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베르탱 메달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14,6~9)
올림픽에 나가 메달을 딴 선수가 시상대에서 보이는 태도를 분석한 데이터를 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납니다. 심리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고통 1점, 기쁨 10점으로 점수를 매겼을 때 동메달을 딴 선수들의 표정점수는 7.1점이고 은메달을 딴 선수들의 표정점수는 4.8점으로 동메달을 딴 선수들이 더 기뻐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와 비교하는 심리’에 젖어 있으며, 만약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법 사고’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메달을 딴 사람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에 대해서 두고두고 곱씹으니 아쉬움이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금메달이지 자신의 목에 걸린 은메달이 아닙니다. 저 금메달은 내 목에 걸렸어야 했는데 하고 생각을 하니 자신의 은메달이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메달을 딴 사람은 까딱 잘못했으면 여기 시상대에 서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그나마 자신의 목에 걸린 동메달도 대견하기 그지없습니다. 비록 동메달이지만 메달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싶어 가슴 한편이 뿌듯한 것입니다.
은메달을 딴 사람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먼저 자기 자신에게 돌립니다. “연습을 게을리 한 거야. 그때 그 기술을 썼으면 분명히 이겼을 텐데. 결승전에서 방심한 거 다 내 잘못이야.” 등등 이렇게 자책이 깊어지면 온화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설령 겉으로는 웃더라도 그건 가짜 웃음입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실패의 원인을 외부로 돌릴 때입니다. “나도 더 좋은 부모 밑에 태어났더라면, 더 좋은 환경에서 열심히 했을 텐데. 좋은 코치, 좋은 감독, 좋은 환경만 제공되었더라면 금메달을 분명히 목에 걸 수 있었을 텐데.” 이런 경우 금메달을 따지 못한 데 대한 실망이 타인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 쉽고, 급기야 그 분노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으로 바뀌기 쉽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중국 임제 선사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이라도 늘 집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재도중 불리가사)” 사람들은 목적과 수단을 분리하여 생각하기를 잘합니다. 직장을 나가거나 노동하는 것을 집을 마련하거나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일과 노동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무엇 무엇으로 나가는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은 자신을 한낱 수단으로만 여기고 일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목적인 경우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창설의 공로자 쿠베르탱 남작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올림픽은 이기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 말을 바꾸어서 표현하면 “인생은 성공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노력하는 데 의미가 있다.”가 됩니다.
1964년 처음 제정된 ‘쿠베르탱 메달’은 지금까지 단 17명에게만 수여되었는데 스포츠맨십을 보여주고 자신을 희생한 선수들에게 수상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 리우 올림픽에서는 육상 경기 도중 메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경기장에 쓰러진 선수를 일으켜 함께 완주한 니키 햄블린(뉴질랜드)과 애비 디아고스티노(미국) 선수가 쿠베르탱 메달의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1988 서울올림픽 때도 이런 미담이 있었습니다. 요트 경기가 열리고 있던 도중, 싱가포르 선수들의 요트가 강풍에 전복되면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를 발견한 캐나다 선수 로렌스 르미유는 2위로 달리고 있었는데 바로 코스를 이탈하여 자신의 배로 선수들을 구하고, 그들이 구조보트에 탈 때까지 함께 기다립니다. 안타깝게도 22위로 올림픽을 마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위험에 빠진 선수들을 구했던 자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해 본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올림픽 메달보다 참가에 더 뜻이 있다는 쿠베르탱의 정신을 제대로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예수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신 것처럼 내가 새로운 예수님이 되어 이웃에게 길이 되는 삶을 살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의 독창적인 모습을 유지한 채 삶의 목적이 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인 여러 성인들의 성격이 전부 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삶은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은 것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14,12)
우리가 감히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까하고 의아하게 생각하겠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우리가 자신의 길에서 독창적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때 타인에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또 다른 쿠베르탱 메달을 받는 삶을 보여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