋아하는 글귀를 만나는 반가움
천자문을 쓰면서 새롭게 깨달은 문장도 많다. 아, 미처 몰랐던 좋은 글귀가 여기 숨어 있었구나 싶어 반가운 것도 있다.
그중 하나가 ‘화인악적 복연선경(禍因惡積 福緣善慶)’이다.
나는 ‘복연선경’이란 글귀가 좋아 수필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아내가 살아났습니다’ 제하의 ‘고백 수필’이었다.
▲ 필자의 「고백수필」 한 대목 - ‘복연선경’이란 문구가 나온다.
아내가 절망적인 병고에 시달리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복연선경’이라고 표현했다. ‘복(福)은 착한 일에서 오는 것이니, 착한 일을 하면 경사(慶事)가 온다’라는 뜻이다.
덕담처럼 아내도 위로하고, 글을 쓴 나도 마음이 편안해졌던 경험을 했다.
하지만 이 좋은 글귀가 ‘천자문’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주변엔 많았다. 이 사자성어(四字成語)의 출전(出典)을 궁금해하는 분들이었다. 내가 천자문을 다시 쓰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천자문을 쓰다가 붓을 멈췄다. 그러고는 이렇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내가 좋아하는 「복연선경」 문구가 바로 여기 숨어 있었구나. 반갑다. 福·善아!” ― 윤승원의 『習字日記』 ‘좋은 글귀를 만나는 즐거움’에서. ■
2023. 12. 22.
필자 윤승원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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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면 필자가 쓴 【습자 일기】를 펼쳐보자
■ 윤승원의 습자일기 / 천자문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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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카페에서
◆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23.12.22.11:42
천자문에 얽힌 사연을 상세하게 논술하셨습니다. 오늘날 전하는 천자문은 한석봉 서체본입니다. 윤 선생은 천자문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셨습니다.
그 효용에 대해 한 두가지 첨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자문은 조선시대에는 어린이가 처음으로 읽는 책입니다, 이는 기초한자를 배우는 책입니다. 이는 많은 수의 순번을 정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최초의 예가 불교 대장경을 담은 상자에 그 순서에 천자문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8만 대장경의 인본이 1000상자에 담겼다고 합니다.
둘째는 조선 시대의 토지측량에서 토지대장을 5결단위로 천자문을 바꾸어 기록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천자문은 4자성구로 되어 있습니다.
붓글씨를 쓰면서 좋은 구절에 단상을 기술한 윤선생의 공로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줄 것입니다.
외람되이 천자문에 대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자문의 뜻풀이에 대하여는 홍윤표 교수의 천자문 판본연구라는 글이 있습니다, 추천합니다.
▲ 답글 / 윤승원(필자)
천자문 漢詩가 놀라운 것은 四言古詩 250句로서 총 1천 자가 하나도 겹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잘 쓰지 않는 어려운 한자가 많다는 점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초등 한자 입문서 또는 학습 교재로는 급수가 대단히 높다는 점입니다. 한자 검정시험에서 특급까지 올라가야 나오는 昃(기울 측)이 맨 앞 12번째로 나오며, 그 앞글자인 盈(찰 영)도 2급짜리라고 하는군요. 저자가 머리가 허옇게 셌다는 전설이 생길 법도 하지요.
하지만 한시이니만큼 초심자에겐 어려운 한자가 있더라도 운율에 맞춰 읽으면 그런대로 재미도 있습니다. 교수님 귀한 가르침 감사합니다.
일거양득입니다.
천자문도 쓰고 그에 얽힌 수필도 쓰고.
게다가 두뇌 운동도 하게 되니 일거삼득인가요?
노년의 평안과 행복입니다.
‘일거삼득’을 넘어 ‘일거사득’은 되는 것 같습니다.
노년의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거든요.
독서와 원고 쓰기, 붓글씨, 그리고 산책과 등산.
돈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 일상의 즐거움입니다.
♧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카페에서
◆ 高林 지교헌(철학자, 수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3.12.23 21:00
독서 작문(창작) 서도 산책(등산) !!!
모두가 아름다운 지성인의 typical model 이니
거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생활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본보기로 기능할 것입니다.
낙암 정구복 박사님의 댓글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유익한 정보와 지식과 생활 모습이 엿보이는
‘올사모’ 카페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2023. 12. 23. 성남 아름마을에서 청계산 高林 지교헌
▲ 답글 / 윤승원(필자)
그저 閑談을 즐기는 사람에게
'독서 작문(창작) · 서도 산책(등산)'이라는
문학지 서평 제목과 같은 멋진 표현을 붙여 주시니,
교수님은 學童의 사기를 높여주는
옛 書堂 어르신 같은 인자한 풍모가
느껴집니다.
'올사모' 카페가 교수님 칭찬으로
인정과 사랑이 넘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