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정원일기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12월 28일(신묘) 맑음
01-12-28[12] 이비와 병비의 관원 현황과 계 및 관직 제수 내용
도목 정사가 있었다.
이비(吏批)에, 행 판서 이의현(李宜顯)은 나왔고, 참판 이재(李縡)는 지방에 있고, 참의 홍현보(洪鉉輔)는 나왔고, 도승지 김취로(金取魯)는 나왔다.
송필환(宋必煥)을 금성 현령(金城縣令)으로, 이세근(李世瑾)을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구성익(具聖益)을 중화 부사(中和府使)로, 전일상(田日祥)을 단천 부사(端川府使)로, 민진성(閔震煋)을 의금부 도사로, 조백붕(趙百朋)을 사직서 영(社稷署令)으로, 정형익(鄭亨益)을 동지의금부사로, 심명철(沈命哲)을 한성부 주부로, 성몽량(成夢良)을 장흥고 주부로, 박필주(朴弼周)를 진선(進善)으로, 최흡(崔潝)을 인의(引儀)로, 김상휘(金尙輝)를 내자시 주부로, 이인백(李寅白)을 빙고 별제로, 최희도(崔熙道)ㆍ이세춘(李世瑃)을 전적(典籍)으로, 정덕재(鄭德載)를 예빈시 별제로, 유익량(柳益良)을 인의로, 황일하(黃一夏)를 좌참찬으로, 권업(權)을 우참찬으로, 홍수귀(洪受龜)를 감찰로, 이동원(李東元)ㆍ최제항(崔齊恒)을 전적으로, 권변(權忭)을 예조 참판으로, 이교악(李喬岳)을 형조 참판으로, 박기조(朴起祖)를 수운판관(水運判官)으로, 이필범(李必範)을 예빈시 별제로, 김대석(金大錫)을 조지서 별제로, 윤심형(尹心衡)을 헌납으로, 이범지(李範之)를 호조 정랑으로, 권성(權)을 공조 판서로, 이위(李瑋)를 사복시 주부로, 이태익(李泰榏)을 장악원 주부로, 김영(金泳)을 사옹원 주부로, 홍중구(洪重耉)를 군자시 주부로, 이의제(李義濟)를 제용감 주부로, 이집(李集)을 장원서 별제로, 이기진(李箕鎭)을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이규일(李揆一)을 한성부 서윤으로, 성기인(成起寅)을 전적으로, 서명구(徐命九)를 보덕으로, 남도진(南道振)을 선공감 감역으로, 정중원(鄭重元)ㆍ맹숙주(孟淑周)를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김진동(金鎭東)을 영휘전 참봉(永徽殿參奉)으로, 어유황(魚有璜)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김한창(金漢昌)을 제릉 참봉(齊陵參奉)으로, 최종주(崔宗柱)를 후릉 참봉(厚陵參奉)으로, 신구(申球)를 영릉 참봉(英陵參奉)으로, 윤해(尹澥)를 북부 참봉(北部參奉)으로, 서종섭(徐宗燮)을 종부시 정으로, 안중필(安重弼)을 예조 참의로, 이존도(李存道)를 영희전 영(永禧殿令)으로, 이의천(李倚天)ㆍ한덕전(韓德全)ㆍ이덕부(李德孚)ㆍ문덕린(文德麟)ㆍ김우철(金遇喆)ㆍ최치중(崔致重)ㆍ이형등(李馨登)ㆍ정유신(丁惟愼)ㆍ허석(許錫)ㆍ김담(金墰)ㆍ이문표(李文標)ㆍ박종윤(朴宗潤)ㆍ정언유(鄭彦儒)ㆍ이태징(李台徵)을 겸춘추(兼春秋)로, 김도언(金道彦)을 양현고 직장으로 삼았다. 의금부 도사 이태진(李台鎭)과 정릉 봉사(靖陵奉事) 윤경룡(尹敬龍)을 서로 바꾸고, 종묘서 부봉사 이서오(李敍五)와 광흥창 부봉사 최상원(崔尙遠)을 서로 바꾸었다.
병비에, 행 판서 조도빈(趙道彬)은 나왔고, 참판 이유민(李裕民)은 나왔고, 참의 경성회(慶聖會)는 나왔고, 참지 신무일(愼無逸)은 나왔고, 우부승지 이집(李潗)은 나왔다.
병비가 아뢰기를,
“유학(幼學) 조태점(趙泰漸)은 인명을 구제하였고 한량(閑良) 윤형로(尹衡老)는 진휼곡(賑恤穀)을 마련한 공로가 있어서 모두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태점과 윤형로는 유품(幼品)과 한량이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특별히 가자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폐무산 만호(廢茂山萬戶) 장두성(張斗星)의 정장에 ‘늙고 병든 사람으로 시골에서 올라오다가 빙판에서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뼈가 어긋나 몇 개월 안으로는 전혀 움직일 형편이 못 되니, 속히 입계하여 처리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병세가 이와 같으니 막중한 변방의 직임을 병세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우선 개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이집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된 겸 우림위장(兼羽林衛將) 이행검(李行儉)이 파산(罷散)으로서 의망되어 낙점을 받았습니다만, 서용(敍用)하라는 명이 현재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감히 여쭙니다.”
하니, 서용하라고 전교하였다.
신재하(申在夏)ㆍ김홍(金泓)을 선전관으로, 마성하(馬聖河)ㆍ김화제(金華濟)를 훈련원 주부로, 이동방(李東芳)을 남촌 별장(南村別將)으로, 허신(許信)ㆍ백상화(白尙華)를 충익위장(忠翊衛將)으로, 이척(李滌)을 도총부 경력으로, 신명인(申命仁)ㆍ김시태(金時泰)를 동지사(同知事)로, 오태성(吳泰成)ㆍ이시우(李時雨)ㆍ김정태(金廷泰)ㆍ김문한(金文漢)ㆍ김창석(金昌碩)ㆍ조박(趙璞)ㆍ김해명(金海鳴)ㆍ박태주(朴泰柱)ㆍ이익하(李益夏)ㆍ이춘혁(李春赫)ㆍ이행덕(李行德)을 부사과로, 김성기(金聖器)를 수구 만호(水口萬戶)로, 김세진(金世振)을 아산 만호(阿山萬戶)로, 정동창(鄭東昌)을 청수 만호(靑水萬戶)로, 변성원(卞成瑗)을 주을온 만호(朱乙溫萬戶)로, 신진소(申震熽)를 풍덕 별장(豐德別將)으로,
전수만(全壽萬)을 정방산성 별장(正方山城別將)으로, 안윤문(安允文)을 훈련원 첨정으로, 구간(具侃)ㆍ김약룡(金若龍)을 도총부 도사로, 오태성(吳泰成)을 부장으로, 이행덕(李行德)ㆍ이시우(李時雨)ㆍ이춘혁(李春赫)을 무겸(武兼)으로, 이국형(李國馨)을 내금위장(內禁衛將)으로, 이행검(李行儉)을 우림위장(羽林衛將)으로, 유성일(柳星一)ㆍ민백승(閔百升)을 선전관으로, 장덕소(張德紹)를 부장으로, 김응감(金應鑑)ㆍ신명상(申命相)을 선전관으로, 변주국(邊柱國)ㆍ송의석(宋義錫)ㆍ정중희(鄭重熙)를 무겸으로, 박종원(朴宗元)을 중추부 경력으로, 김양일(金養一)을 도총부 도사로, 김성팔(金聲八)을 훈련원 판관으로, 임번(林蕃)을 훈련원 주부로, 임봉명(林鳳鳴)ㆍ유득기(柳得基)ㆍ김경태(金慶兌)를 부장으로, 정진복(鄭震復)ㆍ고진구(高鎭九)ㆍ
전세충(全世忠)ㆍ이성운(李成雲)ㆍ김중징(金重徵)ㆍ간이항(簡以恒)ㆍ최일휘(崔日徽)ㆍ신호검(愼好儉)ㆍ전상제(田相齊)를 수문장으로, 김창중(金昌重)을 폐무산 만호(廢茂山萬戶)로, 송탁(宋琢)을 평안 감영의 중군으로, 안세태(安世泰)를 도총부 도사로, 김정태(金廷泰)를 수문장으로, 김문한(金文漢)을 무겸으로, 김기서(金麒瑞)를 훈련원 주부로, 김창석(金昌碩)을 무겸으로, 윤화정(尹和鼎)을 내승으로, 상유주(尙維周)를 동지사로, 하섭(河涉)ㆍ신방(申昉)을 부호군으로, 박기담(朴嗜覃)을 인동 권관(仁同權管)으로, 문승벽(文承碧)을 어정탄 권관(於汀灘權管)으로, 강준척(姜俊陟)을 오촌 권관(吾村權管)으로, 남태종(南泰鍾)을 보로지 권관(甫老知權管)으로, 이만겸(李萬謙)을 곡포 권관(曲浦權管)으로 삼았다.
[주C-001]신묘 : 원문은 ‘庚寅’인데, 《영조실록》 1년 12월 28일 간지에 근거하여 ‘庚寅’을 ‘辛卯’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출처: 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