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미원 청덕제(米院 淸德齊) 원문보기 글쓴이: 쌍행당
新羅王陵事蹟
1. 미추왕릉 (味鄒王陵)
사적번호 : 0175-00-00-00 新羅王陵事蹟
수 량 : 61,143㎡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황남동 89-2 (慶北 慶州市 皇南洞)
경주시내 평지고분군에 있으며 현재 신라(新羅) 사적공원(史蹟公園)인 대릉원(大陵苑) 안에 위치하여 있다. 주변에 대형분(大形墳)이 밀집하여 있으며,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그 북쪽으로 약간 떨어져 있다. 지름 56.7m, 높이 12.4m로 경주시내 평지고분 가운데에서도 대형분에 속한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일 것으로 추정된다. 릉(陵) 앞에는 화강석으로 만든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남쪽에는 삼문(三門)이 있으며, 이 삼문을 따라 담장이 돌려져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으나 모두 후대(後代)에 설치한 것이다. 또 능(陵) 전방(前方) 가까운 곳에 왕을 제사하기 위한 숭혜전(崇惠殿)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에 불탄 것을 조선 정조(朝鮮 正祖) 18년(179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신라 제13대 미추이사금(味鄒尼師金)(재위(在位) 262-284)은 일명 미조이사금(味照尼師今)이며 성은 김(金)씨이고,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갈문왕 구도(葛文王 仇道)의 아들이다. 신라 최초의 김씨 왕(金氏 王)이고 왕비는 광명부인(光明夫人)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이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大陵)에 장사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 흥륜사(興輪寺) 쪽에 있다고 하여 경주시내 평지고분군 가운데 있음을 전하고 있다. 한편 미추왕릉(味鄒王陵)에는 죽엽군(竹葉軍)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추(味鄒)의 다음인 유체왕(儒體王) 14년(297)에 이서고국(伊西古國)이 금성(金城)을 침공하므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댓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아군과 함께 적을 격파하였다. 적이 물러간 뒤 이 군사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댓잎이 미추왕릉(味鄒王陵) 앞에 쌓여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선왕(先王)의 음조(陰助)인 것을 알고 이에 미추왕릉(味鄒王陵)을 죽현릉(竹現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2. 내물왕릉 (奈勿王陵)
사적번호 : 0188-00-00-00
수량사적 : 161호에 포함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교동 14 (慶北 慶州市 校洞)
경주 반월성(半月城) 북서쪽 계림(鷄林)에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2m, 높이 5.3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자연석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는데, 이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과는 달리 호석(護石)에 자연석 받침돌을 받쳐 놓은 것으로 신라 횡혈식 석실분(新羅 橫穴式 石室墳)의 호석(護石)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고분의 봉분 규모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는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에 알맞은 것으로 평지고분이지만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가능성이 많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는데 후대에 설치된 것이다. 한편 이 고분 주위로는 평면 장방형(長方形)으로 이 고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터 흔적이 보이고 있는데, 이는 이 고분이 일찍부터 특별히 보호되고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재위(在位) 356-402)은 성이 김(金)씨이고, 아버지는 말구각간(末仇角干)이며, 왕비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이다. 신라(新羅)에서 김씨(金氏)로서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金)에 이은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지만 이후의 신라왕(新羅王)들이 모두 내물(奈勿)의 후손으로 신라 김씨왕조(新羅 金氏王朝)의 실질적인 창시자이다. 신라는 이 왕 때에 이르러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낙동강(洛東江) 동쪽을 아우르는 왕국(王國)으로 성장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왕의 장지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능(陵)이 점성대 서남(占星臺 西南)에 있다고 하여 현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내물왕(奈勿王)은 후세의 큰 추앙을 받은 실질적인 김씨왕조(金氏王朝)의 창시자로서 그 능(陵) 규모 또한 컸을 것이고, 재위시기로 보아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어야 할 것인데, 현재의 능(陵)은 규모가 작은 석실분(石室墳) 형식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내물왕릉(奈勿王陵)을 신라 최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인 대능원(大陵苑)의 황남대총(皇南大塚)으로 비정하는 학계의 견해도 있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존중하면서 내물왕계(奈勿王系) 계승의식을 표방한 신라 하대(新羅 下代) 왕실(王室)의 수축(修築) 가능성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3. 실성왕릉(實聖王陵) 실전(失傳)
4. 눌지왕릉(訥祗王陵) 실전(失傳)
5. 자비왕릉(慈悲王陵) 실전(失傳)
6. 소지왕릉(炤智王陵) 실전(失傳)
7. 지증왕릉(智證王陵) 실전(失傳)
8. 법흥왕릉 (法興王陵)
사적번호 : 0176-00-00-00
수 량 : 72,817㎡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효현동 63 (慶北 慶州市 孝峴洞)
경주의 서악(西岳)이라 불리는 선도산(仙桃山) 서쪽 기슭에서 뻗은 낮은 구릉의 송림9松林) 속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봉분의 표면이나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물이 없으나, 봉분 아래에 자연석의 일각이 드문드문 드러나 있다. 이것은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로,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의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구조의 호석(護石)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호석 구조는 경주시내 평지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보다 한단계 발전한 것이며,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3세 법흥왕(法興王)(재위(在位) 514-540)은 본명이 원종(原宗)이며, 지증왕(智證王)의 아들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이다. 재위기간인 서기 520년에 관리들의 복장을 법률로 정했고, 521년에는 중국 양(梁)나라와 통교했으며, 또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금관국(金官國)을 점령하였다. 특히 528년에는 불교(佛敎)를 국교로 수용하여 신라(新羅) 호국불교(護國佛敎)의 기틀을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재위 27년만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법흥(法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도 애공사 북쪽에 법흥왕릉(法興王陵)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의 법흥왕릉 남쪽에 신라(新羅) 하대(下代)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는데 이를 애공사지탑(哀公寺址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법흥왕릉(法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선도산 동쪽 기슭 무열왕릉 뒤편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위쪽에 있는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9. 진흥왕릉 (眞興王陵)
사적번호 : 0177-00-00-00
수 량 : 37,993㎡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慶北 慶州市 西岳洞)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에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 서북쪽에 위치한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m, 높이 5.8m이다. 봉분 밑에 호석(護石)을 받쳤던 자연석 받침돌 몇 개만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護石)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재위(在位) 540-576)은 본명이 삼맥종(三麥宗)(심맥부(深麥夫)이며, 법흥왕(法興王)의 아우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진흥왕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佛敎)에 의지하였다. 재위기간인 서기 544년에 흥륜사(興輪寺)를, 553년에는 황룡사(皇龍寺)를 창건하였다. 또한 551년에는 한강유역에 진출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지대를 점령하여 그곳에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고 555년에 북한산(北漢山)을 순시한 후 북한산순수비(北漢山巡狩碑)를 건립하였다. 년호(年號)도 551년에 개국(開國), 568년에 대창(大昌), 572년에 홍제(鴻濟)라 바꾸면서 신라의 독자성을 표시하였다. 또한 576년에는 화랑(花郞)의 전신인 원화(源花)를 만들어 화랑으로 계승하게 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9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眞興王陵)은 법흥왕릉(法興王陵)과 함께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法興王陵)과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선도산(仙桃山)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릉(陵)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新羅 王陵)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眞興王陵)은 이 릉(陵)이 아니라 무열왕릉(武烈王陵)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0. 진지왕릉(眞智王陵)
사적 지정번호 : 0178-00-00-00
수량 사적 : 177호에 포함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慶北 慶州市 西岳洞)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의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中古時)>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46대로, 하대(下代)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系譜)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王陵)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王陵)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眞智王)(재위(在位)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혹은 김윤(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眞智王陵)이 애공사(哀公寺) 북(北)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릉(陵)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武烈王)의 조부(祖父)로서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도열한 4기(基)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릉(陵0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武烈王)의 부(父)인 문흥대왕(文興大王)(용춘일추존(龍春一追尊)의 릉(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문성왕(文聖王)(재위(在位)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57년에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孔雀趾)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
11.진평왕릉 (眞平王陵)
사적번호 : 0180-00-00-00
수 량 : 43,722㎡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608 (慶北 慶州市 普門洞)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들의 평지 가운데에 있다.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36.4m, 높이 7.9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보일 뿐 별다른 장식물이 없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재위(在位) 579-632)은 본명이 백정(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윤(太子 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어 54년간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高句麗)와 백제(百濟)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 원광(圓光). 담육(曇育) 등이 수(隋). 진(陳) 등에 왕래하였고, 수가 망한 이후에는 당(唐)과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대를 기점으로 삼국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성(南山城), 593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축조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다. 한지(漢只)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급인 것은 분명하다.
12. 선덕여왕릉 (善德女王陵)
사적번호 : 0182-00-00-00
수량사적 : 163호에 포함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보문동 산79-2 (慶北 慶州市 普門洞)
경주 시가지 동쪽에 있는 낭산(狼山)에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3.6m, 높이 6.8m이다. 봉분 밑에는 30-60㎝ 크기의 깬돌 2, 3단으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그 외부에 호석의 높이만한 크기의 돌을 기대어 받쳐놓아 무열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외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나 난간(欄干) 구조물은 보이지 않고, 기타 장식물도 배치되지 않았다. 전면에 보이는 석상(石床)은 후대에 설치한 것이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재위(在位) 632-647)은 본명이 김덕만(金德曼)이며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로 신라 최초의 여왕(女王)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백성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재위기간에는 (唐)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정에 힘썼다. 634년 년호(年號)를 인평(仁平)으로 고쳤으며, 자장(慈藏)의 청에 의해 645년에 황룡사 구층탑(皇龍寺 九層塔)을 세우고, 분황사(芬皇寺)와 첨성대(瞻星臺)를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다. 또한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47년 1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지기삼사(知幾三事)로 유명한 일화(逸話)를 남겼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의 죽음에 관한 것으로 죽을 날을 미리 예언하고 자신이 죽으면 이천(利天) 가운데 묻어달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왕이 낭산(浪山) 남쪽이라고 하였다. 예언한 날에 왕이 돌아가자 예언대로 낭산(浪山) 남쪽에 장사지냈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이르러 능(陵) 아래쪽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으니 불경(佛經)에 사천왕(四天王) 위에 이천(利天)이 있다고 한 것과 일치되어 왕(王)의 영성(靈聖)한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13. 진덕여왕릉 (眞德女王陵)
사적번호 : 0024-00-00-00
수 량 : 9,498㎡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견곡면 오류리 산48 (慶北 慶州市 甘浦邑 五柳里)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룡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4.4m. 높이가 4m이다. 봉토 밑에는 판석(板石)으로 병풍 모양의 호석(護石)을 돌렸다. 호석의 면석 사이 탱석(撑石)에는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새겼는데 다른 왕릉(王陵)의 십이지신상과 비교해 볼 때 조각수법이 가장 뒤지고 있다. 면석 위에는 장대석(長臺石)으로 된 갑석(甲石)을 올려놓았으나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장대석이 아닌 것도 있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板石)을 깔고 석주9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했으나 지금은 그 부재(部材)가 거의 다 없어졌다. 이외에는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와서 축대와 통로를 만들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왕(眞德王)(재위(在位) 647∼654)은 본명이 김승만(金勝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동생인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과 월명부인(月明夫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 출신 왕(王)으로 재위기간에 당(唐)과 적극 외교를 펴고,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54년 3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의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추정되는데, 이 왕릉(王陵)의 위치와는 정반대이다. 왕릉 형식 또한 성덕왕대(聖德王代) 이후에 유행한 발달된 형식이고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은 신라 왕릉(新羅 王陵)의 십이지신상 중에서도 가장 늦은 것이어서, 그 위치와 함께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릉(陵)이라고 보기 어렵게 한다.
14. 무열왕릉 (武烈王陵)
사적번호 : 0020-00-00-00
수 량 : 14,169㎡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842 (慶北 慶州市 西岳洞)
무열왕릉(武烈王陵)은 경주 시가지 서쪽의 선도산(仙挑山)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끝부분에 종렬(縱列)한 5기(基) 대형분(大形墳) 가운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원형(圓形)의 봉토분(封土墳)으로 주위 둘레 110m에 높이가 11m이며, 매장주체(埋葬主體)는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일것으로 추정된다. 분구의 언저리에는 호석(護石)을 받치는 자연석 받침돌들이 나와 있다. 전방 동북쪽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능비(陵碑)가 있는데 현재는 비신(碑身)을 잃고, 귀부(龜趺)와 이수(이首)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는 장방형의 대석(臺石) 위에 거북 모양이 올려진 것으로, 네 발과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寫實的)이며, 등의 전면에는 귀갑문(龜甲文)을 시문하고 그 주위엔 비운문(飛雲文)을 돌렸다. 이수(이首)는 좌우에 삼룡식 육룡(三龍式 六龍)을 표현하고 여의주(如意珠)를 다투는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이수 전면(이首 前面) 중앙에는 전서(篆書)로서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 양각되어 있는데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 속(續)에 의하면 김인문(金仁問)이 비문(碑文)을 지었다고 한다. 이 능은 신라고분(新羅古墳) 중에서 피장자(被葬者)가 확실한 능묘(陵墓) 중의 하나이다. 이 왕릉(王陵)의 주인공인 신라 제29대 무열왕(武烈王)(재위(在位) 654∼661)은 본명이 김춘추(金春秋)이고 진지왕(眞智王)의 손자이며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왕비는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진덕여왕(眞德女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眞骨) 출신 왕으로서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百濟)를 정복하고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위에 오른지 8년만인 서기 660년 6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태종무열(太宗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데 영경사 자리가 어딘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능 동쪽에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이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三國史記)기록의 방향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수(이首)의 비문(碑文)을 고려할 때 그 후방의 묘가 무열왕릉(武烈王陵)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현재 능역(陵域)에 담을 돌려 쌓고 능 주위에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1972∼1973년의 공사결과이다.
15. 문무대왕릉 (文武大王陵)
사적번호 : 0158-00-00-00
수 량 : 123,951㎡
지 정 일 : 1967.07.24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 해중(대왕암)(慶北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수중릉(水中陵)으로 동해변(東海邊)에서 200m 떨어진 바닷속에 있다. 봉길리(奉吉里) 앞 바다 물속에 솟은 바위가 있어 이 바위를 대왕(大王) 바위라고 불러왔다. 대왕암(大王岩) 위에 올라보면 가운데에 비교적 넓은 공간이 있고, 그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水路)를 내어 맑은 바닷물이 파도를 따라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水路)로 들어오고 서쪽 수로(水路)로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 공간은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대왕암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넓적하고도 큰 돌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데, 길이 3.6m·너비 2.85m·두께 0.9m의 거북 모양의 화강암석으로 수면(水面)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이 돌 밑에 어떤 특별한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유골(遺骨)을 봉안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돌 밑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왕암에서 중앙의 장골처(藏骨處)를 중심으로 사방에 수로(水路)를 설치한 것은 부처의 사리를 안치한 사리탑(舍利塔)의 형식과 비교되기도 한다. 즉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탑(印度塔)의 경우나 백제의 미륵사탑(彌勒寺塔) 하부에 4방으로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이 대왕암에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신라 제30대 문무왕(文武王)(재위(在位) 661-681)은 본명이 김법인(金法敏)이고, 무열왕(武烈王)의 맏아들로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당(唐)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의 영주(英主)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681년 7월에 왕(王)이 돌아가니 시호(諡號)를 문무(文武)라 하고, 왕의 유언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불식(佛式)으로 화장(火葬)하여 동해구(東海口) 대석상(大石上)에 장사하였다고 전한다. 이는 왕이 죽어서도 동해(東海)의 용(龍)이 되어 왜구(倭寇)를 막겠다는 유지를 받든 것으로 신라 사람들은 왕(王)이 용(龍)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며 그 대석(大石)을 대왕석(大王石)이라 하였다고 한다. 문무왕(文武王)의 아들 신문왕(神文王)은 동해변(東海邊)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하고 금당(金堂) 밑에 동해(東海)를 향하여 구멍을 뚫어 동해(東海)의 조수(潮水)가 금당 밑까지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는 동해(東海)의 용(龍)이 된 부왕(父王)이 조수(潮水)를 따라 금당까지 들어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대왕암이 바라다보이는 인근 해변에 이견대지(利見臺址)가 있는데 신문왕(神文王)이 이곳에서 대왕암(大王岩)을 망배(望拜)한 곳이다.
16 신문왕릉 (神文王陵)
사적번호 : 0181-00-00-00
수 량 : 35,283㎡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453-1 (慶北 慶州市 排盤洞)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의 동쪽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9.3m, 높이 7.6m인 이 왕릉(王陵)의 호석(護石)은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한단계 발전한 모습이다. 봉토의 아래에 벽돌 모양으로 가공한 석재들을 오단(五段) 정도 돌려쌓고, 그 이에 갑석(甲石)을 덮은 호석(護石)에 단면 사각형으로 가공한 석재를 수십개 돌려 받쳐주고 있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 구조는 무열왕릉(武烈王陵) 형식에서 성덕왕릉(聖德王陵) 형식으로 발전하여 가는 중간 형식이다. 호석 받침돌 가운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석재에서 '문(門)이라고 음각된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뜻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호석 밖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은 보이지 않으며, 그의 석사자(石獅子).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의 배치도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왕릉(王陵)의 호석은 일부가 땅 속에 묻혀 있었으나 1970년대에 원형을 복원하고 철책을 둘러서 보호하고 있다. 왕릉(王陵)의 동쪽에는 석상(石床)이 있는데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상에 비해 비교적 얕고, 석재도 고르지 못하여 원래의 석상인지 의심스럽다.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은 본명이 김정명(金政明)(혹은 김명지(金明之)이며,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長子)이다. 재위기간 동안 삼국통일 이후의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정비하는데 주력하였으며, 685년 구주(九州)를 완전히 정비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92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능(陵)은 낭산(浪山)의 남쪽 방향에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망덕사(亡德寺) 동쪽에 있다고 한 효소왕릉(孝昭王陵)과 그 위치가 부합되므로 이 능(陵)은 효소왕릉(孝昭王陵)이며, 신문왕릉(神文王陵)은 낭산(狼山) 동쪽인 황복사지(皇福寺址) 아래쪽에 십이지석(十二支石)이 남아 있는 폐왕릉(廢王陵)일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7. 효소왕릉 (孝昭王陵)
사적번호 : 0184-00-00-00
수 량 : 15,385㎡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慶北 慶州市 朝陽洞)
성덕왕릉(盛德王陵) 서쪽에 인접하여 구릉상에 있으며 주위에 송림(松林)이 울창하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0.3m, 높이 4,3m이다. 봉분의 밑에는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이 몇 개 보이고, 능(陵)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재위(在位) 692-702)은 본명이 김리홍(金理洪)이고 신문왕(神文王)의 태자(太子)이다. 재위시기는 삼국(三國)을 통일한 후 안정과 번영을 향하던 때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는데, 현재의 효소왕릉(孝昭王陵)은 망덕사지(望德寺址)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 거리에 해당하여 너무 차이가 난다. 그래서 효소왕릉(孝昭王陵)을 이 능(陵)이 아니라 망덕사지(望德寺址) 바로 동쪽에 있는 현 신문왕릉(現 神文王陵)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18. 성덕왕릉 (聖德王陵)
사적번호 : 0028-00-00-00
수 량 : 11,174㎡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慶北 慶州市 朝陽洞)
경주 시내에서 불국사 방향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송림(松林)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성덕왕(聖德王)의 형인 효소왕(孝昭王)의 능(陵)으로 전해지는 고분(古墳)이 있다. 이 왕릉(王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신라 최초로 완비된 왕릉제도를 갖추고 있다. 능(陵) 하부에 두른 호석(護石)은 신문왕릉(神文王陵)의 호석 구조에서 한 단계 발전한 형식으로 높이 90㎝ 정도의 판석(板石)을 면석(面石)으로 세우고 그 위에 갑석(甲石)을 올렸다. 면석(面石)들 사이에는 탱주(撑柱)를 끼워 고정시켰고 탱주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받침돌을 세워 보강하였다. 이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는 원조(圓彫)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배치되었는데, 모두 방형 기단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나 심하게 파손당하였다. 호석(護石) 밖으로는 판석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회랑 밖으로 석주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석주에는 상하 2개소에 관석(貫石)을 끼우기 위한 원공(圓孔)이 있으나 관석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능(陵) 앞에서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2구(軀), 무인석(武人石) 2구(軀)를 마주 대하게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파손이 심하여 무인석(武人石) 1구(軀)와 상반신(上半身)만 남은 석인(石人) 1구(軀)밖에 남지 않았다. 무인석은 방형기단(方形基壇) 위에 올려져 있으며, 의장용 갑옷인 양당개(양당鎧)를 착용하고 양손으로 칼을 짚고 있는 모습이다. 능(陵) 뒤쪽 좌우에 1구씩, 그리고 능(陵) 전면(前面) 석인(石人)들 앞 좌우에 1구씩 모두 4구(軀)의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자세, 안면, 체모(體毛)등이 매우 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 능(陵) 전면(前面)좌측에 능비(陵碑)가 있었으나 지금은 비신(碑身)과 이수(이首)가 없어지고, 목이 부러진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龜趺)는 비교적 웅대한 편이나 몸체가 납작하고 귀갑문(龜甲文)의 조각도 힘차지 못하다. 능비(陵碑) 주위의 조사에서 약간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으나 판독된 명문(銘文)은 무(武)와 적(跡) 두 자(字)뿐이다.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재위(在位) 701∼737)은 본명이 김륭기(金隆基)이고, 신문왕(神文王)의 아들로서 효소왕(孝昭王)의 동생이다. 당(唐)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였으며, 능(陵)의 석조물 배치양식도 당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성덕왕(聖德王)의 재위기간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37년 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현재 왕릉(王陵) 북쪽에는 이거사(移車寺)로 추정되는 사지(寺址)가 있고, 넘어진 석탑(石塔)이 전하고 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國立慶州博物館)에는 성덕대왕(聖德大王)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보존되어 있다.
19. 효성왕릉(孝昭王陵) 실전(失傳)
20. 경덕왕릉 (景德王陵)
사적번호 : 0023-00-00-00
수 량 : 9,498㎡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부지리 산8 (慶北 慶州市 內南面 鳧池里)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복(中腹)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상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약 22m, 높이 약 6m이며, 능 하부에는 판석조 호석(板石造 護石)이 돌려졌다. 호석(護石)은 목조건축물의 석조기단(石造基壇)과 같은 형태로, 가장 아래에 지대석(地臺石)이 있고, 그 위에 높이 89㎝, 너비 120㎝의 면석(面石)이 놓였다. 면석 사이에는 뿌리가 고분 안으로 길게 뻗어 면석과 봉분을 지탱하기 위한 탱석(撑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앞면은 면석보다 약간 앞으로 나와 있다. 탱석(撑石)에는 두 칸을 건너서 하나씩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면석(面石)과 탱석(撑石) 위에는 갑석(甲石)이 놓여 있다. 호석(護石)에서 1.3m 밖으로 높이 175㎝의 석주(石柱) 40여개를 세워 돌난간을 둘렀는데, 지금 석주는 거의 다 남아 있으나 기둥 사이에 끼웠던 난간의 돌살대는 거의 없어졌다. 호석과 난간석주 사이 바닥에는 길이 110㎝, 너비 약 45㎝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았다. 능 앞에는 안상문(眼象紋)이 새겨진 높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나, 통일신라시대 왕릉에서 볼 수 있는 석사(石獅).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과 같은 석조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在位> 742∼765)은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며 이름은 헌영(憲英)이다. 경덕왕(景德王) 때는 신라 중대왕실(新羅 中代王室)의 전제왕권(專制王權)이 쇠퇴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행정구역 개편(行政區域 改編), 직제개편(職制改編) 등을 단행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에 의하면 765년 6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경덕(景德)이라 하고, 모지사(毛祗寺)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에는 처음 경지사(頃只寺)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가 뒤에 양장곡(楊長谷) 가운데로 이장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전하는 경덕왕릉의 위치와 문헌기록의 일치여부는 알 수 없고, 또한 호석(護石)의 세부수법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수법을 신라 하대(新羅 下代)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이 능이 경덕왕(景德王)의 능인가를 의문시하는 견해도 있다.
21. 혜공왕릉(惠恭王陵) 실전(失傳)
22. 선덕왕릉(宣德王陵) 화장엽산골(火葬燁散骨)
23. 원성왕릉(元聖王陵)
사적번호 : 0026-00-00-00
수 량 : 75,372㎡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 산17 (慶北 慶州市 外東邑 掛陵里)
괘릉(掛陵)은 낮은 구릉의 남면(南面) 송림 사이에 있다. 왕릉이 조성되기 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어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상(水面 上)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비록 능묘제도(陵墓制度)는 당(唐)나라의 영향을 받았지만 세부수법은 신라인의 독자적인 것으로 통일신라(統一新羅)의 가장 완비된 능묘제도(陵墓制度)를 보여주고 있다.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밑의 호석은 지대석(地臺石) 위에 높이 95㎝, 길이 120㎝ 크기의 판석(板石)으로 된 면석(面石)을 올렸다. 면석의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있는 탱석( 石)을 배치하였는데, 탱석(撑石)의 전면(前面)은 면석(面石)보다 약간 앞으로 내밀었다. 탱석에는 두 칸 건너서 하나씩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조각수법은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손꼽힌다. 호석의 밖으로는 길이 110㎝, 너비 40㎝의 부채꼴 판석(板石)을 정연하게 깔아 회랑(廻廊)으로 조성하고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m의 네모진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현재 석주(石柱)는 25개가 모두 남아 있으나, 석주 사이에 상하 2단으로 원공(圓孔)을 뚫어 끼웠던 관석(貫石)은 거의 유실되었다. 봉분의 바로 앞에는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였고, 봉분의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위치로부터 시작하여 동서로 약 25m 사이를 두고 북쪽으로부터 석사자(石獅子) 두쌍, 문인석(文人石) 한쌍, 무인석(武人石) 한쌍과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얼굴을 마주 대하고 차례로 늘어서 있다. 또한 현재는 없지만 최치원(崔致遠)이 비문(碑文)을 쓴 석비(石碑)가 있었다 한다. 석사자(石獅子)는 각각 자세와 표정이 달라 능숙한 석조기술을 보여주고 있고, 감정표현이 매우 풍부하고 세련되었다. 문인석(文人石)은 각선(刻線)이 분명하고, 관복(冠服)이나 근엄한 안면 처리가 매우 우수하다. 무인석(武人石)은 의복이나 안면의 모습이 신라인이 아니다.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을 하고 있어 주목되는데 페르시아 무인상(武人像)이라는 주장도 있다. 피장자에 대해서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在位) 785∼798)으로 보고 있다. 원성왕은 본명이 김경신(金敬信)이고, 내물왕(奈勿王)의 20세손이며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의 아들이다. 재위기간에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신설하고 벽골제(碧骨堤)를 증축(增築)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798년 12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火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원성 왕릉(元聖 王陵)이 토함산(吐含山)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동곡사는 당시의 숭복사(崇福寺)라 한다고 전하는데, 지금 괘릉(掛陵) 인근에 숭복사지(崇福寺地)가 있어 괘릉(掛陵)이 원성왕릉(元聖王陵)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24. 소성왕릉(昭聖王陵)
25. 애장왕릉(哀莊王陵)
26. 헌덕왕릉 (憲德王陵)
사적번호 : 0029-00-00-00
수 량 : 18,007㎡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동천동 80 (慶北 慶州市 東川洞)
경주 북천변(北川邊)에 있는 이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6m, 높이 6m이다. 봉토 밑에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웠으나, 현재 면석은 없어진 것이 많다.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키고 아울러 탱석에는 등간격으로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갑석(甲石)을 덮었다. 현재 십이지신상은 해(亥), 자(子), 축(丑), 인(寅), 묘상(卯像)의 5개만 남아 있다. 또 호석(護石) 밖으로는 석주(石柱)를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고 호석(護石)과 난간(欄干) 사이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으로 하였다.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로 두 개의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게 되어 있으나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외에는 아무런 외호물(外護物)이 없다. 아마도 이 능(陵)의 전방으로 흐르고 있는 경주의 북천(北川)이 범람하여 능(陵)의 일부가 유실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재위(在位) 809∼826)은 본명이 김언승(金彦昇)이며, 조카인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에 농사를 장려하고 친당정책(親唐政策)을 폈으나, 김헌창(金憲昌)의 반란과 김범문(金梵文)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스러웠고, 치적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26년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덕(德)이라 하고 천림사(泉林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구당서(舊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는 831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천림사(泉林寺)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이 왕릉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이를 천림사(泉林寺) 터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근거가 확실한 것은 아니다.
27. 흥덕왕릉 (興德王陵)
사적번호 : 0030-00-00-00
수 량 : 61,983㎡
지 정 일 : 1963.01.21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42 (慶北 慶州市 安康邑 六通里)
흥덕왕릉(興德王陵)은 괘릉(掛陵)과 함께 능묘제도(陵墓制度)가 잘 갖추어진 신라 왕릉(新羅 王陵)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과 왕비를 합장(合葬)하였다고 전한다. 능(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20.8m, 높이 6m이며 봉토(封土) 밑에는 판석조(板石造) 호석(護石)을 둘렀다. 호석은 바닥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판석(板石)으로 면석(面石)을 세우고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끼워 면석을 고정시켰다. 아울러 탱석(撑石)에는 각각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고, 그 위에는 갑석(甲石)을 올려 호석을 마무리하였다. 호석(護石)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의 조각은 괘릉(掛陵)의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 조각수법은 괘릉(掛陵)에 뒤진다. 호석의 주위로는 판석(板石)을 깔아 회랑(廻廊)을 설치하고 그 밖으로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상하 두곳에 원공(圓孔)이 뚤려 관석(貫石)을 끼우는 형식이다. 현재 난간(欄干) 석주(石柱)는 없어진 것이 많다. 왕릉(王陵)의 외부에는 사우(四隅)에 석사자(石獅子)가 배치되었는데 이는 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石獅子) 배치와 같다. 능(陵) 앞으로는 문인석(文人石) 한쌍과 무인석(武人石) 한쌍, 석화표(石華表) 한쌍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왕릉(王陵)의 전방 좌측에는 능비(陵碑)를 세웠는데, 능비(陵碑)는 현재 귀부(龜趺)만 남아 있고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없어졌다. 귀부(龜趺)의 조각 수법은 성덕왕릉(聖德王陵)의 귀부와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왕릉은 성덕왕릉(聖德王陵)과 괘릉(掛陵)의 형식을 모방하여 건조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장자인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재위(在位) 826∼836)은 본명이 김수종(경휘)金秀宗(景徽)이고, 헌덕왕(憲德王)의 동생으로 왕비는 장화부인(章和夫人)이다. 재위기간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全羅南道 莞島)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장보고(張保皐)를 대사로 삼아 서해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茶) 종자를 지리산(智異山)에 심게 하고 재배시켰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장지가 안강북 비화괴(安康北 碑火壞)이라고 하여 현재의 위치와 대체로 부합되며, 특히 왕릉의 주위에서 흥덕(興德) 이란 명문의 비편(碑片)이 발견되어 이 능(陵)이 흥덕왕릉(興德王陵)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28. 희강왕릉 (僖康王陵)
사적번호 : 0220-00-00-00
수 량 : 9,488㎡
지 정 일 : 1971.04.28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34 (慶北 慶州市 內南面 望星里)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에 있으며, 북쪽에 인접하여 민애왕릉(閔哀王陵)이 위치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4m, 높이 3.4m이다. 봉분만 있을 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43대 희강왕(僖康王)(재위(在位) 836-838)은 본명이 김제융(金悌隆)이고, 이찬 헌정(憲貞)(초노(草奴)의 아들이자 원성왕(元聖王)의 손자이며, 왕비는 문목부인(文穆夫人)이다. 재위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는다. 희강왕(僖康王)은 그의 당숙과의 왕위쟁탈전 끝에 김명(金明)의 추대로 즉위하였으나 그를 추대했던 김명(金明)이 난(亂)을 일으키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38년 1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희강(僖康)이라 하고, 소산(蘇山)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소산(蘇山)의 위치는 알 수 없다.
29.민애왕릉 (閔哀王陵)
사적번호 : 0190-00-00-00
수 량 : 11,302㎡
지 정 일 : 1970.02.06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산40(慶北 慶州市 內南面 望星里)
경주 시가지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능(陵) 남쪽 가까이에 희강왕릉(僖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2.5m, 높이 3.8m이다. 이 왕릉(王陵)은 광복 이전에 두 차례나 도굴당하였고, 1981년에도 도굴 미수사건이 있었다. 1984년 9월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과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가공석(加工石)으로 호석(護石)을 축조하였는데, 밑에 지대석(地臺石)을 놓고 그 위에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3단(段)으로 쌓아올린 다음 갑석(甲石)을 덮었다. 이 호석(護石)에는 또 두께 35㎝, 길이 100-130㎝의 단면 5각형으로 가공한 지주석(支株石) 20개를 봉분의 둘레를 따라 190∼290㎝ 간격으로 받쳤는데, 조사 결과 이는 후에 보축(補築)한 것이었다. 능(陵) 전방에는 장방형 판석(長方形 板石) 2매로 조립한 작은 상석(床石)이 놓여 있다. 봉분 주변에 대한 조사결과 봉분 밑둘레 외곽으로 깊이 13㎝, 지름 25㎝ 크기의 구멍 12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파고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하나씩 묻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높이 10㎝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향하게 놓여졌다. 조사 당시에는 쥐. 소. 닭. 돼지상 등 4가지 상만 발견되었는데, 나머지는 호석(護石) 받침석이 세워질 때 파손되고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능(陵) 주변에서 능(陵)이 축조된 뒤에 매장된 골호(骨壺)가 발견되었는데 뚜껑에 원화십년(元和十年) 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중국 당(中國 唐)나라 때의 년호(年號)로서 서기 815년에 해당한다. 신라 제44대 민애왕(閔哀王)(재위(在位) 838-839)은 본명이 김명(金明)이고, 대아찬, 충공(忠恭)의 아들이다. 이홍(利弘)과 더불어 희강왕(僖康王)을 협박하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도 역시 곧 피살되었다. 재위기간은 왕위쟁탈전의 혼란한 시기였으며, 별다른 치적도 남기지 못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그의 피살사건과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전할뿐 장지(葬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또한 원화 십년명 골호(元和 十年銘 骨壺)가 이 능(陵)이 조성된 뒤에 묻혀, 이 능(陵)은 서기 815년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민애왕(閔哀王)의 연대와는 맞지 않는다.
30. 신무왕릉 (神武王陵)
사적번호 : 0185-00-00-00
수 량 : 36,625㎡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동방동 660 (慶北 慶州市 東方洞)
신문왕릉(神文王陵)의 동남쪽에 있으며 얕은 구릉의 경사면에 조성되어 있다. 원형봉토분 (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m, 높이 3.4m이다. 일반 민묘보다 규모가 클 뿐 다른 특징이 없다. 봉분만 남아 있을 뿐 호석(護石)의 일단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장식물도 없다.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재위(在位0 839)은 본명이 김우징(金祐徵)이고, 상대등 균정(上大等 均貞)의 아들이며, 희강왕(僖康王)의 사촌동생이다. 신라 말기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왕위쟁탈전이 심해져서 부친인 균정(均貞)을 받들어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839년 정월에 청해진대사 장보고(淸海鎭大使 張保皐)의 도움으로 민애왕(閔哀王)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한지 7개월만에 죽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신무(神武)라 하고, 제형산(弟兄山)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전하는데, 이 고분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31. 문성왕릉 (文聖王陵)
사적번호 : 0178-00-00-00
수 량 : 사적177호에 포함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慶北 慶州市 西岳洞)
경주의 서악(西岳) 선도산(仙桃山)의 동쪽 기슭에 진흥왕릉(眞興王陵)과 인접하여 있으며 무열왕릉(武烈王陵)의 북쪽에 해당된다. 모두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0.6m, 높이 5.5m 규모이다. 봉분(封墳)의 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없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진지왕(眞智王)은 신라 제25대로 중고시기(中古時期)의 왕이고 문성왕(文聖王)은 제46대로, 하대(下代)의 왕으로 두 왕은 계보(系譜)도 다르고 재위시기에도 300년 가까운 차이가 있는데, 그 왕릉(王陵)들이 인접하여 있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규모 또한 왕릉(王陵)으로 보기엔 작은 편이다. 진지왕(眞智王)(재위(在位) 576-579)은 본명이 김사윤(金舍輪)(혹은 김윤(金輪)으로 진흥왕(眞興王)의 둘째아들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재위 기간이 짧아 치적은 거의 없으나 중국의 진(陳)나라와 통교한 기사가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59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진지왕릉(眞智王陵)이 애공사(哀公寺) 북(北0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의 릉(陵) 아래편에는 삼층석탑(三層石塔)이 있어 그곳을 영경사지(永敬寺址)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왕은 무열왕(武烈王)의 조부(祖父)로서 무열왕릉(武烈王陵) 뒤편에 도열한 4기(基)의 대형 고분 중 위에서 3번째 고분을 그의 릉(陵)으로, 그리고 그 아래 4번째 고분을 그의 아들이자 무열왕(武烈王)의 부(父)인 문흥대왕(文興大王)(용춘일추존(龍春一追尊)의 릉(陵)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문성왕(文聖王)(재위(在位) 839-857)은 본명이 김경응(金慶膺)이고, 신무왕(神武王0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57년에 9월에 왕이 죽으니 시호(諡號)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공작지(孔雀趾)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으며, 다음 왕인 헌안왕(憲安王)의 장지도 공작지라고 하였다.
32. 헌안왕릉 (憲安王陵)
사적번호 : 0179-00-00-00
수 량 : 사적177호에 포함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서악동 산92-2 (慶北 慶州市 西岳洞)
선도산(仙桃山)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며, 지름 15.3m, 높이 4.3m로 봉분(封墳)의 규모는 그다지 크기 않다. 봉분 아래에 호석(護石)의 받침돌로 보이는 자연석이 몇 개 나와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보이지 않는다. 위치와 호석 구조로 보아 매장주체는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일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재위(在位) 857-861)은 본명이 김의정(金誼靖)(혹은 김우정(金祐靖)이고, 신무왕(神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지만 제방<堤防>을 수리하고 농사를 장려하는 등 권농(勸農)에 힘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33. 경문왕릉(景文王陵) 실전(失傳)
34. 헌강왕릉 (憲康王陵)
사적번호 : 0187-00-00-00
수 량 69,626㎡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55 (慶北 慶州市 南山洞)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북쪽 가까이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바로 남쪽에 정강왕릉(定康王陵)이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봉분의 밑부분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4단(段)으로 쌓은 호석(護石)을 둘렀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은 지대석(址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으나 갑석(甲石)은 덮이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호석(護石)의 구조는 이 능(陵) 남쪽에 있는 정강왕릉(定康王陵)과 같은 형식이다. 능(陵)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짠 석상(石床)이 있을 뿐 다른 장식물은 놓이지 않았다. 이 능(陵)은 일찍이 도굴(盜掘)의 피해를 입어 1993년 우기(雨期)에 석실 개석(石室 蓋石)과 벽 일부가 내려앉아 내부의 긴급 수습조사를 거쳐 복원되었다. 조사 결과 석실(石室)은 평면 방형(方形)에 궁륭상천정(穹륭狀天井)이었으며, 남쪽으로 난 연도(선도)는 석실 동쪽으로 편재되어 있었다. 석실(石室) 서벽(西壁)에 붙여 1대의 1인용 시상(시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석제 두침(石製 頭枕)과 족좌(足座)가 출토되었다. 부장품(副葬品)은 모두 도굴되었으나 인화문토기편(印花紋土器片)이 약간 수습되었다. 그런데 석실(石室)의 구조나 토기(土器)는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形式)이어서 헌강왕(憲康王)의 재위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재위(在位) 875-886)은 본명이 김정(金晸)이고 경문왕(景文王)의 장자이며, 왕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이 왕(王) 때 백성의 집은 지붕을 갈대로 덮지 않고 기와로 덮었으며, 밥을 짓는 데는 나무를 쓰지 않고 숯으로 지었으며,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일본(日本王)이 사신을 보내 황금(黃金) 등을 바치기도 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886년 7월에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35.정강왕릉 (定康王陵)
사적번호 : 0186-00-00-00
수 량 : 35,702㎡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산53 (慶北 慶州市 南山洞)
경주 남산(南山)의 동록 통일전(東麓 統一殿) 바로 북쪽 송림(松林) 속에 둘러싸여 있다. 그 북쪽에는 선왕(先王)인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인접하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5.7m, 높이 4m이다. 봉분의 밑부분은 가공한 장대석(長大石)을 3단(段)으로 쌓아 호석(護石)을 돌렸다. 가장 아랫단 장대석(長大石)은 지대석(地臺石)처럼 약간 밖으로 내밀게 놓았고, 그 위 2단은 이보다 약간 들여 쌓았다. 그러나 별도의 갑석(甲石)은 없다. 이외에 난간(欄干) 장식이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조의 호석을 가진 신라왕릉(新羅王陵)으로는 이 능(陵)과 헌강왕릉(憲康王陵)이 있다. 봉분의 전면에는 얕은 석단(石壇) 위에 작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고, 석단(石壇)에서 조금 떨어진 아랫부분에 장대석이 일렬로 놓여 있다. 신라 제50대(代) 정강왕(定康王)(재위(在位) 886-887)은 본명이 김황(金晃)이고, 경문왕(景文王)의 둘째아들로 형인 헌강왕(憲康)에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기간이 짧아 별다른 치적은 보이지 않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887년 7월에 왕이 죽자 시호(諡號0를 정강(定康)이라 하고 보제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정강왕릉(定康王陵)과 헌강왕릉(憲康王陵)의 북쪽 가까이에 통일 신라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있어 그곳을 보제사(菩提寺)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능(陵)과 인접하여 있고 호석(護石)의 구조도 같은 형식인 헌강왕릉(憲康王陵)의 내부가 1993년 조사되었는데, 그 석실(石室) 구조와 출토유물은 8세기 이후로는 내려오지 않는 형식이어서 이 왕들의 재위 시기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36. 진성왕릉(眞聖王陵) 화장엽산골(火葬燁散骨)
37. 효공왕릉 (孝恭王陵)
사적번호 : 0183-00-00-00
수 량 : 37,993㎡
지 정 일 : 1969.08.27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산14 (慶北 慶州市 排盤洞)
신문왕릉(神文王陵)의 동쪽 얕은 구릉상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서 지름 21.2m, 높이 5m이다. 봉분밑에 호석(護石)의 자연석 받침돌 몇 개가 보이고 있어 무열왕릉(武烈王陵)과 같은 형식의 호석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외의 장식물은 하나도 없다. 신라 제52대 효공왕(孝恭王)(재위(在位) 897-912)은 본명이 김요(金嶢)이고,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이다. 재위기간은 국정이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과 후고구려(後高句麗)의 궁예(弓裔)에게 국토를 유린당하여 많은 국토를 빼앗겼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912년 왕(王)이 죽자 시호(諡號)를 효공(孝恭)이라 하고, 사자사(師子寺) 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왕이 죽자 사자사(師子寺) 북쪽에서 화장(火葬)하여 그 유골을 모아 구지제(仇知堤)의 동산(東山) 옆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왕릉(王陵)의 남쪽에 사지(寺址)가 있어 사자사(師子寺)터로 추정하고 있다.
38. 경순왕릉 (敬順王陵)
사적번호 : 0244-00-00-00
수 량 : 3,967㎡
지 정 일 : 1975.06.25
소 재 지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량포리 산18-2 (京畿道 漣川郡 百鶴面 高良浦里)
이 능은 신라(新羅)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敬順王)(927∼935, 재위)의 무덤이다. 왕의 이름은 김부(金傅)이며 문성왕(文聖王)(839∼857, 재위)의 후예(後裔)로서 927년 경애왕(景哀王)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었다. 왕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의 광포한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국력이 없어 재위(在位) 9년 만인 935년에 군신회의(群臣會議)를 열어 나라의 장래를 논의하고 전쟁으로 인해 많은 백성을 죽게 할 수 없다는 오직 백성을 위하는 마음에서 일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려(高麗) 왕건(王建)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 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고려 경종(景宗)3년(978)에 세상을 뜨매 이곳에 능이 마련되었으나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조선(朝鮮)영조(英祖) 때에 와서야 다시 찾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임금의 무덤 가운데 경주(慶州)지역을 벗어나 경기도(京畿道)에 있는 유일한 신라왕릉(新羅王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