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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20일 “팔복 강해6 –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 한성일 목사 -
마태복음 5:6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찬양: 온맘 다해 (주님과 함께 하는)
최근에 좀 더 잦은 영어 연합 예배, 또 제가 다른 영국교회 예배 인도등이 많이 겹치면서
꽤나 오랜만에 여러분들 앞에 서는 것 같습니다.
다시 팔복 강해로 돌아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망각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지난 시간 수 차례 걸쳐 다루었던 앞선 팔복의
내용들이 지금 잘 생각이 나질 않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전 학교 다닐 때 좋아했던 선생님이 있었는데, 중간 중간에 오래 전에 배웠던 내용들을 일목요연하게
복습 해 주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면 머릿속에 정리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은 설교 앞 부분에 약간의 시간을 할애 하여 복습을 좀 하고 나가려 합니다.
이 시간 잘 들으시면서 팔복의 감각을 다시 불러 오시기 바랍니다.
처음 이 팔복 시리즈 설교를 시작하면서 서론 시간에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말씀 드렸었습니다.
먼저 팔복에 나타나는 사람의 성품이나 특징은 인간이 생리적으로 타고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더 온유한 성품을 입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는데,
만일이런 사람이 복을 더 많이 받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덜 받는 것이라면 이것은 불공평 한 것이겠지요.
팔복에 나타나는 성품은 인간 생태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을 믿는 성도 이기에,
즉 믿음으로 말미암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비록 이 복을 누리게 되는 특징이 여덟 개의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사실은 이들이 결국 하나이고, 그러니 이 특성 중에 한 가지라도 나타내게 된다면
그 나머지 7가지의 특성도 사실은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팔복이 갖는 순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나온 네 개의 복은 내 자아가 하나님 앞에서 비워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게 되는 상태가 되기에 받게 되는 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다루게 될 나머지 4개의 복의 내용은 이제 이렇게 비워지고 낮아져 있는
우리의 심령의 상태에 하나님이 하나 하나 채워주심으로 받게 되는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재미 있는 것은 처음 4개의 항목과 뒤의 4개의 항목이 하나씩 그 짝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까지 다루었던 앞 부분 4개 복의 항목을 하나씩 되짚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얻게 되는 복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사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별 매력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태와도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나의 의,
나의 능력을 바라보지 않고 더욱 더 철저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땅에서 나는 무능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내 안에는 스스로 해결할 힘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며,
또 스스로의 힘으로는 천국에도 이를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사람들,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필요로 하게 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인데,
주님은 바로 이렇게 연약하여 주님 밖에는 소망이 되지 못하는 자들에게
‘바로 너희들이야 말로 복 받은 사람들이며, 천국은 바로 너희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한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는지, 주님 외에는 찾을 수 없는 그런 심령의 상태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게 심령이 가난한 사람과 짝이 맞는 것이 바로 오늘 주로 다루게 될 다섯 번 째 복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해 본 사람이야 말로 그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오늘 주요 본문이며 주제이기에 잠시 후 이어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복은 무엇이었지요?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게 되는 복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첫 번째 항목인,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자신의 연약한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탄식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위로함을 주실 것이라는 복이었습니다.
자, 이 복은 어떤 항목과 연결이 되겠습니까? 자신의 영혼의 연약한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애통하는
사람은 결국 무엇을 받게 되겠습니까? 바로 청결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여섯 번째 복의 항목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결국 이 여덟개의 복은 하나이다! 라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될것입니다.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된다는 복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이 얼뜻 보면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그 원어상의 뜻을 보면 처음 두 복의 내용을 복합적으로 지닌 단어란 사실을 알게됩니다.
헬라어 에서의 온유는 ‘프라우스’ 라는 단어로, 가난한, 짓눌린, 애통한, 억압받는, 겸손한, 낮은 등을 포함합니다.
단순히 온순하고 유한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에서 역시 헬라어와 같이
가난과, 애통, 억압 받는 뜻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니 온유는 심령이 가난한 것과 애통하는 모습을 모두 포함하는 종합 단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유하다라는 단어에는 이렇게 마음이 가난해 지고 애통하는 것을 넘어 한 가지가 더 추가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어지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세인 같이 주님 앞에서 ‘나는 기도도 많이 하구요, 구제도 많이 하구요, 헌금도 많이 하구요…’ 하며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저는 죄인 입니다…’ 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는 그러한 성품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이 역시 내 심령이 비어지는 모습을 말하며, 이와 짝을 이루는 것이 7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에 대한 내용입니다. 스스로 낮아지고, 말 없이 따라주는 이런 온유함의 성품 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해 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배부름의 복을 얻는다는 것이었지요.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의로워 지는 것에 대한 열망이라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더 깊은 믿음에 대한 갈망입니다.
이것을 얼마나 열망하는 것이냐 하면 주리고 목마를 정도로 원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여기사 주리다는 것은 예수님의 예수님이 40일 금식기도 후의 주리다 하셨던 그 단어와 같은 것이라 했지요.
뱃속에 내장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내 안에 현재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그러니 주여! 이 빈 마음 가운데 오직 주님 향한 믿음으로만
가득 채워 주십시오!” 하는 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이와 연결되는 것이 10절에 나오는 마지막 복의 내용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고 합니다.
그 의에 대한 주림 때문에, 이 땅에서 핍박으로 채워지게 될지라도 이 역시 그러한 삶의 뒤에는
최후 승리인 천국을 주시는 복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핍박 받는 것이 무엇이 축복입니까?’ 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터인데
, 그것은 그 시간이 되면 다루어 보겠습니다만…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한 가지가 발견됩니다.
이 마지막 복의 결과와 첫 번째 복의 내용중에 공통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찾아보시지요. 처음과 마지막이 모두 천국이 저희의 것이 됨을 말씀 하셨다는 겁니다.
우리는 또 한 번 이 팔복의 말씀은 서로 서로가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으며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주제인 제 다섯 번 째 복 ‘긍휼이 여기는 자가 받는 복에 대한 말씀’을
본격적으로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타인에 대하여 긍휼이 여기는 것은 참으로 우리가 우리 삶 가운데 매우 실제적으로 부딪히고
고민 하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눈만 뜨면 우리는 도저히 내 마음에 긍휼을 품어 줄 수 없는
인간들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며,
어디에 가나 도처에 그런 사람들은 한 두 명씩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베풀며 산다는 것이 사실 얼마나 어렵습니까?
사람들 중에는 어릴 적 부터 남들 보다 좀 더 유순한 성격으로 용서를 좀 더 잘 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완벽하게 용서와 긍휼의 삶을 살고 있다고는 말 할 수 없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참 착하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관대하고, 또 불쌍히 여기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번은 둘이 깊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제가 좀 놀랐습니다.
자기는 사실 스트레스가 많다는 겁니다. 어떤 어떤 부류의 사람을 보면 마음으로는 미워 죽겠는데,
내가 표현을 못하니까 그렇지, 속이 뒤집어 질 것 같고, 답답하고,
네 자신을 좀 알라라고 한 소리 크게 해 주고 싶은데 막상 만나면 그냥 웃음만 지어준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의 일반적인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영국의 설교가인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도 말하길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생래적으로 용서의 영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쥐어 짜내는 노력으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는 복’을 누리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도, 상대방도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력으로서의 긍휼함이 아닌 믿음의 방법으로 접근해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긍휼은 나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렇게 타인을 향하여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부터가 죄인이고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가 시작입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그분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되며,
그 때 비로서 우리는 사람을 향한 진실한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전에는 저 인간이 밉고 꼴보기 싫고, 너무나 얄미워서 그를 향해 겉으로든 속으로든 욕을 할 수도 있겠지만
나도 당신도 결국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은 후에는
‘쯧쯧,,, 저 사람도 불쌍한 영혼일 뿐이지, 주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지, 은혜를 받아야만 되는 사람이지…’
라는 마음이 들면서, 내 마음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긍휼을 품지 못하는 것이란?>
그런데 만일 우리 가슴에 긍휼함이 부족하거나 없다면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예수께서는 긍휼과 용서에 대한 예화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이야기 입니다.
대략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한 신하가 왕에게 빚을 지었는데, 그 금액이 너무 커서 값지를 못하자
왕이 모든 빚을 은혜로 모두 탕감 시켜 주게 됩니다.
신이 난 신하는 집에 가는 길에 자신에게 빚진자를 만나게 되는데,
자기가 탕감 받은 빚에 비하면 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작은 액수 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를 용서치 않고 옥에 가두게 됩니다.
이를 전해 듣게 된 왕은 그 신하를 다시 잡아다가 빚을 도로 값을 때 까지 감옥에 쳐 넣으라는
결말로 이야기가 끝이 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일만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커다란 죄를 사해주시는 긍휼과 사랑을 말하는데,
이 사랑과 긍휼을 받고도 작은 것 하나 용서치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그 큰 금액을 탕감 받은 신하는 자신이 받은 긍휼을 제대로 인지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머리로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가슴까지 깊이 사무치도록 그 은혜를 안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 은혜를 깊이 깨달은 자라면, 그 작은 것을 용서 못 했을리가 없습니다.
젊은 날 커다란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무기징역을 선포 받은 어떤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10년 넘도록 모범수로 생활했는데, 광복절 특사로 정말 특별한 케이스로 사면을 받고
10년 만에 교도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온 것입니다.
감옥에서 느끼던 그 햇살과 밖에서 자유의 신분으로서 온 몸으로 느끼는 그 햇살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어디선가 낯 익은 사람이 다가와 꾸벅 인사를 하며 축하를 하는데,
10년 전에 당신에게 10만원을 빌려갔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때 그 돈을 값고 싶었지만
능력이 없었고, 어찌 살다보니 지금까지도 너무나 가난해서 당장 돈 값을 형편은 못 되고,
이렇게 인사라도 나왔다고 한다면, 여러분 같으면 이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게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대부분 이럴겁니다. 됐다고… 그 옛날의 작은 돈 가지고 뭘 그러냐고,
이렇게 찾아와 축하해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맙다...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것도 아니면… 조금 쪼잔한 경우일 지라도, 손을 잡아 주며, 아 괜찮다.
뭐 나중에라도 천천히 값아주면 고맙고, 아니어도 괜찮아요… 정도로 답할 것 같습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말이지요.
하지만 그 좋은 날 그 사람의 멱살을 잡으며, “당신 잘 만났다. 내가 그 돈 못 받아 정말 화가 났었는데,
오늘 당장 값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로 데리고 갈것이오!” 할 사람은 어지간히 나쁜 사람 아니구서야
세상에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받은 그 사면의 기쁨과 은혜와 비교하면, 10만원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
나도 기쁘게 사면해 줄 수 있는 정도의 것이 되는 거지요.
성도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나도 남을 용서하고
긍휼의 마음을 품는 것으로 증명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의 여부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아닌가로
선언하게 되는 셈입니다.
<긍휼을 베품은 축복입니다>
긍휼함을 베푸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명제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하는 이 말은 참으로 매력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분명히 지키시는 분입니다.
주변에 보면 긍휼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이들은 사사건건 잘잘못을 따지기를 좋아합니다.
남을 판단 합니다. 그리고 죄인에 대해서 비판적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과연 정작 사람들부터 긍휼함을 받고 사는 것 같습니까? 점차 외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주변에는
참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따라 다닙니다.
처녀 총각들은 데이트시 다른 거 자꾸 보지 말고 이런 것 잘 살피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과 나중에 결혼하고 살면 정말로 피곤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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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야곱의 자녀 중에 셋째 아들 유다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유다는 첫 째도 아닌데,
예수님의 직계조상이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유는 그가 다른 형제보다 긍휼이 많았던 사람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세 번의 사건이 있는데,
첫 번째 사건은 형제들이 모두 눈의 가시 같은 요셉을 죽이자고 했을 때,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을 죽이는 것만은 우리가 하지 말자 제안 한 것이 유다이었고,
결국 이 때문에 요셉은 생명을 유지하고 이 성경과 구속사 속에서 크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요셉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
런데도 예수의 족보는 요셉이 아닌 유다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한 번은 막내동생 베냐민과 함께 애굽의 궁전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베냐민의 가방에서 알수 없는 은잔들이 나와서 곤경에 처했을 때도,
자기가 베냐민 대신 저들에게 끌려가겠다고 나섰던 인물 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며느리 다말과의 사건인데, 그에게 아들 셋이 있었는데, 첫 째 아들이 며느리와 살면서
그만 죽고 맙니다. 그래서 당시 풍습을 따라 그 며느리를 둘 째 아이와 살게 했는데, 그
만 둘 째 아들도 죽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이어서 셋 째 아들에게 시집 보내야 하는데,
이 며느리만 만나면 아이들이 자꾸 죽으니 셋 째 만큼은 주기 싫은 겁니다.
세월이 지나며 기다리고 기다려도 막내 아들을 남편으로 줄 생각 없는 시아버지를 알게되고,
결국 며느리가 이 가문의 대를 잊기 위하여 작당을 하고 스스로 길에서 창녀행세를 하여
유다와 성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유다는 며느리와 속아 넘어가 관계를 한 것이 되지요. 관계 후에 유다는 돈이 없이,
대신 나중에 만나면 지불 하겠다는 증표를 여인에게 건네줍니다.
그리고 한 동안 찾아오는 여인이 없어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 며느리가 그 증표를 보여주며 시아버님과 관계를 맺은 것이 본인 이라고 밝히게 됩니다.
이 때 사실 유다는 발뺌 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누구도 그 허무맹랑한 며느리의 이야기 보다는 유다의 말에 신뢰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며느리는 참담한 이야기를 지어낸 대가로 죽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진실을 밝힐 때 자기가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을 알았음에도
진실을 따라 며느리의 생명을 살렸던 인물입니다.
바로 이러한 긍휼의 사람이었던 유다를 통해서 예수님의 족보는 흘러가게 됩니다.
형제가 모두 12명이나 되었고, 유다가 장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한 족보는 유다를 타게 됩니다.
성경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와의 관계하는 모습 등, 이런 이야기는 참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이런 이야기까지 이토록 자세하게 기록 했는지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지만,
결국은 이러한 유다라는 긍휼의 마음을 가진 자가 긍휼을 입는 복을 실제로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약속은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약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 없이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 심판에도 긍휼이 없을 것이나, 혹 부족한 것 많게
살아왔을 지라도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온 자에게는 그 심판마저도 이기는 역사가 있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긍휼 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긍휼의 마음 품고 긍휼의 은혜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긍휼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그 분의 은혜와 긍휼을 내가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일 때
다른 사람에게도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가슴 아픈 이야기, 받아 들이기 실은 말일 수 있으나,
내가 긍휼하지 못하다면 여기에는 한 가지 설명이 있을 뿐입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에 있으며, 아직 죄 속에 있으며, 용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특별히 내 삶에 긍휼함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 시간 주님께 간구하셔서,
이미 여러분의 삶에 깊숙이 스며든 그 은혜와 긍휼을 여러분의 가슴으로 이해하고
받아 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도 만나는 영혼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성도 되게 해 달라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말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 실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