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입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 입에 원망이 가득합니다.
중국선교를 다닐 때에 특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장춘시 공안국장인
사람이 온 몸이 마비가 되고 목 위만 살아서 먹고 배설하고 말만하고 몸은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가 된 상태에 복음을 증거하니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교회와 한국선교사들에게 못쓸 짓을 했노라고 고백하는 걸 들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여 십자가를 끌어내리고 선교사들을 잡아 가둘 때는 그토록
불안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평온하여 좋다고 고백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욥에게도 아직 입이 살아 있다는 것은 욥42장에 가서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고 참 회개를 하므로 그의 구원을 확증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23장1절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바울이라면 이와 같은 경우에 아무 말을 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그는 디모데에게 변론은 무익하므로 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2절 “오늘도 내게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나니
내가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아무리 원망불평해도 당하는 고통에 비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내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힘든 줄 아냐 합니다.
3절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만일 욥과 같이 말한다면 진리에 대해 무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어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셔야만 공중에서 그
영광을 본다고 믿으며 영화로운 구원은 죽어서 얻는 것으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에 충실하다면 교회는 제2의 성육신이므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 안에 거하시므로 육체 안에서 살아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몸이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면 당연히 지성소와 법궤의 영광도 있는 것 아닙니까?
4절 “어찌하면 그 앞에서 내가 호소하며 변론할 말을 내 입에 채우고”
5절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며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랴”
6절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와 더불어 다투시겠느냐
아니로다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7절 “거기서는 정직한 자가 그와 변론할 수 있은 즉
내가 심판자에게서 영원히 벗어나리라”
8절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불가지론(不可之論)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진 부가지론(否可之論)에 빠져서 좌충우돌을 하고 있는 겁니다.
원시적인 믿음에 의한 신학은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해 계시를 받은 신학은 자연을 초월하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9절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가 없구나”
욥은 지금 하나님을 찾는 술래가 되어 숨바꼭질을 한다고 여깁니다.
실제로는 하나님이 그를 요리조리 찾으시는데 욥은 그 사실을 모릅니다.
다만 하나님을 만나면 좀 따지겠다고 하고 나옵니다.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만 해 봐라는 식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욥은 아브라함이나 다윗과 같은 믿음의 조상의 반열이 아닙니다.
만일 욥의 신앙이 온전하였다면 바울이 욥을 믿음의 모델로 세웠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10절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이 욥의 앙코 없는 찐빵과 같은 고백이 얼마나 많은 액자로 만들어져 가정이나
사무실에 걸려 있는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쩜 부적과 같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는 의로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롬4:25-5:2) 믿음이 아니라면 욥과 같은 고난은
하나님을 뵙기 위한 섭리일 뿐입니다. 땅의 의인이 하늘의 의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11절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그렇다면 왜 연단이 필요할까요? 그 자체가 순금일 텐데 왜 장차가 필요할까요?
12절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과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하고나서 욥이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생각할까요?
지금도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고난을 변명하고 합리화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13절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14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이것이 욥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주변에서 많이 보는 유형의 신앙이지 않습니까? 욥의 신앙은 율법의
완전함을 스스로 성취하고자 하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적인 소망도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정신 건강을 위해 신념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조성하는
집단지성과 집단확신의 리더십은 하나님과는 무관하지만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에
다소 도움이 됩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이와 같은 풍조가 유통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죄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모범수가 교도소에서 다른 죄수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지만 같은 죄수일 뿐입니다.
욥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다시 인정받고 싶은 겁니다. 회복에 대한 집념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허물어지면서 온갖 잡동사니가 그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찬란한 과거의 행적이 자랑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겸손을 가장해서 자신의 과거의 업적을 반복해서 부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을 잘 가르치면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현대철학에 의한 교육학으로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교훈의 꽃다발을 만들어 열심히 땜질로 애프터서비스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를 입고 욥처럼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의를 얻는 믿음과
거룩함을 얻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구원의 영적 시스템이 결여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잘못 태어났기 때문에 거듭나서 다시 태어나야 하고 육신대로 행하면
반드시 죽음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행하여 살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입어 믿음으로 의를
얻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져야만 창조목적의 그 ‘사람’이 되는 겁니다(창1:27-28)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께 찬양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