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테무진to the칸(21) 안티 테무진
2012. 2. 13. 월요일부편집장 필독
지난 회
(1) 짓밟힌 소녀 (2)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3)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 (4) 살인의 추억 (5)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6) 달콤한 인생 (7) 아내가 결혼했다 (8) 복수는 나의 것 (9)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10) 테무진 라이징 (11) 13익(翼) 전투 (12) 레저렉팅 테무진 (13) 내 이름은 칸 (14) 에너미 앳 더 게이트 (15) 패자의 역습 (16) 킬링필드 (17) 배신의 계절 (18) 컨스피러시 (19) 사막의 폭풍 (20) 왕의 귀환
테무진을 포함한 20명의 결사대는 불과 며칠 만에 속도, 스케일, 정교함 모두에서 인류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귀환을 펼쳐 보였다. 그는 자무카에게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에서 탈탈 털려 발주나 호숫가로 피눈물 범벅된 퇴각을 하기 이전보다 더 강력한 칸이 되었다. 출신부족인 몽골족을 거의 통합했고, 타타르에 이어 커레이트족을 집어삼켰다. 외가이자 처가인 올쿠누트와 옹기라트를 포함한 등 수많은 군소부족까지 자신의 휘하로 정리했다.
테무진 울루스는 다문화국가, 혹은 다문화사회로 발전하고 있었다. 몽골인(이 경우는 몽골’부족’은 물론 인종적 구분으로 몽골인, 즉 ‘몽골로이드’까지 포함해서 썼다.), 아랍인, 투르크(돌궐, 혹은 터키)인, 아리안족의 피가 섞였다고 봐야 하는 위구르인, 기타 말갈, 여진, 타타르, 거란, 탕구트족 등 다양한 인종집단이 섞여 있었고, 백성들의 종교도 가지각색이었다. 당시 몽골어로 ‘차캉’이라 부르던 시베리아 숲 속의 순록 유목민도 흘러 들어왔다. 이들은 코카서스인종과 몽골인종의 백-황 혼혈집단이었다. 전편에 설명한 대로 발주나 호숫가에 모인 20명의 결사대는 역사에 출현한 최초의 근대적 집단이었다. ‘발주나의 맹약’ 이후의 테무진 울루스는 20명의 결사대가 양적으로 확장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테무진의 극적인 몰락과 재기의 스토리는 지난 두 편, 19회 <사막의 폭풍>과 20회 <왕의 귀환>에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기록을 보면 테무진이 커레이트족 백성들을 평화롭게 통합하고,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만들기 위해 상당히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언제나 그렇듯 테무진은 ‘잘못을 저지른 대빵과 그 주변’과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에 어쩔 수 없이 동원된 백성’을 철저히 구분했다.
그렇다고 커레이트 왕족을 절단내기도 좀 뭐했던 것이, 진짜 잘못을 저지른 건 옹 칸과 셍굼 두 부자로 압축되기 때문이다. 커레이트 왕족들은 커레이트의 운명을 결정짓는 쿠릴타이에서 테무진을 배신하려는 옹 칸과 셍굼의 비겁함을 비난했었다. 특히 옹 칸의 동생이자 테무진과 여러번 손을 잡았던 자카 감보는 테무진에게 별다른 잘못을 한 적이 없었다. 원래 옹 칸은 테무진에게 커레이트족을 유산으로 남겨주려고 했었고, 테무진은 옹 칸 사후 커레이트족을 자연스럽게 상속받기 위해 커레이트 왕족과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으려고 했었다. 테무진은 셍굼의 억지와 옹 칸의 배신으로 어그러진 결혼사업을 마무리짓기 위해 자카 감보의 가족을 택했다. 어쨌든 커레이트 부족민들은 왕가의 혈통에 충성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왕가와의 결혼은 하는 편이 좋았다. 자카 감보는 테무진 편을 들다가 옹 칸에게 쫓겨 간신히 나이만에 도망간 상태. 그러나 그의 가족은 커레이트족에 있었다. 테무진은 일단 자카 감보의 딸인 ‘이바카 베키’를 자신의 처로 삼았다. 본부인 보르테, 그리고 타타르족 칸의 두 딸인 예수겐과 예수이에 이은 네 번째 부인이었다. 이바카에겐 ‘소르칵타니’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데다 총명하기 이를 데 없던 소르칵타니… 테무진은 그녀를, 아직 약혼자가 없던 막내아들 톨루이와 결혼시켰다.
소르칵타니는 몽골역사상 가장 중요한 여성이다. 왕실의 남자들이 정복사업에 뛰어들어 전선에서 싸울 때 제국의 행정을 관리하고 통치한 것은 그녀였다. 소르칵타니는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여성이다. 커레이트 왕실은 독실한 기독교도들이었고 그녀 역시 기독교 신자였던 만큼 소르칵타니의 자식들을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갖게 된다. 소르칵타니는 한때나마 몽골을 기독교에 우호적인 국가로 만들었고 이는 기독교의 역사에서도 매우 강렬한 사건이다.
다스린 영토와 인구로 보면 소르칵타니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시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하지만, 그녀가 벌였던 진한 투쟁의 역사와 권력의 밀도는 빅토리아 여왕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이야기까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오도록 하자.
테무진을 초원에서 깔끔하게 ‘delete삭제’한 쾌거를 뻑적지근하게 축하하는 자리에서 난데없이 수만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테무진에게 대패, 간신히 몸만 빠져나간 옹 칸과 셍굼… 이 두 부자에겐 비참한 최후밖엔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 편에 이야기한 적이 있다(또 설명하게 만들지 말고 1편부터 쭉 읽어보는 바른 습관을 갖도록 하자.).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초원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되면 서쪽으로 튀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당연히 옹 칸도 서쪽으로 튀었다. 테무진이 재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민심이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반면 옹 칸의 지지율은 바닥을 친 지 오래였다. 막상 몸을 피하고 나자,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위병도 없이 말 그대로 혼자 서쪽으로 튀었다.
많은 역사서에서 옹 칸이 나이만으로 간 것으로 나오지만, 이는 오류다. ‘나이만의 국경수비대장’을 만났다고 해서 그리 기술되고 있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우리는 딴지스. 이렇게 퉁치고 넘어가는 거 못 보는 족속이지 않는가? 함 살펴보자.
첫째, 옹 칸이 나이만으로 갈 리가 없다. 나이만이 옹 칸 동생들의 망명을 받아준 것은 정치적으로 옹 칸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즉 나이만이 커레이트족 자체의 적국이라고 단언하기는 좀 뭐해도, 옹 칸 개인에게는 명백한 적국이었다. 그는 나이만과 두 번 싸웠으며, 두 번 모두 처참하게 패배해 테무진에게 한번만 살려달라고 싹싹 빌지 않았는가. 특히 그중 한 번은 나이만의 군대를 대표하는 에이스 ‘쿡세우 사브락’ 장군에게 제대로 당했었다.
두 번째. 초원에는 국경이란 개념이 없었다. 국경이 없는데 어떻게 국경수비대가 있겠는가. 국경선을 긋고, 거기에 수비대를 상주시키는 건 정주문명 국가에서나 하는 거다. 고정된 영토가 없는 데다가 모든 인구가 계절마다 이곳저곳으로 이동하며, 인구밀도도 극도로 적은 초원에서 특정한 곳에 상주하는 병력이 있을 수 없다.
<몽골비사>는 옹 칸이 만난 나이만의 군사를 ‘전초’라고 적는다. 전적으로 옳다. 원래 전초란 전쟁시에 동원/집결된 군대에 속한 작은 부대로, 본대가 본격적인 전투를 벌이기에 앞서 적의 동태를 파악하고 정보를 물어오는 정찰대 내지는 소규모 특수부대를 뜻한다. 하지만 유목민들은 평시에도 전초를 운용했다. 정주-농경국가는 평시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킨다. 반면 유목민들은 국경도 국경수비대도 없었지만, 대신 전시가 아닌 평시에도 말을 타고 세력권 주변을 누비며 무슨 일 없나 하고 살펴보는 전초를 운용했다. 고정된 영토가 없으니 임시 둥지 주변을 살피는 ‘옵저버’가 필요했던 것이다.
전초를 국경수비대로 오인해 기술한 것은 정주문명의 기준으로 기마-유목문명을 이해하려는 오류다. 기라성같은 몽골 학자들이 줄줄이 실수한 걸 보면 고정관념은 역시 무섭다. 하긴 그들 모두가 정주문명의 일원이니… 중국인들이 내몽골의 몽골인 배우들을 동원해 만든 대하드라마 <성길사한(成吉思汗)>을 보면, 이 대목에서 정말 목책으로 두른 국경이 나오고, 거기에 나이만 병사들이 창을 들고 주욱 서 있다. 당시 초원엔 단 한 명의 보병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옹 칸은 해외여행하면서 국경 넘을 때 비자 제출하듯 나 좀 들여보내 달라고 문을 두드리는 식이다. 그랬을 리가, 절대로 없다. 다시 말해 그 드넓은 초원에서 옹 칸이 나이만의 전초와 딱 마주친 건 더럽게 운이 없었다는 거다. 처음 보는 노인네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니, 전초부대가 옹 칸을 심문한 건 당연한 거고. 전초의 지휘관은 ‘코리 수베치’라는 인물이었다. 누누이 설명했지만 코리는 지휘관이라는 뜻. 아마 소대장에서 중대장 정도 되었을 수베치는 자신의 순찰구역에 들어온 노인을 수상하게 여겼다
“당신 누군데 여기서 알짱대는 거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포로가 될 망정 신분을 떳떳이 밝혀야 죽지 않을 상황이었다.
“나는 옹 칸이다. 커레이트족의 왕 옹 칸 말이다.”
저 추레한 몰골로, 동료도 없이 혼자 어슬렁거리는 노인이 그 옹 칸이라고? 수베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옹 칸과 커레이트족은 건재했다. 우리야 테무진이 며칠 만에 극적으로 초원의 중-동부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수베치의 입장에선 서울역에서 마주친 노숙자 행색의 노인이 자기가 일본 천황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노인네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급히 하는 이유는? 그야 적의 스파이라서 그런 게 뻔하지 않을까.
“이 노인네가 미쳤구만.”
수베치는 그 자리에서 옹 칸을 죽여버렸다. 비록 우리의 주인공 테무진에게 한없이 비겁했고 역사가들의 말마따나 2류 군주였던 옹 칸이었지만, 그래도 약육강식의 초원에서 살아남은 사내였다. 유럽에까지 명성을 떨친 강력한 칸의 최후 치고는 너무나 허망하고 비참했다.
쿠쿠추는 아내와 동행하고 있었으니, 셍굼 일행은 세 명이었다. 테무진에게 워낙 완벽한 포위섬멸을 당했는지라, 정신없이 빠져나온 이 초라한 일행은 별다른 식량이 없어 쫄쫄 굶고 있었다. 그러다가 셍굼이 사막 한가운데 물웅덩이에 모여 물을 마시고 있던 야생마를 발견한다. 이게 웬 떡, 아니 밥이냐…
“쉿~”
셍굼은 야생마들을 놀래키지 않고 사냥하기 위해 말에서 내려 활시위를 잰 채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자 쿠쿠추는, 셍굼의 말을 낚아채 튀어버렸다! 뒤통수 제대로 맞은 셍굼, 사막 한 가운데서 말도 없이 헤매다 죽게 생겼다. 이제 쿠쿠추와 그의 아내는 셍굼을 버리고 살 길 찾아 가면 되는 거였지만…
여자는 남편이나 배우자가 인격적으로 저열한 행동을 보이면 실망과 함께 경멸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아니 내가 겨우 이런 인간을 믿고 함께 살았단 말인가? 쿠쿠추의 아내가 그랬다.
“당신, 셍굼이 개자식인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적어도 당신한테는 은인 아니야? 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불렀어? 그냥 ‘쿠쿠추’하고 부른 게 아니라 항상 ‘나의 쿠쿠추!’하고 부르면서 당신을 끔찍이도 아낀 사람 아닌가? 좋은 옷감이 있으면 당신하고 나눠서 함께 옷을 해 입었고,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당신을 불러서 함께 즐긴 사람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할 수가 있어?”
“이봐 마누라, 셍굼은 완전히 끝났다고. 그리고 냉정히 생각해 봐. 초원에 셍굼 저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저 사람이랑 같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 수 있겠냐구. 이왕 버리고 떠날 거 말이라도 빼앗아 챙기는 게 당연하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현실적으로.”
“아니 씨바… 그래 그 사람이 개자식이라고 치자. 헌데 다른 사람은 다 셍굼을 버려도 당신, 아니 너만큼은 그러면 안되지 이 비겁한 자식아! 우린 셍굼한테 당장 돌아가서 마지막 남은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그러나 아내에게 돌아온 쿠쿠추의 대답은 찌질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 개같은 년이(정말로 이렇게 말했다고 기록된다.), 남편 말은 안 듣고 셍굼을 챙겨? 네년이 나보다 셍굼을 더 좋아하는 걸 보니 그놈의 마누라가 되고 싶은 모양이구나?(이것도 역사에 기록된 대사다. 찌질남의 대사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비슷한 모양이다.)”
이런 병신 개마초… 이제 쿠쿠추의 아내는 남편이라는 인간을 완전히 혐오하게 되었다.
“여자가 돼서, 남편에게 이쁘다는 소리는 못 들을 망정 개년이란 소리나 들어 먹다니, 내 팔자야… 그럼 어쩔 수 없다. 셍굼에게 그의 황금 술잔이라도 주어라! 그거라도 있어야 물이라도 떠 먹고, 노잣돈이라도 할 거 아니냐.”
“쳇.”
쿠쿠추도 할 말이 없었는지, 셍굼에게 달려가 황금잔을 던졌다. “받으슈!” 서로 정나미가 뚝 떨어진 쿠쿠추와 아내는 투닥거리며 테무진 울루스를 향한다. 나이만에서 망명객으로 받아줄 가능성도 희박하고, 나이만 외의 초원 전부는 테무진의 영역이라 달리 갈 데도 없었으니… 그리하여 부부는 테무진을 알현하게 된다. 물론 테무진에게 서로를 일러바치러 간 걸 보면, 서로 자기가 잘했다고 굳게 믿은 모양이다. 이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들은 알 것이다. 테무진이 두 부부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줬을지.
테무진은 ‘계약의 인간’이이다. 셍굼은 개자식이 맞다. 하지만 사회적 시스템이라 할 수 있는, 법과 같은 ‘보편적 약속’이 존재하지 않았던 초원의 전통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계약이 법과 도덕을 대신한다. 테무진 자신은 개인 사이의 도덕률을 사회의 단위로 확장시킨 혁신가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간의 약속을 중요시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기는커녕 누구보다 배신자를 혐오했다. 테무진은, “뭐 이런 인간 말종이 다 있나.”하며 쿠쿠추를 처형해버렸다. 물론 쿠쿠추의 아내는 백성으로 받아들였고, 거기에 더해 상까지 두둑이 주었다.
그리고 중년의 천애고아 셍굼은… 말도 없이 용케 탕구트(서하)까지 갈 수 있었다. 물론 걸어갈 순 없다. 평생 부유하게 살았던 셍굼은 옷이나 장신구가 무척 고급이었을 것이다. 행색을 바꾸면 운 좋게 만난 캐러밴이나 아이막에서 말 한 마리 정도는 살 수 있다. 물론 쿠쿠추가 던져준 황금 잔으로 말을 구했을 수도 있다.
탕구트는 셍굼의 출신을 고려해 일단 망명을 허락해줬다. 물론 고급 망명객이 아니라 평범한 외국인 거주자 정도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셍굼은 탕구트에서도 자신이 귀족 신분이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초원에서 귀족들이 자주 하던 짓, 즉 마음에 드는 평민의 물건을 그냥 가져버리는 행동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마구를 집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탕구트 관리의 입장에서는?
그냥 절도다.
인지능력의 부족이라기보다는 ? 아무리 셍굼이라지만 그 정도로 멍청할 순 없다 ? 습관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외국인 거주자가 범죄를 저질렀으니 그 결과는 당연히 추방이었다. 셍굼은 사막과 초원이 섞여 있는 서쪽, 위구르족 유목민(상인들도 있었다.)들이 흩어져 사는 지대로 갔다.
처음 위구르족 현지인들은 끈 떨어진 셍굼을 받아준 것 같다. 하지만 셍굼은 거기서도 비슷한 실수를 한 모양이다. 탕구트가 셍굼에게 더 나았다. ‘추방’은 행정처리다. 행정편제가 있는 나라나 취할 수 있는 조치다. 빡친 위구르 현지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셍굼을 응징했다. 간단하고 소박하게, 다구리를 놔서 셍굼을 때려 죽였다.
역사를 오래 디비다 보면 재미난 현상이 생긴다. 어느 시점부터는 누가 착하고 나쁜지, 누가 세고 약한지 하는 기준에서 벗어나게 된다. 마치 문학작품을 읽는 것처럼 역사에 기록된 인물들이 한 명의 사람으로 다가온다. 영웅이나 비겁자나, 승자나 패자나 연민과 교감으로 접근하게 된다. 셍굼처럼 비참하게 죽어도 별다른 동정이 느껴지지 않는 인물을 만나기란 참 드물다. 안녕, 셍굼.
여하튼 셍굼은 이 시점에서 몇 년을 더 살다가 죽고, 살아있을 때의 셍굼 이야기가 한 번쯤 더 나올 예정이지만 역사에서는 지금 퇴장한다고 보면 되겠다.
한편, 옹 칸을 죽인 수베치는 은근히 뒷골이 땡기기 시작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진짜 옹 칸을 죽인 거면 어떡하지…? 군대는 어쨌든 보고가 생명. 수베치는 나이만 조정에 리포트를 올렸다.
“저기요, 제가 여차저차해서 그 노인네를 확 죽여버렸는데 꼭 옹 칸이 아닐 거란 보장은 없잖아요…??”
글타, 나이만은 초원 유목민들치고는 무척 세련되게도 ‘조정’을 운영했다. 유목민 집단의 수뇌부를 ‘오르도’라고 하는데, 이 오르도는 군주와 그와 핏줄이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고급 혈통집단이다. 물론 테무진의 오르도는 천민출신부터 자신의 혈육까지, 능력 순으로 모인 세련된 오르도였다. 이것도 조정이라 부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건 테무진이라는 개인이 혁명적이어서 그런 거지, 몽골족이 일정 수준 이상의 발전궤도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로 둘 다 ‘court’로 번역되는 궁정과 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거칠게 구분하자면, 어떤 나라 혹은 세력권이 있을 때 궁정이란 군주를 중심으로 그의 혈육, 그리고 그들의 하인들이 모인 집단을 말한다. 따라서 초원의 전통적인 오르도도 궁정과 다를 바 없다.
궁정도 정부라고 할 수 있지만 현대적인 의미의 정부라 부르기엔 많이 모자라다. 하지만 조정은 명실상부한 정부다. 조정은 혈통에 의해 군주가 된 최고권력자를 중심으로, 그의 혈육 뿐 아니라 실력으로 선출된 국가운영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집단이다.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과거시험을 통해 실력으로 채용된 신료들이 최고결정권자인 군주를 보좌하는 고려와 송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정부, 즉 조정을 갖고 있었다. 이 중화식 행정편제는 군주의 사적 영역인 ‘궁정’과 공적 영역인 ‘조정’을 구분한다. 금나라의 경우는 여진족 황실 멤버들과 과거를 통해 선출된 한족 천재들이 군사와 행정을 양분하고 있었다. 물론 이 경우도 조정이라 불리기엔 충분하다. 공부 잘 하던 머리 좋은 추기경 데려다가 궁정에 득실대는 영주들 사이에 박아 놓고 재무장관 시키던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중국이나 아랍에서 보기엔 도토리 키재기지만, 그래도 초원에선 가장 잘 먹고 잘 살았던 나이만은 위구르족 석학을 초빙해 재상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조정이라 부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시킨 셈이다.
여하튼 수베치의 보고를 받은 나이만 조정. 지난 17회 <배신의 계절>을 다시 복기해 보자. 테무진은 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쳐부수고 막대한 약탈품을 챙겨, 성인 남성들을 학살하고 흡수한 타타르족 여성과 고아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당시 나이만의 정식 군주인 ‘타양 칸’은 평지를, 그의 동생 부이룩 칸은 알타이 산기슭을 다스리고 있었다.
부이룩 칸이 테무진에게 죽은 지금, 나이만의 권력은 타양 칸과 그의 어머니인 왕후 ‘구르베수’가 나눠 갖고 있었다. 타양칸의 아버지이자 구르베수의 남편인 선대 왕 ‘이난차 빌케 칸’은 상당히 양호한 군주였다. 당시엔 에이스 쿡세우 사브락 장군도 팔팔한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난차 빌케 칸이 사망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타양 칸이 문제였다.
타양 칸, 한자 대왕(大王)의 초원식 발음인 ‘타양’을 이름으로 가진 그였지만 대왕의 자질은 갖추지 못했다. 이난차 빌케 칸은 솔찬히 늙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다가 젊은 부인(아마도 자식을 보기 위해 또 맞아들인 여인이었으리라) 구르베수 사이에서 가까스로 아들을 얻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타양 칸이다.
이난차 빌케는 무정자증 환자였을까? 그랬다면 타양 칸은 구르베수가 요령껏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 나은 아들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난차 빌케는 정자의 수가 적었거나 정액의 질이 좋지 못한 증상을 가진 남자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난차 빌케가 다 늙어서 처음 얻은 자식인 타양은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못했다.
몸이 좋지 못했으니 어머니 구르베수의 품에서 오냐오냐 하며 자랐고, 초원 남자들이 겪는 통상적인 경험-유목, 서러운 데릴사위 생활, 전투, 약탈 등-을 하지 못하고 왕이 되었다. 역사는 타양 칸을 어리석은 겁쟁이로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누구라도 그렇게 화초처럼 자랐다면 거친 초원에서 다른 사내들과 어울리는 법, 즉 다스리고 지휘하는 법을 제대로 익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타양 칸은 운이 나쁜 군주다.
타양 칸이 마마보이였던 만큼 나이만의 조정은 왕후 구르베수가 휘어 잡고 있었다. 여기에 조커에 해당하는 카드가 있었으니… 뛰어난 능력자였던 타양 칸의 아들 ‘쿠출룩’이었다. 쿠출룩은 군사적 재능 뿐 아니라 정세를 분석하는 능력에서도 아버지와 할머니를 월등히 앞섰지만, 두 사람의 권력에 밀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여하튼 수베치의 보고는 왕엄마 구르베수가 접수하게 된다. 구르베수의 답신은 :
“야 수베치, 이왕 죽인 건 뭐 할 수 없고.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 하니까 그 사람 머리를 잘라서 갖고 와봐. 우리한텐 옹 칸을 알고있던 사람들이 여럿 망명 와 있으니까, 보면 바로 알 수 있을거야.”
그리하여 옹 칸의 머리는 나이만 조정으로 특급배송된다. 박스 뚜껑 열어보니 뭐, 당연히 옹 칸의 머리였고.
이런… 아무리 적이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초원을 주름잡던 영웅이었지 않은가. 이렇게 비참하고 별 볼 일 없게 죽이다니. 구르베수는 영웅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이왕 잘린 머리 다시 붙일 순 없는 노릇이고… 구르베수는 옹 칸의 머리에 금칠을 해서 흰 양털 펠트 위에 올려놓고는 아들 타양 칸과 며느리들을 불러다가 예를 올리게 했다(금칠은 방부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미안하게 됐수다…”
그때였다. 옹 칸의 머리가,
웃. 었. 다.
사후 경직에 의해 죽은 사람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일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게다가 옹 칸의 머리는 잘린 채였으므로,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장통 돼지머리처럼 건조해지는 얼굴 근육의 작용에 의해 웃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일어났을 수 있다.
어쨌든 옹 칸의 잘린 머리의 얼굴근육이 움직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 간주하고 이야기를 계속하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타양 칸은 조낸 식겁했다. 공포는 분노를 낳는 법. 타양 칸은 옹 칸의 머리를 내던진 후 발로 짓밟고는 내다 버리라고 소리쳤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나이만의 에이스 쿡세우 사브락, 한심해 죽을 지경이다.
“구르베수 카톤, 그리고 타양 칸, 두 분 지금 뭐 하는 행동입니까? 칸이었던 사람을 함부로 죽인 것도 명예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예를 갖추고 정중히 처형하던가… 하지만 멋 모르고 죽였으면 죽인 거지, 그 머리를 잘라서 갖고 와서는 금칠을 해다가 모셔 놓은 건 또 뭐 하는 짓이랍니까? 게다가 이 이상한 놈의 제사를 지낼 거면 끝까지 지내기라도 하던지, 발로 밟아서 내다 버리다니 지금 제 정신들입니까?”
쿡세우 사브락이 성질 난 거, 이해할 만하다. 대부분의 나이만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다. 왕실 멤버들과 귀족들은 100%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같은 기독교 신도인 데다 주군이라는 인간들이 사람 머리를 가지고 저 난리를 피우며 ‘이단’ 짓을 하고 있으니, 사리분별 확실한 쿡세우 사브락의 속이 뒤집어질 만 하다. 물론 당시 초원의 기독교 문화는 무속신앙과 많이 뒤섞인 상태였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이 죽인 사람의 머리를 갖고 푸닥거리를 할 건 뭐란 말인가. 쿡세우 사브락은 계속해서 분통을 터뜨린다.
“구르베수 카톤, 여왕님은 백성들을 잔혹하게 다스리시지요. 그 가혹함이 날이면 날마다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의 칸이신 타양 칸이여. 당신은 매사냥과 네르제(몰이사냥. 이게 뭔지는 지난 기사에서 확인하는 착실한 독자가 되도록 하자.)만 즐길 줄 알지, 전쟁이 뭔지 정치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시지요.”
확실히 구르베수는 사디스트였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뒤이어 하겠다. 그건 그렇고 쿡세우 사브락이 이렇게 여왕과 왕을 훈계한 걸 보면, 역시 보통 위치의 장군은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 쿡세우 사브락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 전장을 누빌 때야 테무진의 공격으로부터 왕국을 지킬 수 있었지만, 지금은 현장에서 은퇴한 상태였다. 그러니 왕국의 앞날에 대해 걱정도 많아지고 잔소리도 많아질 수밖에.
한편, 몽골사를 연구하는 잭 웨더포드는 <몽골비사>에 기록된, 나이만 조정애서 벌어진 엽기극이 나이만 사람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기 위한 테무진의 ‘선전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정신줄이 안드로메다로 가 있는 인간 말종들이다.”
는 프로파간다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첫째, 사실이 아니라 선전이라는 증거가 없고 둘째, 지나치게 솔직한 역사서로 정평이 나 있는 <몽골비사>는 나이만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했던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의 행색을 가감 없이 묘사하고 있다. 촌놈들, 즉 테무진 울루스 사람들의 ‘열폭’까지 그대로 적혀있다.
나의 판단이 1차 사료를 가장 먼저 다루는 전문 역사학자들의 수준에 미칠 리는 없다. 그래도 내 개인적인 예측이 허락된다면, 나는 몽골인들이 그저 보고 들은 정보(그 정보에 다소 오류가 있었다고 해도)를 솔직히 기록했다고 감히 생각한다.
어쨌든 타양 칸은 쿡세우 사브락의 훈계를 알아듣기는커녕 일평생 왕국에 봉사해 온 뛰어난 노장군을 절망에 빠뜨린다.
“몽골을 쳐부수자!”
“뭐라굽쇼?”
우리의 쿡세우 사브락, 어이를 상실하고 만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는 법. 이 초원에 두 칸이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저기, 당신이 머리를 짓밟은 그 옹 칸은 칸이 아니었나요? 초원엔 원래 칸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태양이랑 칸은 다르거든요?”
“아 씨끄럽고… 어차피 우리 나이만과 테무진은 결판을 내야 할 운명이야!(실제 대사임)”
“저기요, 타양 칸 당신은 정복자의 운명을 타고난 뭐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방금 그 대사는 당신 같은 사람한테 어울리지 않는데요. 큰소리 치지 말고 근신이나 하십시오!”
그러나 타양 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테무진 울루스와 나이만은 전쟁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지난 수십 년 간, 불구대천의 라이벌이자 안다인 테무진과 자무카 두 사람은 초원의 패권을 두고 경쟁해왔다. 둘 다 자신을 중심으로 초원의 질서를 재편하려 했다. 하지만 테무진이 급진적인 혁명가였던 반면 자무카는 전통적인 의미의 영웅이었다. 테무진은 군사적 능력에선 언제나 자무카에게 밀렸지만 정치에서는 언제나 승리했다. 결과적으로 초원의 정국을 주도하는 주인공은 테무진이었다. 즉 당시 초원은 <테무진과 안티 테무진>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자무카는 테무진과 맞부딛히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테무진의 여집합, 즉 전통 귀족세력과 보수주의를 대변하게 되었다. 테무진에게 패한 적들은 자석에 이끌리듯 자무카에게 모여들었다. 자무카는 반 테무진 몽골족, 반 테무진 부족/씨족, 한때 테무진을 도와 무찔렀지만 결국 테무진에 대항해 그에게 귀순한 메르키트족, 그리고 테무진의 혁명에 반대하는 전통 기득권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친 자무카 연합은 나이만과 손을 잡은 상태였다. 그렇다, 쿡세우 사브락이 은퇴한 지금 자무카는 나이만의 최고 사령관으로 초빙된 VVIP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혹한 운명인 테무진과 자무카. 자무카를 끌어안은 것 만으로도 나이만은 테무진과 초원의 주인을 놓고 대결전을 벌일 운명이었던 거다. 나이만이 자무카와 손을 잡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 이미 나이만에 한 번 쳐들어왔던 테무진이 재기에 성공해 나이만을 제외한 초원 전부를 손에 넣은 상황이 아닌가. 초원 최고의 군사전략가이자 테무진의 가장 무서운 적인 자무카를 군 최고사령관으로 초빙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자무카의 군사적 재능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나이만의 군사와 물자라는 강력한 하드웨어와 만났다. 뭘 더 망설이겠는가?
실크로드 무역로 한구석에 발을 걸치고 있던 나이만은 지구의 촌구석인 초원 유목민 세계에서는 가장 부유했다. 인구도 가장 많았고, 정주문명국가를 어설프게나마 모방해 ‘조정’을 운영하는 등 가장 잘 나갔다. 나이만은 이난차 빌케 칸 시절부터 초원 전체를 통일할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난차 빌케 칸 시절부터 나이만은 권력투쟁에서 옹 칸에게 밀려난 커레이트 왕족-옹 칸의 동생들-의 망명을 받아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이만 사람들이 동정심이 많아서가 아니다. 커레이트, 즉 초원 중부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서였다. 나이만은 옹 칸의 동생 에르게 카라를 명분으로 앞세워 옹 칸을 쫓아내고 커레이트를 괴뢰국으로 만든 적도 있었다. 테무진이 옹 칸의 옥좌 복귀를 도와주면서 잠깐 담갔던 숟가락을 빼야 했지만 말이다.
수많은 전쟁과 약탈로 카오스 상태였던 초원엔 이제 두 개의 세력이 응집해 있을 뿐이었다. 테무진 울루스. 그리고 자무카-반 테무진 세력-나이만 연합. 서로가 서로의 명백한 목표물이었고, 또한 최종 타겟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정국이었다.
한편 금나라는 제후의 작위를 내려준 옹 칸(‘옹’이라는 이름 자체가 왕王의 초원식 발음이지 않은가. 기억 안 나시는가? 그렇다면 지난 기사를 쭉 읽어보자. 얼릉.)을 통해 초원을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옹 칸이 죽은 지금, 금나라도 초원 정세에 간섭할 루트를 잃어버린 상황 초원의 전사들이 외부 세력의 개입 없이 자력으로 초원통일전쟁을 치를 잠깐의, 그리고 절호의 타이밍이었다.
촌놈 무시하는 건 서울사람이 아니라 촌동네 멋쟁이라는 말이 있다. 초원 바깥의 고급문화를 얼추 경험해본 나이만은 초원 중-동부를 상당히 깔봤다. 특히 귀부인 구르베수는 대놓고 테무진 울루스를 무시했다.
“야 그 거지새끼들… 그 지저분한 애들을 다 노예로 잡아다가 뭐에 쓸고? 걔네 몸에서 냄새도 나고 옷도 추레하게 입잖아. 전쟁에서 이겨도 남자들은 데려오지 마. 나이만 오염된다, 얘. 개중에 가장 깨끗한 젊은 여자들만 잡아와서, 음… 소와 야크, 양의 젖이나 짜게 부려먹어야지. 그 더러운 손으로 짠 젖을 우리가 먹을 수 없으니 젖 짜기 전에 꼭 손 씻게 하고 말야.”
울루스의 이익과 전쟁의 당위보다, 패배한 적들의 괴로움과 굴욕을 먼저 생각하는 걸 보면 쿡세우 사브락이 구르베수의 성격이 잔혹하다고 평한 게 이해가 간다. 확실히 사디스트 기질이 있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구르베수의 언행은 테무진 울루스에 전해져 테무진과 그의 백성들을 분노에 떨게 했다.
타양 칸은 “몽골놈들의 전통을 빼앗아오자!”며 전쟁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전통이란 화살통을 말하는데, 활이 절대적인 주력무기인 초원에서 화살통을 빼앗는다는 관용구는 상대의 무력을 제거한다는 뜻. 다시는 싸울 수 없는 상태인 전사 이하의 포로나 노예로 만든다는 이야기다. 사실 타양 칸의 자신감도 이해가 가는 것이, 늙은 쿡세우 사브락을 대신해 자무카가 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상황이 쿡세우 사브락에게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째, 자무카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 위험한 인간이다. 그의 야심에 나이만의 병사와 물자가 동원된다…? 자무카는 나이만에 봉사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우리의 나약한 군주는 그만 믿고 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반대하는 게 당연하다.
둘째, 쿡세우 사브락은 테무진 군대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었다. 테무진과 옹 칸 연합군을 추격했을 때, 테무진을 피해 옹 칸의 커레이트군을 잡아먹지 않았는가. 물론 모든 면에서 나이만이 유리한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적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지를 아는 장군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의 패배가 멸망으로 직결되는 크리티컬 워, 결정전이었다. 그런 전쟁을 즉흥적으로 추진한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셋째, 자신이 은퇴했다. 자무카와 그의 세력 외에, 순수 나이만인 중에는 전쟁을 총괄할 만한 인물이 없는 인력공백 상태였다.
넷째, 나이만 조정은 “몽골의 대부분은 우리에게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물론 몽골 씨족들과 귀족들 대부분은 나이만에 있었던 것이 맞다. 중부와 동부 초원엔 테무진의 출신가문인 카야트 보르기킨 혈족의 간판밖엔 없었다. 그 외의 간판은 필요 없었다. 테무진은 귀순, 동맹, 정복 등 다양한 형태로 수많은 집단을 흡수통합했기 때문이다. 혈통 단위로 자잘하게 쪼개져 있던 과거의 초원에서는 간판의 수가 세력의 크기를 나타낸다. 나이만인들은 습관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새로운 정세를 분석하지 못했다. 오히려 같은 군사력이라면 하나의 체제에 묶여있는 것이 훨씬 강력하다. 일사분란하게 통일된 명령체계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초원 중동부는 하나의 오르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쿠리엔만 존재했다. 그 중심엔 물론 테무진이 있었다. 쿡세우 사브락은 이 파괴력이 어떤 건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무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살아남은 그의 모든 적들이 나이만을 중심으로 규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전쟁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많을 수록 유리하다. 20세기 이전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양과 양의 충돌이다. 역사엔 뛰어난 전술로 많은 수의 적을 무찌른 영웅스토리가 득실거리지만, 그들이 영웅인 이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무카가 나이만의 군사고문이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먼저 ‘이기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테무진은 전술적 재능과 현장지휘력에선 자무카에게 안 된다. 테무진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역사엔 여러모로 재능이 평범한 사람이 불세출의 영웅이 되는 경우가 여럿 있다. 이 인물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단점을 정확히 안다는 것. 몽골 군대의 전설은 테무진의 자기 인식에서부터 시작됐다.
자신 뿐 아니라 누가 지휘해도 이길 수 있는 군대가 필요했다. 그래서 테무진은 군대를 굴리는 항구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이 훗날 유라시아 대륙을 피로 물들인다.
일단 테무진은 십진법 단위로 군 전체를 재편성했다. 지난 편에서 쿠리엔 단위로 싸우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충분히 설명해 놓았다. 초원 전사들이 쿠리엔 단위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현실도.
여하튼 유목-기마민족들은 원래 전시에, 여건만 된다면 십진법으로 군을 편성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 여건을 마련하는 게 영 힘든 일이었지만…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군 편제도 십진법 단위였다. 테무진은 타타르에 맞서 옹 칸, 금나라 제국군과 연합군을 편성했을 때 이 시스템을 처음 배웠다. 다만 테무진처럼 효율적이고 정확한 십진법 체계를 만든 인물은 초원에 없었다.
그 이유는 테무진이 군 편제에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통치하는 사회를 완벽한 십진법 체계의 군대가 가능하도록 개혁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유목사회의 복잡다단한 계급구조를 없애고 능력순으로 사람을 기용했으며, 그렇다고 낙오자를 만들지도 않았다. 너무 어리거나 늙지 않은 모든 남성이 근대적 시민군에 해당하는 어엿한 전사였다. 누구에게나 커리어를 만들 기회가 있었으되 굶는 사람은 없었다. 테무진 울루스는 가장이 없는 가정을 먹여 살렸고 고아들의 성장을 책임졌다.
이런 구조에서는 모든 남성들이 동등한 한 명의 전사로 제몫을 하게 된다. 출신부족의 이익과 복잡한 주종관계에 휘말리지 않아도 된다. 전 백성의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주는 단 한 사람, 테무진의 의지에 따라 목숨을 걸면 된다. 싸우다 죽으면?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들의 삶을 책임져준다.
테무진 울루스의 군 편제는 총 네 단위의 단순깔끔한 형태를 띠게 된다.
1. 아르반. 열 명의 분대다. 2. 자우트. 백 명의 중대이다. 3. 밍간. 천 명의 연대다. 4. 투멘. 만 명의 사단이다.
당연히 모두가 기병이다. 단 한 명의 보병도 없다. 일인당 국가가 소유한 공공재인 군용 거세마 3~4 마리가 배속된다. 무장도 통일한다. 기본적으로 모두가 활을 쏘는 궁수다. 물론 백병전을 대비해 장대, 창, 칼(몽골식 환도), 철퇴를 구비한다. 신분과 직업별로 무장과 무기, 병종이 달라지는 다른 지역의 군대와는 전혀 다르다.
한편, 100% 기병이기 때문에 열 명을 분대로 보는 건 무리가 있다는 시각도 있다. 기병의 전투력은 보병의 5~15배에 달한다. 전속력으로 뛰는 말 위에서 단잠을 잘 수 있는 초원 유목민들은 최고급 기병이었다. 따라서 전투력만으로 보면 아르반을, 현대적인 기준의 전투력 측정했을 때 중대로 볼 수도 있다. 그러면 자우트는 연대, 밍간은 사단, 투멘은 군단이 된다. 우쨌든…
치열한 전투현장의 운명공동체라 할 수 있는 아르반은 전우애가 중요하기 때문에, 한 ‘아이막’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어도 언어와 종교는 같아야 할 테니까. 따라서 한 아르반 멤버들은 함께 생활하고 오래 내왕한 지인들이 많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분대장을 뽑는 기준이다.
싸움을 잘하고 체력이 좋은 순서대로 아르반의 분대장 뽑는 게 아니었다. 테무진의 철학을 들어보자.
“분대장은 자신의 체력과 실력을 기준으로 부하들을 이끄는 법이다. 자기 자신은 뛰어난 전사지만 남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대장은 동료들을 지치게 하고, 그러다보면 낙오자가 생길 수 있다. 누구도 낙오해서는 안 된다.”
즉 모두가 최상의 컨디션에서 전쟁을 수행하려면, 아르반 코리는 신체능력이 평균치에 해당하는 평범한 사람이어야 한다. 능력이 뛰어난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 분대장이 되면 분대원들의 열등감을 조장하고 그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
공포와 권위에 눌려 전투에 참가하는 것은 2% 부족하다. 테무진 자신의 경우가 그렇다. 그를 지켜주고픈 민심이 그의 정치력을 만들었다. 그는 전투에서는 많이 졌지만,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겼기 때문에 초원의 정세를 주도할 수 있었다. 내 곁에 있는 대장은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더불어 성격이 순해서 모두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모든 인력 자원을 맥시멈으로 끌어올려 전투력에 반영하는 테무진만의 방식이었다.
그 맹렬한 정복의 역사 때문에 몽골 전사라고 하면 피에 굶주린 엘리트 전사들이 연상 되지만, 몽골 남성들은 전사 노릇도 하는 생활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분대장이란, 사람 좋다는 소리 듣는 옆집 아저씨 정도다. 성격 좋은 아저씨는 젊은 부하들을 인간적으로 챙기는 법. 부하들도 ‘동네 형’, ‘이웃 삼촌’을 울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참 인간적인 풍경이지만, 이렇게 구성된 아르반은 그야말로 가공할 전투력을 내뿜게 된다.
물론 자우트를 지휘하는 중대장부터는 전투의 잔문가가 되어야 한다. 이때부터는 출신계급과 종족에 상관없이 능력순으로 선발된다. 물론 자우트 코리도 자신의 직속 아르반을 지휘한다. 이 아르반은 자우트 코리의 호위대이자 전령, 전초 등 특수부대 역할을 한다. 아마 젊고 강인한 남자들이 뽑혔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투멘까지 올라간다. 투멘 지휘관부터는 장군이다. 한 개 이상의 투멘을 관장하면 노얀, 즉 대장군의 칭호가 붙는다. 노얀이 테무진이 관장하는 쿠릴타이에 참석했다가 나오면, 투멘-밍간-자우트-아르반 순으로, 각 단위의 장들을 통해 모든 병사들에게 순식간에, 빠르면 불과 몇 분 만에 전술이 전달된다.
대병력이 만나 일전을 치르는 전통적인 회전(會戰)은 전투 직전의 포메이션 세팅과 임무 부여에서 판이 갈린다.
영화 <벤허>에 보면 해적과의 전투에서 자신이 이긴 줄도 모르고 자결하려는 로마 장군의 모습이 나온다. 피 튀기는 전투의 아수라장 속에선 장군이나 병사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알기가 힘들고, 일단 죽어라 싸우는 수밖에 없다. 열심히 준비하고, 세팅해 놓고 승자독식의 운명으로 군대를 밀어 넣고 나면 승패는 하늘에 맡기는 거다. 물론 초원 유목민들의 경우 사령관은 후방에서 전투를 내려다보며 지휘하곤 했지만 그래도 회전의 성격이 변하지는 않는다.
만약 전투 중에 승패의 무게추를 돌릴 수 있는 지휘관이라면 소위 영웅이라 불릴 조건이 된다. 전투를 큰 그림에서 판단하는 시야, 그 치열한 현장에서 당장 어떻게 해야 할 지를 감지하는 동물적 감각. 그리고 부하들을 피칠갑이 기다리는 적진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맹렬한 에너지를 가진, 비범함과 싸이코패스 중간쯤에 위치한 남자들이다. 이 분야에선 초원에서 자무카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전투 중에는 물론 어느 상황에서도 통일된 명령, 신호 체계에 따라 지휘관의 의지대로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신속하고 세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군대가 있다면? 수만 명이 모여도 기동과 대형(포메이션) 전환에 아무런 흐트러짐이 없다면? 또한 그 군대가 100% 실력이 검증된 순수 기병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군대가 가능하다면 그건 무적이다. 설사 지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한 채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다. 테무진은 이런 군대를 만들기 위해 십진법 체계 아래 날이면 날마다 맹훈련을 했다.
무슨 훈련을 했을까? 바로 네르제, 몰이 사냥이었다. 회전의 목표는 언제나 포위섬멸. 기본적인 그림은 네르제와 같다. 원래부터 기마-유목민 전사들은 네르제를 통해 전투를 연습했다. 당연히 테무진은 수많은 전술과 병력단위로 네르제를 하는 실험을 반복했을 것이다. 덕분에 초원 동물들은 고생을 하게 됐다. 야생동물 뿐 아니라 말도 고생했다.
통일되고 약속된 움직임을 위해 동서고금의 모든 보병은 ‘제식’이란 걸 한다. 우리가 보는 제식의 궁극은 국군의 날 행사 퍼레이드다. 오와 열을 맞춰 똑같이 움직이는 보병들은 자유의지가 없는 얼간이처럼 보이지만, 제식은 괜히 하는 게 아니다. 보병의 전투력은 이 통일된 움직임에서 나온다. 정해진 간격과 형태로 밀집한 보병들이 적과 충돌하는 전통 회전에서는 더욱 그렇다.
로마군의 투스타도(거북대형)은 제식훈련의 결과물이다. 게르만족이 ‘어린 계집애처럼 작고 연약하다’고 평했던 로마 남자들. 로마군은 일대일 대결로는 대적하기 버거웠던 장신의 게르만족, 켈트족(갈리아인) 전사들을 제식으로 휩쓸었다.
하지만 기마병은? 길들인 동물에게 제식을 기대할 수 있을까…
테무진은 그걸 했다.
초원에서 거세마가 군용인 이유는 숫말의 체력과 암말의 온순함을 지녔기 때문이다. 순해야 말을 잘 듣고 통제가 잘 된다. 군용마는 엄격한 훈련을 통해 선발된다.
군용마 훈련 프로그램은 남은 기록이 별로 없다. 확실히 남아있는 기록들 중 한 가지 ? 군용마가 되어 ‘입대’하기 위한 최종 테스트는, 달리는 말 위에서 기수가 양손에 물이 담긴 술잔 두 개를 들고 있는 것. 물이 한 방울이라도 떨어지면 탈락이다.
이처럼 궁극의 주행 안정성을 가진 말 위에선 궁수가 완벽한 조준사격을 할 수 있다. 또한 이러 말을 몰면 적에게 소리 없이 접근할 수 있다. 달리는 중에도 그 정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체력적으로도 우월하단 뜻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말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향 평준화되었다. 평준화되었으니 수십만 마리의 말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와중에서도 서로 오와 열을 맞추며 정확하게 흩어지고 모일 수 있다. 후미(특유의 저음을 내는 몽골의 전통 발성법), 효시(소리나는 화살), 횃불, 호루라기, 깃발 등으로 지휘관의 뜻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 받은 기수의 명령을 기계처럼 구현한다. 테무진은 장거리를 달리다 멈춘 말에게 곧바로 물과 풀을 먹이는 행위를 금지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방금까지 뛴 말의 앞발과 뒷발을 묶어서 꼼짝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다 말의 숨이 가라앉고 나서야 물과 풀을 먹였다. 이는 격렬한 운동 후에 몸을 잠시 긴장하게 만들면 근육이 제자리에 잡힌다고 하는 현대 스포츠역학에도 꼭 들어맞는다. 테무진 울루스의 사람들은 이 현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말을 이렇게 다루면 뱃살이 안 생기고, 살(근육)이 등에 붙는다.”
하지만 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사람도 아니고 짐승이 복잡한 규칙에 시달리다 보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테무진 군대의 말 훈련법은 인류가 말을 길들인 이래 가장 엄격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인내력이 강한 말들만 선발되는 거긴 하지만…
게다가 전쟁터는 순진한 가축의 입장에선 미치고 환장할 공포의 현장이다. 확실히 동물애호가의 입장에선 할 짓이 아니다. 테무진과 그의 백성은 결코 동물애호가가 아니었지만 말은 유목민들에게 다른 짐승과 사람의 중간쯤 되는 존재다. 언제나 말과 교감하며 함께 사는 사람들이다. 말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테무진은 말의 기본권을 배려한 초현대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군용마 퇴역제도’였다. 일정 기간 이상의 전쟁을 겪거나 한 번 이상의 장거리 원정에 참여한 말은 초원에 돌아와 말 그대로 ‘전역한다.’
거세마는 생식력이 없고 말젖도 생산할 수 없기 때문에 목적에 맞게 쓸 게 아니면 고기와 가죽의 재료가 되는 게 합리적이다. 하지만 테무진은 자기 울루스에서 태어나 자란 죄로 갖은 고생을 다 한 말에 대한 예의로 전역한 군용마는 훈련과 전쟁에서 해방돼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평생 살게 했다.
초원의 풀은 가축의 수를 유지하는 한정된 자원이다. 유목문명은 풀에서 시작한다. 테무진은 복지 차원에서 퇴역마들에게 기꺼이 풀을 내줬다. 물론 필요하면 여기저기 오가는 교통수단 노릇이야 계속 했겠지만, 말한테 그걸 고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은 울루스의 모든 성인 남성과 군용마를 정예군으로 만들었다. 나라 전체가 전문 전투집단으로 거듭나고 있던 1204년 봄, 나이만 조정은 기어이 전쟁을 결의했다.
‘토르비 타시’라는 이름의 사내가 남쪽을 향해 말을 달리고 있다. 그는 타양 칸의 지령을 받고 지금 ‘옹구트’족의 영역에 와 있다. 옹구트족은 뭐하는 사람들이었을까? 나는 분명히 초원 전체가 테무진 울루스와 반 테무진 연합으로 양분된 상황이라고 썼다. 옹구트족은 전통의 기마민족이었지만, 초원의 일원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몽골 역사에서 옹쿠트족이라 기록된 탓에 그리 불렸지만, 원래 옹구트족은 스스로를 ‘샤토’족이라 불렀다. 샤토 족은 유라시아대륙을 오랜 시간 휩쓴 투르크족의 한 일파가, 중국의 풍요로운 물자와 식량을 기웃거리면서 탄생한 부족이다. 당연히 약탈을 했을 것이다. 옛날 옛적 당나라는 이 귀찮은 부족을 아예 국경수비대 겸 기병부대로 고용해버린다. 게르만족에 속한 한 부족 전체 남성을 용병군단으로 고용한 로마의 경우와 비슷하다. 샤토 족은 얼추 말도 잘 듣고 고용주 당나라에 적당히 반항도 하며 살게 된다. 그러면서 중국 북부, 만리장성 바깥쪽에 붙어 살게 된다. 이 지역이 현재 내몽골의 ‘올도스’주(state)다. 아래 보이는 붉은 부분이다.
안녹산의 난으로 당나라가 멸망하자, 샤토 족은 중원의 권력 공백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당나라의 인구와 물자를 상당 부분 점유한다. 이를 주도한 인물이 당나라의 장군 겸 샤토 족 족장, 즉 외국인 용병대장이었던 ‘‘이극용’이다. 중국 장군이니 중국식 이름이 필요했을 터. 당연히 모국어로 된 본명은 따로 있었을 것이다. 이극용이 세운 나라가 ‘후당(後唐)’이다. 정주문명을 관리해 본 경험이 없는 샤토 족의 후당제국은 금방 사라지지만, 샤토 족은 당나라 멸망과 송나라 건국 사이의 혼란기인 오대십국 시대(오호십육국 시대와 헷갈리지 말자.)에 몇 개의 나라를 세우고 또 망하면서 스펙터클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샤토 족은 송나라가 건국되고 다시 중원과 초원의 경계선, 즉 만리장성의 바깥 면에 붙어 살게 된다. 그리고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워 중국 북부를 장악해 만리장성의 주인이 되자, 이번엔 부족 전체가 금나라의 용병으로 채용된다. 무려 천 년 가량을 직업군인으로 살아온 특이한 집단이다. 샤토 족을 부르는 옹구트라는 말 자체가 중세 몽골어인 ‘카막 몽골어’로 ‘벽’을 뜻한다. 이 벽이란 곧 만리장성. 만리장성에 붙어 사는 친구들이란 뜻이다. 금나라 조정에서 보내주는 생명수당과 전쟁보상금으로 생활을 꾸려가다 보니 초원의 정세와는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옹구트 족 이야기는 이제껏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즘의 우리 입장에서는 금나라의 ‘앞잡이 노릇’을 한 옹쿠트족이 초원 사람들 눈에 고깝게 보였겠다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초원 사람들은 옹구트족에 대한 별다른 적개심이 없었다는 점이 재미있다. 난세의 초원에서는 먹고사니즘보다 중요한 게 없었다. 다른 부족의 생존 방식에 굳이 도덕과 정의를 들이대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옹구트족의 지도자는 ‘알라쿠쉬 디긴 코리’였다. 코리, 즉 부대장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한 부족의 지도자 쯤 되면 칸(군사지도자)이나 세첸(정치력을 인정받은 최고장로), 혹은 베키(혈통에 의해 지도자가 된 가장 순수한 ‘흰 뼈’)의 호칭이 붙는 게 일반적이다. 코리는 용병대장을 뜻할 수밖에 없다. 옹구트족의 생존방식을 잘 보여주는 호칭이다. 타양 칸이 보낸 사자 토르비 타시는 알라쿠쉬 디긴 코리를 만나 주군의 뜻을 전했다.
“어이, 알라쿠쉬 디긴. 나 타양 칸이 몽골 놈들을 확 쓸어버려서 초원을 통일하려고 하거등? 줄 잘 서야 하지 않을까? 우리 나이만에 붙는 편이 좋을 거야. 우리가 출정하면 너희 옹구트족은 우익-오른 쪽 쿠리엔-이 되는 거야. 나이만과 옹구트가 양쪽에서 몽골을 포위해 섬멸해버리는 거다! 그러면 내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너네한테 돌아갈 몫을 챙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전통의 고급 용병집단을 공짜로 부리려고 하는 타양 칸… 아니 뭐 해준 게 있다고? 알라쿠쉬 디긴의 입장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때따…”
금나라가 옹구트족의 운명에 관심을 가질 이유, 읍따. 책임을 지니까 백성이다. 책임을 지지 않고 돈으로 해결하니까 용병인 거다. 데려다 써먹을 때나 부하지, 그렇지 않고서야 옹쿠트족이 망하든 말든 금나라 조정의 입장에서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옹 칸이 죽으면서 초원으로 통하는 커넥션이 끊어진 지금, 만리장성 바깥에 풀어놓은 옹구트족 따위는 금나라가 알 바 아니었다. 수많은 부족과 씨족들이 투쟁하던 몇 년 전까지야, 옹구트족도 남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초원을 누빌 수 있었다. 하지만 테무진 울루스와 나이만 두 경쟁세력으로 초원의 정세가 압축된 지금 옹구트는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신세였다. 전문 전투집단이면 뭐하랴. 애초에 덩치 자체가 작은데… 남미의 두 거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끼어서 온갖 고생을 한 우루과이를 생각하면 간단할 것 같다.
나이만이 몽골과 전쟁을 한단다. 타양 칸이 저렇게 나온 이상 편을 정해야 한다. 대체 어느 편에 붙어야 할까? 자신 뿐 아니라 부족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 판단이 안 선다. 나이만은 풍요롭고 선진적이며 인구와 물자가 많다. 확실히 유리하다. 하지만 테무진 울루스는 군주 테무진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 돌처럼 단단한 단결력으로 무장한 집단이다. 이런 집단은 초원에 한 번도 출현해본 적이 없다. 이런 정세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전문 용병기업의 CEO가 모를 리가 있을까. 한마디로 테무진 울루스와 나이만의 승률은 50대 50이었다. 편을 정하면 50%의 확률로 부족이 생존한다. 중립을 지키면? 결국 두 강대국 사이에 승패가 정해질 터. 양측 어느 편에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 부족이 안전하게 생존할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책임감 있는 부족장이라면 당연히 과감하게 편을 정해야 한다. 내가 알라쿠쉬 디긴이라면 아마 공황장애에 걸렸을 것 같다.
결국 알라쿠쉬 디긴은 모 아니면 도의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50대 50이라면, 공정한 사람한테 붙는 게 유리하다. 인품과 합리성이 검증된 사람 편에 서는 게 맞다. 여기서 테무진은 평생 바보짓을 하며 고생스래 구축한 선량한 이미지의 대가를 또다시 되돌려 받는다. 알라쿠쉬 디긴은 타양 칸의 제안을 거절했다. 타양 칸의 사자 토르비 타시에게 안 좋은 소식을 안겨주고 떠나보낸 즉시 테무진에게 전갈을 보냈다. 이왕 테무진 편에 서기로 한 거, 확실하게 도와주는 게 부족의 운명에 도움이 된다. 테무진은 나이만이 전쟁을 결의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빨리 전쟁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알려주어야 했다.
지금부터는 우리 부족이 살아 남던가, 아님 막장테크를 타던가 둘 중 하나의 상황이다…
Outro
그날도 테무진과 그의 군대는 대대적인 네르제로 군사훈련을 하던 중이었다. 그 떠들썩한 와중에 알라쿠쉬 디긴이 보낸 사자가 난입한다. 손님을 받는 측에 공식적인 예를 표할 틈을 주지 않은 걸 보면, 알라쿠쉬 디긴의 마음이 얼마나 급했는지 알 수 있다. 하긴 독자 여러분, 여러분이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한민족의 운명을 걸고 어느 한 편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보라. 여러분이 뽑은 카드가 똥패가 되면 민족 전체가 증발하고, 오 천 년 역사가 지구상에서 지워진다고 생각해보라. 알라쿠쉬 디긴이, 속된 말로 얼마나 똥줄이 탔을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격식 따위는 그 자리에서 집어치우는 게 당연하다.
알라쿠쉬 디긴이 전달한 내용은 간단하면서도 절박하다. 급한 나머지 테무진을 일컫는 호칭은 그냥 ‘당신’이다.
“나이만의 타양 칸이 당신을 치려고 전쟁을 결의했다! 나더러 우익이 되라고 하길래 난 거절했다. 난 당신 편이 되기로 했다. 지금 급하게 사자를 보낸다. 아아, 이렇게 된 이상 난 당신이 나이만에 패할까봐 너무 두렵다. 당신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
절규에 가까운 메시지를 접수한 테무진은 한 마디로, 황당했다. 어차피 나이만과 한 판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은 테무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나이만 이것들이 개념을 상실했나… 테무진은 하던 사냥을 때려치우고, 심복들을 모아 급하게 전략회의에 들어간다.
초원을 통일하기 위한 단 한 번의 결전, ‘차키르마우트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다음 편 ‘초원통일’에서 계속) 부편집장 필독twitter: @DDAnziFieldD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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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딴산 원문보기 글쓴이: 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