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교제 사랑하는 주님 앞에 220
오꾸노 마사쓰나 작사 · D. B. Towner 작곡; 《통일 찬송가, 1983》 278장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 크신은
혜 생각하 며 즐거운 찬송부 르네 내주예수
내주예수
본을받아 모든사람 내몸같이 환난근
본을 받아 모든사람 내몸같이
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환난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2. 사랑하는 주님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
나 즐거우 나 주님만 힘써 섬 기네 우리주님
내주예수
거룩한손 제자들의 발을씻어 남섬기
본받아 모든사람 내몸같이
는 종의도를 몸소행해 보이셨네
환난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3. 사랑하는 주님 예 수 같은 주로 섬기 나니 한 피받
아 한몸 이 룬 형제여 친구들 이여 한몸같이
내주예수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되어 우리주
본을받아 모든사람 내몸같이
님 크신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환난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이 찬송은 일본 《찬미가(讚美歌), 1931》에서 번역하여 《신편 찬송가, 1935》 390장에 처음 채택한 찬송이다. 일본형제들도 작사자를 몰라 「신센삼비까」에서 채택했다고, 'Sbinsen Sambica, c, 1896'라고 적어 놓아, 우리도 이제까지 그렇게 적어 내려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최근 《신센삼비까, 1890》 책을 미국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이 책은 개정판으로서 초판은 1888년인데 곡조찬송가였다. 이 찬송가 237장에 「사랑하는 주님 앞에」가 있는데, 사용 곡조는 아래서 보시는 대로 'BARNBY'로 되어 있고, 영문 가사 첫 줄은 몽고메리의 작사 'In One Fratemal Bond of Love'였는데 별표(*)를 달아놓았다. 영문 가사 첫줄 찾아보기에 들어가 보니, 별표를 달아 놓은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해가 있었다.
'Tbe subject only is indicated in tbe lines marked an ASTERISK'
그러니까 'ln One Fratenal Bond of Love'는 가사 첫 줄이 아니라 제목이라는 말이다. 작사자가 영국의 찬송가 작가 몽고메리의 찬송 'In One Fraternasl Bond of Love'에서 영감을 받아 첫줄을 제목으로 작사하였다는 뜻으로 보인다. 몽고메리의 가사 1절을 소개한다.
In one fraternal bond of love
In one fraternal bond of love,
One fellowship of mind,
The saints below and saints above
Their beliss and glory fine.
Here, in their house of pilgrimage
The statutes are their song
There, through one bright, etemal age,
Thy praises they prolong.
이 책에 작사 · 작곡자 이름은 하나도 넣지 않았다.
일본에서도 이 찬송 작사자를 알지 못해 그 동안 《찬미가(讚美歌), 1954》 537장에까지도 「신센삼비까」에서 채택했다고 'Sbinsen Sambica, c, 1896.'이렇게만 적어놓았기 때문에, 찬송가 해설쓰는 이마다 온갖 억측이 나돌았었다.
다행히도 최근 일본에서 찬송가와 창가연구로 크게 활약하고 있는, 오쓰까 노유리 교수가 이를 찾아냈다.
작사자는 「신찬찬미가」 편찬 책임자인 오꾸노 마사쓰나 목사였다. 오꾸노 목사는 일본교회의 최초 목사이다.
작사자 오꾸노 마ㅏ사쓰나(1823~ 1910) 목사는 1823년 에도바꾸후의 하급 사무라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4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반항아가 되어 아무도 그를 가르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10살에 절에다 맡겼다. 그러나 불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주지가 검도 · 창술등의 무옐르 가르치고, 예능으로 단가 · 한시 · 피리 · 꽃꽃이 등과 서예 교육까지 하였다. 15살에 〔4서 5경〕을 시작하여 2년 만에 통달하였다.
그는 재능을 인정받아 에도바꾸후의 유력자 오꾸노 라는 부자 사무라이 집의 양자로 들어가 명치유신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바꾸후를 위해 목숨 결고 싸우다가 완패하여 쫓기는 몸이 되자. 그는 다시 절로 들어가 중에게 살길을 알려 달라 했다. 그러자 중은 한 주간 단식을 하고 매일 아침 1,000 번씩 물 끼얹기를 50일 동안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 바람에 죽을 힘을 다해 그리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신도의 어떤 사람은 10,000곳의 신사를 참배하면 소원이 이르어진다고 하여 오꾸노는 자신이 1,000곳의 신사를 참배하고, 사람을 동원하여 모두 1만4천 곳의 신사를 참배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든 오꾸노는 불상들을 때려부수겠다, 신사에 불을 지르겠다, 난리를 쳤다는 것이다.
오꾸노는 아주 반 기독교적이었다. 명치유신 세력이 누구든지 이 난국을 타게할 방도를 서면으로 제출하여 채택되면 그를 중용하겠다고 하였을 때, 오꾸노는 「기독교를 박멸하고 신도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문을 써서 보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를 당신의 사역자로 크게 쓰실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다. 1871년 요코하마로 간 오꾸노는, 사위의 친구인 오가와 요시야스(1831~1912)를 만난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인 오가와는 오꾸노를 미국 의료선교사 제임스 헵번(1815~1911)에게 소개한다.
오꾸노는 헵번 선교사의 일본어 교사가 되면서부터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길을 차근차근 걷게 돤다. 먼저 오꾸노는 헵번을 도와 일본 최초의 「화영사전」편집을 도왔다. 헵번은 「헵번 안약」으로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안질을 고쳐주어 유명해졌다. 의사이기도 한 그는 성경번역으로 일본인들의 영의 눈을 고쳐주었을 뿐만 아니라, 안약을 만들어 일본인의 육의 눈도 고쳐주었고, 「헵번식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여 일본인들의 지식의 눈도 뜨게 해주었다. 이 표기법은 지금도 일본에서 공식으로 통용되는 외래어 표기법이다.
헵번이 중국 상하이로 출장 간 후, 오꾸노는 브라운(1810~1880)선교사를 도와 신약성경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오가와와 함께 요코하마에 있는 일본 최초의 교회인 「일본 기독공회」에 출석은 했지만 세례는 안 받고 있었는데, 때가 찼다. 제임스 발라(1832~1920)목사가 어느 주일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란 제목의 설교를 하였는데, 베드로가 어린 여종 앞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 후 예수의 시선과 마주치자 밖으로 나가 통곡한 일을 눈에 보는 듯이 설명하였다. 그 시간 오꾸노는 자기 자신이 「베드로와 같은 자」라고 통회 자복하며 세례 받을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입을 열기만 하면 베드로 얘기를 하였기 때문에, 「베드로 얘기를 들으려면 오꾸노에게 가라」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1872년, 오꾸노는 브라운(1810~1880)선교사에게 일본에서 27번째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헵번이 돌아오자 오꾸노는 그를 도와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1873년 2월 일본 명치정부가 기독교 「금교령」을 해제하자, 오꾸노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가와와 함께, 8개월간에 걸쳐 전국순회 전도여행을 떠났다. 마침내 오꾸노와 오가와 두 사람은 1878년 나란히 목사 안수를 받아 둘 다 일본인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1883년 5월 8일부터 한 주간 동안 됴코에서 일본 최초로 대부흥집회가 열렸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작사자 오꾸노 목사는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해와서 그리스도인이 된 후, 미국 선교부에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여러번 편지를 하여 허락을 받은 이수정을 초청하였다. 이수정은 한국 초대 선교사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와 스코랜턴 선교사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자기가 번역 출판한 《마가복음》을 선물로 주어 그들이 제물포에 입항할 때 한국어 성경을 들고 입항하게 한, 열성적인 글기스도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오꾸노 목사는 이수정에게 집회 시작 때 조선어로 기도를 하게 하였는데, 오순절 날과 같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모두들 이스정의 기도를 알아듣고 아멘으로 화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감동한 오꾸노 목사는 부흥외 기간에 이수정에게 간증집회를 열게 하여, 이수정은 일약 일본 전국에 유명해졌다. 약삭빠른 장사치는 이수정의 이름을 딴 가게와 과자를 만들었는데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무술과 문필 · 서화 · 음악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격정적이며 쉼을 모르는 오꾸노 목사는 「일본의 사도 바울」이라 불렸다. 그는 찬송가 번역 · 창작 · 편집에도 힘을 쏟아 계속 찬송가를 출판하였다.
오꾸노 목사는 1910년 8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전국을 순회 전도하였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곡조는, 타우너(1850~ 1919) 교수가 거든로빈스 작사인 'Tbe Better Land를 위해 1897년에 작곡하여 처음 발표 한 것이다. 타우너가 1899년에 출판한 《복음 안내자 찬송》' 149장에 처음 실렸다. 엘더킨, 스웨니, 커크패트릭, 길모어 그리고 하딘 둥이 공동 편집한 《세기의 찬송, 1900》'제19장도 실렸다. 일본 사람들은 이 곡조를 좋아하여 후에 「사랑하는 주님 앞에」를 이 곡조에 맞춰 불렀고, 우리는 《신편 찬송가, 1935》발행 때 《찬미가(讚美歌), 1931》에서 번역 채택하였던 것이다.
작고자 다니엘 타우너(1850~1919)는 펜실베이니아의 타우너힐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성악가로서 교육자였다. 후에 하워드와 루 트(1820~1895) 그리고 웹 에게서 공부하였다. 1870년부터 12년 동안, 뉴욕의 빙햄턴에 있는 감리교100주년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섬겼다. 1882년부터 신시내티에 있는 요크스트릿 감리교회, 유니언감리교회 등에서 음악셩경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죽기까지 26년 동안을 가르쳤다. 1900년 테네시주 해리만에 있는 미국절제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작품을 발표할 때 'Roben Beverly'라는 아호도 사용하였다. 타우너의 작곡으로서 우리 찬송가에 있는 곡조는 다음의 4편이다.
1. 「사랑하는 주님 앞에」(220장) 2. 「놀랍다 주님의 은혜」(251장)
3. 「행군 나팔 소리에」(360장) 4.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440장)
이 찬송은 1881년에 처음 《찬미가(讚美歌),1881》에 실린 적에는 작사자 이름을 안 밝히고, 곡조는 「내 가도하는 한 시간」 'SWEET HOUR OF PRAYER'의 곡조로 불렸으나, 1888년판에서 위의 'BARNBY'로 바꾸었다가, 1930년판(Sol-Fa Edinon, 485수록)454장에서 현재 우리 곡조인 'TOWNER'로 바뀌었다. 이번 일본 《찬미가 21》543장에서 일본 사람 다가나미 싱이찌(1941~)작곡, 곡명 「마지와리」교제의 뜻으로 바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