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주 : 대전수필문학회 카페(수필예술)에 방금 전에 올라온 강승택 수필가의 <형님>제하의 수필 한 편을 읽고, 혼자 간직하기 어려운 사연이 있어 여기에도 소개한다. 강승택 수필가와는 거의 매일 카톡 대화를 나눌 만큼 남달리 친숙하게 지내는 문단의 선배이자 인생의 선배님이다.
형님
강승택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형님께서는 나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오셨다. 파킨슨병으로 몸은 이미 쇠약해 질대로 쇠약해진 데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손으로 자판 하나하나를 힘겹게 눌러가며 완성한 글이다. 형님의 편지를 읽으며 나는 한동안 착잡한 마음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무리 둘도 없는 동생의 생일이라 한들 그 몸으로 굳이 축하의 글이라는 걸 써야 했을까. 형님은 이 글을 보낸 후 꼭 3년 6개월을 더 사시고 국립묘지에 묻히셨다.
“내 몸이 이렇지만 않았다면 여동생들과 함께 대전으로 내려가 4남매가 밥이라도 한 끼 했으면 좋겠지만 형편이 그렇질 못하니 미안하고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서두로 편지는 시작된다. ‘4남매’란 형님을 비롯하여 두 분의 누님과 나를 말한다. 형님 말씀처럼 매년 이맘때면 4남매가 생일상을 함께 했다. 그러던 것이 깊어진 형님의 병으로 인하여 올해엔 더는 할 수 없게 되었으니 형님의 마음인들 좋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형님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이 이즘 들어 부쩍 더해졌는데 거기에 답하듯 형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나의 출생 당시의 상황을 유언처럼 적어 놓으셨다.
“너는 만주 봉황성 다포에서 태어나 이듬해 해방을 앞두고 아버지의 선견지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 백토 동에 있는 숙부님 댁에 정착할 수 있었다. 너와 나의 첫 상봉은 내가 열다섯 나이로 신의주 동중 2학년에 재학 중일 때였다. 어머니가 너를 업고 내 앞으로 다가오시더니 “승희야, 이리 와서 네 동생 좀 봐라!”하시며 업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안으시며 말씀하신다.
“네 동생이다. 잘 생겼지? 어머니로선 그럴 만도 하셨다. 우리 康 씨 집안은 아들이 귀했다. 아버지 4형제 중 큰 집에 아들 하나, 둘째인 우리 집이 나 하나였다가 네가 태어났으니 자랑스러울 수밖에. 특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크게 기뻐하셨다. 너는 70년 전 이렇게 귀하게 태어났다. ”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70여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백토 동 숙부님 댁 마당에 내려선 기분이었다. 무명 치마에 흰 저고리. 머리를 쪽진 30대 후반의 어머니 모습과 유난히 눈망울이 또랑또랑 빛을 발했던 까까머리 형님의 얼굴까지 70여 년 전의 세월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서 어른거렸다.
당시 우리 집은 아버지 직장을 따라 온 가족이 만주로 이주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형님만이 홀로 숙부님 댁에 기거하며 신의주 동중(東中)엘 다녔는데 듣기로는 그 지역 수재들이 모인 곳이라 했다. 그 후 해방을 앞두고 귀국했고 형님은 말로만 듣던 동생의 얼굴을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이리라.
형님과 나는 나이 차가 많다 보니 여느 형제처럼 성장기를 함께 보낸 기억이 별로 없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형님은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이란 울타리를 떠났다. 그해 여름 6.25 전쟁과 이어지는 1.4 후퇴. 형님은 대학교 합격통지서만 받아 쥐고 학교 한 번 가보지 못한 채 군문에 입대했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서로의 생사조차 모른 채 형님은 소총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현리 전투에서 포로로 잡혀 끌려가던 중 아군의 공습으로 탈출, 기적 같은 자유를 찾기까지 돌아보면 형님만큼 기구한 삶을 산 경우도 흔치 않으리라.
형님은 성격상 군인 체질이 아니었다. 일찍이 문학을 좋아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는 「현대문학」 창간호에서부터 쭉 모은 책들을 상자에 바리바리 쌓아 대전 집으로 가져왔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나는 틈틈이 읽곤 했는데 내가 문학에 눈을 뜬 계기였다면 아마도 이때였을 것이다.
나는 형님의 죽음을 서울행 버스 안에서 처음 들었다. 열흘 전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냉면 한 그릇을 너끈히 해치우실 만큼 상태가 좋았던 형님이었다. 그랬던 형님의 병세가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인다는 조카의 말을 듣고 병문안을 나선 길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조카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아버지, 조금 전 돌아가셨습니다.”
앞뒤 정황설명 없이 끝을 맺는 짧은 한마디에 나 역시 가타부타 질문 없이 통화는 끝이 났다. 워낙 큰 충격 앞에서는 놀라움도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담담했다. 절대 일어나선 안 될 것처럼 여겨지던 일이 너무도 쉽게 벌어지고 보니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 모든 것은 정해진 순서대로 굴러가는 것을 괜히 애글타글 했던가 하는 허무함도 함께 밀려왔다.
나의 발길은 급히 방향을 틀어 삼육병원 영안실을 향했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촛대 사이로 내려다보는 형님의 영정 앞에 서니 새삼 인생이 허망했다. 형님 자신도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금의 집이 협소하다고 큰 집으로 늘려 가자고 했던 형님이었다.
오늘은 그동안 미루어왔던 형님의 여행용 가방 속 옷들을 동네 재활용 통속에 넣었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 우리 집에 잠시 맡겨놓은 물건이었다. 겨울용 잠바 두 어가지와 등산용 지팡이가 전부였으나 생전의 형님을 보는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칠 않았다. 그리고 문득 내년 나의 생일 아침을 그려본다. 만주 봉황성과 다포 이야기도, 진한 평안도 억양의 형님 목소리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우리의 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나 역시 어찌 예외일 수 있으랴.
■ 강승택 : 수필가. 《목척교 위의 어머니 》저자. 8.15광복과 함께 월남하여 10살 이후 대전에서 거주. 대전 목척교에서 노점상을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유년기를 보냄. 초등교사 38년 재직 후 정년퇴직.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존경합니다
윤승원
강승택 선생님의 <형님>제하의 옥고를 읽으면서 남다른 감회에 젖습니다. 저의 스마트폰 앨범에 저장된 국립대전현충원 사진을 다시 살펴 봅니다. 강선생님이 작년 이 맘때 제게 카톡으로 보내주신 사진입니다.
강선생님은 제게 보내주신 사진에 이런 설명을 붙이셨습니다.
<지난 10월 돌아가신 형님의 묘역입니다. 어제 태극기 꽂아드리고 왔습니다.>
짧은 한마디 사진 설명이지만 거기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형님에 대한 존경심은 나라 사랑 정신으로 승화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강선생님의 형님이 국립현충원에 잠들어 계시다는 사실만으로도 강선생님 가문의 뜨거운 애국심에 존경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이버 참배>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사이버 참배> 방명록에 이렇게 존경심을 표했습니다.
<님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헌신적 나라 사랑, 존경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 숭고한 애국정신, 온 국민이 영원히 잊지 않아야 합니다. - 육군중령 강승희 님께 헌화, 분향, 사이버 참배합니다. 아우이신 수필가 강승택 님과 대전수필문학 동인 윤승원 절>
오늘 강선생님이 쓰신 <형님> 제하의 옥고를 다시금 정독하고 보니, 가슴 뭉클합니다. 강선생님이 형님 묘역에 꽂아 놓고 오신 태극기를 보니, 더욱 가슴 뭉클합니다.
국립현충원 앞을 자주 지나치게 되는 대전시민으로서 애국 선열의 나라 사랑정신에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밉니다. 고맙습니다.
2013.6.27
※ 국립 대전현충원에는 저도 공무상 여러 번 가봤습니다. 제가 과거 대전북부경찰서 근무 당시 이곳이 관할이라 여러 번 가봤습니다. 현충원을 둘러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합니다. 풍수지리상 천하 명당이라고 하니, 당시 대통령이 특별히 이곳에 터를 잡아 애국 선열들을 모신 것은 참으로 잘한 일입니다.
첫댓글 장천 선생의 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많은 느낌을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습니다.
1. 강승택씨의 글은 형님을 존경하는 것을 우애가 깊었음응 확인하고 우애는 부모님을 존경하면서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남매는 부모님의 분신입니다. 비유하면 송편을 만들 때에 상위에 만들어 놓은 송편이 우리라고 본다면 이체동심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애라는 용어를 설명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가정은 형제자매가 없는 가족이 많기 때무입니다.
2. 형님 강승희 중령님이 국가를 위해 바친 공로를 올사모를 대표하여 경하드립니다. 태극기를 꽃은 꽃다발이 상징하는 의미가 큽니다.
3. 장천선생의 글에서 또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명당이론보다는 어린이들의 참배 설명이 더욱 깊은 감명을 줍니다. 현충일 난
나라를 지키신 분들에게 전국민이 태극기를 게양하는 운동을 벌려야 할 것입니다. 비록 그들에 대한 국가적 보상이 넉넉치 못하지만
이 것이 국가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4. 후일 강승택 씨의 글에서 느낀 소감을 후일 시간을 내서 자세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 교수님 고맙습니다. 여기에 글을 올리면 존경하는 정 교수님의 귀한 고견과 함께 따뜻한 정이 배어나는 댓글을 만날 수 있으니,
어디 다른 인터넷 공간에서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정 교수님의 말씀에는 온화한 어투지만 삶의 무게감, 예의, 정의감, 애국심 등이 행간에 가득하니
여기는 보배로운 공간입니다. 강승택 수필가님도 정 교수님의 자상하신 댓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머지 않아 이곳을 방문하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대전에 가면 한번 뵙고 싶습니다. 강승희 중령은 저와 비슷한 삶을 사셨습니다. 대전 그리고 생일 등 많은 이야기 거리를 공유할수 있습니다
.저도 형님에 대한 느낌도 비슷합니다. 꼭 카페에 들어오시면 본카페는 문사철이 참여하는 인문학의 광장으로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천 선샏 해인사창건설화에 댓글을 부탁합니다,꿈의 여행을 떠남에 참여해주시면 상상의 여행기를 함께 써봅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