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로 가는 길/이기철
절요 25 책은 권마다 사람의 발자국소리로 덮여 있다 발자국에 담긴 노래가 면면하면 내 발은 어느덧 여대麗代로 가는 세로를 밟는다
고금동서 가편 가운데 청산별곡 8장은 금곡琴曲¹의 백미다 율려를 넘어선 소엽²후강³은 자자字字마다 관주다 편복에 짚신감발한 노래꾼의 소리 하나가 헐한 세상을 건너간다
나는 어제 망상 묵호 북평 나곡 후정 죽변 용화 후포를 지나왔다 땅 이름은 부를수록 토장 맛, 망상은 지미화, 묵호는 물미역, 북평은 들깨꽃, 나곡은 명자화, 후정은 모란대, 죽변은 오죽잎, 용화는 부용꽃, 후포는 자작나무로 내 상상은 채미를 더한다 삼척 지날 땐 삼베두루마기에 청려장 짚은 옛사람을 그리워도 했다
수로부인곡을 놓치고 무릉곡을 지난다 거기 가면 8백년을 살고 있는 고려인이 멀위랑 다래랑 먹고 지금은 누가 통치하는 어느 시대냐 물을가 봐서다 물음에 대답이 막힐 것 같아서다
관동을 지나왔으니 또 내 편상화는 몽돌 숨 쉬는 다도해를 좇아 오늘은 지명이 모두 음표인 진도 완도에 닿는다 여요전주에서도 못 보았던 우선羽扇 나마자기 물미역의 하룻밤을 나문재와 바닷말로 식음하고 가난과 자족과 안민을 벗했던 한아비들의 행색을 베낀다
마음 출렁여 하룻길 또 행려 백리, 어란포 벽파진 우수영 녹진 명량 원동리 당안리 장도 소안도 노화도 마량 칠량 별량에 닿는다 바다가 차라리 안가의 방식인 신지 명사십리에서 톳과 다시마를 먹고 매생이 구조개국에 숟가락 대면 어느덧 마음은 고현을 넘어 물 아래 물아래 가던 새 본다
백저포에 늑건⁴으로 메투리를 끌면서도 면화의 웃음은 익어 운모 장석 각섬석이 된 마을을 지나며 음영만으론 늙지 말아라 썪지 말아라 빈 당부가 촉급이다 어디를 가리키는지 붉은발꽉새 한 마리 송곳부리로 허공을 찔러 아직은 마멸되지 않은 보허자⁵진작⁶이 소금小琴 한 소리로 피어난다
선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몸 비우고 마음 안고 가야하는 길 동동 아박⁷ 내당⁸ 피리를 내려놓고 별곡을 걸어 마음허공에 금현을 거는 이 혈혈단신은 믜리도 괴리도 없이 던지는 후생 모르는 한 개 돌멩이, 헝겊신 반소매남방으로야 어찌
즈ᇝ대에 올라 해금을 혈 수 있으리!
1.금곡琴曲;거문고곡, ‘정과정곡’의 별칭, 조선시대 眞勺으로 이어짐
2.소엽; ‘정읍사’를 부를 때 4행, 11행
3.후강; ‘정읍사’를 부를 때 5행, 후강 전(全) 5,6, 7행
4.백저포 늑건; 백저포; 평민이 입던 흰색의 포袍, 늑건; 폭이 넓은 허리띠
5.보허자; 송에서 고려로 수입된 악곡, 당악정재의 궁중음악, 늙지말라는 축도의 곡
6.진작眞勺; 만전춘, 이상곡, 자하동, 진작 4곡이 조선 초기(세종, 성종)에 연주되던 궁중 연악곡, 빠르고 느림에 따라 1,2, 3, 4 진작으로 나뉨 眞勺四體라 부르기도 함
7.아박; ‘동동’을 춤으로 출 때 아박이라는 악기를 사용한 민속무구舞具
8.내당; 고려 평민들이 불렀던 속악, 무가 巫歌적 내용, 피리에 맞추어 부르기도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