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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남(2004). 『교육학론』. 학지사.
제11장 교사교육과 교육학: 실천하면서 이해하는 이론 중 pp. 298-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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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교육활동들은 그것이 정서의 발달에 관한 것이든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든, 교육이론의 모습을 갖춘다. 고대 중국이나 그리스의 교육사가 보여 주듯이, 고대 사회에서 가르침이 시작할 때부터 교육이론이 그런 모습을 드러내 보였다. 공자의 사상을 기록한 고전들이나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기록한 플라톤의 글들이 교육이라는 그림들이다. 그런 그림에는 가르침의 방법과 의미, 교육관과 교육적 가치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교육에 대한 인류 최초의 그림이다. 그리고 그 그림에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묘사해 놓았고, 잘못된 교육이 무엇인지를 또한 분명하게 그려놓았다.
교육의 실제는 교육이론의 모태다. 교육적 실제가 교육이론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교육이론의 본질이 교육적 실제라면 교육이론은 다른 무엇 이를테면 과학적이라든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practical)인 것이 되는 셈이다. [각주 11: 허스트(Hirst) 교수와 오코너(O’Connor) 교수의 ‘교육이론의 본질’에 관한 논쟁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 논쟁에서 오코너 교수는 이론은 마땅히 과학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허스트 교수는 모든 이론이 과학적일 필요는 없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허스트 교수에 따르면 교육이론은 실천적이다.] 교육의 실제를 그려낸 이론이 교육의 실제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육이론은 교육의 실제를 이끌 만큼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교육이론이 단순히 이론적 연구의 결과여서 교육활동에 종사하는 교사들에게 별로 실천력이 없는, 말하자면 공론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이 그렇듯이, 교사들은 기존의 교육이론에 대하여 적지 아니 회의적이다. 사실, 교육철학, 교육사,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과 같은 영역은 지금까지 다분히 이론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분야의 이론들이 교육의 실제를 그려낸 것이라기보다, 이론적 지식을 추구하는 그들의 모학문의 이론을 그대로 빌려 온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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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우리는 ‘교육이론의 기초학문들’이라 한다. 이 기초 학문들은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새로운 출발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모학문에 의지하는 것 대신에 교육의 실제를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교육의 기초 학문들은 교육의 의미와 목적을 설정하고, 실천적 방향을 모색하며, 가르치고 배우는 원리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교육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이끌어 주는 데 중요하다. 교육의 실제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이 영역의 교육이 교사교육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오늘날처럼 교육이 방향을 상실한 채 단순히 기능적인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에 더욱 절실하다. 교육의 기초 학문들이 교육의 실제를 바로 이끄는 일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늘 복잡하고 섬세하며, 광범위하고 난해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교육의 기초 학문들이 교육의 실제를 보다 자세히 탐구하고 교육 활동을 올바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럴 여지도 충분히 있다. 이를테면, 교육철학이 교육의 의미를 분석하고 목적을 바르게 그려내며, 어떤 교과가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은 교사들이 교과를 가르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러하였듯이, 가르칠 지식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은 가르치는 일의 전제조건이다. [각주 12: Plato, Meno.] 교과에 관한 철학 말이다. [각주 13: 교과철학의 일부분에 오늘날 과학철학이 들어가야 한다. 수리철학, 자연과학철학, 역사철학, 예술철학, 정치철학, 사회과학철학 등이 그런 것들이다. 교사들에게는 그들이 가르치는 교과가 있다. 그리고 이 교과에는 관련되는 철학이 있게 마련이다. 이 철학은 교사가 교과를 보는 안목이다. 이 철학은 일반 철학자들보다 교과를 가르치는 교사들이 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교과철학은 교사들의 것이다.] 모든 교과 교사들은 사실 철학자여야 한다. 교과를 철학하는 일은 교사들의 몫이다. 교과가 무엇이고, 그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며, 가르칠 수 있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 없이 교과를 가르친다는 것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문법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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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실제에 대한 철학적 탐구가 교과를 가르치는 일의 전제 조건인 이상 그것은 다분히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교육의 실제에서 연구되어야 한다. 교육철학은 사실 교육의 실제에 관한 철학적 탐구활동이다. 따라서 교육의 철학적 탐구는 실천적 판단력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교육철학이 형성하는 교육이론은 이런 맥락에서 도덕적 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각주 14: ‘런던 라인’(London line)을 주도하던 런던대 교육과학원(Institute of Education, London)은 지금 새로운 교육철학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연구 주제는 교육철학이 교육의 실제에 어떻게 깊숙이 들어갈 수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교육사는 교육이념의 변천과 이에 따른 교육과정의 변화를 사상사적 관점에서 설명해 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예비교사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교육의 실제 자체와 교육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의 현재를 읽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교육은 인류의 사상적 변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매한가지다. 지금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교육적 문제는 우리가 처해 있는 정치 사회적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 이는 틀림없이 교육의 실제에 스며들어 오는 역사적 문제다. 교사에게 교육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없다면, 그가 어떤 교과를 가르치던지, 그의 가르침은 틀림없이 방향감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교육사회학은 교육사와 유사하게도 교육의 실제에서 발생되는 문제를 사회학적 방법에 의해서 접근하기에 적절한 교육의 기초 학문 가운데 하나다. 인간의 사고양식은 문화에 따라 다르다. 상이한 문화는 서로 다른 사고양식을 형성한다. 사고양식을 고려하지 않고 가르친다는 것은 잘못되었어도 어딘가 크게 잘못된 일이다. 문화적 실제에서 사고 양식을 고찰함은 교육이론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학습자의 사고 양식은 인류학과 심리학에 의해서도 연구되는 영역이다. 특히 학습자의 지적 발달은 교육심리학의 중요한 연구 주제다. 교육심리학은 학습자의 지적 발달뿐만 아니라, 정서적 발달의 이해에도 크게 공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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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육의 기초 학문들이 교육의 실제에 보다 밀접히 연결되고 자율성을 가지는 학문이 되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를 진실로 소망한다면 그것은 지금과 같은 접근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을 취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지금까지 기초 학문들은 교육의 실제가 아니라 모학문(母學問)에 의지해 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학문으로서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은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교육의 실제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따라서 교육이론의 기초 학문들이 모학문에 의존하는 일은 교육이론을 교육의 실제와 논리적으로 괴리(乖離)시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교육이론 교육이 교육의 실제로부터 창출된 이론을 예비교사들에게 가르쳤다고 하기보다,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의 이론을 소개하거나 이를 교육 현장에 응용하도록 종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교육의 기초학문들이 모학문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만큼 자율성을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초 학문에 종사해 온 교육이론가들이 예비교사들에게 모학문의 이론을 가르쳐 온 것은 어쩌면 그 기초학문들의 탄생에 얽혀 있는 운명의 사슬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닌게 아니라, 그들의 전공 명칭이 이 점을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엄밀히 말하여 ‘교육철학’, ‘교육사’,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은 ‘교육학’이라고 하기보다 그 표현에 있어서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의 일부분에 속하는 학문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들의 명칭이 차라리 앞뒤가 바뀌어 철학적 교육학, 역사적 교육학, 사회학적 교육학, 심리학적 교육학이었다면 사정이 다소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본다면 교육학에는 지금까지 철학자, 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는 많았으나 교육이론가는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이끌려고 하였던 것은 교육이론이 아니라 철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이었던 셈이다. 이는 교육의 기초 학문들이 의존한 모학문들이 지금까지 교육이론의 주체가 되어 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교육이론이 모학문들에 의존하여 온 흔적이 교육행정학, 교육경제학, 교육재정학, 교육경영학, 교육통계학 등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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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학문들이 얼마나 행정학, 경제학, 재정학, 경영학, 통계학의 이론들을 교육학 속으로 끌고 들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5: 경영학과 경제학의 원리가 교육의 실제를 다스리는 원리로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지금 잘 알고 있다. 자유시장경제학은 외부의 통제와 간섭이 없을 때 시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며, 이런 조건은 시장이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효율성을 증대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육은 때로 이익과 효율성을 목적으로 할 수 있지만, 이익과 효율성의 추구가 곧 교육의 목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장과 학교는 항상 같은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장소가 아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한 곳을 우리는 ‘시장’이라 하고, 다른 곳을 ‘학교’라 부른다. 전자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고, 후자는 인간을 발달시키는 곳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교육이론 연구와 강의가 교육의 실제를 그려내었다고 하기보다 모학문에 의존함으로써 교육 밖의 논리를 교육 안으로 들여오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미 자율성을 획득한 학문들은 지금 교육이론이 겪고 있는 학문적 방황기를 거쳤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학문이 처음부터 자율성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심리학은 실로 오랫동안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부터 벗어난 지는 그리 멀지 않다. 그 결과 오늘날 심리학은 상당한 정도로 자율성을 확보하였고, 자체의 체계 안에서 의미있게 분화와 발달을 거듭하고 있다. 성격심리학, 산업심리학, 임상심리학, 범죄심리학 등의 구분이 이를 대변하여 준다. 그런데 이들의 명칭이 말해 주고 있는 것은 교육이론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이 명칭들이 뜻하는 것은 그들이 모두 ‘심리학’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각 이름 앞에 내용이나 방법에 관한 한정어를 사용함으로써 당연하게도 그것이 어떤 부류의 것을 대상으로 하고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를 구분하였을 뿐이다. 의학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앞에서 보여주었듯이, 교육이론에는 심리학이나 의학과 달리, 내용과 방법을 달리하는 학문들이 들어와 각축을 벌이면서 패권을 다투는 학문적 ‘전국시대’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 결과 교육이론에서 언어의 통일, 개념의 공용, 방법론의 합의, 이론적 체계성은 찾아볼 수 없다. 거기에는 모학문에서 탄생된 이론들 사이의 갈등과 모순과 대립이 빚어내는 혼돈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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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이라면 학문적 발전의 기대는커녕 해체의 목소리만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보여준 것과 같이, 이런 환경에서 형성된 교육이론은 외부 학문의 논리에 의해서 늘 간섭받기 마련이고, 주변에 범람하는 학문적 유행사조에 따라 그 고유한 모습을 상실할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가치가 혼동을 거듭할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와 같은 환경 속에서 전개된 교육이론이 교육의 실제와 괴리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환경 속에 있는 교사들은 교육의 실제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정면으로 마주칠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교육의 실제에 민감하면 할수록, 교육이론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벗어나려면, 그 방법은 오직 한 가지다. 교육의 기초 학문이 그들의 모학문에 매어있는 고리를 끊는 일이다.
교육이론의 잘못된 ‘연결 고리’는 교육이론의 발달에서 겪은 학문적 변고다. 근대 서양교육사에서 교사교육이 시작되었을 때, 교육이론을 가르친 사람들은 교육학자가 아니라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심리학자들이었다. [각주 16: 영국 근대교육사에서 교사교육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교육이론을 철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역사학자가 가르쳤다. 미국의 경우도 영국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도 영국에서는 철학자, 심리학자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달리 교육문제를 깊이 연구하고 관여한다. 영국에서 철학자, 역사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들이 교육이론을 연구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찬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 그들의 학문적 정직성과 성실성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이 찬탄은 그들에 의해서 교육학의 역사적 운명이 바뀌어도 좋다는 것까지를 포함해서는 안 된다.] 제도가 그랬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전문 교육이론가를 찾는 일이 용이하지 않았다. 하여튼, 당시에 교육이론을 가르친 사람들은 그들의 출신 배경이 그렇듯이 그 근거가 어찌 되었던 이미 나름대로 틀을 갖춘 철학,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의 눈으로 교육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이 만든 학문이 ‘철학적 교육학’, ‘역사적 교육학’, ‘사회학적 교육학’, ‘심리학적 교육학’이 아닌 철학과 사회학과 심리학으로서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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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교육을 보는 그들의 안목은 모학문에 의해서 제한을 받기 마련이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사들의 안목도 교육의 실제로부터 먼 거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자명하다. 이는 틀림없이 교육이론의 탄생에서 발생된 역사적 변고다. 이러한 변고 속에서 교사교육은 늘 뿌리를 잃고 부유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영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론과 실제의 괴리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여 온 교육이론과 그 실제 사이의 괴리 문제는 사실 잘못된 교육이론의 시작에서부터 필연적으로 생성된 문제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론과 실제는 본질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이라는 위안을 받아가면서 지내왔고 또한 그렇게 가르쳐 왔다. 그러나 이런 반성은 논리적으로 교육이론이 우연한 역사적 변고에 의해서 맺어진 모학문과의 고리를 끊고, 교육의 실제를 천착(穿鑿)하기에 힘쓰면, 교육이론과 그 실제 사이의 간극은 좁혀질 수 있다는 뜻을 함의한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교육관을 가진 교사와 교육의 실제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교사는 모학문에 의해서 각색된 교육이론에 그만큼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교육이론을 정직하게 거부할 것이라는 뜻도 함께 포함한다.
우리는 이제 교육이론과 모학문 사이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하지만 이때 염두에 둘 것은 그 이유를 오인하지 않는 것이 고리를 끊는 일 그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고리를 끊는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고리를 끊는 일이 오히려 더 큰 학문적 변고를 자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변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우선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은 무조건 모학문의 내용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인간과 사회에 관련된 매우 넓은 이해의 폭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부터 비롯되는 근원적인 질문들은 그동안 교육학의 기초학문들이 기댄 모학문들과 밀접히 관련된다. 교육학은 사실 모학문들로부터 얻는 것이 많다.
두 번째로 조심해야 할 일은 이렇다. 흔히 학문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할 때, 거기에는 늘 정확성을 기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때의 정확성을 과학주의에서만 찾으려는 경향이 있어 왔다. 정확성 또는 객관성은 곧 과학주의라는 등식으로 오인하는 경향 말이다. 이 경향을 우리는 가깝게는 정치학이나 심리학의 발달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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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와 홉스의 정치철학은 정치학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 이 변화의 목적은 정치학을 과학적인 학문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논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정치학으로부터 결별을 선언하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정치학은 윤리학의 연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다분히 가치판단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정치학은 고전정치학과 윤리학 사이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과학주의를 표방하였지만, 그것을 지금 우리가 ‘정치학의 정확성’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정치학의 패러다임이 정치학 속의 윤리적 요소를 무참히도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한 학문이 그 탐구 대상에 포함되어 있는 중요한 요소를 버림으로써 학문적 ‘간결성’을 추구할 수 있고 그것을 ‘과학적’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때의 ‘간결성’은 그만큼 그 학문을 ‘엉성하게’ 그리고 ‘부정확하게’ 만든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탐구대상이 내포하는 중요한 요소를 버리는 일은 분명히 그 학문의 엉성함을 자초하는 일이다. 학문적 간결성은 자칫 학문적 ‘엉성함’을 불러들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탐구대상의 요소를 인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그 대상을 왜곡하는 것은 학문 탐구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속임수다.
분트(Wundt)의 심리학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과학주의를 표방하였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과학주의에 환원된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인간은 과학주의가 대상으로 하는 양적 존재라기보다 질을 그 특징으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질’을 과학의 대상인 ‘양’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연구대상의 ‘카테고리’를 바꾸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학문의 패러다임 변화에서 과학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정치학과 심리학뿐만이 아니다. 교육학에서도 그런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이론을 기술과학(記述科學)으로 규정하려던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과학’이라는 용어가 이미 암시하듯이, 이 노력의 밑바탕에는 교육이론을 과학적 합리주의가 군림하는 세계로 환원시키겠다는 의도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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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론의 문장을 과학적 문장으로 바꾼다는 것은, 정치학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삶 속에 그리고 가르침과 배움 속에 내포되어 있는 질적인 것을 간과하는 일이며, 탐구 대상을 혼동하는 범주화의 오류를 저지르는 실로 엄청난 일이다. 이러한 일은 마치 교육이론이 탐구대상으로 삼던 인간의 정신발달을 신체발달로 대치하는 경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요청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잘못된 교육관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