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에 있는 차원부 설원기에 대한 비평
1. 이재난고 문집에 대하여
50책 6,000장.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저자가 10세부터 63세로 서거하기 2일 전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생각한 문학(文學)·경학(經學)·예학(禮學)·사학(史學)·산학(算學)·병형(兵刑)·종교(宗敎)·도학(道學)·천문(天文)·지리(地理)·역상(易象)·언어학(言語學)·전적(典籍)·예술(藝術)·의학(醫學)·음양(陰陽)·풍수(風水)·성씨(姓氏)·물산(物産) 등 정치, 경제, 사회, 농·공·상 등 인류생활에 이용되는 실사(實事)를 망라하여 쓴 일기 또는 기사체(記事體)로서 책마다 쓰기 시작한 연대와 끝낸 연대를 기록하고 난고(亂藁)라는 표제를 달았다.
황윤석은 소과합격(小科合格)에 그쳤고 관직도 낮은 지위에 그쳤지만 학문으로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보다 1세대쯤 앞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며, 학문의 영역이 광범하고 학풍이 정치(精致)한 점에 있어서도 높이 평가된다.
그의 학문은 사후(死後) 53년인 1829년(순조 29)에 후손 수찬(秀瓚)과 당시의 전라도관찰사 조인영(趙寅永)에 의하여 간행된 ≪이재유고 頤齋遺藁≫ 12권 7책과 이 유고가 간행된 지 114년 뒤인 1942년에 역시 후손 서구(瑞九)와 향유(鄕儒)들에 의하여 속간된 ≪이재속고 頤齋遺藁≫ 14권 7책과 ≪이수신편 理藪新編≫ 10책에서 그 학문적 도량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현재까지 간행되지 않고 유고(遺稿) 그대로 남아 있는 ≪이재유고≫에서 그 학문의 깊이를 엿볼 수 있다. ≪이재난고≫는 그 엄청난 양뿐만 아니라 실학적인 내용과 함께 한국의 저술사상 최고의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는 특히 속고 간행시에는 난고 중에서 선집(選輯)한 것도 약간 있지만 시문이나 언어·산학·도학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것도 난고 내용의 1/5도 못되는 것이며, 난고는 실학적인 면에서 귀중한 학술연구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황병관(黃炳寬)이 소장하고 있다
2. 이재난고에 있는 차원부 설원기 관련 내용
(1) 二十七日丙午 (이재난고 권13) : 박은정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의 논문에 의하면 1769.6.27
芝湖李公選 素稱精博 又累以曝史攷出 秘藏甚多 著勝國新書一卷 其中與世上流傳 牢不可破者不同 亦非一二 如麗末金籠巖臨江寄衣等事 及金桑村死節謂皆浪說 又如車元頫雪冤記 亦謂其贋作矣 余曰頃歲見南鶴鳴之子 直寬(南克寬 1689-1714) 所撰 夢囈集 亦言雪冤記 非六臣諸公所作乃車天輅父子兄弟贋作 欲以增重世譜耳
(번역) 지호(芝湖) 이선(李選, 1632-1692)공은 본디 지식이 넓고 깊다. 또 거듭 역사를 드러내고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는 일이 아주 많았다. 승국신서(勝國新書) 한 권을 저술했는데 그 안에는 세상에 확실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같지 않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고려말 농암(籠巖) 김주(金澍)가 강에 이르러 옷을 보내왔다는 등의 이야기와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가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는 이야기는 모두 낭설이라 한다. 또 "차원부설원기"[元은 原의 오기] 또한 위조(僞造) 작품이라 한다.
내가 전에 남학명(南鶴鳴)의 아들 남직관(南直寬)[남극관(南克寬)의 오기]이 쓴 몽예집(夢예集)을 보았는데 역시 설원기가 사육신의 여러 분들이 쓴 것이 아니며, 차천로 부자형제가 위조하여 족보를 부풀리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류 주환 교수님 번역을 인용한 것임. 원래 이 글은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있는 글로 1842년 이재난고에 있는 글 중 주요내용등을 발췌하여 간행한 문집이 이재속고로 이재속고에도 이와 동일한 글이 있음)
(2) 十五日丙申 (이재난고 권13) : 박은정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의 논문에 의하면 1776.8.15
曉晴 ○奴以馬雇 赴東小門外[주:京人 皆以秋夕上塚故也]
昨日 洪伯能(주1)言 曾見車氏雪寃記否 出而示之 乃近年金龜柱(1740-1786)爲大司成時 撰跋重印者也 余曰 此記南處寬(주2)曾云 車天輅三父子贋作(안작)
어제 홍 백능(주1)이 말하기를 일찍이 차씨설원기를 꺼내어 읽어 보았는데 (그 내용이) 비루한데(또는 그 내용이 의심이 간다), 근래 김귀주(1740-1786)가 대사성 직에 있을 시 그 내용을 골라 다시 발행한 자가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남처관이 쓴 글을 보니 차천로삼부자의 위작이라고 하였다.
(주1) 홍 백능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홍대용(1731-1783)의 담헌서에 나오는 인물이고, 또한 김이한(1722-1791)의 삼산재집에도 나오는 인물로 정조시대의 문인으로 추정된다.
(주2) 남처관(1695-?)은 남극관(1689-1714, 몽예집의 저자)의 동생이고 류봉휘(1659-1727, 문화류씨 영의정 류 상운의 아들임)의 사위이다. 황윤석이 이글에서 몽예집의 저자 남극관의 이름을 착오로 동생인 남처관으로 오기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던 남극관, 남처관 형제는 차원부 설원기가 안작임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고 남처관의 장인이 문화류씨 하정공파 류 봉휘이고 류 봉휘의 아버지가 영의정 류 상운(1636-1707)이다. 이렇게 류 상운(1636-1707)의 아들 류 봉휘와 남구만(1629-1711)의 아들인 남학명(1654-?)는 사돈지간이다. 즉 류봉휘(류상운의 아들)의 딸과 남학명(남구만의 아들)의 둘째아들 남처관이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류 상운이나 또는 류 봉휘는 남극관등에게서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인데 류 상운은 연안차씨 무자보(1708년간)의 발문을 1706년에 썼다고 하나(이에 대한 논증은 전 문화류씨대종회 상임부회장 류 종현이 한 바 있고 약재집에는 이러한 발문이 없음) 이 또한 누군가 조작하였을 것이라는 의심이 간다.
*** 약재공 류 상운과 남 구만은 당대의 명신으로 손자들간의 혼인 관계가 있었고 약재공이 돌아가실때 "신도비를 세우지 말라"고 하셨는데 사후에 남구만이 신도비명을 썼다.
而 李選(1632-1692, 승국신서 저작)前已云 然果有車雲岩元頫 如此卓然之大節 是直圃牧一流 豈有他人專不說道之理 伯能曰然
또한 그 전에 이선의 말하기를 ----- 제가 나름대로 해석한 것인데 맞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래는 홍백능과 황윤석의 대화 내용 같기도 하고 해석이 어렵습니다. -----
伯能又言 近得岳珂所爲金鉈稒禾卒編 備載其祖武穆王飛事宲 及後來褒錄之跡 視精忠錄加詳 而所謂金鉈二字 莫曉其義云[주:余言 珂又有程史 其義亦所未喩]
伯能又言 曾見辛應純省齋漫錄 李頤正東國記事 辛公 靈光人 李公 余所及見 所輯此書 寒泉嘗目之曰 遯翁野錄
伯能又言 兪相公[주:拓基]所輯先世內外窮源錄 自戊戌以後三十餘年 尙未完役 分作四卷云
伯能又言 趙孝承本意 未必只擧光恒 或以泰億爲可寬 而疏入之日 上曰 並擧三大臣光恒億乎 金尙喆曰 只擧兩大臣矣 孝承
旣竄蒙宥也 下敎又有只擧兩大臣一條 孝承歸次長湍 始不勝追悔云
伯能又言 或有所記渼上語錄等文字乎 正禮近已編成年譜 而立朝事業無多 未免草略 故今方待京鄕門下人語錄文字裒來 欲以抄附其後耳 余曰 吾則果有語錄 已托永同 而他人亦有送到者乎 伯能曰 未也
伯能又言 徐元德 頃當三凶[주:光 恒 億]復官之際 以大諫求避 僅免發啓 頃於渼上相逢曰 兄於丈席 有所師得乎 曰未也 吾言只此求避 亦可謂有得歟 元德亦憮然 吾言兄視申益彬 可謂幸耳 元德又無言
伯能又言 頃逢洪台樂性 來自完營 語及左
右長城山訟事 則彼言黃喪人用心於難圖之地云矣 余曰 此台過於柔善 不能束一下官 又不省山地當禁與否耳 伯能曰 此事吾固力囑 而此台果無威風 奈何
是日 靈岩文君粲龜來見 因言 文命龜 卽咸興人 明經文科 爲人木直有卓識高才 能前知來事 出入桂洞趙台門下 曾爲庇仁縣監 今寓連山等處 ○午訪金圭瑞 圭瑞亦言 少時與文命龜 同榻明經 其人神於相法 亦不肯輕言 嘗爲鄭安州士直氏言 今年切勿南歸 應加緋玉 果陞承旨 餘皆類此
(3) 二十六日戊戌 (이재난고 권13) : 박은정 <차원부설원기 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 의 논문에 의하면 1786.06.26 --- 황 윤석은 차원부설원기에 대하여 이미 남극관의 몽예집를 보고 위서를 알았고 본인도 차원부설원기가 위서임을 알고 있었는데, 1786년 진주에 사는 차석우,차석주등이 차원부 증시 관련 상소 초안을 황 윤석에게 써다라고 부탁한 내용인데 이를 황윤석은 거절하였다는 내용이다. 그 이후 차 석주는 일성록에 의하면 1788. 4월에 차원부 증시 관련하여 상소를 하는데 오래전에 있는 일이라 불가하다는 답변을 내렸다.
今日 吏曹二十九日都目政事 爲之之意 敢啓 ○晉州正面車錫雨錫周從兄弟 以李奉事言 來示其先雲岩原頫 請褒諡上言 草要余叅修 余辭以不能□君言 當更來訪 又言關西文官車信周丙丁節士禮 亮之後也 湖中文官車彦輔 有易學 亦皆□□ 回禍五從兄弟之後云 ○聞宋仲建 移寓于宋先達允大允喆兄弟下處 宋先達 報以本家奴馬已近來 來時其叔先達贊旭病 未作書于余云 仲建 今夕當自闕中退出 ○南平洪亨輔 自壺洞寓所來見自言再到 ○白師斌來 林先達懋□亦爲訪金載潤來相話 ○午雨
<참고> 일성록 1788년 정조 12년 4월 4일 (병신일)
각 해사(該司)에 상언(上言) 166도(度)를 판하(判下)하였다.
목 ○ 하교하기를,
“지금 내린 상언을 모두 기한 안에 회계(回啓)하게 하라.”
하였다.
○ 상언은 다음과 같다.
또 아뢰기를,
“하동(河東)의 유학 차석주(車錫周)의 상언에, ‘선조인 고려조(高麗朝)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차원부(車原頫)에 대해 증시의 은전을 입게 해 주소서.’ 하였습니다. 오래 전의 일이라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되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3. 황 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에 차원부와 관련된 글이 3편 정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첫댓글 남처관과 류상운 공(약재상공)과의 관계는 제가 알지 못하던 내용이어서 흥미로웠습니다. 류종현님께서는 다시 상임부회장으로 임명되어 현직으로 있습니다. 여러 증거로 그분이나 저나 약재상공께서 연안차씨 무자보를 썼다는 것은 위조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재난고의 색인집이 있어 그로부터 설원기 관련 기사들을 모두 찾아 뽑아놓았는데, 한번 더 살펴본다는 것이 차일피일 미루어져 왔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글을 보니 고맙습니다. 저도 시간이 나는 대로 더 살펴보겠습니다.
남구만과 같은 집안인 남이공(이조판서)의 헌판시가 전남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 영팔정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모산리는 약재공(류상운)이 잠시 낙향하였으며 약재공의 부 조부 증조가 살았던 문화류씨 집성촌입니다. 영팔정에 있는 고경명, 이율곡 시 등이 번역되어 게시되어 있습니다. 시간 나시면 영팔정에 한번 들려 방계 선조의 자취를 보십시오.
신북면 모산리는 저희 동내입니다. 주말마다 영팔정 앞을 지나가는데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입니다.
좌상공파이지만 같은 류씨라고 타지에서 정착했을때 하정공파 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