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의 상황
330년 5월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리키니우스에 대한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가장 큰 유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라는 도시와 그리스도교 개종이다. 그의 말년에는 비교적 특기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단독 황제가 되는 고된 과업을 성취했음에도 단 한 사람의 후계자에게 모든 권력을 넘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1세,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정제로, 두 조카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친족 관계로 강화된 사두정체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을 야전에 보내고 황제 자신은 차츰 원정에서 빠졌다. 다뉴브 방면에서는 고트인을 상대로 약간의 성공을 거둔 반면, 동방에서는 페르시아의 개입으로 아르메니아의 그리스도교도 왕이 사산 왕조의 피후견인으로 교체되었다. 전면전이 임박한 듯 보였고 콘스탄티누스도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원정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37년 5월 니코메디아의 주교 에우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은 뒤 유혈 참사가 벌어졌다. 황제의 세 아들과 어린 조카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를 제외한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모든 남성이 살해당했다. 338년 세 아들은 제국을 나누기로 합의했으나, 353년까지 내전과 찬탈이 이어지다가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만이 살아남아 단독 황제가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사촌 율리아누스를 갈리아의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율리아누스의 잇따른 군사적 성공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멀어지게 했는데,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가족을 살해했다는 데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전쟁이 목전에 다가온 듯 보였다. 율리아누스는 360년 휘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고 동방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으나, 콘스탄티우스가 361년 페르시아 원정 중에 죽는 바람에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 황제가 옛 신앙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자, 대중은 돌변했고 그리스도교도들은 경멸의 뜻을 담아 그를 ‘배교자’라고 불렀다. 율리아누스의 이교 포용은 퍽 개인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실용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어 그리스도교의 성공에서 자선 활동 같은 핵심적 요소를 재빨리 파악해 이교 지도자들에게 모방하라고 촉구했다. 율리아누스는 전임자들이 그리스도교도들에게 부여한 특권들을 몰수하기까지 했다.
궁전과 군대에서 대숙청을 마친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에 착수하여 362년 군대를 안티오키아 인근에 집결시켰다. 율리아누스가 1년가량 안티오키아에서 머무르는 바람에 식량 부족 사태가 일어났다. 사후 조치는 이루어졌지만 안티오키아의 시민들은 율리아누스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다(이에 대한 답으로 황제는 <수염 혐오자(Misopogon)>라는 풍자가 담긴 책을 남겼다. 이 책은 고대 후기에 쓰인 생생하고 유머러스한 글 가운데 하나이다). 율리아누스는 안티오키아를 떠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전투 중에 치명상을 입었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의 전설에 따르면 죽은 성자의 창이 입힌 상처였다고 한다.
율리아누스의 후계자 요비아누스는 페르시아와 굴욕적인 협상을 맺고 재빨리 퇴각했으며, 36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 군대는 새로이 발렌티니아누스 1세를 황제로 선출했다. 새 황제는 동생 발렌스를 동방의 공동 황제로 임명한 뒤 자신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제국의 서방을 다스렸다. 이후 몇 년 동안 찬탈 시도가 잇따랐음에도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침공을 시도하는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키는 데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75년 발렌티니아누스가 죽자 아직 미성년인 그의 두 아들 그라티아누스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상당한 규모로 고트 집단이 훈 제국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고는 다뉴브강을 건너 로마 제국 영토에 정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제국은 대이주를 감당하지 못했고, 양 세력의 갈등은 커지기만 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삼촌인 발렌스 황제는 군대를 이끌고 고트 집단을 막으려 했으나,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대패하여 황제는 로마군 3분의 2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251년 데키우스 황제가 전사한 이래 처음 있는 대참사였다. 몇 달 뒤 스페인 지방의 군사령관이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위에 올랐고, 곧 서방제국 황제 그라티아누스의 인정도 받았다. 380년 테오도시우스는 고트 집단에 패배했으나, 382년 평화 협상을 맺는 데에 성공했다. 고트 집단은 자체 통치자들의 통제 아래에 제국으로 받아들여져 다뉴브 전선 인근에 정착했다.
383년 그라티아누스가 진중 반란으로 살해당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이 반란을 388년 진압했다. 그는 383년에 이미 자신의 아들 아르카디우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동 황제로 선언해 놓은 상태였고, 서방 문제를 일단락 지은 뒤인 393년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를 서방의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