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즈베키스탄에 국제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긴 발신음 끝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차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6년째 그곳에 살며 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 김영순(67)씨다. 그는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 참사로 숨진 당시 서울교대 3학년 이승영씨의 어머니다.
군인 남편이 과로사한 뒤 딸마저 떠나보낸 그는 승영씨의 사고 보상금 2억5000만원을 전액 기탁해 '승영장학금'을 만들었다. 장학금을 만드는 건 딸이 일기장에 남긴 '일생 동안 하고 싶은 일' 14가지 중 하나였다. 김씨는 이후 15년간 딸의 나머지 소원들도 하나하나 실현시켰다.
'강원도에 이동도서관을 만든다'는 소원은 승영장학회가 강원도 한 포병 부대에 전천후 이동도서관 차량을 기증하면서 이뤄졌다. 시신 수습이 늦어져 하지 못한 '장기(臟器) 기증'의 꿈은? 김씨가 딸의 시신을 한 의과대학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그리고 그는 2009년 외아들을 남겨두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그저 '눈감는 날까지 나보다 힘든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다 가겠다'는 마음에서였다.
지금껏 인터뷰를 마다해온 김씨를 꼭 만나고 싶었다. 그곳까지 찾아가겠다는 기자의 말에 그는 이번에도 "정말 죄송하다"고 했다.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하루하루 사는 게 승영이 뜻 같아요."
대단한 일이 아니라 했지만 그가 만든 승영장학금은 가난한 신학대학원생 89명의 '빛'이 됐다. 지금은 목사와 전도사가 된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저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묵묵히 봉사하고 있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하고, 경기도 용인에 작은 요양원까지 만든 최만재(58) 목사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승영씨 어머니가 장학금을 만든 것처럼 승영씨 소원 중 '복지 마을을 만든다'는 꿈은 내가 대신 이뤄주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터졌을 때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20년 전 그때처럼 모든 국민이 내 일처럼 아파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엔 사고 직후 슬픔의 자리를 이내 '분노'가 대체했고, 유족의 분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 때문에 사회 분열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누나가 숨졌을 때 고3이었던 승영씨 동생 이상엽(39)씨는 그래서 세월호 참사가 더 마음 아프고 안타까웠다고 한다. 그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부부와 네 아이의 가족사진이다. 네 아이 중 둘은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던 누나를 대신해 그가 아내와 함께 입양한 아이다.
이씨는 세월호 유족들에게 "새해에는 결코 원망이나 슬픔에 빠져 있지 마시라"고 전하고 싶다 했다. "누나가 죽어서도 죽지 않고 이 땅에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처럼 세월호 참사로 돌아가신 고인들의 삶도 남은 가족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을 사는지에 따라 재평가될 겁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이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이 사회를 다시 한 번만 믿고 희망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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