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고무신을 주으려다 총에 맞아
증언자: 전재수(남)/전영병(아버지)
생년월일: 1969.(당시 나이 12세)
직 업: 국민학생(현재 사망)
조사일시: 1988. 11
개 요
5월 24일 진월동에서 있었던 총격전 때 희생됨.
벗겨진 신발을 주우려다 총에 맞아
80년 5월 24일! 계엄군의 무차별 난사로 목숨을 잃은 내 아들 재수는 그때 나이 겨우 12살인 효덕국민학교 4학년이었다. 광주상황이 격렬해지자 국민학교에까지 임시휴교령이 내려 사고가 난 그날도 재수는 또래 아이들과 마을 앞산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그 무렵 교통사고를 당해 발에 깁스를 하고 쉬고 있었다.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재수가 손밑 여동생과 싸우길래 "아버지가 이렇게 아파 누워 있는데 너희들은 왜 그렇게 시끄럽게 싸우느냐"고 하자 밖으로 나가서 논 것이 그런 큰 사고를 당하게 된 것이다. 우리 동네 앞에는 지원동으로 통하는 군사도로가 나 있다.
오전에는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마을 앞길을 지날 때 아이들과 서로 손을 흔들어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오후 두 시쯤 되었을까. 갑자기 온동네가 떠나갈 듯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놀라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숨이 턱에 차서 뛰어왔다. 그러더니 날벼락 같은 말을 내뱉었다.
총격살상<주남마을. 국민학교 4학년 짜리를 10여 발이나 어머니는 홧병으로 죽고.>
"재수 아버지, 재수가 죽었어요. 군인들이 총을 쏴서 재수가 죽었어요." 군인들이 마을에 대고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총을 갈겨댈 때 마을 한씨 선산에서 놀던 아이들은 총소리에 놀라 산 뒤로 무작정 도망을 쳤단다. 그런데 허겁지겁 뛰어가던 재수의 검정 고무신이 무엇에 채여 벗겨졌다. 재수가 뒤돌아 고무신을 주워 들려는 순간 쏟아지는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린 것이다. 얼마 후 시청에서인지 어디에서인지 사실여부를 확인해 보자고 해서 시커멓게 변색해 있는 아이를 다시 파가지고 전남대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 시체해부를 해보더니 M16을 십여 발이나 맞았다고 했다. 아내는 사고 후 식음을 전폐하고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더니 위가 나빠지고 간경화에 걸려 고생을 많이 했다. '지역개발협의회'에서 준 천만 원의 보상금이 아내 치료비로 다 들어갔으나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다.
앞이 캄캄했다. 그때부터는 나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찌나 속이 상하든지 아무 곳에나 묻어버리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친지들이 동네 앞산에다 묻어 주었다.
집사람과 나는 그 자리에 차마 가보지 못했다. 사람들 말이 어린 것한테 얼마나 총을 갈겨댔는지 그 끔찍한 형상을 도저히 눈뜨고는 못 볼 정도였다고 한다.
병원에서 시체를 어디에다 묻을 것인지 물어왔다. "가까이 두면 더 속이 뒤집어질테니 그냥 망월동에 묻어줘라." 고 해 재수는 지금도 망월동에 묻혀 있다.
그 후 나는 그래도 남자라 술이라도 먹고 잊어버리는데 집사람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고생하다가 결국 1984년에 아들 따라 가버렸다.
무책임한 총격
나는 이곳 진월동이 본적지라 어려서부터 부모님 따라 농사짓고 살았다. 그러나 집안이 빈곤해 농토도 없고 평생 남의 소작농으로 살고 있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지만 재수는 막내 아들이라 그랬는지 저희 형들이나 누나들과 달리 아이가 유독 정이 많고 사랑스러웠다. 학교에서도 상을 많이 받아와 참으로 대견한 녀석이었다. 일찍 죽으려고 그랬는지 부모 속도 안 썩이고....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내 아들이 스무 살 정도 되어 도청 앞에서 총 들고 싸우다가 죽었다면 이토록 원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열두 살 난 어린애를, 그것도 벗겨진 신발 주우려는 어린 것한테 그렇게 무자비하게 총을 갈겨대야 했을까?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후유증으로 아내까지 잃고 보니 너무나 분하고 원망스럽다. 이 한을 어디다 호소해야 될지 모르겠다.
나중에 들으니 계엄군이 저희들끼리 오해가 생겨 총격전을 벌이다가 인근 마을에 그렇게 무차별로 총을 쏴댔다고 했다. 총이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인데 꼭 쏠 곳에다만 쏘아야지, 죄없는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쏘아대다니. 그놈들의 행동은 순장난이었지, 어찌 군인들이 할 짓인가.
내 생각에는 총책임자였던 전두환이나 그 밑의 군인들이 다 잘못한 것이다. 직속상관이 교육을 제대로 시켰더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 아닌가. 실탄을 하나라도 아껴야지. 동네 앞에 서 있던 커다란 소나무가 그때 군인들이 갈긴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온 마을에 탄피가 깔릴 정도였다.
유족회 활동은 1982년부터 시작했지만 모임에 나가면 다른 사람들은 내외가 함께 참석하는데 나는 혼자라서 더욱 쓸쓸하고 내 자식이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만 더 상하고 뒤집혀 모임에 나가지 않았는데, 박찬봉씨가 찾아와 부탁해서 지금은 그곳으로 다니고 있다. 이제는 5.18에 대해서 그만 떠들었으면 좋겠다.
이미 지난 일이니 그것은 역사 속의 일로 덮어두고 앞으로는 정치를 잘해 좋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양선화, 양난희)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