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원이 계엄령이 실시되면 실행에 옮기려고 했던 계획을 기록한 수첩이 발견되어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졌다. 그 계획을 보고서 떠오론 몇가지 기억이다.
우선 비상사태 기간 사살된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서 영현백 3000개를 준비하려했다는 것이다. 80년대 호랑이가 금연하기 전 인터넷이 지금처럼 대중적이지 않을 때 목회자들에게 설교 자료를 우편으로 공급해주는 사업이 있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김항안 목사님이 교회정보센타라는 이름으로 이 사업을 시작하고 도와줄 사람을 찾다가 나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설교 필진으로 참여하여 교회력에 따라 1주에 2 편씩 설교를 써서 공급하는 일은 고정적 수입이 없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그 이후 많은 은혜를 입었다. 김 목사님은 그 후 호주로 와서 97년 유학생선교쎈타를 시작할 때 매달 1,000불 씩 선교비를 보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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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정보쎈타의 가장 큰 행사는 해마다 개최하는 목회자 3,000 명이 참석하는 전국 목회자 세미나였다. 어떤 해는 나도 귀국을 해서 행사 진행을 도와야할 때도 있었다. 김 목사님은 행사의 진행을 책임지고 나는 스탶들을 데리고 운영을 책임졌다.
기도원이라는 불편한 곳에서 3박 4일 동안 3,000여명을 먹고 재우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은 전쟁 같은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마침 친한 동창생이 맹호부대 사단장이어서 선교비를 보낼 터이니 담요를 빌려달라고 했다. 사단장 친구는 맹호부대는 기계화사단이라서 개인 침낭을 쓰기 때문에 담요가 없어서 빌려 줄 수 없지만 총은 빌려 줄 수 있다고 약을 올렸다.
다음으로 반체제 인사들을 수거해서 사살한 다음 오음리에 시신보관소로 설치하려고 했다고 한다. 오음리는 30만 월남파병 전우들에게는 잊을 수가 없는 곳이다.
참전병들은 그 곳에서 4주 동안 실전 교육을 받고 정글복과 정글화, 수첩과 인식표 2개를 수령하고, 유언장을 쓰고 작은 봉투에 손톱·발톱, 머리카락을 넣어 겉봉에 수신인을 적고 전사할 때 보상금을 수령할 사람을 적는 찬바람 도는 서류를 작성하고 월남 전선으로 떠났다.
새벽녘에 장병들을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한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체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생각만해도 끔찍한 계획들이 실행에 옮겨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12. 3일 국회 앞으로 달려간 용기 있는 시민들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