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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일자 동아일보 A29면의 인터뷰 내용을 읽어본후 보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경훈 지음
푸른숲 / 2011년 7월 / 257쪽 / 13,000원
▣ 저자 이경훈
1963년 경기도 백령도의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스물넷에 뉴욕으로 건너가 Pratt Institute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졸업 후, 미국과 한국에서 건축사자격증을 취득하고 미국건축가협회(AIA) 정회원이 되었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신탄진 고속도로휴게소, 헤이리 랜드마크하우스 등의 건축 작업을 했다. 2003년부터 국민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세컨드 모더니티의 건축』, 『통섭지도 : 한국 건축을 위한 아홉 개의 탐침』 등의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 Short Summary
2009년, 영국의 여행 전문지 《론리 플래닛》은 서울을 최악의 도시 3위로 꼽았다. 1, 2위는 범죄와 오염이 심각한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가나의 아크라였다. 우리나라의 여러 언론매체에서 이 외신을 보도하자 대다수의 서울 시민은 분노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토록 아름다운 서울을 최악의 도시로 꼽다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흥분한 네티즌은 뉴스 하단에 수백 개의 댓글을 달며 이 가혹한 선정에 반박했다. ‘디자인 수도, 서울시’역시 공식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벼르기까지 했다.
《론리 플래닛》은 서울을 최악의 ‘도시’로 꼽았지만, 《뉴욕 타임스》는 ‘가볼 만한 곳’으로 선정했다. 참고로 《뉴욕 타임스》가 1, 2위로 선정한 곳은 스리랑카와 파타고니아의 와인 생산지였다. 나머지 10위 안의 리스트는 태국의 휴양지나 남극대륙 같은 곳으로 채워졌다. 그렇다면 혹시, 이 선정의 의미가 오지 탐험 측면에서는 서울이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지만 도시로서는 영 최악이라는 건 아닐까? 서울에 대해 혹은 도시의 개념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꼼꼼히 새겨볼 대목이 있다. 사람이 많고 건물이 많이 모여 있다고 모두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숯과 다이아몬드가 성분은 같지만, 어느 것은 땔감이 되고 어느 것은 보석이 되는 것처럼, 도시는 환경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관계하는 방식이다. 기존의 관습이나 시골의 관계 방식과 다를 뿐, 그보다 저열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도시란 스포츠카처럼 최첨단 기술로 이뤄낸 문명의 결정판인 동시에, 짬뽕 대신 자장면을 택한 것처럼 취향과 선택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책은 여느 도시에는 없지만 서울에만 있는 여덟 가지 요소에 관한 고찰이다. 또 서울의 도시다움을 방해하는 불순물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아파트, 방음벽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불순물이라 칭하며 여러분에게 혼란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생각이다. 그 동안 정체를 숨겨온 이 불순물들은 사실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며, 도시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편견을 몸으로 보여주는 반反 도시의 징후다. 아직,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 차례
들어가는 말
1. 걷는 순간, 비로소 도시가 탄생한다_ 걷고 싶은 거리 1
2. 거리는 어떻게 우리를 걷게 만드는가_ 걷고 싶은 거리 2
3. 마을버스에는 마을이 없다_ 마을버스
4.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은 울타리가 있다_ 방음벽
5. ‘방’은 아무리 모여도 도시가 되지 않는다_ 방
6. 도시는 우리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_ 새집증후군
7. 아파트는 도시의 미래가 아니다_ 아파트
8. 모델하우스, 도시를 환각에 빠트려라_ 모델하우스
9. 서울은 꿈을 꾸고 있다_ 루체비스타
나오는 말
추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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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순간, 비로소 도시가 탄생한다
걷고 싶은 거리 1
길과 거리를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헷갈리기도 하고 비슷한 뜻으로 섞어 쓸 때도 있어 더욱 그렇다. 하지만 한자와 영어로 표기해보면 그 뜻은 명확해진다. 길은 ‘로路’이며 ‘Road’이고, 거리는 ‘가街’이며 ‘Street’다. 길은 한 점과 다른 점을 연결하는 통로를 의미한다. 반면에 거리는 길의 한 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한마디로 구경거리가 있는 길로서 양편에 늘어선 구경거리들이 만들어내는 수동적 통로인 것이다. 그래서 거리는 연결보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경험의 배경, 공간적 장치로서 더 의미가 있다. 길이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에 충실하다면, 거리는 경험이라는 과정 지향적 성격을 띤다.
길을 숲이나 벌판을 가로지르는 자연의 영역으로 본다면, 거리는 인공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도시의 일부로 구분할 수 있다. 시골길에 고요가 있다면, 도시의 거리에는 활기가 있다. 사진이나 영화 속 노천카페의 낭만은 모두 거리가 낳은 것이다. 따라서 도시가 삭막하다는 것은 거리가 삭막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종종 ‘다르다’를 ‘틀리다’로 잘못 쓰는 이유는 표준에서 벗어난 다른 것을 틀렸다고 간주해버리는 무의식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길과 거리의 용어혼용은 거리에 대한 오해의 증표이며, 나아가 도시에 대한 몰이해를 나타내는 방증이다.
걷고 싶은 거리와 걷고 싶은 길은 다르다: “학교가 파하면 해찰하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너라.” 등굣길에 어머니는 주의가 산만한 나에게 항상 버릇처럼 이르곤 하셨다. 5학년 때 서울 남산으로 전학 오기 전까지 살던 소읍에서는 아침에는 매일 지각을 했고, 저녁에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등굣길은 볼거리 천지였다. 작은 채마밭에 고추와 깨, 마늘 같은 것들이 돌아가며 꽃을 피웠다. 도랑을 따라가면 신작로가 나오고, 거기엔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길 따라 가다 보면 나오는 고등학교 앞은 항상 작은 장터가 열렸다. 만년필을 늘어놓고 파는가 하면, 신기한 문구용품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광약 같은 것도 팔았다.
그에 비하면 서울에서의 통학길은 오히려 단조로웠다. 초등학교 때 통학로는 남산 소파길이었다. 부모님께 받은 차비를 아껴 갖고 싶은 걸 사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아침마다 기꺼이 걸었다. 하굣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 했고, 샤프펜슬도 필요했다. 한 달쯤 모으면 모터가 달린 모형 탱크를 살 수도 있었다. 집에서 출발해 남산을 올라 옛 식물원과 어린이회관을 가로지른 다음, 케이블카 승강장을 지나면 적십자사 바로 밑이 학교였다. 겨울에는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잠이 덜 깬 채로 걷는 등굣길은 고행이나 다름없었다. 오가는 동안 내내 볼거리라곤 도심의 시무룩한 잿빛 빌딩 숲과 멋없이 서있는 남산의 소나무, 그리고 축대뿐이었다.
서울의 ‘걷고 싶은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덕수궁길도 있다. 서울시에서 지정한‘걷고 싶은 거리’ 1호이다. ‘걷고 싶은 거리’는 서울시청에서 선정한 곳이 아홉 군데이고, 각 구청별로 정한 곳들도 따로 있으니 다 합치면 백 군데 정도 된다. 그렇게나 많으니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찾아가 걸어볼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걷고 싶은 거리’의 의미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많은 시민들이 걷고 싶어 하는 길이라는 것인지, 지금은 아니지만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겠다는 공언인지 뜻이 분명치 않다. 또한 나머지 거리는 어쩌고, 선정된 몇 곳만 걷고 싶은 거리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의문스럽다.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은 길과 거리의 개념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소파길과 덕수궁길은 가끔 걷고 싶은 길이지 거리가 아닌 것이다. 앞에서 밝혔듯 길과 거리는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개념이다. 길이 이동과 도착이라는 목적 지향에 충실하다면, 거리는 다양한 경험의 배경이자 공간적 장치로서 도시성에 더 잘 부합된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가 소통의 공간이 되려면 먼저 거리의 분위기가 활기차야 한다. 도시에서의 아름다움이란 녹지나 공원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가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러니 걷기 힘든 거리로 이루어진 도시는 애초부터 도시가 아닌 것이다.
거리는 어떻게 우리를 걷게 만드는가
걷고 싶은 거리 2
도시는 기본적으로 상업적 공간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도시의 거리가 지닌 기본적인 역할과 그로써 형성된 도시적 공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넉넉한 주차장과 쾌적한 공원이 없는 가로수길은 도시의 거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을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적당한 폭의 인도와 거리를 메우고 있는 상점이야말로 가장 도시적이며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기 때문이다. 상점의 쇼윈도는 교류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요소인 데다, 무엇보다 ‘걷게 하는’ 도시의 장치로서 의미가 크다. 그런데 가로수길에만 있고 다른 곳에 없는 것을 찾다 보면 서울을 옥죄고 있는 엄숙주의를 마주하게 된다.
온갖 광고와 욕망이 집약된 물신주의가 팽배한 도시임에도 안 그런 척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는 가식이 서울을 망치고 있다. 이에 비해 쇼핑몰은 도시의 블랙홀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시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사람들이 쇼핑몰을 도시적 공간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러나 쇼핑몰은 현대적이며 서구적이긴 하지만 도시적이지는 않다. 사실 쇼핑몰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도시의 거리를 재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태어난 가상의 거리에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고 쇼핑객들이 북적거리는 동안 실제 도시의 거리는 텅 비고 점점 피폐해진다.
광화문 ‘광장’은 왜 어색할까?: 2009년 개장한 광화문광장은 아직까지 논란거리이다. 그보다 몇 년 앞서 생긴 시청광장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광화문이 제 모습을 찾았고, 시청 앞도 온통 자동차로 미어터졌던 시절에 비하면 진일보했지만 두 광장은 여전히 찬사보다는 비판 앞에 놓여 있다.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비아냥거림이 말해주듯 별다른 시설 없이 광장이라는 이름만 붙인 결과다. 이에 대한 논의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도로 포장 문제를 거론하거나 ‘나무를 심자’는 등의 착하기만 한 목소리가 힘을 얻을 뿐이어서 아무래도 유럽이나 미국 등지에서 보아왔던‘도시 광장’이 되기는 힘겨워 보인다.
광장은 ‘공공의 공간’이다. 공간이란 말은 말 그대로 비어 있는 장소를 말한다. 그런데 이 공간의 형태가 중요하다. 물을 담는 바가지가 오목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야 하듯, 사람을 담는 광장은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마치 어렸을 적 만들었던 모래집 같은 것이다. 주먹을 쥐고 모래를 덮고는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하며 모래를 다진 후 주먹을 빼내면 주먹 모양의 공간이 생긴다. 도시의 광장도 이렇게 만들어진다. 공적인 공간, 즉 광장을 얻기 위해서는 주변 건물의 희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 이익을 어느 정도 희생한다는 것. 그래서 한 도시가 품은 이상과 뜻이 시각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광장이다.
광장의 마지막 조건은 상업 시설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도시의 거리는 상점들이 즐비한 길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도시의 광장은 상점들이 에워싸고 있는 공터를 말한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늘어선 가게들이 없었다면,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을 에워싼 카페들이 없었다면 그곳의 광장은 그저 답답한 지옥이었을 것이다. 쇼윈도를 눈으로 살피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상업적 행위들과 상점이 사람들을 광장에 머물게 한다. 광화문광장이나 시청광장에서 생수 한 병 사서 마시려면 바다같이 넓은 길을 건너고, 광장을 가로질러야 하는 것과는 퍽 대조적이다.
루이스 칸의 미술관과 도시의 의미: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 Kahn은 20세기 건축을 완성했다는 평을 받는 미국의 건축가이다. 쉰이 넘어서야 첫 건축물을 지었는데, 그 후 그가 작업한 모든 건축물은 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문화재가 되었다. 그는 재료의 물리적 특성을 반영한 절제된 형태, 극적인 빛의 도입으로 건축을 철학적 경지에 올려놓았다. 특이한 점은 그의 유작인 ‘영국 미술관’의 1층을 상점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근엄하고 존귀한 존재도 도시에서는 상업성과 결합해야 빛을 발휘할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도시都市라는 한자어는 도읍都과 시장市이 합쳐진 말이다. 도시에는 시장의 기능이 필연적으로 포함되었다는 뜻이다. 도시의 성격을 군사도시, 위성도시, 행정도시, 교육도시 등으로 분류하기는 하지만 상업도시라는 말은 없다. 이미 도시라는 말 속에 상업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동어반복이기 때문이다. 도시 자체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탄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은 가장 도시적인 장소다. 남대문시장이 고궁과 수려한 자연을 제치고 서울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태원이 거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는 상가가 없었다면 외국인이 즐겨 찾는 거리가 되었을지 되돌아봐야 하고, 동대문 상가가 밤새도록 북적거리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그럼에도 건축에서만큼은 “상업적인 것은 안돼.”라는 위선적인 말 한마디가 서울을 도시에서 멀어지게 한다. 공공의 공간을 문화적인 시설로 해결하려는 시도는 착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지는 정책이다. 그리고 그 패인을 시민 의식에 돌리는 태도는 더욱 위험하다. 프랑스의 ‘카페’, 영국의 ‘펍’, 미국의 ‘바’처럼 도시를 윤택하게 만드는 공유 공간은 모두 상업 시설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상업은 탐욕스럽지 않을뿐더러 저급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든다.
우리 주변엔 너무나 많은 울타리가 있다
방음벽
서울은 스스로 울타리를 두르면서 자발적인 게토(서양 도시의 낙후된 구역, 유대인 거주 구역)가 되어가고 있다. 방음벽은 그 자체의 흉물스러운 모습만이 문제가 아니다. 장벽은 소음뿐 아니라 바람도, 사람도, 풍경도 막아선다. 도시의 풍경은 자연과는 달리 시민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포기하고 소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는 것이 도시적이라면, 방음벽은 분명 반도시적 증표다. 아파트나 학교 주위를 둘러싼 방음벽은 도시성의 후퇴다.
소음을 줄인다는 사적인 쾌적함을 위해 그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을 도시 전체에게 지우는 것은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행태라고밖에 볼 수 없다. 혹자는 선진국에서도 방음벽을 설치했다고 강변하지만, 그것은 도심이 아닌 고속도로 주변 교외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도심에 방음벽을 높게 세우기를 당연시하는 풍토는 한국 건축이 도시라는 새로운 공간적 배경에 적응하지 못한 결과이며, 도시성에 대한 철학과 의식이 부족한 건축가들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방음벽은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 방음벽은 서울에만 있는 장벽이다. 처음부터 방음벽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라는 동요 가사처럼, 예전에는 불가피한 소음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도시의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차츰 방음벽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제는 서울 어디를 가나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 되었다. 고속도로 주변은 물론, 차량통행이 드문 이면도로에까지 설치되어 있다. 요즘은 아파트 공사를 시작하면 먼저 거대한 장벽부터 설치하는 일이 일상화되었다. 방음벽은 주변에 시끄러운 도로나 철길이 있을 경우 소음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다. 어디를 가나 방음벽을 볼 수 있을 정도니 서울은 점점 중세 도시처럼 금속의 성곽도시가 되어간다.
도시는 태생이 인공적이다: 한국의 주거 공간을 자연적 공간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경계가 불분명한 자연과 인공의 공간이 있고 그 만남은 절묘하고 또 아름답다. 주변의 산에서 가져온 나무며 흙이며 바람이 촉촉하게 인공의 공간으로 침투하는 것이다. 굳이 곧은 나무를 고집하지 않고 적당히 휜 나무를 기둥으로 대들보로 걸쳐놓은 여유가 있다. 정원은 그저 아무 보살핌 없이 놓인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자연이 스스로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꿔서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며, 그렇기에 거스르지 말아야 할 순리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한국의 전통 건축과 도시는 서울 인구가 20만이 채 안 되던 20세기 초에 이미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화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에 일제강점이 시작되었고, 성곽과 궁성이 파괴되고 근대주의적 신식 건축이 강제로 이식되었다. 기차역, 중앙청, 은행 또는 백화점 같은 새로운 용도와 그에 걸맞은 신식 건축 형태가 식민 공간을 만들어냈다. 도시화는 일제 식민지배와 동일시되었고, 이는 민족적 반감과 혼합되어 타도의 대상으로 굳어져갔다. 한국의 전통공간에 대한 향수는 그 대표 키워드인 자연과 어우러졌고, 그 결과 자연은 ‘한’이나 ‘흥’같은 민족 고유의 대표어가 되었다. 한국인의 몸으로 경험했던 자연은 종교가 되고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도시는 분명 자연의 혜택보다는 문화와 문명의 혜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자연과 문화는 상대적 개념으로 성립되는데, 여기에서 자연은 나무와 흙, 맑은 물 같은 구체적인 대상보다는 말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한 것然, 다시 말해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하는 대상의 통칭으로 보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문화는 인간의 지력으로 창조한 여러 종류의 제도와 사회적 공간에 관한 광범위한 개념이다. 따라서 도시는 문화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도시는 자연보다 열악하고 타도해야 할 악이 아니라, 자연과는 다르지만 나름의 생태계적 질서와 미덕을 지닌 인간 최고의 발명품으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방’은 아무리 모여도 도시가 되지 않는다
방
우리말에서 ‘집’은 ‘House’와 ‘Home’을 모두 포함하는 중의적이며 복합적인 기호이고 상징이다. 단순한 건물로서의 의미를 넘어 인간 정주의 기본 단위이며 그 안에서의 기초적인 공동체가 생성되는 공간적 장치인 것이다. 전원에서의 집은 ‘House’로서의 주택뿐 아니라 ‘Home’으로서의 가정과도 의미가 맞아떨어지지만, 도시에서의 집은 그 의미가 최소화되는 경향이 있다. 즉, 전통적으로 집 안에서 이루어지던 행위의 대부분이 도시에서는 일종의 공유 공간으로 확장되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방’이다.
집 안의 부엌과 식탁에서 이루어지던 식사를 밖에서 하게 되는 외식 문화나 세탁을 공동으로 하는 빨래방, 노인들이 모여서 여가를 보내는 경로당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의 카페, 영국의 펍 같은 공간적 장치 또한 이러한 도시적 특성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공유 공간 대부분이 노래방, 찜질방처럼 ‘방’이라는 폐쇄적 형태로 이루어지는 것은 도시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방’문화는 기존 관계를 심화시킬 수는 있어도, 새로운 도시적 관계를 확장하기에는 부적합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안쪽 방으로 주세요: 서울은 방의 도시다. 방의 종류도 많고 그 기능도 다양하며 지대하다. 노래방에서 시작해서 PC방, 비디오방, 보드방에서 차마 글로 옮기기 민망한 방들까지 가득 차 있다. 비디오방이 DVD방으로 재빨리 전환되는 과정을 보면, 서울의 방은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생겨도 언제나 재빨리 수용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고 있는 유연하며 탄력적인 공간이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지는 동시에, 어느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이 벌어지는 일종의 초공간이기도 하다.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출품한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의 주제는 ‘방’이었다. 영어의 ‘Room’과는 의미와 차원을 달리해서 ‘방’이라는 고유명사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비엔날레 참가 작가인 김광수 교수는 찜질방을 이렇게 묘사한다. “각자의 집 안방을 한 곳에 죄다 풀어놓은 형국이다. 사적인 영역은 신발장과 라커룸에 국한될 뿐, 그 밖의 모든 사생활이 노출되어 다른 사생활과 뒤섞여 있는 기이한 광경인 것이다.”
공유 공간은 자신이 알고 있고 또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중간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영어로는 커뮤니티에 해당하는 단어다. 그러나 서울에서 공유 공간의 개념은 특별하다. 서울의 상징인 광장이나 공항, 박물관은 으리으리하고 잘 꾸며져 있지만, 도시의 이면도로는 인도도 없다. 반면에 아파트 내부는 호텔을 능가하는 인테리어로 치장한다. 도시의 풍경과 생명이 오히려 이러한 중간 영역, 공유 공간의 질에서 가름된다는 걸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그러니 도시의 쾌적함은 녹지의 면적과 나무 수가 아니라 공유 공간을 함께 나누고 그곳에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데 있다. 결국 도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생활이 공유 공간으로 확장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이 모든 것이 또 다시 ‘방’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공유 공간에서 일어나야 할 커뮤니티의 형성이나 이웃과의 교류가 ‘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폐쇄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도시’라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사회적 관계는 심화될지언정 새 이웃을 만나는 등의 확장은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방’은 굴절된 서울의 도시화의 현재를 대변한다. ‘방’은 서울에만 있다.
도시는 우리의 기억이 켜켜이 쌓인 공간이다
새집증후군
새집증후군은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용어다. 빨리빨리 짓다 보니 본드와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 새로 만든 집에는 유해한 독소가 많이 발생해 거주하는 사람들이 여러 질환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적 증후는 기술적 안이함과 기술에 대한 불신, 그리고 건축을 일종의 유행으로 보는 조급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그러나 도시는 기억의 공간이다. 추억은 장소 지향적이거나 최소한의 장소라는 배경에 의존한다. 장소는 주관적 지점을 가리키며 대부분 건물과 연관되어 있다. 도시는 이러한 기억의 배경인 동시에 현실의 삶이 실행되는 공간이다.
기억의 지우개, 소아병의 도시 서울: 무늬만 나무고, 무늬만 돌인 건축은 지속 가능할 리가 없다. ‘무늬만……건축’은 서울을 유례없이 어린 도시로 만들었다. 6백 년이 되었다는 서울에 있는 건축물의 75% 이상이 1980년 이후에 지어졌다. 50년이 넘은 건물은 2.45%에 불과하고, 20년 이하의 건물은 57%나 되니 사람으로 치면 미성년자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건물의 평균 나이가 시민의 평균 나이보다 훨씬 어린 도시가 된 것이다. 여기서 계속되는 뉴타운 사업이나 재개발로 이 나이는 점점 더 어려질 것이다. 시청은 새로이 공사 중이고 25개 구청들은 새로 지었거나 리모델링이라는 국적 불명의 수리를 거듭한 터라,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탈리아의 세계적인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는 ‘기억은 장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도시는 집단적 기억의 장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서울에는 100년은 커녕 50년 된 건물도 드물다. 어릴 적 살던 집은 헐려서 아파트로 다시 태어났고, 다니던 중학교는 강남으로 이사했으며, 고등학교는 새집으로 바뀌어 모습을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동네의 풍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젊은 시절의 추억이 통째로 담겨있던 무교동의 카페와 술집들은 단정한 화단으로 변해 있다. 문제는 50년 후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 세대처럼 어릴 적 기억이 말소된 ‘장소 상실의 도시’를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아파트는 도시의 미래가 아니다
아파트
가장 도시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서울에서는 오히려 도시를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이자 한국 도시의 최대 불행이다. 외국의 생경한 주거 형식이던 아파트가 한 세대 만에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은 세계 건축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다. 여기에는 도시, 건축적 고려를 넘어선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이 작용하지만, 무엇보다 아파트가 주거보다는 재산 증식의 의미가 강하기 때문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파트는 자신의 취향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바를 추구하는 ‘타자의 건축’으로 성립한다. 시장이라는 괴물은 아파트에게 도시에서 상상할 수 없는 특권을 의미한다.
아파트는 도시의 문화적, 경제적 혜택은 고스란히 누리면서도 도시의 번잡함은 멀리하겠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주거와 도시를 모두 망치고 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아파트의 미래는 도시의 미래 또한 어둡게 한다. 이전의 개발시대 때는 재개발을 통해 평수를 늘리는 것이 가능했지만, 인구가 감소하고 요즘 지어진 건축의 수명이 다 되었을 때가 되면 서구의 선진국들이 겪었던 슬럼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강북의 구 도심조차 이러한 아파트의 숲으로 바꾸겠다는 ‘뉴타운’정책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 아니다: 어느 아파트든 두 가지 면적을 갖는다. 우선 순수하게 세대가 사용하는 면적인 전용 면적이 있다. 그리고 주차장, 복도, 엘리베이터 홀처럼 함께 쓰는 면적 전체를 세대 수로 나눈 공용 면적이 있다. 공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건설사 입장에서는 돈을 들여 지은 면적이므로 이를 세대별로 배분한 것이다. 이 둘을 합친 면적을 분양 면적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건설사에서 만들어내고 이를 기준으로 판매하기 때문에 시장에서 통용되는 숫자에 불과하다. 대개 32평형 아파트의 전용 면적은 25평 정도가 된다. 정부에서 말하는 국민주택 규모가 25평이고 세금도 이 면적에 따라 내지만, 집을 살 때는 분양 면적에 따라 집값을 친다. 공용 면적이 작아지지만 그만큼 전용 면적 비율이 올라가므로 좋은 아파트 대접은 받는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의 아파트는 공동 주택이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집 한 칸 자체로 하나의 고급 주거지가 되며, 옆 세대는 이웃이 아닌 언덕이나 구릉 같은 자연의 일부와 다름없다. 언덕은 소음을 다루지 않는다. 언덕과 왕래나 대화를 할 수 없는 일이다. 철문으로 스스로 가두고 작고 쾌적한 왕국을 꾸미는 일이 벌어진다. 공동 주택의 기본이랄 수 있는 로비는 더욱 심각하다. 아파트 건물 한 동은 시가 수백억에 달하는 건물이지만, 입구는 뒷골목으로 난 샛문으로 들어가듯 비좁고 낮다. 공용으로 쓰이는 공간은 주차장과 엘리베이터 홀뿐이다.
그리고, 단지형 아파트의 행복하지 않을 미래: “아파트는 빼지…….” 책을 기획하면서 주변에서 많이 들은 말이다. “아파트가 뭐가 문젠데?” 사실 내 대답은 궁색하다. 열심히 문제 제기를 했지만, 막상 나열해보면 사소하거나 기껏해야 취향의 차이 정도다. 도시 경관을 해친다는 비판 정도가 뜨끔하겠지만, 어디 경관을 해치는 건물이 아파트뿐인가? 찬찬히 생각해봐도 아파트가 왜 공격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아파트는 장점이 더 많은 건축물이다. 도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 불량한 건물들을 쓸어내고 쾌적하고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문제는 앞으로 20~30년 후의 일이다. 단지형 아파트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동안엔 아파트가 노후했다고 판단되면 재건축을 했다. 어림잡아 이 주기는 보통 20년 정도로, 콘크리트의 수명이 100년인 점을 감안한다면 매우 짧은 수치다. 건축 구조의 안전성 고려라는 측면보다는 다른 요인이 많다. 재건축을 하면서 용적을 늘리고, 이렇게 늘어나는 용적을 판 기준 입주자들은 더 넓은 새집을 갖는다. 5층 높이의 아파트를 15층으로 다시 지어서 늘어난 면적을 판 돈으로 공사도 하고 자신의 평수도 늘리는 구조다. 결국 아파트는 리모델링을 통해 또 다른 집으로 태어나거나,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슬럼화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아파트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마찬가지로 가로수길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가로수길에 아파트 즉 주거 기능이 들어온다면’과 같은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주거는 도시를 24시간 깨어 있게 한다. 물론 아파트 형태도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지형 아파트가 아니어야 한다. 상상해보라. 가로수길에 사는 당신을……. 집 현관을 열고 나서면 밝고 아름다운 거리가 있고 도시의 북적거림이 펼쳐져 있다. 식당이 있고, 커피숍이 있고, 서점과 빵가게가 있고, 그 모든 가게의 주인과 단골들이 당신의 이웃이자 친구다. 그 도시의 활기와 생명력을……. 그렇게만 된다면 가로수길의 아파트는 타워팰리스를 누르고 최고가의 아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은 꿈을 꾸고 있다
루체비스타
서울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살고 있는’ 도시와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도시가 다르다는 것이다. 마주치는 이웃에게 웃으며 인사하는 간단한 일에서부터,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부부의 뒷모습, 거리에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의 위로 아련하게 켜지는 가로등 같은 광경은 사실 광고에서나 볼 법한 비현실적인 장면이다. 이러한 또 하나의 현실은 실제보다 더 실제같이 소비되고 경험되어서 도시로서의 서울에 확고한 가상의 성을 쌓는다. 팍팍한 현실과는 다르게 대조적인 가상의 집단 기억은 드라마와 영화와 현란한 광고영상을 통해 더욱 견고해진다.
이중의 현실, 가상과 실제 사이에서는 필연적으로 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보드리야르 식으로 말하자면 시뮬라크르다. 즉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가상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번듯한 세계. 이 실재와 실제였으면 하는 가상의 공간 같은 간극이 바로 서울을 도시에서 멀게 만드는 힘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일반적인 도시의 어쩔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더 많은 녹지 환경과 여유를 외치는 사이, 서울은 도시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서울에서 생겨나는 도시 문제라는 것은 도시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서울이 진정한 도시가 아니어서 생겨나는 문제가 더 크다.
밤이 되면 서울에는 빛이 소곤거린다: 연말이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시청 광장 그리고 루미나리에Luminarie라는 이름의 빛의 축제가 열렸다. 빛의 놀이는 중세 때부터 있었으며, 이를 축제로 만들어낸 것이 ‘루미나리에’다. 이 ‘루미나리에’가 2004년 서울로 왔다. 그 후 ‘루미나리에’라는 이름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상표 등록을 해 쓸 수 없다고 해서, 2007년부터는 ‘빛의 풍경’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루체비스타Lucevista’를 사용하고 있다.
루체비스타 앞에선 모두가 행복해지리라: ‘루체비스타’가 만든 가상 도시 서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고베가 루미나리에를 만든 건 지진으로 파괴된 도시의 시민을 위로하기 위해서라지만, 서울은 지난 60년간 멀쩡했다. 루체비스타는 서울에 거리가 없음을 위장하는 매트릭스다. 인파와 훈훈한 연말 분위기로 차가운 겨울을 녹일 수 있는 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감추는 환각장치다. 현실에서는 거리의 시민들이 인도도 없는 거리를 걷거나, 자동차가 비집고 올라와 있는 인도를 걸어야 한다. 루체비스타는 말한다. 당신은 도시에 살고 있고, 그 도시는 아름답다고 속삭인다. “아. 름. 다. 운. 도. 시. 서. 울.” 루체비스타나 ‘디자인 서울’ 같은 가상현실은 매트릭스의 촘촘한 그물망을 견고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 서울은 아무런 자각이나 고통 없이 최악의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진실은 때론 고통스러운 법이다. 아직,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