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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3 - 저녁후 호텔 TV 에서 수백향을 보며 성왕의 전사를 떠올리다!
2022년 11월 6일 닛코(日光)에서 도쇼구 東照宮(동조궁)를 구경하고는 JR 닛코(日光) 역에 돌아와
기차를 타고 우츠노미야 宇道宮 역에서 신칸센 야마비코 기차를 타고 도쿄역에 내리려
역사로 들어오니 인파로 미어터지는데 표지판을 보고 야에스 기타구치(八重洲 北口) 로 나옵니다.
밤이라 빙향과 거리 감각이 떨어져 어렵게 도요코인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오는데 여기 주변에는 시로키야나 어민등 현대적인 체인 이자카야는 보이지 않고
동네 이자카야 뿐인지라 그 중에 사람이 북적이는 곳으로 들어가니 고기를 굽는 연기가 가득합니다.
우리는 저녁은 시로키야등 현대적인 체인 이자카야에 들어가 맥주에다가 안주로 닭고기나
만두며 김밥에 소바같은 것을 시켜서 안주로 저녁을 떼우곤 하는데..... 오늘 들른
동네 이자카야는 음식점으로 술집이라기 보다는 식당인데 돼지고기나 닭고기등
꼬치를 구워서 만두나 밥을 먹는 곳으로 스무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 들어차 있습니다.
평소 일본 사람들은 조용한 편이지만 오늘은 꼬치고기를 구워 술을 먹는관계로 취기가 오른지 왁자지껄하니
시끄러운데 우리는 돼지고기와 닭고기 꼬치에다가 만두에 나마비루(생맥주)를 시키는데 서너
테이블에 한명 정도가 담배를 피우는데 조금후 끄고 나면 옆 다른 테이블에서 다른 사람이 담배를 피웁니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 후에 텔레비전을 트니 중국영화가 상영되는데 말을 모르니 내용이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국경에서 침략자로 부터 외로운 성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전투 장면이 이어집니다.
다른 채널로 돌리니... 이게 뭐야? 익숙한 장면이 나오니 몇년 전에 이누야마에서 하루 묵을 때 텔레비전
에서 방영되었던 그 연속극으로 백제 무령왕 의 얘기인 MBC 연속극 "수백향" 을 방영중입니다.
TV 연속극 수백향의 줄거리는 백제 문주왕이 귀족 해씨에게 시해당한 후에 아들 삼근왕도 불과 2년만에 귀족
진씨들에게 살해되니 유랴쿠천황은(일왕) 은 일본에서 곤지왕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란 어린 왕자를 불러
머리를 쓰담으며 격려하고 왜군 500명의 호위를 붙여 한반도로 내보내 479년에 왕위에 오르니 동성왕 입니다.
왕위에 오른지 22년후인 501년 12월에 동성왕이 사냥 중에 가림성 성주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3번째로 시해당하자 역시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무령이 백제 왕위에 오르는데 그는 개로왕
의 아들이라는 설과 일본에 파견된 곤지왕자의 장남이라는 설 2가지가 있는데 아버지 곤지
를 따라 한반도로 나왔으며 아버지는 삼근왕이 진씨들에게 죽을 때 함께 살해된 것으로 보입니다.
무령은 왕위에 오른후 군대를 보내 백가가 성주로 있던 가림성을 공격해 함락하는데, 그전에 좌평 륭(무령왕)
은 백가의 딸 채화 와 연인사이 였으니 성이 함락될때 무령의 씨를 잉태한 채화는 혼절하고 노비 구천
이 구해 멀리 가야로 달아나서는 딸인 설란(수백향) 을 낳는데 그렇게 은둔 생활에서 노비와 부부가 됩니다.
둘째딸 설희를 놓고 살다 동성왕의 아들 진무가 보낸 자객의 습격으로 죽으면서 채화는 이삭처럼 둘째를
첫째인줄 잘못 알고 출생의 비밀을 털어 놓으니 동생 채화는 언니를 따돌리고 백제 왕궁에 나아가
무령이 채화에게 준 비녀를 증거물로 자신이 “수백향”이라고 말해 공주가 되어 호사를 누리는데
설란도 상경해서 자신의 출생 비밀을 모른채 비문의 사람이 되고 태자 명농(성왕) 과 사랑에 빠집니다.
세월이 흐르고 설란은 자신이 수백향 임을 알게되자 설희에게 분노하면서도
오누이인 명농(성왕) 과 사랑이 이루어질수 없음 을 비통해 하는데....
설희 는 진무의 연정을 받는등 몇번 고비 끝에 결국 사실은 밝혀지고 설란 은 수백향
공주로 복귀하니 무령왕은 두 태자가 서로 바뀌었으니 사랑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는 죽는데.... 평화로운 세상을 연다는 수백향 꽃 이 핍니다.
그런데 수백향 은 일본 제24대 천황(일왕) 닌켄(인현) 의 공주였던
실제 인물을 백제 무녕왕의 공주로 설정했다고도 말합니다.
수백향이란 인물은 일본 닌켄 덴노의 딸인 타시라카 황녀인데 이 여인을 백제 무령왕의 딸이라
고 설정하여 역사왜곡 논란이 일자 MBC 제작진은 기발하게도 수백향의 한자를 ‘手白香’
에서 ‘守白香’ 으로 바꾸었으며.... 일부 옹호자들은 수백향은 가상의 인물이라고
변호했으나 제작 발표회에서 이미 수백향을 '역사적 인물' 로 표현해 버렸으니 이를 어쩐다?
수백향이 백제의 공주 라는 근거는 역사학자 문정창의 저서 “일본 상고사” 에 제시된 가설에
불과하고 본인도 이후 저술한 자신의 책에서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네요? 또 가능성은 적지만 수백향은 백제 공주로 일본 왕실에 출가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구려 침공에 시달리던 461년 백제 개로왕은 둘째 아들(일본서기에는 동생?) 곤지 에게
임신한 후궁을 내어주며 후일을 위해 일본으로 도피 시키는데 바다를 건너는 중에
후궁은 태기 를 느껴 규슈 가라쓰의 가카라시마 (加唐島 가당도) 동굴에서 왕자
를 출산하니 섬에서 태어났다고 섬왕 즉 시마(사마) 로 부르니 바로 백제 25대 무령왕 입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수도 한성(서울)을 침범해 개로왕을 죽이자 신라에서 구원병 1만을 이끌고 온
아들 문주왕이 남쪽 공주에서 왕위에 오르나 불과 2년만에 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됩니다.
그러자 왕위을 이어받은 13세의 삼근왕 은 허수아비에 불과한지라 실세 해구를 병관좌평
에 임명하는데 교만해진 "해구가 대두성에서 반란" 을 일으키자..... 왕은 진남과
진로 등을 시켜서 토벌하나 세력을 잡은 "진씨" 세력들은 욕심으로 삼근왕을 시해 합니다.
477년년 15년간 일본 오사카 동쪽 가와치 아스카에 머물다가 귀국한 개로왕의 차남(일본서기는 동생)
곤지는 내신좌평 으로 왕을 보좌하고 있었는데 이때 삼근왕과 함께 진씨 세력들에게 피살 됩니다.
곤지가 왜국에서 오래 살다가 귀국할 때 장남 무령왕 을 대동했으나... 진씨들은 궂이
번거롭게 멀리 일본에 살고있는 곤지의 차남 어린 동성 을 왕으로 세우니 동성왕
은 규슈 쓰쿠시(후쿠오카) 에서 왜병 500명의 호위 를 받고 나와 백제 왕위에 오릅니다.
해씨의 반란을 진압한 진씨 들이 권력을 잡았으니 이제 백제 왕위에 국내로 나와 있던
형인 무령왕 대신에 동생으로 나이가 어린데다가 왜국에서 태어나 살았던지라
국내 사정에 어두운 어린 동성왕 을 궂이 왜국에서 모셔와서 옹립한 이유는 뻔합니다?
순조가 죽자 조선 조정이 강화도로 유배된 왕손의 후손으로 농꾼인 철종을 옹립한 것이나
조대비가 흥선 대원군의 장자로 영특한데다가 성년에 가까운 이재면을 제쳐두고
12살 철부지 어린아이 고종 을 옹립한 것과 같은 이치로 권력을 농단 하기 위함이지요?
동성왕은 중국 역사서 남제서와 자치통감 및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488년~490년에 위나라를 격퇴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와 싸운 것으로 백제 동성왕이 올린 표문에 험윤(獫狁)과
위노(魏虜) 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후대의 다른 역사가들이 이를 북위(北魏) 로 오해한 것 같습니다?
동성왕은 남제 에 표문을 바쳐서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등에게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중원을 북위에게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 건강에 도읍한 남제에서는 이를 허락
하며 동성왕의 충성이 가상하다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에 봉합니다.
그러면 고구려군에 밀려 공주로 수도를 옮긴 백제에서는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3대가 모두
국내의 반대파에게 연속해서 암살된 것인데 곤지(개로왕?) 의 아들로 이복형 무령왕이
동성왕을 이어 백제 왕위에 오른 후에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고 고구려 수곡성을 공격합니다.
1145년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에 곤지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고 무령왕 또한 동성왕
의 아들 이라고 적혀있는데 하지만 삼국사기 보다 425년이나 앞서 720년에
씌어진 일본서기에는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며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 으로 나옵니다.
무령왕 은 김부식의 기록대로 동성왕의 아들 이냐? 아님 일본서기 처럼 이복형 이냐?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서기는 조작된 사실이 많으니 삼국사기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1971년 충남 공주시 에서 한국 고고학계를 뒤흔드는 일대 사건 이 일어나니
송산리 고분 에서 벽돌무덤을 발견했는데 "지석에는 글자" 들이 새겨져 있었읍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 사마 斯麻 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의 본명이고 영동대장군은 무령왕이 521년에 중국 양나라의 황제 무제로 부터 책봉받은
관직이라 무령왕의 무덤 이 확실한 것이니 일본서기의 기록 이 정확한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부장품은 108종 2,906점인데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만 12점에 달할 정도니 참으로 대단한
발굴이었으니 무령왕릉은 백제식이 아니라 벽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든 중국 양나라
식이었으며 무령왕과 왕비의 시신을 담은 관 은 "일본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금송" 이라!!!
출토된 지석에 무령왕 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하는데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고 일본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제로 부터 “사지절도독 백제군사 영동대장군” 에 책봉 됩니다.
극에서 무령왕의 태자로 나오는 설란의 연인 명농 은 그후 聖王(성왕) 으로 554년에 신라
를 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 하는데.... 관산성 管山城 은 고리산성 古利山城,
혹은 환산성 環山城 이라고도 하며 일본서기에는 함산성 函山城 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고대에 한국과 일본은 자기 고유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말로만 전해지던 城(성)
이름을 훗날 여러 사람들이 시기를 달리 해서 각자 한자로 옮기면서 한자
자체는 조금 다른 것을 썼지만 관산, 환산, 함산은 얼핏 봐도 같은 발음인가 합니다?
왕이 태자(위덕왕)가 이끄는 백제군(대가야군과 왜군 포함) 3만이 승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나머지 격려차 가다가 매복중인 신라군에 잡힌 곳은 충청북도 옥천군 월전리 구진벼루 입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당해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 :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 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720년 편찬된 일본서기 흠명기 15년조 : 일본서기는 백제왕이 사신을 보내 선물을 전한후 왜병을 보내달라
고 하니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領)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 을
보내 자(自)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병사 죽사(竹) 물부(勿部) 막기위사기(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신라가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를 설치한 것은 서기 553년 7월로 이미 그 한달 전인 6월에 왜가 백제로
지원군을 보냈으며, 553년 12월 9일에 신라의 함산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은 시작되었으니
그렇다면 관산성 전투는 553년 12월에 시작해서 그 다음해인 554년 7월에 끝난 장기전에 속하는
전쟁입니다(일본서기에 나오는 함산성 (函山城 관산성)은 옥천의 서산성과 삼양리토성으로 비정(比定)함)
신라는 명왕(明王 성왕) 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가 아뢰길
“고도는 천한 노(奴)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奴)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하였다
(다른 기록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 주어 베게 했다라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수는 없다.” 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기록에는 신라가 명왕의 두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추어 백제에 보냈다 한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이라 이름한다”라 하였다.
성왕 전사 이후 신라 백제 전쟁의 급반전되는데, 성왕이 신라군의 매복으로 참수된 사실이
알려지자 성치산성 주둔 성왕 휘하의 백제군은 필사적으로 신라 관산성을 총공격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러나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한 신라군의 방어막을 백제는 돌파하지 못한다.
백제 기마군이 돌격을 감행하다가 저지된 그 자리는 말무덤고개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 왜,
가야 혼성군으로 편성된 성왕 휘하의 백제군(그전까지 전투 지휘는 태자로 훗날 위덕왕)
은 아무래도 성왕의 전사로 말미암아 구심점을 상실한 가운데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
했다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으니 결과도 말무덤터가 전하는 그대로 백제의 패배로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태자 여창(위덕왕)의 백제 연합군이 신라군에 이미 포위된 상태인걸 전혀 모르고
백제군이 크게 이기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던지라 근처에 신라군이 있을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한채 50명의 호위병만 거느리고 찾아가다가 매복에 걸려 허무한 죽음을 맞은 어이없는 상황 입니다.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은 3만 병력을 잃을 만큼 참패를 기록했으며 이후 신라는 한반도 남부
주도권을 잡고 한민족의 본류를 이루게 되는 역사적 대 사건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서나 교과서는 관산성
전투를 달랑 한 문장조차 기록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일본서기를 인용하기 싫은 이유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나라 호류지 (法隆寺) 몽전에는 동양의 비너스로 불리는 백제관음 과 함께.... 백제 위덕왕 이 전사한 부친
성왕의 모습을 녹나무에 조각해 금박을 입힌 일본 국보 “구세관음상 (救世觀音像)” 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위덕왕의 아들 아좌태자 는 추고천황(일왕) 597년 아스카데라(飛鳥寺) 준공 축하 사절단으로
8척 배로 일본으로 건너와 쇼토쿠태자의 스승 이 되는데 호류사에 전해오던 백제
아좌태자(阿佐太子) 가 그린 쇼토쿠 태자상 은 궁내청 제실(帝室) 박물관에 보관중 입니다.
아좌 태자는‘쇼토쿠 태자와 두 왕자상’초상화를 그렸다고 하는데 불교의 영향을 받은
삼존불 형식의 초상화는 태자가 가운데에 있고, 좌우에 두 왕자를 태자 보다는 작게
배치한 구성이니 오른쪽이 장남 야마시로노오에 왕이고 왼쪽이 에구리 왕이라고 합니다.
오사카 동쪽 아스카 주민 들은 서기 461년 일본에 건너간 백제 개로왕의 동생 이자 동성
, 무령왕의 부친 곤지왕의 제사 를 1550 여년간 아스카베 신사 에서 지내왔으니
2011년에 나라현 아스카 주민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곤지왕이 누구인지 확인하고
그 뿌리를 찾으려 방한해 남한산성 숭렬전의 온조왕 위패에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오사카의 양형은 박사를 주축으로 “곤지대왕” 소설을 쓴 정재수 작가를 포함해
"곤지왕 네트워크" 가 형성되어 제2회 심포지엄에는 700명이 참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무령왕의 장남 순타태자의 8대손 화을계의 딸 화신립이 일본 간무 천황의 생모 라는사실은 2,001년 아키히토
일왕 (천황)이 고백한 바 있으니... 아키히토는 나루히토 왕세자에게 천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