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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군사저널 2018년 8월호
박경석 군사논단[5]
존폐 위기의 국군기무사령부
-개혁방안을 생각한다-
국군기무사령부의 역사는 길다. 1950년 10월 21일 육군특무부대로 창설된 이래 육군방첩부대, 육군보안사령부, 국군보안사령부를 거쳐 오늘의 국군기무사령부(이후 기무사로 호칭)로 68년의 세월을 거쳤다. 기무사의 명칭이 바뀔 때마다 그때그때 큰 소용돌이에 빠져 그 돌파구 마련을 위해 개명으로 화장을 했을 뿐이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기무사는 늘 '뜨거운 감자'가 되어 큰 홍역을 치러야 했다. 언제나 기무사는 많은 물의를 일으키는 근원으로 작용하면서 국민들에게는 사악하고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갔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사건을 선정하려면 전두환 육군보안사령관의 12.12군사반란을 들수 있다. 그 사건 외에도 세상이 놀랄만한 사건을 열거하려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다. 자, 과거를 되돌아보며 개혁방안을 찾아보자.
나와 기무사는 깊고 좋지 않은 연고가 있다. 내 친형 박영석 준장이 박정희 정권 초기 기무사의 전신인 육군방첩부대장을 지낼 때 나는 육군소령으로 1사단 15연대 대대장으로 철원지역 GOP근무를 하고 있었다. 형은 육사5기생으로 육사 후보생 중대장 박정희 대위 밑에서 후보생으로 있었다. 후보생 시절 성실 충직함을 인정 받아 훗날 육군방첩부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실세 육사8기생 윤필용 준장에게 밀려났고 그후 그들의 간교한 술책에 희생돼 형은 육군준장의 군복을 벗어야 했다.
이 이야기는 형이 육군방첩부대장으로 행세할 때 일이다. 형은 가끔 나를 서울 종로구 옥인동 부대장실로 불러 호통을 쳤다. 시시콜콜한 내용이 방첩대 존안에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형과 다투었다. "방첩부대가 방첩업무는 뒤켠에 두고 전방에서 적을 경계하는 장교의 술 마시는 것, 술먹고 헌병 때린 것 사생활 뒤지는 것이 임무요?" 이렇듯 기무사 요원은 야전에서 근무하는 장병을 괴롭히는 일이 한도를 넘고 있었다. 그때마다 야전에서 근무하는 장교들은 기무사 요원에게 대접해야 했다. 그 사안을 일일이 여기 밝힐 수 없는 것은 너무나 치사한 사연들이 많기 때문이다. 선거 때가 되면 박정희정권을 위한 지나친 작태 또한 젊은 장병 누구나 분노와 격분을 참아야 했다. 만일 입밖에 내어 기무사 요원에게 대들면 그자의 군대생활은 황혼기를 맞아야 했다.
다음으로 기무사와 나와의 관계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내가 생명보다 소중했던 육군을 기무사 때문에 떠나야 했던 사연이므로 좀 소상하게 밝히고자 한다. 더구나 이 사건 경과는 기무사령관의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 행사의 전형이기 때문에 기무사 개혁에 소중한 참고 자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여기에 올렸다.
나는 육군대령의 모든 직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대령과장으로 부임했다. 장군진급 1차년도에 최고 평정으로 심사에 올라갔으나 보기 좋게 낙방했다.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심사 막판에 정치군인 계열의 김성배 대령과 바꿔치기 했다는 소식에 접했다. 2차년도, 3차년도 모두 정치군인 계열로 대체돼 나는 마지막 대령 8년차에 겨우 구제되어 별을 달았다. 그러나 별을 달자마자 최 전방 DMZ 철원땅굴 탐색부대장으로 유배? 되었다.
장군의 DMZ 상주근무는 그때도 처음이고 그 이후에도 내 경우가 유일하다. 나는 6개월간 DMZ내에서 숙식하면서 눈물을 흘려가며 땅굴 탐색임무에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 철원땅굴 공로로 오히려 보국훈장 천수장을 받았다. 무공훈장이 많다고 나를 질시하던 정치군인에게 한방 먹인 꼴이었다.
1975년 여름, DMZ 상주근무를 마감한 후 제1군단 참모장으로 새 보직을 받았다. 내가 1사단 12연대장 시절 미 2사단의 수도권 요충지 문산 북방의 GOP를 인수, 성공적인 임무수행이 평가된 공로로 1군단 참모장으로 보직되었다고 군단장이 말해 주었다.
1976년 수도권 북방 방위책임을 맡고 있던 제1군단은 양봉직 중장이 군단장이었다. 당시 군단장의 친형이 양순직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는데 박정희의 3선 개헌을 반대하고 나서자 박정희의 눈밖에 났다. 이에 착안한 육군보안사령관 진종채 소장은 제1군단장 양봉직 축출을 착안했다.
당시 육사8기생 군단장은 충청도 출신의 이재전 중장과 강원도 출신의 이범준 중장이었기 때문에 영남권 8기생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군단장을 거쳐야 군사령관 참모총장으로 이어지는 군권을 장악할 수 있는데 8기생 영남 출신이 자칫 전멸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따라서 영남 출신의 진종채 소장과 이희성 소장의 음모가 시작되었다. 이참에 양봉직 제1군단장을 축출하고 그 자리에 이희성이 가고 진종채는 사단급인 육군보안사령부를 군단급으로 격상해 해군과 공군의 보안 기능을 흡수 국군보안사령부를 만들면 영남권 두 군단장급이 확보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강직하고 그 낌새를 눈치 채고 있던 양봉직 군단장이 약점을 노출할 리가 없었다. 그러자 진종채는 최후 방책으로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을 착복했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허위 보고해 단 하루만에 양봉직 군단장 축출에 성공 하였다. 이어서 진종채 소장은 육군보안사령부를 육해공군 통합해 군단급으로 격상시켜 중장으로 진급 했고 이희성은 1군단장에 취임함으로써 중장으로 진급, 이로써 두 명의 8기생 영남권 군단장직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양봉직 군단장이 방위성금을 착복했다는 내막은 다음과 같다. 제1군단 직접지원 공병여단장 황오연 준장은 군단장 양봉직 중장에게 당시의 관례에 따라 3천만원을 건네자 "내가 부대 운영을 하는 것이 아니니 참모장 박익주 장군과 상의하라"고 하면서 공병 여단장을 돌려 보냈다. 당시 군 예산이 절대 부족으로 일부 부대운영비를 공병, 병참 등에서 조달하는 것이 통상적인 관례였다. 진종채는 이런 관례를 노린 것이다.
그후 3천만원은 군단 참모장 박익주 준장에게 주어져 부대 운영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박익주 준장 후임으로 군단에 갔을 때는 3백여 만원이 통장에 남아 있었고 나는 그 통장을 인수했다.
그런데 내가 군단 참모장으로 부임해서 몇 달이 지나 느닷없이 양봉직 군단장을 방위성금 착복 죄명으로 파면시키니 얼마나 황당한 사건인가. 공병여단장 황오연 준장이 박익주 준장에게 건낸 3천만원은 공병 건설자금으로 전용된 방위성금이었다.
이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한 두달이 지나자 양봉직의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진종채 국군보안사령관은 나에게 "할 이야가 있으니 사령관실로 와달라"는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당당히 각오하고 3백여 만원의 잔고가 있는 통장을 가지고 보안사령관실로 들어섰다. 진종채 보안사령관은 어색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건넸다.
"박장군은 전도가 유망하니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그 문제의 3천만원을 양봉직이 착복한 것으로 알고 있으라. 대신 그 잔금 통장은 박 장군이 임의로 사용해도 좋다"
나는 그 말에 피가 솟아오르는 분노가 치밀어 왔다.
"양봉직 군단장이 단 한푼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제가 어찌 한 나라의 장군으로써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돈도 필요 없고 거짓말도 못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잔금 통장을 탁자에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보안사령관실을 나왔다. 나는 이때 이제 군복을 벗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는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리 속을 감쌌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12.12군사반란이 일어났고 전두환이 정권을 찬탈하자 이희성 중장이 대장으로 진급 육군참모총장으로 화려하게 군림했다. 그런데 뜻밖에 당국은 나에 대해 특별한 보상책으로 소장 직위인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으로 승격 발령했다. 이어서 당연직 육군공적심사위원장인 나에게 광주 사태 유공자에게 무공훈장을 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광주사태 폭동진압의 무공을 역사에 각인하겠다는 음모가 숨어 있다고 판단한 나는 정치군인편에 합류할 수 없음을 마음으로 정하고 1981년 7월 31일 8년차 육군준장의 군복을 벗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전업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내가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한 내면에는 요지경 속보다 더 황당한 실태를 작품의 소재로 활용해 진실을 밝혀 정의를 되찾아야 되겠다는 의지가 숨어 있었다.
군복을 벗을 무렵 나와 함께 별 하나를 달았던 정치군인들은 별 넷을 달고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 이들 모두 보안사령관 출신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7월 10일 국군기무사령부가 지난 해 3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선고 전 위수령과 계엄관련 문건을 작성한 것과 관련 "독립 수사단으로 하여금 신속하고 공정하게 수사케 하라"고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지시했다. 군 관련 사건으로 독립 수사단이 구성되는 경우는 창군 이래 처음이다.
더구나 인도를 국빈 방문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 현지에서 사건 보고를 받은 뒤 독립 수사단 구성을 지시한 점은 문재인 대통령이 이 사안을 얼마나 중시했는지를 알게 한다.
기무사령부의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은 작년 3월 당시 기무사령부에서 작성해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한민구 국방장관에게 보고한 문건이다. 이 문건은 헌법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선포 이후 국가 안보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응하기 위해 작성되었다고 당국은 밝히고 있다.
기무사 문건 주요 내용에는 탄핵 결정 또는 기각 때 대규모 폭력시위에 대비해 국가안보 위기시 군이 준비해야 할 계획임을 명시하면서 위수령과 계엄령 시행 요건 절차를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언론에 발표된 내용만으로 결정적인 판단을 하기에 불충분하다. 그러나 무장 소요나 폭동이 아닌 평화적 촛불시위에 한정된 상황하에서 위수령과 계엄령선포 방식을 예단한 사실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더구나 구체적인 전투 장비 동원과 병력 규모 등을 명시한 것은 그 의도에 의심을 가지기에 충분하다.
조사 결과에 따라 밝혀지겠지만 박근혜 옹위를 위한 내란 음모죄가 성립될 수 있다는 정계와 시민단체 일각의 주장에도 신경이 쓰이는 국면이다.
지금 국민의 상당수가 기무사에 대해 극도로 나쁜 감정을 노출하고 있다. 근간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거의 과반수가 기무사 해체에 찬성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기무사에 대한 개혁은 꼭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당국도 이런 국민의 여론에 부응해 개혁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기무사 조직과 운영 문제는 역대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역대 대통령이 그 폐해를 알고 있으면서도 명쾌하게 결단을 못내리고 있었다. 자신의 안전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서슬이 퍼렇게 하나회를 척결하고 기무사 기능 조종에 칼을 댔지만 그 기개가 1년만에 무너졌다. 부임초 기무사령관과 독대를 않겠다고 하면서 기무사령관 직급을 중장에서 소장으로 낮추었지만 불과 1년만에 슬그머니 중장으로 복귀시켰다.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근래 기무사령부의 조직표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 기무사령부 조직이 사단급과 군단급의 중간 기능으로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군사령부급에 도달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육군준장 시절 3군사령부에서 기획처장을 거쳐 인사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3군사령부 장군 수가 8명이었다. 그런데 기무사의 장군수가 그동안 9명으로 당시의 군사령부 장군수를 넘은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한 자유 세계에 유례가 없는 기현상이다. 군단도 참모장 외에 모든 참모가 대령급이다.
기무사를 개혁하려려면 사령관, 참모장(부사령관 겸직) 2명의 장군외에 휘하 부서장은 대령으로 조종해야 한다. 9명의 장군들이 방첩 업무 외에 무슨 일을 하기에 그렇게 비대해졌단 말인가.
다음으로 통상 60단위 기무부대로 통칭되는 서울특별시를 포함해 광역 시.도 11곳에 설치된 기무부대를 해체해야 한다. 이어서 참모 부서의 수를 반으로 통폐합해야 한다. 조직을 과감하게 축소하지 않고 개혁책을 찾는 일은 탁상공론이다. 기무사 개혁은 의지만 확고하다면 한나절이면 완결될 수 있다.
불순한 탐욕은 조직의 규모를 초월한 높은 계급 사회에서 성장한다. 이번 파동은 기무사 기구가 너무 비대해져 기무사 책임한계를 뛰어넘어 합참의 영역까지 침범한 결정적인 월권행위 결과다. 기무사 조직 구조를 과감하게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 지금 한창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는 '위수령, 계엄령 파동'은 언제나 다시 되풀이 될 수 있다. 아니 더 무서운 결과로 발전 할지도 모른다.
알림: 이 글에는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모두 실명이며 생존 인물도 있다.
이 글은 진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므로 작가인 내가 무한 책임을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