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 부흥부 장관
1973, 79 제9대․10대 국회의원
1978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79 국무총리
1981 국정자문위원
1986 삼성물산 회장
1988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
1993 한일협력위원회 회장
● 대(代)를 이은 일제관리 집안
일제 때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일본 중앙행정관료’, 자유당 시절에는 ‘부흥부 장관(현 경제기획원 장관)’, 유신 독재 때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최규하 과도정권 시절엔 ‘국무총리’, 현재는 ‘TK 마피아의 실세’. 이처럼 우리 역사의 사계절을 중앙관료로 지낸 신현확을 거론하자면 먼저 그의 화려한 경력이 떠오르게 된다.
이처럼 인생 역정에 있어서의 거듭된 카멜레온적 변신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역사의 뒤편으로 추락하지 않고 생영할 수 있었던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그의 말대로 역사가, 아니 시대적 상황과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러한 운신(運身)을 하게 하여 고역(苦役)을 치르게 되었던 것일까? 그 자신의 운신의 능력이 그러한 그의 경력을 만들어 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진실이 묻혀 있는 것일까? 또는 신현확 같은 인물만이 폭풍처럼 밀려오는 세파를 헤쳐 나갈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튼 신현확은 격동적인 역사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회주의적으로 버티면서 살아온 대표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신현확의 출생지는 황해도 안악이다. 흔히 그의 고향이 경북 칠곡군 왜관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그의 본적지일 뿐이다. 그가 황해도에서 태어난 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는 부친인 신집(申執)의 직업 때문이었다. 1920년 10월 29일(음력) 4남 3녀 중 둘째 아들 현확이 태어날 무렵 신집은 황해도 안악군청에서 세무관리로 일하고 있었다. 관리라는 직업상의 특성상 부친 신집은 주로 경북지방이긴 했어도 근무지를 여러 군데 옮겨 다녔다. 그래서 4형제의 출생지가 모두 다르게 되었다. 맏아들 신현철(鉉哲, 1917년생, 경북 왜관 보건소장에서 1982년 정년퇴임)은 경북 금릉에서, 3남 신현천(鉉千, 1922년생, 전 경상대 총장, 방송통신대 교수 역임)은 경북 영천에서, 4남 신현탁(鉉卓, 1930년생, 지방공사 강남병원장 역임)은 경북 경주에서 각각 태어나게 된 것이다.
1910년대 일제는 강압적인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약탈하고 조선을 식민지적 예속체제로 재편하고 있었고, 회사령으로 일본 자본을 유입시켜 민족 자본을 억제한 노골적인 수탈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집은 1910년 나라가 망한 직후 서울로 올라가 토지측량 기술자를 양성하는 전문학교를 다녔다. 그런 후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실시한 대규모 토지조사사업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그후 세무관리로 일한 신집은 자신이 맡은 바 직무를 충실하게 꾸려 나갔다. 이러한 결과 1930년대 후반의 퇴임 직전에는 조선총독부의 고등관〔지금의 장관급, 친임관(親任官)이라고도 부르며 이는 일본 천황이 친히 임명식을 한 뒤에 임용된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 주는 서훈을 받았다. 이러한 포상을 통해서 보듯이 신집 자신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결국에는 일제를 도왔다는 것의 명확한 준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8․15해방이 되자 신집은 왜관읍장을 지냈으며 이승만의 독재 정권 수립의 전위대 역할을 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칠곡군 책임자를 지내기도 했다).
경북 일대에서 신동으로 알려졌던 신현확은 1938년 봄 경북고의 전신인 대구고보를 졸업(20회), 경성제대 예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경성제대 시절에 그는 탁구를 잘하여 일본에까지 학교 대표로 원정한 적도 있었다. 또한 그는 재학 시절 일본 고등문관시험(이하 고문시험)도 함께 준비중이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부친의 강력한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36년 동안 한국인이 일제 식민지 착취기관인 조선총독부나 일본 정부기관 그리고 일제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의 관리가 된다는 사실은 직접 간접으로 일제의 수탈과 착취를 지원하고 대다수 식민지 민중을 억압하는 일에 일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제 기관의 관리가 되는 것은 그 자체가 반민족행위였고,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고문시험에 통과하게 되면 다른 조선인 관리보다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는, 다시 말해 더욱 밀접히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관여할 수 있는 계기가 확보되는 셈이었다. 대다수 식민지 민중이 지극히 곤란한 생활을 했던 데 반하여 고문 합격자들은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보장받으며 일제의 하수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당시 1930년대 초 자작농의 평균 수입이 544원(圓), 소득 수준이 높다고 하는 평양시민의 90%가 1천원 이하였던 데에 비해 조선인 최고관리인 ‘도지사’의 연봉은 무려 5.350원이나 되었고, 고문 합격후 일정기간 수습을 거쳐야 하는 조선인 시보(試補)에게도 1년에 1.100원 이내의 많은 금액이 지급되었다(《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록》).
또한 고등문관은 합격자 전원에게 관리 임용을 보장하는 ‘임용시험’이 아니라 고등문관에 나아갈 수 있는 ‘자격시험’에 불과했고, 고등문관인 주임관으로 임용되기 위해서는 일제 당국자의 심사와 선발을 거쳐야 했다. 그러므로 일제 당국자에게 친일의 성향을 웬만큼 인정받지 않는 한 고등문관으로 임용되기 어려웠던 것이 당시 상황이었다. 고문의 3과 가운데서 당시 일본인들은 관존민비(官尊民卑) 사상이나 가치관 때문에 행정과에 합격하는 것을 제일 명예롭게 생각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조선 응시자들 역시 행정과 시험에 합격하여 일제의 관리가 되는 것을 영예로 생각하였다. 이는 이 시험에 응시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생각없는 사람들이었는지를 그대로 나타내는 사실이라 하겠다.
어쨌든 어려서부터 경북지방에서 신동이라고 소문났던 신현확은 1943년 경성제대 재학 시절에 일본 고문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부친의 소망을 풀어 주었다. 또한 그는 한국인 고문 합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본토 동경 중앙관서의 하나인 상무성(곧 군수성으로 개칭)에서 근무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실현한다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현해탄을 건너간 그의 8.15해방 당시 직책은 군수성의 군수 관리관이었다. 말 그대로 전시 체제하 일본군의 중요한 군수 물자를 관리하는 자리였다. 이는 신현확이 그만큼 일제의 신임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역으로 고통받고 있는 민족의 암울한 현실에 눈감아 버린 그의 행각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3.15 부정선거 관련 사실을 발뺌하기에 바빴던 부흥부 장관
해방 후 대구대 교수로서 3년을 보낸 신현확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4,5개월쯤 전에 휴직하여 왜관에서 휴양을 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중 그는 장택상(張澤相, 전 국무총리)을 중심으로 모인 칠곡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낙동회(洛東會)’란 모임을 통해 친목을 다져 나갔다. 그러던 중 장택상의 권유에 의하여 1951년 상공부 공업국 공정과장으로 취임,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의 관료로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상공부의 과장으로서 출발한 신현확의 그후 관운은 날로 빛을 더했다. 1954년 전기국장으로 승진하고 광무(鑛務)국장, 공업국장을 두루 맡아 상공부 내에서 실력자 국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국장 시절 그는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여러 차례 불려가 직접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앞에서 세부적인 정책 사항들을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제시대 관리의 행정업무 경력에 대한 평가와 실무처리 능력이 인정되어 1957년에는 부흥부 차관 겸 외자청장 서리를 맡게 되었고 1959년 3월에는 만 39세의 젊은 나이로 부흥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부흥부는 지금의 경제기획원의 전신으로 장기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국가 경제를 재건한다는 의도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주로 대미원조자금을 동원하는 것에 업무를 집중하였다.
당시 미국은 팽창정책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는 동북아 지역에 대미 종속국가를 만드는 일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소위 ‘원조경제’로 얘기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원조는 새로운 종속 국가를 형성해 나가는 지름길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는 미국의 자본과 기술에 종속되어 자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지 못한 채 파행성이 점차 심화되었다.
한편 4.19혁명 직후 신현확은 국무위원 일괄 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부흥부 장관으로 일한 지 꼭 11개월째 되던 날이었다. 그러고는 3.15 부정선거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곧 구속되었다. 5.16 군사정부가 1962년에 펴낸 방대한 분량의 《한국혁명 재판사》 제2집에는 그와 관련된 사건을 ‘부정선거 원흉 국무위원 사건’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당시 검찰측은 신현확을 포함하여 부정 선거 관련 국무위원 8명에 대한 공소 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자유당 입후보자의 당선을 위하여 전국 공무원을 총동원 구사할 목적으로 각 도마다 기관장회의 또는 행정협의회를 조직 강화하여 운영케 하고 중앙 각 지청간에 국장급 17명으로 구성되는 지방행정사무 연락조정협의회를 개최토록 합의하여 매월 3일에 동 회를 개최하고 또한 최인규(崔仁圭)가 고안한 공무원 친목회의 조직에 공명 합의한 후 최인규로 하여금 내무부 행정기구를 통하여 동 및 시․읍․면 단위로 이를 조직 운영케 하여 전국 공무원의 일반 유권자에 대한 선거운동을 적극 권유하고, 둘째, 자유당 입후보자의 95% 내지 99%의 득표율이 예상되자 피고인 등은 득표수를 적정 소멸 조절할 것을 상호 공모하고 최인규에게 일임하여 전국 각 도지사 및 경찰국장에게 이승만 80%, 이기붕 70% 내지 80%로 적정 소멸 조치할 것을 최인규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검찰측 공소사실에 대해 훗날 신현확은 회고를 통해 부인하고 있다.
나중에 사형 집행당한 최인규 내무와 곽영주(郭永周) 경무관 같은 사람들은 내막을 알고 있었겠지만, 사실 우리 같은 일반 국무위원들은 부정선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굳이 책임을 묻는다면 국무위원으로서의 도의적 책임이 있다고나 할까. … 재판 받는 과정에서 비로소 ‘정말 그랬구나’ 하고 알게 되었지만 세상 사람들이야 어디 그렇게 생각해 줍니까? … 그러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는 하지 말아 달라,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다시 장관이 된다면 - 필자) 지금껏 해오던 일을 똑같이 해 나가겠다.
이러한 그의 회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분명히 되짚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나라의 장관직에 있는 사람이 그 정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도 없이 단지 ‘정책 기술자(?)’의 입장에서만 자신의 친정(親政) 행위를 평가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승만 정권의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성격에 대한 그의 인식이 그 정도라면, 거슬러 올라가 일제 시대의 그의 행위 자체도 개인적 판단에 의해 역사적 평가가 가리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는 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안정을 빙자한 개발독재의 선두주자
신현확은 4.19 혁명이후 2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마치고 출감한 후 김성곤(金成坤, 경북고 15회로 신현확의 5년 선배)의 쌍용그룹과 함께 사업에 손댄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그러던 중 유신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73년에 김성곤의 추천으로 공화당 공천을 받아 국회에 진출한 신현확은 1975년 말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보건사회부 장관직을 맡게 됨으로써 경제정책의 총수이나 확대론자로 지목되는 남덕우(南悳祐)와 경제장관회의에서 국정을 논의하게 되었다. 1978년 12월 드디어 신현확은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 부흥부(현 경제기획원) 장관의 경력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또다시 유신정권과의 결탁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이었다.
흔히 신현확을 안정론자라고들 한다. 즉 1970년대 한국 경제를 성장 발전시켰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서 벗어나 내수시장의 확대, 긴축 금융정책 등을 통하여 인플레를 억제시키자는 것이 이 안정론의 주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안정론의 본래적 내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한 축은 농민을 볼모로 하는 농업희생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품귀현상이 빚어지는 고추, 차, 콩, 쇠고기 등을 무제한 수입하겠다는 정책인 것이었다. 긴축안정정책을 위해 다른 부분을 희생시키더라도 1970년대 성장정책의 그늘에서 지내왔던 농민을 배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안정론의 또 다른 한 축은 대기업, 즉 재벌위주 정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출이 부진한 기업체는 그 품목을 내수 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하여 기업의 활로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기업의 여신규모를 재벌 위주로 확정하게 되어 중소기업에서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재벌위주 정책의 배경에는 이전(1968년)의 쌍용그룹 계열 기업체인 동해전력의 사장 경험이 숨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신현확은 안정을 빙자한 개발독재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다.
● 과도 정권의 과도한(?) 총리
12.12 군부 쿠데타로 정승화파에 대한 숙청을 성공시킨 전두환의 신군부는 곧바로 내각 개편에 개입하고, 자기 파벌을 중심으로 군 내부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권력의 핵심을 장악해 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지만 당장 표면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군부의 재등장을 원하지 않고, 민주주의적인 제도와 절차의 확대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실세를 장악한 채 자신들의 권력을 제도화 할 수 있는 길을 암암리에 모색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행정부의 실세로는 신현확이 등장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하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최규하(崔圭夏) 총리가 10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나흘뒤인 12월 10일 신현확은 예상대로 신임 대통령 최규하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 되었다. ‘10.26 사태 후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이 일국의 재상인 국무총리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에 대해, 그는 “위기에 처한 국가의 부름을 회피할 수 없었다”라는 자기 합리화의 표현을 썼다.
최규하의 대통령 승계와 더불어 부총리에서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긴 신현확은 제1공화국 이래 역대 정권에서 거듭 중용되어 온 관록과 경북권의 인맥으로 구성된 정․재․관 관계의 핵심 엘리트들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10.26에서 5.17에 이르는 정치적 과도기에 대통령이었던 최규하에 비해 훨씬 더 적극적으로 정치 정세에 대한 의사표현을 함으로써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면서 신현확은 민주화를 실종시키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신현확은 1980년 1월 이후 잇달은 ‘신당설’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정부 주도 헌법개정론’을 앞세워 국회와 정면으로 충돌한 장본인이었고, 이원적 집정부제의 적극적인 주창자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신현확은 최규하 과도 정부 내의 민간인 강경파로서 기본적인 정치 노선에 있어서 신군부 세력과 일치했던 것이다.
그 단적인 예는 일본 『산케이(産經)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신현확이 ‘유신은 필요했던 것’ 이라고 주장한 데서도 드러났다. ‘박 대통령 사후 급속히 진전되는 한국의 민주화를 어떻게 보면 좋을까’라는 일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신현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치․사회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한창 구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국방력의 충실, 경제발전을 위해서도 어떻든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내하지 않으면 안된다. 국방력의 충실과 경제 성장의 단계에 응하여 박 대통령 서거라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았어도 민주화는 진전되었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금후도 적극적으로 민주화를 추진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것을 단숨에 바꿔 버린다는 것은 현실 파괴이고, 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따라서 종전의 것을 잘 분석하여 계속할 것은 계속하고, 개선할 것은 개선한다는 유연한 태도로 일보 전진할 생각이다(『산케이신문』, 1980년 3월 10일자, 『조선일보』, 1980년 3월 18일자).
또한 3월 11일 아주(阿洲) 및 미주 지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하여 행한 치사에서 신현확은 ‘안보 우선, 경제 우선의 논리’를 확고하게 주장하면서 정치민주화 일정에 쏠리고 있는 전국민적인 관심의 초점을 바꾸려고 기도했다.
지금 우리는 과거에 없던 어려운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보문제가 작년에 비해서 금년에 조금이라도 호전되었느냐 하면 오히려 위험성은 더 커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또 경제가 작년보다도 국제 경제정세를 위시해서 국내 사정도 더 어려워진 것도 사실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국내에 정치 변혁이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어려움이 지금 겹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디에다 최대의 중점을 두느냐는 것을 정부로서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된다고 믿습니다. 지금 정부는 최대 중점을 안보에 두고 있습니다. 둘째는 경제에 두?있습니다. 셋째로 정치 변혁 내지 발전에 두고 있습니다. … 정치는 우리 국내에서 우리 사람끼리 모여서 논의해서 어떻게든 해나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안보는 그렇지 못합니다. 경제도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총력을 기울여도 될까말까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안보와 경제, 이것이 최대의 문제이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범위 안에서 우리가 가능한 힘을 모아서 빨리 정치 부문도 발전을 시킨다는 식으로 중점을 잡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합니다(『조선일보』, 1980년 3월 18일자).
이상의 발언은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으며, 낡은 유신체제를 새롭게 바꾸고자 하는 마당에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사고를 지닌 사람의 발언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민의를 외면하고 낡은 유신독재 체제를 옹호하고 나선 신현확의 발언에 대해 야권 일반이 “과도 체제 지도자가 도도히 흐르는 민주주의 물결을 역류시키려 든다”며 일제히 성토하고 나선 것은 물론이었다. 공화당조차도 신현확의 발언에 반발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신현확은 자신의 발언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면서 문제된 발언을 공개하고 나섰다.
이처럼 신현확은 유신독재 체제에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따라서 국민의 압력에 밀려 유신헌법을 철폐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지 않을 수 없게된 상황에서도 새로운 억압적 체제의 수립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역사의 대세로 받아들여졌던 독재 철폐와 민주화의 진척은 불투명하게 되었으며 더욱 오리무중 상태로 빠지고 말았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정치상황을 빗대어 ‘안개정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민주화의 전망이 날로 어두워져가는 가운데 정국 전망을 더욱 어둡게 하고 정국의 불안과 정부의 의중을 의심케 한 또 하나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것은 바로 신현확 총리의 외신 인터뷰였는데,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개헌은 정부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조선일보』, 4월 17일자).
이러한 신현확의 반역사적․반민주적인 행보로 인해 당시 민주화 진영은 계엄철폐, 전두환 퇴진과 더불어 신현확의 퇴진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저녁 이화여대에서 전국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은 제1회 전국대학 총학생회장단 회의를 열었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경찰의 기습으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된 이 회의에서 회장단은 5월 22일까지 비상계엄 해제, 연내 정권 이양을 위한 정치일정의 조속한 천명, 5월 20일까지 전두환 퇴진 등과 더불어 신현확의 퇴진 등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민주화 세력 외에도 공화당과 유정회까지도 정부의 조속한 계엄해제와 문제가 되고 있는 전두환, 신현확으로 대변되는 극우 강경세력의 인사 조치를 요구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5월 20일부터 열릴 예정인 국회에서 계엄해제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여야 합의로 통과될 가능성이 높아져 있었으며, 종교계․언론계․학계 등에서도 잇달아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이 나오고 있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5월 20일 이후가 되면 극소수 극우 강경파를 제외한 모든 세력들이 하나로 연합할 가능성이 매우 컸던 것이다. 이로써 신군부 세력은 명분상으로도 완전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즉 5월 20일 국회가 열리게 되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 및 신현확에 대한 인책 요구가 강력해질 것은 필연적으로 내다보이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우 강경파는 5월 17일 토요일 자정을 기해서 계엄 확대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경찰이 이화여대를 급습하기 직전인 1980년 5월 17일 오전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각급 학교 휴교조치,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됐다. 회의를 마치고 주영복 국방장관과 이회성 계엄 사령관은 신현확 국무총리에게 자신들의 결의를 보고했고, 신현확은 주영복과 이희성을 대동하고 청와대로 올라갔다. 신군부의 압력을 받아들인 최규하는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비상계엄안을 의결하였고, 당일 자정을 기해 전국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이날 비상국무회의는 완전무장한 정복 군인들이 복도에까지 도열한 삼엄한 분위기 아래서 열렸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결정이 군부의 일방적인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지난 1988년 청문회에서 압력 여부를 묻는 질문에 신현확 당시 총리가 “5.17 계엄확대 조치는 필요한 조치였다”고 강변 한데서도 볼 수 있듯이 행정부 내 강경파들도 이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물론 행정부 내 강경 인사들의 정상에는 신현확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도 정권의 과도한 총리였다고 할까. 이러한 신현확의 사고와 정치 행각은 결과적으로는 5공 독재의 등장을 도운 것이 되었다. 결국 과도정부의 ‘시간 끌기’로 말미암아 1979년 연내에 개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1980년 상반기의 선거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80년 5월 ‘피를 뒤집어쓰고’ 신군부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자 최규하-신현확의 과도정부는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였다. 10년 가까운 유신독재 탓에 척박할 대로 척박해진 이 땅에 민주화의 길을 닦아 놓고 명예스럽게 퇴진하지 못한 데 대해서 신현확은 커다란 책임을 져야 마땅할 것이다.
● 불행한 역사의 앞줄에 서 있었던 산증인
나의 인생이 화려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운명이 그럴지 모르나 태풍 같은 격변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태풍의 눈에 휩쓸려 들어가 고역을 겪곤 했지요. 자유당 정부 수립 후 관계에 들어간 지 5년만에 장관이 되었을 때 4.19가 일어나 징역을 갔었습니다. 3년 가까운 긴 세월을 교도소에서 살고 나오니 박 대통령이 ‘다시 나와 일해달라’고 청을 해 관계에 다시 몸을 담게 되었는데 공화당 말기 그 혼란의 와중에서 또 고역을 겪어야 했습니다. 일이 터지면 터질 때마다 그 현장에는 내가 있었으니 ….
위의 말들은 화려한 인생 역정에 대한 신현확 자신의 평가다. 그런데 그의 이런 말들에는 문제가 있다. 역사를 보는 눈이 그렇고 마치 자신이 역사의 피해자인 것처럼 ‘고역을 당했다’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가 ‘고역(苦役)만 겪었다’는 그 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진보’의 시기요, ‘발전’의 시기였다. 8.15 해방, 4.19 혁명이 그랬고, 1980년 ‘서울의 봄’이 그 발전과 진보의 시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제 방향으로 돌리지 못하고 스스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가 올바른 가치관과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 역사는 분명히 혼란의 모습으로만 비춰지진 않았을 것이며 그 자신이 고역만 치렀다고 이야기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역사가 그를 ‘고역’을 치르게 한 것 중에서 대부분은 그 스스로가 택한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볼 때 앞의 얘기처럼 그는 ‘우직한 성품만을 지니지는 않았다. 신현확의 처세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그가 일본 본토 군수성에서 전시물자를 관리하던 군수관리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8.15 해방을 두 달 남짓 남겨 두고 그는 돌연 귀국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당시 “일본 지방에서 가만히 전황을 보니 일본은 곧 망할 게 틀림없었어요. 마침 한 열흘 한국으로 출장할 일이 생겨, 현해탄을 건넜지요. 그 길로 나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에 돌아가질 않고 아버님을 모시고 대구에 눌러 앉아 버렸습니다”고 회고한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일제 관리 출신들의 처세의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1980년 ’안개 정국‘이라 불렸던 시절, 그는 총리로 임명되자마자 유신정권과 함께 생사 고락을 같이 했던 ’공화당‘을 탈퇴해 버리는 발빠른 행보를 보여주어 정치인들조차 놀라게 했다. 이러한 그의 처세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 볼 때 8.15 해방이후 한때 자숙하는 그의 모습도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의 한 방편이었다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
한편 신군부가 등장한 1980년 이후 총리직을 물러나 은둔 생활을 지속하는 가운데도 그의 집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가운데 많은 수가 각계에서 나름의 영향력을 지닌 경북 출신의 후배들로 알려진다. 워낙 그의 위상이랄까 영향력이 예사스럽지 않은 까닭일까, 그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들이 그럴싸하게 장안에 퍼져나가곤 했다. ‘TK 마피아의 대부’란 지칭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0.26이후 총리로서 신현확의 조각(組閣)은 그러한 성향의 일단을 보여 준다. 그는 박동진(朴東鎭) 외무장관(경북고 22회, 국회의원 역임)을 유임시켰으며, 문태갑(文胎甲, 경북고 30회, 서울신문사 사장 역임)을 비서실장에, 황선필(黃善必, MBC 사장 역임)을 공보비서관으로 발탁해서 썼다. 이러한 연유로서 그를 일컬어, 경북고 20회 동기 동창인 김준성(金埈成) 전 총리, 정수창(鄭壽昌) 전 대한상의 회장(경북고 20회, 경북 영덕)과 더불어 경북고 인맥 ‘삼웅(三雄)’이라고 불리어진다.
일제 시대, 이승만 독재, 박정희의 유신독재, 전두환 독재의 사계절에 걸쳐 두루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했던 신현확, 그리고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TK 마피아의 대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온 신현확. 그는 왜곡된 우리 역사의 단편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 인물상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변혁의 시기에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감춰진 역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이 시대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은 왜곡된 역사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갚아야 할 빚’인 것이다.
□ 심상주(외대 정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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