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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관련자
1
이따금 몸이 자기 것 같지 않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박중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뺨을 어루만졌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몸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멀찍이서 감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 상상할 여유는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특보-여고생 연쇄살인 용의자 김준영, 긴급 체포]
화면의 3분의 일을 커다랗게 쓰인 문구가 가리고 있었다. 영상은 무척 혼잡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있고, 카메라는 힘겹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간다. 이어서 시점이 바뀐다. 경찰서 건너편 건물 옥상 위에서 안정적인 구도로 입구를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자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쉬워졌다. 달이 중천에 떠 있을 만큼 늦은 시각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화면인데도 불구하고 취재진들이 밝혀둔 조명의 불빛 때문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이곳은 금정경찰서 앞입니다. 경찰은 최근 발생한 여고생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김준영을 긴급 체포했습니다. 아, 지금 용의자가 서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급박한 목소리가 화면과 함께 풍부한 현장감을 만들어냈다. 중현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일거야. 분명 거짓말이라고.
들어오는 차량을 피해서 사람들이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경찰서 소속의 표시가 되어 있는 승합차의 문이 열렸다. 재킷을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형사들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이어 팔을 붙잡힌 용의자가 끌려나오고 있었다.
중현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용의자가 체포된 현 상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걸어가는 용의자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준영의 그 특유의 여자처럼 긴 머리는 형사들에게 거칠게 다뤄졌기 때문인지 많이 헝클어진 것 같았다. 머리카락에 이따금 얼굴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4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강간한 극악무도한 살인범의 이미지에 걸맞은 인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스튜디오에 있는 여자 아나운서도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는 성난 군중들이 섞여 있었다. 사실 기자들도 분별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사들이 거칠게 뿌리치는 것에 굴하지 않고 준영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누군가가 “죽어도 싼 새끼야!”라고 격하게 외치는 소리가 방송을 통해 그대로 나갔다. 사람들의 분노가 그 자리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흥분과 떨림. 그 모든 감정이 중현의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러나, 그러한 소용돌이의 와중에도 이질적인 요소는 존재하고 있었다. 현재 사태의 주역이자 가장 유력한 사건 관련자로 경찰의 수사망에 잡힌 김준영은 용의자로써 체포되었다. 보충 자막이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보태주고 있었다.
[용의자의 자택에서 피해자들을 살해하는데 사용된 노끈 발견]
준영은 겉모습이 흐트러지기는 했으나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흉악범들이 체포되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는 했다. 그런 인간들은 대체로 죄책감 때문인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준영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당당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시선을 똑바로 정면에 두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더 분노할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빠르게 돌아가더니 울음을 터트리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붙잡았다. 아나운서가 설명한다. 살해된 피해자들 중 한사람의 어머니라고. 용의자가 떳떳하게 경찰서로 걸어가는 사진이 ‘뻔뻔하다’라는 수식어와 함께 기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현에게는 뻔히 보였다.
이어서 리포터의 설명은 계속된다. 김준영은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용의선상에 오른 뒤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어 긴급히 체포 영장이 신청되었다. 구속된 용의자는 수사팀에 의해 철저하게 심문을 받고 범인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범인이라고 100프로 확실시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방송국의 모든 사람들은 김준영이 99.9프로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용의자로 체포된 시점에서 이미 그는 전 국민들에게 여자들을 살해한 잔인한 살인마로 낙인이 찍혀버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찰은 용의자와 피해자들 간의 관계와 알리바이 등을 중심으로 조사를 해나갈 방침입니다. 자세한 소식이 들어오는 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중현은 텔레비전을 껐다.
“그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화면 속의 사람들과는 다른 심정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준영의 행동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무슨 수를 써야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중현은 컴퓨터를 켰다. 그는 알고 있었다. 범인이 김준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15년 전, 자신의 누나를 죽인 사람도 김준영이 아니라는 것을. 왜냐하면 범인은 바로 이 모니터 너머에 있으니까.
2
한 달 전.
아침에 일어난 박중현은 이를 닦으며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빠르고 익숙한 눈길로 메일과 뉴스를 적당히 훑어본 후 거실로 내려간다. 따뜻한 밥상의 냄새가 났다..
“어머, 벌써 일어난 거니?”
어머니가 부엌에서 몸을 내밀고 물어본다. 중현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몇 시에 왔어?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술 좀 먹어서 기억이 잘 안나. 아마도 두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먹고 살려고 좋아서 하는 일인걸.”
중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식탁에 앉았다. 건너편에는 아버지가 신문을 펼쳐들고 있다. 중현의 기사는 실리지 않은, K일보의 오늘 날짜였다. 중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신문을 접어서 내려놓으며 묻는다.
“요즘 일은 잘 되가?”
“그럭저럭요.” 중현은 젓가락으로 밥을 입에 집어넣으면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중현은 묵묵히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의 옆에 놓여있는 신문지를 보았다.
신문사에 입사한지 어느덧 반년 가까이 되었다. 경찰 기자로써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일에도 슬슬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지 6년. 수도권 대학의 신문방송과를 막 졸업하고 난 뒤엔 누구나 꿈꾸는 일류 언론사를 지망했지만 현실에서 꿈이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이곳저곳을 진전하며 프리랜서로 삼류잡지에 투고 기사를 쓰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불안정하게 먹고 살다가 고교 시절 선배의 추천으로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와 부산에 기반을 둔 언론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K일보는 판매 부수가 적지 않은 편이었지만 대형 메이저급 언론에 비하면 지명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정식으로 신문사에 기자로써 입사한 것이 처음이라 당연한 듯이 경찰서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중현의 실망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온갖 사건들을 접하면서 사회의 가장 새카만 부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간상에 대한 발견들이 그의 기자 감성을 콕콕 찔렀다. 늘 마감에 쫓기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피곤하지만 즐겁지 않은 적은 없었다. 자신이 쓴 기사가 사회면에 실리는 일 만큼 보람찬 것이 없었다.
기자 일을 시작하면서 중현은 인터넷에 블로그를 개설했다. [K일보 기자 박중현] 이라는 서브타이틀이 방문자를 맞이한다. 가장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강력 범죄들에 대한 자료들이 제법 방대하게 정리되어 있다. 자료들의 출처로는 언론들의 보도도 있지만, 가능한 만큼 그가 직접 조사를 한 사실들도 있으며, 포스트마다 그가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추론을 덧붙인 이야기들도 포함되어 있다. 물론 사실을 보도해야 할 기자로써 지켜야할 선은 넘지 않는다. 살인, 강도, 유괴, 성범죄 등등 범죄에 대해서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스로써 그의 블로그는 인터넷상에서 점점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같은 경찰 기자들은 물론, 경찰 관계자에서부터 미스터리 팬과 심지어는 소설과 영화를 쓰는 작가들에 이르기 까지. 블로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층도 다양했다.
이는 박중현이라는 한 사람의 기자가 자신의 그럴듯한 경력을 작성해나가는 과정의 하나이기도 했지만, 그의 개인적인 흥미를 채우는 작업이기도 했다. 경찰 기자로 일하면서 그는 강력 범죄를 취재하는 일이 자신의 천성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연수가 쌓여서 좀 더 편하게 일할 수 있는 부로 이동할 수 있게 되더라도 왠지 경찰 기자 일을 계속 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물론 부모님은 좋아할 것 같지 않지만.
“너도 이제 서른 살이 넘었고,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니. 하루빨리 좀 더 편하고 안정적인 일을 맡아서 하는 게 좋을 거다.”
서른으로부터 2년이 흐른 지금. 부모님은 ‘좀 더 편하고 안정적인 일’이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지만, ‘결혼을 해야 되지 않겠니’라는 말은 입에 달고 산다. 결혼은 기사를 쓰는 일과는 달라서 마감이 없기는 하지만, 한번 그 시기를 놓치게 되면 평생 힘든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중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급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은 기자 일이 너무 바쁘기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뿐이다.
기사가 실리지 않은 신문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하는 일의 힘겨운 점들이 떠올랐다. 중현은 괜히 거칠게 숟가락을 휘저었다. 아버지는 어느새 숟가락을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물을 갔다 달라고 하고 있었따.
일을 하면서 가장 서운한 순간은 열심히 쓴 기사가 퇴짜를 맞을 때였다. 신문의 편집방향, 할당된 분량, 기사 내용의 사회적 중요성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 기사가 실리게 될지 실리지 않을지가 결정이 된다. 중현도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따금 편집 담당자와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다. 쓴 소리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퇴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럴 때마다 애써 다음번에는 잘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일 뿐이었다.
최근에는 일종의 슬럼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흥미로운 기삿거리가 없어서인지 알 수 없지만 중현의 기사가 채택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그래서 중현은 요즘 들어서 피로를 배로 느끼고 있다.
무력감은 누구나 느끼게 되는 거라고 친한 선배 기자인 이영훈이 말해준 적이 있다.
“그럴 땐 큰 건을 하나 빵 하고 터트리는 게 좋지.”
“큰 건이라면……. 특종 말인가요?”
“그래, 특종. 바로 그거 말이야.”
기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 특종 기사를 써서 온 세상의 이목을 자신이 쓴 기사에 집중시키는 것. 그 뒤에는 명성이라는 이름의 빛이 뒤따라온다.
중현도 당연히 그것을 바라고 원했다. 쉴 틈도 없이 열심히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것도, 블로그에 강력 범죄 자료를 모으는 것도, 모두 그것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특종을 쓰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것. 이는 객관적이고 사실만을 전달하는 기사를 쓰는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 아닐까.
좀 더 멋진 기사를 쓰는 것. 중현은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입지가 탄탄해지면, 그땐 원하는 일을 더욱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결혼도.
“그러고 보니 너, 기억하고 있냐.”
반찬을 씹어 넘기던 중현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뭘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 말이다.”
“오늘은 11월 1일이죠.” 그렇게 말하다가 중현은 앗, 하고 입에 든 것을 꿀꺽 삼켰다. “설마 오늘이…….”
어머니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중현은 보았다.
“그래. 오늘이 네 누나가 죽은 날이다.”
그날 중현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팀장에게 오후 3시도 되지 않은 시간에 조퇴를 하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누나의 일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지하철로 40분 가까이 타고 가서 내렸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기는 했지만 혼자 다녀오라는 말을 들었다. 언덕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묘지들이 모여 있는 공원이 나온다. 중현은 꽃을 사서 누나의 산소로 향했다. 산소는 변함없이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누나의 이름이 적힌 묘비에 도착하고 중현은 의아해했다. 누군가가 먼저 다녀갔는지 하얀 꽃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부모님이 먼저 다녀간 것 같지는 않았다. 누나를 아직 잊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일까. 중현은 말없이 손에 들려있던 화환을 내려놓았다.
금방이라도 투명해져버릴 것 같은 하얀 꽃잎과, 묘비에 적힌 누나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과거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중현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진학해서 서울로 올라간 뒤엔 한 번도 누나의 무덤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올해, 중현은 부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거의 15년 만에 다시 누나가 잠든 곳으로 돌아왔다.
박민아, 라는 세 글자에서 견딜 수 없는 무게감이 느껴졌다. 1살 연상의 누나는 열여덟 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5년 전이었다. 그녀의 몸은 무덤 속에 잠들었지만, 영혼이 편하게 쉴 수 있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현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 뿐인 피붙이였던 누나는 살해당했다. 시체는 개천의 하류 부근에 무성하게 자란 풀숲 사이로 떠내려 와 있었다. 목을 졸려서 교살당한 그녀는 실오라기 한 점 걸치고 있지 않았다. 부검을 한 결과, 죽기 전에 강간을 당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범인의 정액은 발견되지 않았다.
대대적인 수색이 온천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지하철 1호선의 일부 구간은 온천천의 바로 위를 나란하게 통과한다. 부산대앞역과 장전동역 사이에 있는 산책로 옆에서 누나가 입고 있었던 교복이 발견되었다. 코트는 멀쩡했지만 교복 와이셔츠는 단추가 거칠게 뜯겨나가져 있었다. 속옷도 모두 함께 있었지만 그녀가 입었던 치마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옷가지가 버려져 있던 장소는 그녀가 늘 하교 시에 다니던 길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곳이었다. 사망 시각도 오후 10시에서 11시 사이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녀가 학교에서 자율학습을 마친 후 돌아오던 생활 사이클과 맞아 떨어졌다. 경찰은 그 부근이 범행 현장이라고 보고 탐문 조사를 행했지만 이렇다 할 단서는 전혀 얻지 못하고, 수사는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 피해자가 나왔다. 마찬가지로 여고생이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됐다. 다만 그 경우는 첫 번째와는 다르게, 옷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누나의 시체나 옷가지가 발견된 장소들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서면의 한 골목길 안이었다. 살해당한 방식과 시체의 상태 등이 유사점을 보였기 때문에 경찰은 누나의 사건과 같은 범인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별 다른 수확은 없었다. 서면 한복판에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범행 시간이 밤늦은 시각이었다는 점도 있지만, 범인이 피해자가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위협하지 않았겠냐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범인을 잡는 것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치 경찰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범인은 아무런 흔적도 남겨두지 않았고 어떠한 단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두 건의 범행이 일어난 후 여고생의 시체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도 차츰 멀어져갔고, 사건 관련자들을 제외한 이들에겐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중현은 누나의 묘비 앞에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누나가 죽었을 때, 중현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넘치도록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3학년으로 올라가고 나서도 방황의 나날이 계속 되었다. 한 해를 멍한 눈빛으로 흘려보내고 난 후에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때였다.
누나가 죽은 사건은 중현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까지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어왔다. 범인을 직접 붙잡을 수 있는 경찰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본래 튼튼한 체질이 못 됐기 때문에 그 생각은 단념했다. 대신 세상의 진실을 쫓아다니는 길을 선택했다.
“……오랜만이야.”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중현은 누나의 무덤에 대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누나는 무척 예뻤다. 중현의 눈에는 지금의 김태희와 같은 톱스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아 보였다. 학교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금정구 일대의 고등학생들은 모두 누나의 이름을 한 번씩은 들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 누나를 중현은 좋아했다. 이성으로 생각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피를 나눈 남매로써, 그리고 언제나 서로를 보살펴주고 지켜줘야 할 가족으로써 누나를 따랐던 것이다. 누나는 언제나 자신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아직도 날은 밝은걸.”
봐, 아직 밝잖아. 어렸을 적, 누나와 함께 집 밖에서 놀던 시절에 그녀가 늘 하던 말이었다. 늦게까지 놀아서 해가 저물 무렵이 다 됐을 때, 중현이 집에 가자고 말하면 민아는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남동생의 손을 잡아끌었다. 남동생은 누나의 손길을 한 번도 뿌리친 적이 없었다.
중현은 담배를 피우고 싶었지만 갑이 텅 비어 있었다. 한 손으로 갑을 구기면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꿈이었던 기자가 된지 어언 반년. 누나를 죽인 범인은 아직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다. 가끔 그렇게 생각을 할 때마다 중현은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내려앉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기사를 쓰기 위해 경찰서를 발이 닳도록 드나들다가 지쳐 쓰러져도 좋다. 흉악한 살인, 강간범들의 이야기를 집요하게 모으는 일도 전혀 지겹지 않았다. 누나를 죽인 범인을 언젠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는 것이 중현의 소원이었다.
해가 천천히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주황빛으로 물드는 초겨울의 쓸쓸한 바람을 맞으며 중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 중현은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여러 언론 포털 사이트들을 살피며 최근의 기사들을 열심히 읽는다. 기자는 눈을 항상 크게 뜨고 있어야 한다. 정보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사명을 가진 자라면 항상 정보들을 향한 길의 가장 앞에 서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중현은 늘 생각했다.
블로그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러다가 중현은 방명록에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다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그의 블로그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방명록에는 좋은 자료들을 잘 보고 간다는 감사의 인사도 많았지만, 가끔씩 분별없는 인간들이 쓸데없는 글을 남길 때도 있었다. 중현은 오늘은 또 어떤 말이 적혀있을지 생각하며 게시판을 클릭했다.
거기엔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이 적혀 있었다.
작성자 : 용의자1
작성 시간 : 2010-11-1
오랜만이야.
안민초등학교 체육관 뒤편.
본인 인증을 거치지 않은 익명의 필자가 남긴 글이었다. 용의자라니. 범죄를 다룬 블로그의 성격으로 볼 때 꽤 귀여운 닉네임이다. 뒤에 붙은 숫자1에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남긴 시간을 보니 어젯밤, 엄밀히 말하면 오늘에 해당하는 날짜였다. 오랜만이라는 말을 쓴 걸 보니, 나를 아는 사람인가? 중현은 ‘용의자1’의 글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안민초등학교는 이름만 대충 들은 기억이 났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글은 그것이 끝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두 줄이 전부였다. 용의자1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다른 글도 없었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말. 그냥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유행하고 있는 변종 인터넷 광고의 일부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중현은 별 생각 없이 그 글을 삭제했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세수를 한 후 책을 보다가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안민초등학교에서 여고생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3
세 번째 시체가 발견되던 날 아침부터 중현은 불길하면서도 실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결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가슴이 이유도 없이 설렜다. 어젯밤 지워버린 방명록의 글이 계속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취재를 명목으로 기자실을 뛰쳐나와 동래경찰서로 향했다. 안민초등학교가 있는 동래구의 관할서였다. 지도를 보면서 곧바로 초등학교로 가려다가 일단은 상황을 지켜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중현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경찰보다도 먼저 현장에 있게 되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경찰 기자라는 입장을 이용해서 서에서 대기하고 있는 편이 기사를 쓰는데 유리하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때 중현은 근거 없이 확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장난 글이 아니라고. 안민초등학교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혹은 이미 일어났다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중현은 서의 분위기를 살폈다. 아직은 형사들의 움직임도 평소와 다름없었다. 복도를 천천히 돌아다니던 중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자네 혹시…….”
“예? 무슨 일입니까?”
돌아보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 같은 인상을 한 형사가 서 있었다. 중현은 어색하지 않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고 했다.
“아, 저는 K일보의…….”
“그래그래. 맞네, 맞아!” 갑자기 그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이, 나 못 알아보겠냐? 기억 안나?”
중현은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한순간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눈을 크게 뜨면서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털보 형사님 아니십니까?”
“그래그래. 하하하, 나야, 나. 털보 백광민이라고!”
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중현도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
15년 전, 누나가 살해당한 사건에서 수사에 참여했던 형사중의 한 사람이었던 백광민은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청취하는 일을 맡았다. 그는 슬퍼하는 유족들로부터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피해자 유족들로부터 사정 청취를 하는 일은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는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백광민의 느긋하고 털털한 성격은 가볍게 보이기 쉬워서 그런 일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중현은 그가 사실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 중현은 누나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마음이 꽁꽁 얼어버린 채였다. 그래서 다른 수사관들이 중현과 대화를 하는데 많이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중현의 앞에 백광민 형사가 찾아왔다. 그를 처음 봤을 땐 도무지 형사 같지 않은 인상 때문에 경찰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안녕. 난 털보 아저씨다. 잘 부탁한데이.”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광민은 중현을 어린 아이 대하듯이 자기소개를 했다. 중현은 웃기는 형사라고 생각했다.
그때 중현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차서 형사들의 사정청취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누나와는 얼마나 친했느냐, 누나를 아는 사람들은 누가 있었냐, 누나는 평소에 어떻게 살고 있었냐……. 누나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자꾸만 물어올수록 괴롭기만 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광민 형사가 다른 수사관들과는 조금 달라보였지만 중현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직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라는, 사춘기 소년과 같은 반항심을 중현은 품고 있었다. 뭐든 말을 하게 만들려고 하겠지. 사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척, 애써서 위로하려는 척 빙빙 돌려가면서 다른 얘기를 하다가 결국은 자신에게서 누나의 기억을 파헤치려는 속셈을 드러낸다. 그것이 형사들의 수법이었다. 중현은 마음의 벽을 더욱 견고하게 쌓으려했다.
그러나 백광민 형사가 처음으로 꺼낸 말을 중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럼 니네 누나에 대해서 함 말해봐라.”
중현은 직설적으로 나오는 그의 태도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광민은 중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당신들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알겠어. 친누나를 살해당한 기분을 어떻게 알겠냐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도 비슷하기는 할 기다. 안 그렇나?”
그는 동그란 눈을 뜨고 있었다. “마 아니라도 상관없다. 너네 누나가 죽어서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무당도 점쟁이도 아닌데 말이다. 사람이 남의 기분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알지도 못하는데, ‘네 기분을 이해한다’ 같은 말 따위 나는 하지 않을 기라.”
“.....”
“그렇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고슴도치마냥 몸을 웅크리고 뾰족한 가시로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려고 하면 안 된다. 모두 네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맞지. 하지만 네 기분이 어떨지 예상은 할 수 있지 않겠나. 가족이 죽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 모를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노? 모두가 너랑 같은 심정을 느끼려고 노력하는 기다.”
중현은 그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 해야……진심으로 범인에 대해서 분노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알겠나? 물론 나처럼 짬밥 먹은 경찰들 중에 가족이 살해당한 사람은 거의 없어. 그래도 니랑 같은 선에 서려고 애를 쓰는 기다. 그 새끼가 피해자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내 소중한 가족까지도 노리고 있다고. 붙잡지 않으면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과 아들이! 처참하게 뒤져 뿌린다고 말이다. 알겠나?”
형사의 과격한 언사가 그의 차분한 표정과 심하게 대조되었다. 그 때문인지 중현에게 그의 말은 더욱더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흔들리는 중현의 눈을 보며 형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그래. 우린 그런 각오로 수사에 임하고 있다. 그걸 알아줬으면……좋겠데이.”
“……네.”
그의 강렬한 말 한마디가 중현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기 때문에, 중현도 그의 마음을 범인에 대한 분노로 옮겨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뒤로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할 수 있었다.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기 까지는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털보 형사로 인해서 사건 현장을 뒤쫓는 기자가 된다는 중현의 목표의 초석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형사님은 변한 게 없으시군요. 수염도 여전하시고.”
“변한 게 없긴. 배가 이따 만큼 나왔구마.”
광민은 자신의 불룩한 복부를 어루만졌다.
“혹시 여기서 근무하시는 거예요?”
“그래그래. 그동안 여기저기로 옮겨 다녔거든. 넌 정말 몰라보게 컸구나.”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중현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두 사람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 사이처럼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기자가 됐단 말이가. 허허, 거참 의외구만. 그때 너는 무지 침울한 애였는데 말이다. 그런 발로 뛰어다니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뭘요. 다 오래전 일이죠.”
“그건 그렇고 여긴 무슨 일이고?”
“아, 그냥 기삿거리가 없나 들쑤셔보고 있는 겁니다. 평소엔 동래서 까진 오지 않는데, 오늘은 그냥 기분전환도 겸해서 여기까지 나와 봤어요.”
광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동네가 워낙 조용하니까 말이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아주 죽겠다.”
“형사님은 책상 일이 더 편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옛날에 이야기를 할 때 몇 번 들었던 말이었다. “나쁜 놈들이 살인 같은 일로 설쳐대니 피곤해 죽겠다, 아주 그냥.” 이라면서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모습이 생각났다. 중현의 말에 형사는 큰 소리로 웃었다.
“어째 이 아저씨는 뭐든 거꾸로 가서 탈이란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왠지 더 날뛰고 싶다는 거 아이겠나. 늙은이답지 않게 몸도 펄펄하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긁으면서 광민은 덧붙였다. “예전보다도 지금 감이 훨씬 더 좋데이.”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보며 중현은 그가 정말로 형사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실제로 우수한 형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은 끝내 붙잡지 못했기 때문에 무척 분해하던 것이 기억났다.
“뭐 때문에 왔노, 여긴.” 형사가 같은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중현은 괜히 뜨끔했다. 블로그에 올라왔던 의미를 알 수 없는 글 때문에 왔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경찰을 상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색하지 않게 그 자리를 넘겼다.
그때 형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김 형사? 무슨 일이고?”
광민은 전화를 받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살인이구만. 알았다. 곧 갈 테니……. 뭐라꼬?”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형사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그것을 보면서 중현은 아침부터 느꼈던 불길함의 실체가 점점 더 명확하게 모습을 드러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광민에게 중현은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 형사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아직은 곤란하다. 내 이따가 말해주마.”
그는 코트를 챙겨 입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현은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렸다. 경찰들의 입에서 안민초등학교라는 단어를 듣고 나서 중현은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어린 학생들의 하교 시간은 이미 지난 뒤였지만, 학교 주변은 어수선했다. 운동장 이곳저곳에 경찰차들이 세워져있고 경찰관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주민들이 구경을 나와서 불안한 시선으로 학교 건물을 주시했다.
체육관 뒤편. 중현은 그가 쓴 글을 기억했다. 왼편에 있는 큰 체육관 건물의 뒤쪽으로 돌아가니 출입을 통제하는 테이프가 설치되어 있었다. 중현은 적어도 이 자리에 자신이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 기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건물 뒤쪽에는 허리 정도 높이의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산으로 이어지는 숲이 계속 되었다. 형사들이 그 밖에서 뭔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중현은 안쪽을 들여다보려고 했으나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과학수사관들이 도착하여 울타리를 넘어갔다. 날이 어두워지려는 참이었기 때문에 경찰관들이 숲 주변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중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현장을 바라보고 있는 백광민 형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들고 있던 카메라로 적당히 몇 장 찍었다.
“이봐요, 뭐하시는 겁니까!”
지키고 있던 경찰관이 험악한 소리로 외쳤다.
“전 K일보의 기자입니다.” 중현이 경찰관과 실랑이를 하는 사이에 광민이 소리를 듣고 중현을 보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경찰관에게 잘 설명한 뒤 중현을 끌고 조금 옆으로 비켜섰다.
“금방 따라왔구나.”
“무슨 일입니까, 형사님. 초등학생이 죽기라도 했답니까?”
중현이 물어보자 털보 형사는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말이다…….”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에 한 경찰관이 “찾았습니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광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중현도 그쪽을 보았다.
경찰관이 막대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흙과 나뭇잎이 지저분하게 묻어있는, 여자 교복의 상의였다.
중현은 다시 자신을 바라보는 광민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변 일대의 수색은 계속 되었고, 죽은 여고생이 입고 있던 옷의 나머지 부위들도 차츰 발견되었다. 속옷과 내의, 교복 겉옷과 코트……그러나 유일하게 발견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입고 있던 치마였다.
형사가 보여준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중현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석이 다시 돌아왔다고. 누나를 죽인 그놈이 15년 만에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것이라고.
4
안민초등학교에서 발견된 여고생은 근처의 여고에 다니는 것도, 집이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인근에 있는 입시전문 미술학원에 다니는 예술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살해당한 것은 11월 1일 오전 0시에서 1시 사이. 늦게까지 실기 연습을 한 후 집으로 귀가하던 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시체가 발견된 것은 11월 2일. 하루나 지난 후에 발견된 것은 시신이 학교 뒤편의 사람들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유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의 체육 선생이 비품을 정리하기 위해 뒤쪽으로 왔다가 울타리 건너편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시신인 것을 확인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살해당한 여학생은 평소의 행실에도 문제가 없는 착실한 아이였다. 그녀는 살해당하기 전에 범인에 의해 욕보여졌다. 그리고 목을 손으로 졸려서 교살 당했다. 그러한 시신의 상태와, 현장 부근에서 발견된 옷가지 중에 치마만 없었다는 사실.
15년 전의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경찰은 동일한 범인의 범행으로 보고 수사를 개시했다. 언론사들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특히 부산에서는 얼마 전에 여학생을 살해한 범인이 도주하여 며칠 만에 체포되는 등 비슷한 종류의 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크게 끌은 터라 또다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컸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띠는 기사, 특히 사건 관련 사진은 바로 중현이 현장에서 찍은 것이었다. 경찰관이 버려져 있던 살해된 여학생의 교복을 들어 올리는 모습. 경찰관들의 흔들리는 눈빛과 근처를 밝히는 손전등의 움직임들이 수사에 임하는 경찰들의 진지한 태도와 사건의 심각함을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했다.
K일보는 중현의 공으로 살인마가 돌아왔다는 뉴스를 가장 먼저 인터넷을 통해 보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나온 본지를 통해 중현이 발 빠르게 수집한 정보들이 기사화되었다. 중현의 사진과 기사는 수십만 명이 보고 읽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중현은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쉴 틈은 없었다.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사이에 어느새 그는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다. 모두가 그의 이름을 불렀고 그에게 사진과 기사를 요청했다.
“축하해. 큰 건을 잡았더라?”
선배인 이영훈 기자가 바쁘게 원고를 작성 중이던 중현에게 말을 걸었다.
“뭘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중현은 겸손하게 말했다. 평소에 그렇게도 바랐던 특종이었다. 특종을 잡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과 더불어 운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영훈은 늘 말해왔다. 그 운이 드디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냈는데도 불구하고 중현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특종이라는 것이, 누나를 죽인 범인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더 복잡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말라고.”
중현의 표정이 힘든 것으로 보였는지 영훈은 후배를 격려하는 말을 했다. 중현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따가 또 서에 가볼 꺼지?”
“네.”
K일보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취재의 대부분을 중현에게 일임했다. 팀장이 그를 불러서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이 사건이 중현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현은 괜찮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중현의 머릿속에는 계속 그 글이 떠오르고 있었다. 시체가 발견될 장소의 예고. 그것은 사건이 드러나기도 전에 쓰였던 글이었다. 그것을 남긴 것은 범인이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나에게 접근을 해온 것일까. 오랜만이라는 말은 대체 무슨 뜻일까.
기사를 쓰는데 집중하면서도 중현은 계속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붕 뜬 사고는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특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자의 덕택이었다. 게다가 그 녀석은 어쩌면 누나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래서 중현은 특종을 잡은 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시체가 발견된 날, 중현은 집에서 부모님에게 소식을 알렸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모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는 중현을 보며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 뒤로도 틈틈이 블로그를 살폈다. 하지만 그가 다시 글을 남기지는 않았다.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된 지 3일이 지나자 수사는 고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단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에게 있어서 악몽과 같은 순간이었다. 수사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인 여론이 제기되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범인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 과거의 두 사건의 피해자들과 새롭게 발견된 시체와는 여고생이라는 점을 빼면 연관점도 없었다. 비뚤어진 성적 욕망, 이성에 대한 정복감, 세상에 대한 과시 등등 정신심리학적 분석들도 범인을 찾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간의 사고가 정상적이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연일 경찰서를 드나들며 중현은 하루라도 빨리 범인을 잡을 수 있는 단서가 나오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블로그에 올라온 글에 대해 경찰에 알리는 것은 망설였다. 백광민 형사의 얼굴을 보고 나면 그런 고민을 몇 번이나 하게 되었다. 어쩐지 털보 형사가 자신에게 “니 뭐 감추고 있는 거 아이가?” 라고 금방이라도 물어올 것만 같았다.
이 망설임은 내면의 갈등에서 빚어지는 것이었다. 특종을 쫓는 기자로서의 직업의식과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양심이 서로 부딪혔다. 중현은 그런 글만 보고서 그가 범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범인이든 아니든 간에 사건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중현이 그렇게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수사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블로그에도 새로운 글은 올라오지 않았다.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된 지 일주일이 지난 뒤,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손님이 와 있다고 했다.
“누가 와 있는데요?”
“왜, 너도 잘 알거야. 옛날에 네 누나랑 만나던…….”
안으로 들어가니 한 남자가 거실에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는 중현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일어서서 반가운 표정을 하며 중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이야, 중현아.”
자신을 알아보는 그와는 달리 중현은 그가 누군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남자가 여성처럼 길게 기른 머리에 안경을 쓰는 것이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어울리는 그림이 나올 것 같지 않았지만, 그에게서는 미묘하게 남성적인 느낌이 살아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중현은 도무지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어……. 실례지만 누구신지?”
어머니가 얘도 참, 이라면서 나무랐다. 남자는 웃으면서 자신의 소개를 했다.
“김준영이라고, 기억 안나? 고등학교 때, 농구부에 있었던…….”
“아……아! 준영 선배로군요!” 중현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럼요, 기억하죠. 잊어버릴 리가 있겠어요?”
김준영은 안경을 고쳐 쓰며 중현을 바라보았다.
15년 전 중현이 다니던 남고에는 농구부가 있었고, 중현도 그곳의 부원이었다. 김준영은 한 학년 위의 선배였다. 중현은 농구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래서 가까운 자리에서 밝게 빛나던 김준영의 모습을 동경했던 기억이 났다. 그는 농구 실력도 출중했지만, 잘 생기기도 했으며 성적도 무척 우수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엄친아’, 그 자체였다. 또한 그는 중현의 누나 박민아의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 두 사람 다 학교 안에서 동경 받는 위치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둘의 조합은 무척 어울려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역시 서로를 좋아했었다.
중현은 누나의 애인이었던 그를 사건이 일어난 후 거의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준영에게 있어서 같은 농구부의 후배이고 여자 친구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자주 어울렸었다. 그러나 누나가 죽고 난 후에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그를 만나게 되어 중현은 무척 반가웠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어쩐 일이세요?”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구나.” 어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가 됐다고 들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좀 하려고 찾아 온 거야.” 그는 여전히 호감 가는 인상이었지만 표정이 진지하다는 것을 중현은 알 수 있었다.
“이야기라뇨, 어떤?”
“잠깐 나가지 않겠어? 중요한 이야기야.” 준영은 중현의 부모님의 눈치를 살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그들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중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근처의 놀이터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두 사람은 서로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중현은 그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김준영은 좋은 성적으로 일류대학에 진학하여 무사히 졸업을 한 후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했다. 착실하게 일하면서 우수한 경력을 쌓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중현은 감탄했다. 학생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중현이 물었다.
“부산에는 왜 내려오셨어요?”
준영은 중현을 보면서 답했다. 그는 서울에 있는 본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네가 쓴 기사도 잘 봤고. 그래서 유급 휴가를 내고 돌아온 거야.”
“네……?”
“이 이야기는 그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었는데…….” 준영의 안경 안쪽의 눈이 어두워보였다.
“중현아. 난 그동안 너희 누나를 죽인 범인을 찾고 있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마음속엔 줄곧 민아를 죽인 놈을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15년 전의 사건을 열심히 조사했어. 당시 나와 민아의 고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도 만나보고 말이야.”
중현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물론 경찰이 찾아내지 못한 범인을 나 같은 개인의 힘으로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여러 가지 가설은 가지고 있어. 한번 들어봐.”
그는 가지고 온 문서들을 꺼내어 중현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여러 학생들의 학생기록부와 신상에 대한 자료들이었다. 그것들을 보며 중현은 놀라서 물었다.
“이런 걸 다 어떻게……?”
“사람을 조사하는 걸 전문으로 하는 이들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것들은 당시 부산 지역에 있던 문제 학생들에 대한 자료들이야. 그중에서 민아의 생활 반경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던 녀석들이지.”
중현은 자료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폭행치사나 여자들을 성추행하는 등 학생이라고 짓이라고 믿기가 힘든 여러 범죄들을 저지른 학생들의 정보가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걸 조사하신 거예요? 죽은 건 제 누나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요.”
“그래. 두 번째로 죽은 여학생……. 그 여학생과 너희 누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용의자를 찾는데 고려하기는 했어.”
준영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이야,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너희 누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왜죠?”
“이 녀석은 두 명을……. 아니, 며칠 전의 일까지 포함하면 세 명을 죽였어. 연쇄 살인범에겐 정상인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동기는 없다고 생각해. 재미로 죽인다던지, 죽이는 행위로 만족감을 느끼는 것 같은 비정상적인 이유뿐이지.”
중현은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나 이 녀석은 말이야, 자신의 증거를 전혀 남겨놓지 않을 정도로 치밀해. 그래서 나는 녀석이 단순한 정신이상자라는 생각이 안 들어. 자기가 여학생들을 죽이는 데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녀석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는 어떤 원인이 있을 거야. 틀림없이. 이를테면 어렸을 때 부모의 학대를 받았다던가 라는 식의……. 그런 식의 원인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렇다면 선배는 그 원인이 어쩌면 저희 누나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군요?”
“그래. 범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녀석의 성장 배경을 파고들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렇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건 그 녀석이 처음으로 고른 것이 너희 누나, 민아였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그는 또 다시 다른 문서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이건 당시 두 시체의 상태에 대한 검시보고서야. 너도 알겠지만 민아의 시체와 비교할 때 두 번째 시신은 범인이 더 거칠게 다뤄서 상처가 많이 남아있지. 그것만 보더라도 범인의 행동의 차이를 알 수 있어. 녀석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민아를 죽였어. 따라서 그 뒤의 피해자들은 사실 그로인해 비뚤어진 사고로 생겨난 부산물……. 이라고 해야 할까.”
중현은 얼마 전에 발견된 세 번째 피해자의 시신을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그 여학생의 시신 역시 험하게 다룬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누나를 죽인 범행에서 연쇄 살인으로 연결되는 어떤 계기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녀석은 15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 또다시 사건을 저지른 걸까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일단 자신이 추려낸 잠재적인 ‘용의자’들의 소재지를 파악하는 중이라고 준영은 말했다.
“그럼 선배는 누가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이걸 한번 볼래?”
그가 한 인물의 파일을 보여주었다. 이름은 최기혁. 그의 고등학교 이름을 보고 중현은 그가 누군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그래. 우리와 같은 학교였던 기혁이다. 너도 기억하겠지?”
“그럼요…….”
중현이 최기혁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누나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남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기혁이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민아에게 굉장히 분해하는 것을 중현은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심지어 집에 까지 찾아와서 고집을 부린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누나에게 원한을 품고……. 그런 짓을?”
“그래. 물론 15년 전에도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증거가 없어서 풀려났지. 하지만 여기 나와 있는 사람들 중엔 아무래도 그 녀석이 가장 수상해. 민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도 그 녀석 뿐이고.” 준영이 말했다. “그 녀석은 지금, 부산에 있을지도 몰라.”
“정말인가요?”
“정확히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어.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부탁을 하기 위해서다. 이 녀석이 어디 있는지 찾아봐다오.”
“찾아서……. 어쩌시려고요?”
중현은 준영의 표정 뒤편에서 어두운 그늘이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과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 민아가 그 녀석을 찬 건……. 어찌 보면 나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나 때문에 녀석이 또 다른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 거라면…….”
“그런……. 그렇게 말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누나가 죽은 건……. 여학생들이 죽은 건 선배 때문이 아니에요.”
중현은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말이에요.”
확실히 최기혁이라는 남자는 위험해 보였었다고 중현은 생각했다. 체격이 크지만 어쩐지 모자라 보이는 듯 한 인상이었던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중현이 다니던 남고 근처로 민아가 왔을 때 그녀를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때 민아는 준영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중이었다. 얼마 후 기혁은 그녀에게 고백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기혁은 끈질기게 그녀에게 매달렸다.
중현은 그때 누나가 상당히 차갑게 그를 대했었던 기억이 났다. 집 주소까지 알아내서는 문 앞에 버티고 서서 농성을 피우고 있을 때, 누나는 슬리퍼를 신고 당당하게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의 따귀를 힘껏 때렸다. 중현은 그때 창문으로 바깥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얻어맞은 기혁이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것을 한참동안 보았다.
그 뒤로 그가 누나에게 집적대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었을까?
범행의 동기로 충분하다는 느낌은 들었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중현은 블로그를 살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늦은 시각이라 졸려서 눈앞이 몽롱했지만 중현은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계속 조사했다.
그러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귀에 알림 음이 들려왔다. 채팅 창이 눈앞에 떠 있었다. 그 상대방의 이름을 보자 중현은 잠이 확 깼다.
[용의자1]
두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이어서 채팅 창의 줄이 하나 올라갔다.
[안녕? 반가워. ^^]
중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떨리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5
‘당신은 누구지?’
우선은 그렇게 썼다. 혹시나 장난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나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뭐야, 나 잊어버렸어? 저번에 방명록에 글 남겼는데, 지웠더라. 서운한 걸 ㅜㅜ]
‘방명록에 글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를 한번 떠 보기로 했다. 블로그에 남긴 인물과 동일한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그렇게 써 놨잖아? 오랜만이라고. 그리고 좋은 것도 가르쳐줬는데 말이야 ㅋㅋ]
중현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당신은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거 참 간단한 질문이네.]
거기서 ‘용의자1’은 말을 한 번 끊은 후, 다시 이었다.
[그 여자애를 죽인 게 바로 나거든.]
가슴 속에서 무거운 추가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중현은 침착 하려고 애를 썼다.
‘당신이 범인이라는 말인가?’
[아아, 그래. 내가 범인이야.]
‘그렇다면……. 15년 전의 사건도 당신이 저지른 거야?’
[맞아. 내가 했어 ㅋㅋ]
그의 말끝에 붙은 웃음소리에 중현은 울컥 화가 났다. 그러나 참으려고 노력했다.
‘당신이 죽인 게 내 누나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 그걸 알면서 일부러 나한테 접근하는 건가?’
[아아, 민아 말이야? 네가 동생이란 것도 알고 있어.]
‘어째서 나에게 접근하는 거지?’
[글쎄……. 어째서일까? ㅋㅋ 맞춰보지 그래.]
중현은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이 녀석은 지금 자신이 15년 전의 사건과, 지금의 사건을 일으킨 범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정말로 범인인지 아닌지 이 채팅만 보고서는 알 수 없다.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네가 범인이라는 걸 증명해봐.’
[뭐야……. 나 못 믿는 거야? 어쩔 수 없군……. 이것까진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뭐라고?’
[잠깐만 기다려봐 ㅋㅋ 파일을 보낼 테니까.]
잠시 후 폴더 창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몇 개의 사진 파일이 나왔다. 그것들을 보면서 중현의 표정은 점점 더 험악해져갔다.
그것은 일주일 전에 발견된 여학생의 사진이었다. 장소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다. 눈을 뜨고 있는 그녀는 사진 안에서 무척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속옷이 벗겨진 채로도 필사적으로 저항을 하는 사진……. 그리고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에게 목을 졸리고 있는 사진. 끔찍했지만 중현은 겨우 사진들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녀석의 말은 계속 되었다.
[어때. 이정도면 믿을 수 있겠지?]
‘이걸 정말로 당신이 찍은 건가’
[그래. 내가 찍었어.]
‘나에게 이러는 목적이 뭐야?’
중현의 질문에 ‘용의자1’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가 대답했다.
[왠지 누군가에게는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널 고른 거야. 너와, 네 누나는 특별하거든.]
녀석에게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라고 말하던 준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그의 말이 맞는 것일까. 녀석이 연쇄 살인을 일으킨 이유는 누나와…….
‘누나를 왜 죽인거야?’
[아아, 민아를 왜 죽였냐고? 간단하게 말해줄까? 그녀 자신을 위해서도, 그러는 편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지!]
갑자기 그의 말투가 격해졌다. 흥분한 것일까? 그의 말은 계속 되었다.
[겉으로는 예쁘고 착하고……주변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 보는 아이돌 같은 존재였지만, 사실 민아에게는 어두운 면이 있었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지만.]
‘그래서……죽인 거야?’
[그래. 죽여 버렸지. 죽기 전에는 신나게 능욕도 해줬고. 아마 그녀도 기분 좋았을걸? ㅋㅋㅋㅋ]
순간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하는 것을 중현은 참았다. 지금 당장 이 녀석을 죽여 버리고 싶었다.
‘그럼 다른 여학생들은 왜 죽인거지?’
[한번 사람을 죽여보고 나니까. 주체할 수 없게 되더라고. 마치 내가 몰랐던 다른 성격이 눈을 뜬 것처럼. 그래서 지나가다가 보이던 여자 애들도 똑같이 만들어줬어.]
‘충동적인 것 치고는 아주 치밀하던데. 증거도 남기지 않고.’
[ㅋㅋ 그거 칭찬인가? 난 무척 꼼꼼한 성격이라고. 마치 네 누나처럼 말이야!]
그리고 그 뒤로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라는 웃는 기호가 계속 되었다. 중현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그의 말이 계속 되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 기자 양반에게 한 말씀 해드려야겠어. 이 녀석이 대체 무슨 속셈인지, 궁금하지? 응? 궁금하지?]
‘그래.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당신은 나 덕분에 특종을 썼잖아.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않나? 누나를 죽인 범인이 또 다시 나타나서 기사를 쓰도록 도와줬으니 말이야. 어쩌면 그건 모두 죽은 네 누나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입 닥쳐.’
중현은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잘 들어. 난 반드시 널 붙잡고 말겠어. 경찰이 잡지 못하더라도 내 손으로 널 찾을 거야. 알았냐, 이 자식아!’
[어이구, 무서워라. 진정하라고.]
‘용의자1’이 빈정댔다. 중현은 흥분해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의 이름은 최기혁이지? 그렇지 않나?’
본래는 적절한 기회를 봐서 파고들려고 준비해 둔 질문이었다. 그러나 잔뜩 화가 난 중현은 홧김에 그에게 직설적으로 물어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대체 누구야 그게? 난 그런 놈은 몰라.]
그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중현은 필사적으로 그 느낌을 읽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런 중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용의자1’은 계속 말했다.
[아무튼 내가 한번 도와줬으니 말이야. 또 좋은 걸 가르쳐주지.]
‘그게 무슨 말이지?’
[2주일 뒤야. 11월 22일. 금강공원 물오리 놀이기구.]
그렇게 말하고 난 뒤 갑작스럽게 접속이 끊겼다. 대화창이 닫히고 모니터에는 파란 바탕화면만 덩그러니 떠올랐다. 중현은 멍하니 텅 빈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다시 채팅창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 뒤로 중현은 혼란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자가 마지막에 남긴 말의 의미는 너무나도 분명했다. 2주일 뒤에 또다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뜻이다. 여학생을 범하고 죽인 뒤 시체를 그 장소에 버릴 생각이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경찰의 수사도 막다른 벽에 부딪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기사로 쓸 만한 것도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수사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중현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현은 더욱더 고민되었다. 그 고민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섞여서 중현의 머릿속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과연 수사에 큰 도움이 될까? 이 사실을 알린다고 해서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중현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우선은 그가 정말로 그날 범행을 저지를 것인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용의자1’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경찰에 이 정보가 들어가게 되면 금강공원 일대의 경계가 강화될 것이다. 그곳으로 경찰들의 시선을 돌려놓은 사이에 다른 곳에서 범행을 저지를 수도 있다. 또한 적어도 경계가 강해지게 되면, 녀석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경찰들이 들키지 않게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도 ‘용의자1’이 자신이 경찰에 그가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고 생각하는 이상, 공원에는 경찰들이 배치된다고 여길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보니 과연 그가 공원에 나타날지가 의심스러웠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를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자신이 경찰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날짜와 장소를 미리 알렸다. 그가 자신의 입으로 말한 것을 지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득 중현은 그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녀석은……내가 경찰에 알리지 않을 거라고 보고 있는 건가.’
그렇게 믿고 있지 않고서야 범행 예고를 당당하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사실을 자신만이 조용히 알고 비밀로 간직한다면 그는 그날 공원에서 당당하게 범행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자는 나를 믿고 있는 것일까?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중현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그는 자신에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물론, 특종을 의미하는 것일 테지.
경찰에 이 사실을 그냥 알릴 경우 그가 알린 22일까지 보도가 철저히 규제될 것이다. 그러면 특종 같은 것은 쓸 수 없게 된다. 경찰은 범인을 잡는 것이 우선이지, 기자들의 형편 따위를 신경 쓰는 집단이 아니니까. 특종에 눈이 먼 기자라면 살인사건의 범인이 이렇게 접촉해왔을 때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정도로 기쁠 것이다. 그러나 중현은 자신이 그 정도의 인간은 아니라고 여겼다. 당연히 경찰에 알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마음속 한구석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놈을 잡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나머지 한구석이 속삭였다.
그자는 자신이 이렇게 고민할거라는 걸 예상했을 것이다. 고민하면 할수록 중현은 그자의 속셈에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갔다.
중현은 그동안 김준영과도 몇 번 정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용의자1’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김준영은 계속 최기혁의 행방을 뒤쫓는 중인 듯 했다. 하지만 중현은 ‘용의자1’과 최기혁이 동일 인물이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준영이 부탁한 대로 최기혁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보려는 노력은 했다. K일보의 선배 기자인 이영훈에게 그의 신상을 조사해 봐달라고 부탁을 했다.
“왜. 이 사람이 누군데?”
“그냥 제 고등학교 선배입니다. 연락처를 몰라서 알아보려고요.”
“혹시 사건하고 관계있는 거야? 이를테면 네 누나랑 뭔가 관련이 있다든지…….”
중현은 그의 감이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뭐, 그런 이유도 아주 없지 많은 않습니다.”
반쯤은 솔직하게 말하니 영훈은 흐응, 하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알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능력 있는 소식통에게 부탁해보겠다고 했다.
“참, 그런데 너 피해자들 사진 봤냐?”
“사진요? 시신 확인은 초등학교에서 나온 거 밖에…….”
“아니, 그거 말고. 15년 전의 것과, 이번 피해자들의 평상시 사진 말이야.”
“아아, 그럼요. 보기는 했죠. 그게 왜요?”
“혹시 이 사진은 봤냐? 잠깐만…….” 영훈은 책상을 뒤지더니 두 장의 사진을 꺼냈다. 누나를 제외한 나머지 두 피해자들의 사진이었다.
중현도 피해자의 사진들은 많이 봐왔지만 그것은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여학생들의 사진은 대체로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에서 발췌한 것으로 대체로 밝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던 피해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영훈이 보여준 사진 속에서 피해자들은 웃고 있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일상을 찍은 사진이기는 하지만 웃고 있지는 않은 평범한 표정이다.
“꽤 어렵게 구한 거야. 이쪽은 옛날 취재파일에 남아 있던 사진이고, 이건 이번 피해자의 학교 친구가 찍은 사진이지.”
“이런 걸 왜 찾으신 겁니까?”
“뭐,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려는 심산이지. 경찰들이 찾지 못한 피해자들의 공통점이랄까. 잘 봐. 이 사진들을 보면 피해자들이 얼핏 닮은 것 같지 않아?”
중현은 좀 더 자세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머리 모양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언뜻 보기에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네 누나의 외모랑 비교해보면……. 어때?”
“글쎄요…….” 중현의 대답은 애매모호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닮았다고 하기엔 아무래도 뭔가가…….”
“음. 대충 한번 봐. 내가 볼 땐 네 누나하고도 비슷한 느낌이 있어. 네가 동생이라서 그렇게 안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지.”
과연 그런 것일까? 중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어딜 봐도 이 사진속의 피해자들이 누나와 닮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를 가지고 닮았다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겠죠. 기사로 쓰기에도 뭐하고.”
“그런가?” 영훈은 팔짱을 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말이야. 범인이 피해자를 고르는 데에는 틀림없이 어떤 기준이 있었지 않겠어? 이를테면 첫 번째 사건의 경우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영훈은 문득 중현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정도 까지만 하는 게 낫겠군……. 그렇지?”
중현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더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며 누나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누나의 웃지 않는 표정도 여러 번 본 적은 있었다. 다른 피해자들과 비슷한 면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누나가 그중에서 외모가 제일 예뻐 보인다는 정도. 하지만 중현은 어쩐지 세 사람 모두, 웃는 모습이 웃지 않을 때보다 나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들이 웃고 있지 않으니 그녀들이 살해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더 쓸쓸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시간은 흘러 11월 22일은 점점 다가왔다. 중현은 여전히 ‘용의자1’에 대한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물론이고, 신문사 사람들이나 준영 선배, 백광민 형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경찰 수사에도 전혀 진전이 없었으며 범인의 단서나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이 시들해져서 기사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중현은 다른 기삿거리들을 찾아서 이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줄곧 그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22일의 해가 저물기 시작했을 때, 중현은 결단을 내렸다.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코트를 단단히 입었다. 이 시간에 어딜 나가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친구와 만날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금강공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산 아래에 위치한 공원은 오래전에 지어져서 놀이기구들은 낡고 촌스럽다. 그래서 지금은 유원지보다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밤중의 공원에도 운동 삼아서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있어서 가로등이 환했다. 희미한 달빛이 울창한 소나무들의 윤곽을 비추었다. 중현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셔터가 내려진 간이 상점들과 공원 내의 해양박물관, 그리고 찻집을 지나가니 놀이기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람쥐통과 원형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모양의 기구. 그리고 멀찍이 에버랜드 같은 곳과 비교하기엔 초라한 모습의 바이킹이 보였다.
물오리 놀이기구는 원형의 수로를 가운데 지지대에 고정된 오리 모양의 배들이 지나가도록 되어있는 기구였다. 안에는 두 사람 정도가 탈 수 있다. 기계는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쉬고 있었다. 중현은 물오리의 머리를 보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에 오기까지 고민을 계속 했다. ‘나 혼자서 그 장소에 나간다’라는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가에 대해. 어딜 봐도 무모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겨 여기까지 왔고, 지금 이렇게 어두운 공원 안을 지켜보고 있다. 중현은 으슥한 나무 뒤쪽에 숨어서 놀이기구를 몰래 살폈다.
이곳에 숨어서 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경찰에 신고한다. 만약 그에게 들키거나 그가 도망을 치려고 하면 어떻게든 싸울 수밖에 없다. 승산이 있을까. 중현은 싸움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약한 것도 아니다. 여학생을 세 명이나 무참하게 살해한 인간을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누나를 죽인 놈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서 뭔가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해서 여기에 혼자 온 것이다. 중현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한두 명씩 산책로를 지나갔다. 그러나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놀이기구 주변에도 움직임은 없다. 이따금 추리닝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중현은 그가 공원을 산책하는 여학생을 노리려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확실히 인적도 드물고 어두운 곳이어서 범행에는 최적인 장소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점점 흐를수록 사람들의 모습도 더 뜸해졌다. 중현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용의자1’은 분명히 오늘, 이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11월 22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밤이 더 깊어져서 공원에 사람이 없어지게 되면 범행을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데. 중현은 그자가 이곳에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문득 그가 여기서 여학생을 살해하려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자는 단지 시간과 장소만을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범행을 저지를 거라고는 하지 않았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자신에게 뭔가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기다려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지가 않자 중현은 점점 더 불안감에 휩싸여갔다.
그때 뭔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야에 좀 더 집중을 하니 물오리 쪽에서 움직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그림자 같은 것이 있다. 주변에 다른 사람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중현은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놀이기구의 뒤편,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사각으로 중현은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기분 탓으로 잘못 본걸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반대편에서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중현은 고개를 돌렸다. 계단 아래쪽에서 난 소리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중현은 발을 옮겼다. 아래쪽에는 봄버카들이 놓여 있는 공간이 있었다. 중현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공간을 들여다보았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딱딱한 바닥을 밟고 서서 중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흐릿한 어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가 ‘용의자1’이냐.”
“……크크크.”
그자가 웃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할 생각이지?”
“아아, 그래. 나는 여기서 뭔가를 할 거야. 미리 예고를 했으니까, 지키지 않으면 매너가 아니지.”
중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하도록 내가 내버려둘 것 같아? 지금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할 수 있어.”
“하하. 내가 잡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그건 네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중현은 좀 더 가까이 걸어가려고 했다. 어둠 속에 있는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목소리를 처음 듣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기도 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최기혁인가? 아니면 다른 누구?
“그래도 일단은 할 일은 해야 되니까 말이야. 방해꾼은 잠시 치워놓는 편이 좋겠군.”
뭐라고, 라고 중현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걸음을 멈추기도 전에 시야가 확 움직이더니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렸다.
6
공원에서 정신을 잃고 깨어난 후의 몇 시간 사이의 일을 중현은 명확하게 기억해낼 수 없었다. 봄버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기절한 후 깨어났을 땐 날은 이미 새벽에 가까웠다.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보며 중현은 밖으로 나왔다.
막 깨어난 몸에 한 박자 늦게 불길한 감각이 엄습해왔다. 중현은 물오리 쪽으로 가보았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뒤쪽에 나 있는 길을 돌아갔다…….
거기엔 그가 예상한 것과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럴 수가…….”
중현은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기구 안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누군가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생명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목 부근에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보였다.
고개를 축 늘어뜨린 소녀의 상반신은 벗겨져 있었다. 다만, 하반신에는 뭔가가 걸쳐져 있었다. 교복 치마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중현은 금방 알아보았다.
초등학교에서 발견되었던 여학생의 치마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중현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본능에 몸을 맡겼다. 산 속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아침 소리를 들으며 중현은 황급히 공원을 도망치듯이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몸을 씻을 때 까지도 중현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출근을 하고 멍하니 책상에 앉아있던 중 급한 소식을 듣고 서야 중현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팀장이 중현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시체가 또 나왔다고 하는군.”
전날과는 달리 금강공원은 무척 혼잡했다. 시신이 들것에 실려서 운반되어 나오는 광경을 보며 중현은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고 직시할 수 있었다.
모두 나 때문이다. 무모한 짓을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또 다른 사람이 죽을 일은 없었을 텐데. 중현은 쓰라린 죄책감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동래경찰서의 백광민 형사도 이곳 현장에 나와 있었다. 그는 중현을 발견하고는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다. 현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보고 싶었는데.”
그 역시 범인이 새로운 사건을 일으킨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 자식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프게 하는구마. 14일이나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나타나서는…….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노린 거야.”
“뭔가 단서는 없습니까?”
“……아직까지 별 소득은 없는 모양이라. 이번 피해자는 저번 사건 피해자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알몸에다가 말이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은 숲속에서 발견됐다.”
인근에 살고 있던 소녀는 매일 밤마다 운동 삼아 공원을 산책했다고 한다. 살해되기 전에는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중현은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살해 방법은 마찬가지로 교살이고……죽기 전에 범한 것도 똑같고……. 완전 동일범이지.”
“그렇……습니까.”
시체가 발견된 것은 오늘 아침 이른 시각. 공원에서 조깅을 하던 중년 남성이 시체를 발견했다고 한다.
형사의 말을 들으면서 중현은 고개를 숙였다. 결국은 그자를 잡지도 못했고, 막지도 못했다. 그 결과로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소녀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건 아직까지는 극비 정보인디……. 니한테만 살짝 알려주마. 일단 당분간은 기사로 쓰면 안된데이?”
털보 형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는 목격자가 나왔어.”
“그게 정말입니까?”
그의 말을 듣고 중현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백광민은 표정은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새벽에 공원에서 나오는 남성의 모습을 봤다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 근처에 살던 주민인데, 그자의 인상착의를 대충 들을 수 있었다는 거 아이가.”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키나 체격, 옷 등은 똑똑히 보았다고 한다. 중간 정도의 체격에 키는 175정도. 머리는 짧은 편이고 짙은 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라는 말을 들으며 중현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갔다. 그 사람이 본 것은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현의 심정을 알지 못한 형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마냥 허겁지겁 도망치고 있었다고 하데. 아마도 틀림없을 기다. 인제 그놈도 슬슬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니, 곧 붙잡을 수 있을 기라.”
형사가 하는 말이 중현의 귀로 들어와 그대로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의심스럽게 보이지 않기 위해 중현은 곧 정신을 차리고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다음날. 신문사 근처에 있는 카페에 앉아 기사를 쓰며 중현은 현재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았다. ‘용의자1’은 예고대로 여학생을 살해했고, 그 현장에서 자신은 기절해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나오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우연히 목격되었다. 얼굴이 들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언제라도 자신이 용의자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혹시라도 정신없는 와중에 놀이기구에 지문이라도 묻어버렸다면…….
체포되었을 때 블로그에서 만난 ‘용의자1’에 대한 이야기를 쉽게 할 수도 없다. 그자가 공원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제보하지 않았냐고 비난을 받고 의심을 사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은 굉장히 곤란한 상황에 놓여있다. 본래는 피해자의 가족이라는 관계 밖에 없었던 자신이 용의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건에 관련될 위기였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자, 도저히 태평하게 기사나 쓸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숨을 깊게 쉬며 앉아있을 때 누군가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준영 선배가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편집실에 물어보니 경찰서나 여기에 있을 거라고 하더구나.”
그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중현은 문득 그의 안경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배, 안경 바꾸셨군요.”
“어. 얼마 전에 부서져서 말이야.” 준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중현에게 물었다. “그보다도 또 사건이 일어났다던데. 어떻게 된 거야?”
“그 말 그대로죠…….” 중현은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피곤했다.
“최기혁에 대한 건 조사해봤어?”
“네.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봤는데…….” 며칠 전에 기자 선배인 이영훈에게 부탁했었던 것을 떠올렸다. 부탁한지 이틀 후에 그가 경과보고를 해 주었는데, 현재 거주지 파악이 쉽게 되지 않는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했었다.
중현은 그의 말을 전해주었다. 준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맙다. 부탁한대로 해줘서.”
“그러고 보니 선배.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에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중현은 말을 꺼냈다.
“최기혁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죠? 키랑 체격은 어느 정도에요?”
“응? 그런 건 왜 물어봐.”
“왜 있잖아요. 이번 사건에 나온 목격자의 말로는 공원에서 도망친 자가…….”
“잠깐만 기다려. 목격자가 있었단 말이야?”
그가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딜 봐도 목격자가 있었다는 말은 전혀 없었는데.”
순간 중현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백광민 형사가 그 사실은 기사화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 말대로 목격자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중현은 어제부터 오늘까지 정신이 없어서 뉴스를 보지도 않았다. 다른 신문들도 모두 그 건에 대해서 보도를 하지 않은 것일까.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중현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주었다. 발견된 사람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빼고. “경찰의 친한 사람에게 몰래 들은 이야기니까 비밀로 해주셔야 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준영의 표정이 무척 심각해져서 중현은 깜짝 놀랐다. 그의 머릿속에서 사고가 폭주라도 하는 것인지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중현에게 말했다.
“이만 가봐야겠다.”
“선배?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라도…….”
“아무것도 아냐. 그냥 조금 확인할 게 있어서. 그리고 미안하지만……. 최기혁에 대한 조사는 그만해도 될 거야.”
“선배?”
준영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중현은 한동안 어리둥절해 하며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갔지만 경찰서에서도, 김준영에게서도, 새로운 소식은 없었다. 목격자에 대한 건 여전히 보도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사본부에서 제공되는 보도 자료에 언급도 되어 있지 않았다. 백광민 형사는 범인이 자신이 목격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며 그가 방심하도록 만들려는 수사 계획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목격자까지 나왔지만-목격된 것이 범인이 아니기는 하지만-이렇다 할 범인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드러나지 않는다. 목격 정보를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탐문 조사중인 경찰에게 헛다리를 짚고 있다는 말을 중현은 할 수 없었다.
준영에게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는 도대체 자신의 말로부터 무엇을 깨달은 것일까.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자신의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난 후 도시는 공포에 휩싸였다. 15년 전과 마찬가지이다. 범인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경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 끓었고 시민 단체에서는 자경단을 만들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10대의 딸을 둔 부모들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두려워했고 매일 자가용으로 자녀들을 태우고 다녔다. 거리의 공기는 온통 긴장되어 있었다. 밤이 되면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어 빈자리를 금방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허전함이 들었다.
그런 와중에서 중현은 자신이 범인으로 체포되는 악몽을 몇 번 꾸기도 했다.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놈을 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놈을 어둠으로부터 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매일 같이 블로그를 살펴보았다. 그가 또 자신에게 접촉해 올 방법은 인터넷일 것이다. 중현은 방명록 게시판은 물론이고 자신이 올렸던 글과 다른 곳에 올렸던 기사와 글들에 ‘용의자1’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네 번째 사건이 발생하고 5일 뒤. 중현은 악몽 같았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비극의 서막을 알리는 종소리와도 같이, 중현의 귀에 알림 음이 들려왔다.
채팅 창이 눈앞에 떴다. 중현은 모니터를 노려다 보았다. ‘용의자1’이 말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
천연덕스러운 이모티콘을 보며 중현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동안 잘 지냈나?]
‘이 자식……. 웃음이 나오나?’
[왜. 나는 내 맘대로 웃지도 못하나.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게 목적이었으면 여자 아이를 또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그런데 왜 죽인거야!’
[잠깐, 잠깐. 함정이라니. 내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용의자1’은 영문을 몰라 했다. 중현은 그에게 자신이 혐의를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용의자1’은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를 ㅋ의 숫자로 표현했다.
[ㅋㅋㅋㅋㅋㅋ 그거 참 웃기는 상황이군. 정말 웃겨!]
‘그럼 넌 그럴 생각은 없었다는 건가?’
[그래. 거기 자빠져 있었던 건 네 자유지, 내가 그렇게 만든 건 아냐. 나는 전부터 그 여자애를 죽일 생각이 있었거든. 표정이 맘에 안 들었었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학생을 죽인 동기를 말하고 난 뒤에도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로서는 곤란하군. 너에게 도움을 주려고 한 게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됐으니까.]
‘도움 같은 소리는 집어치워! 쓸데없는 말은 이제 하지 않겠어. 대체 넌 누구냐.’
[하하. 넌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 거야?]
중현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난 알고 있어. 너의 이름은……. 최기혁이다. 그렇지 않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중현은 계속해서 모니터 너머의 상대에게 말을 전달했다.
‘나는 봤어. 그 날……. 집 앞에서 누나에게 뺨을 맞고 돌아서던 너의 모습을. 그때 내가 본 너의 눈은…….’
중현은 떠올리고 있었다. 골목길에서 우는 고양이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늦은 시각이었다. 그 시간까지도 최기혁은 집 앞에 서서 누나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이 나가서 꾸중을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의 집념이 무섭기까지 했었다.
최기혁은 결국 누나가 집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돌아갔다. 그녀에게 비참하게 버림을 받고서. 그는 누나를 원망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섬뜩할 정도의 차가움이 깃들어있는 것을, 중현은 보았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나를 최기혁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네 자유야.]
중현은 그가 대답을 회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용의자1’은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쩌면 나는 네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도 몰라. ㅋㅋㅋ 너와 네 누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일지도 모르지…….]
‘무슨 말이야 그게.’
[그거 알아? 컴퓨터란 건 참 좋은 수단이야. 상대방의 얼굴을 몰라도 대화를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상대가 겉으로는 아무리 친절해보여도 모니터 너머의 진실은 직접 마주하기 전엔 알 수 없는 법이야. 인터넷상으로 강한 척 지껄이는 녀석들 중에 실제로 보면 형편없는 놈들인 경우도 상당히 많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말이야. 자,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느 쪽일까?]
“......”
중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좋은 걸 가르쳐주겠어. 조만간 넌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될 거야.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렇게 저번과 마찬가지로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났다. 중현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저번의 경우도 있어서 익숙해졌다. 대화 저장 버튼을 눌러서 대화 내용을 텍스트 파일로 저장했다. 그리고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기 위해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그대로 무의식에 몸을 맡겼다.
-조만간 넌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될 거야.
대체 그게 무슨 말일까. 다음날 일어난 중현은 아침부터 그의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다는 말은, 자기가 범인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지만 중현은 ‘용의자1’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보낸 사진 파일, 대화 기록들은 모두 자신의 컴퓨터에 남아있다. 그 사진들은 범인이 아니라면 결코 찍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그동안 나눈 대화를 봐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은 결코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중현은 자신의 블로그를 살피면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가 감추고 있는 속내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더 이상 그가 방명록에 남긴 글도 없었다.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중현은 블로그의 업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수많은 일들로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방명록에는 평소에 즐겨 찾는 누리꾼들이 남긴 격려의 글들이 게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던 중현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영훈 기자를 찾아갔다. 중현을 본 영훈이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여어. 저번에 부탁했던 거 말인데.”
최기혁에 대한 조사 이야기였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거주지가 어딘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사람을 수소문 끝에 찾아냈거든.”
“고맙습니다. 그보다도, 또 다른 일로 부탁드릴게 있습니다.”
중현의 급한 표정을 보며 영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요즘 많이 무리하는 거 아냐? 안색이 아주 새파란데.”
그의 말을 무시하고 중현은 그에게 작은 쪽지를 건넸다. 거기엔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제 블로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에요. 그걸로 11월 1일에 남겨졌다가 삭제된 방명록 글을 추적해주세요.”
그 날은 ‘용의자1’이 처음으로 글을 남겼던 날짜였다.
“아니. 그런 거라면…….”
“선배가 알고 있는 그 능력 있는 사람에게 부탁하든지, 어떻게든 해주세요. IP추적이든 뭐든 해서 말입니다. 부탁합니다.”
“그래, 뭐.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하지만 어째서 그런 걸?”
중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여고생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과 채팅을 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조사하면 그 사실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중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이 다른 이에게 알려지면 형사적 책임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그자를 찾아낼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당장 경찰에 알리고, 아이피 추적도 경찰에 맡겨도 되지만 중현은 당장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용의자1’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는 어쩌면 그가 자수할지도 모른다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가 말하던 분위기로 볼 때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 대해서 최대한 알아보면서 그자가 말했던 ‘조만간’이 될 때까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자가 누군지 알아낸다면 그땐 곧바로 경찰에 알리면 된다.
그 날 밤, 중현은 방명록에 새로운 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샤워를 끝마치고 막 잠에 들려던 찰나에 한 번 더 블로그를 확인하던 중 발견했다.
작성자 : 용의자1
작성 시간 : 2010년 12월 1일
걱정하지 마. 미리 한 예고를 지키지 않으면, 매너가 아니지.
대체 무슨 속셈이야. 중현은 모니터에 대고 그렇게 물었다. 녀석은 금강공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당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녀석의 그런 오만함이 그 자신을 붙잡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중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중현은 초조하게 걸어 다니며 수사본부에서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지는 않는지 귀를 쫑긋 기울였다. 백광민 형사에게도 먼저 연락을 해봤지만 사건에 새로운 진전이 생기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자가 말한 대로라면 분명 뭔가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중현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대로 날은 저물었다.
중현은 맥이 풀린 채로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에 방을 나섰다. 따끈한 김치찌개의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그동안 사건으로 바빠서 집에서 저녁 식사를 제대로 한 적이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중현이 매일 같이 늦은 시각에 들어오는 걸 염려했다. 그래서 집에서 하는 식사만큼은 제대로 챙겨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중현은 가슴이 찡했다. 중현은 아버지의 모습을 살폈다. 아버지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아도 늘 자신의 걱정을 해주고 계셨다.
누나가 죽은 뒤로, 가족들 사이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린 것 같았다. 그 속이 너무 깊어서 세월이라는 모래로도 도저히 다 메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조금씩 마음속의 빈틈을 채우려는 노력을 해 왔다.
중현은 부모와 텔레비전을 보며 평범한 일상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 있을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표정이 변해가는 것을 중현은 보았다.
“저게 도대체…….”
중현도 그의 시선을 따라가 텔레비전의 화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눈도 엄청나게 커졌다. 맞은편에 있던 어머니도 놀라서 입으로 손을 가져갔다.
[특보-여고생 연쇄살인 용의자 김준영, 긴급 체포]
7
이따금 몸이 자기 것 같지 않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박중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뺨을 어루만졌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몸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멀찍이서 감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 상상할 여유는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특보-여고생 연쇄살인 용의자 김준영, 긴급 체포]
화면의 3분의 일을 커다랗게 쓰인 문구가 가리고 있었다. 영상은 무척 혼잡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몰려있고, 카메라는 힘겹게 자신의 자리를 잡아나간다. 이어서 시점이 바뀐다. 경찰서 건너편 건물 옥상 위에서 안정적인 구도로 입구를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자 그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그리고 그곳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쉬워졌다. 달이 중천에 떠 있을 만큼 늦은 시각이었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화면인데도 불구하고 취재진들이 밝혀둔 조명의 불빛 때문에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이곳은 금정경찰서 앞입니다. 경찰은 최근 발생한 여고생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김준영을 긴급 체포했습니다. 아, 지금 용의자가 서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급박한 목소리가 화면과 함께 풍부한 현장감을 만들어냈다. 중현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일거야. 분명 거짓말이라고.
들어오는 차량을 피해서 사람들이 홍해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주차장으로 들어선 경찰서 소속의 표시가 되어 있는 승합차의 문이 열렸다. 재킷을 입은 험상궂은 인상의 형사들이 먼저 내리고, 그 뒤를 이어 팔을 붙잡힌 용의자가 끌려나오고 있었다.
중현의 눈이 더욱더 커졌다.
용의자가 체포된 현 상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 아나운서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눈은 걸어가는 용의자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쫓았다.
준영의 그 특유의 여자처럼 긴 머리는 형사들에게 거칠게 다뤄졌기 때문인지 많이 헝클어진 것 같았다. 머리카락에 이따금 얼굴이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4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강간한 극악무도한 살인범의 이미지에 걸맞은 인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스튜디오에 있는 여자 아나운서도 그런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기자들 사이에는 성난 군중들이 섞여 있었다. 사실 기자들도 분별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형사들이 거칠게 뿌리치는 것에 굴하지 않고 준영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누군가가 “죽어도 싼 새끼야!”라고 격하게 외치는 소리가 방송을 통해 그대로 나갔다. 사람들의 분노가 그 자리를 더욱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흥분과 떨림. 그 모든 감정이 중현의 피부에 와 닿았다.
그러나, 그러한 소용돌이의 와중에도 이질적인 요소는 존재하고 있었다. 현재 사태의 주역이자 가장 유력한 사건 관련자로 경찰의 수사망에 잡힌 김준영은 용의자로써 체포되었다. 보충 자막이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보태주고 있었다.
[용의자의 자택에서 피해자들을 살해하는데 사용된 노끈 발견]
준영은 겉모습이 흐트러지기는 했으나 전혀 주눅 들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동안 수많은 흉악범들이 체포되는 장면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고는 했다. 그런 인간들은 대체로 죄책감 때문인지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그러나 준영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당당하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시선을 똑바로 정면에 두고 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더 분노할지도 모른다. 카메라가 빠르게 돌아가더니 울음을 터트리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붙잡았다. 아나운서가 설명한다. 살해된 피해자들 중 한사람의 어머니라고. 용의자가 떳떳하게 경찰서로 걸어가는 사진이 ‘뻔뻔하다’라는 수식어와 함께 기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중현에게는 뻔히 보였다.
이어서 리포터의 설명은 계속된다. 김준영은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하던 중 용의선상에 오른 뒤 결정적인 증거가 발견되어 긴급히 체포 영장이 신청되었다. 구속된 용의자는 수사팀에 의해 철저하게 심문을 받고 범인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러니 그가 범인이라고 100프로 확실시 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방송국의 모든 사람들은 김준영이 99.9프로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용의자로 체포된 시점에서 이미 그는 전 국민들에게 여자들을 살해한 잔인한 살인마로 낙인이 찍혀버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찰은 용의자와 피해자들 간의 관계와 알리바이 등을 중심으로 조사를 해나갈 방침입니다. 자세한 소식이 들어오는 데로 전해드리겠습니다.”
중현은 텔레비전을 껐다.
“그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화면 속의 사람들과는 다른 심정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그동안의 준영의 행동을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당장 무슨 수를 써야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중현은 벼락을 맞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모를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컴퓨터를 켰다. 그는 알고 있었다. 범인이 김준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15년 전, 자신의 누나를 죽인 사람도 김준영이 아니라는 것을. 왜냐하면 범인은 바로 이 모니터 너머에 있으니까.
그때 문득 책상 옆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확인해보니 새로운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시간 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모든 걸 알아냈다. 문자 보는 대로 연락해다오.]
김준영이 보낸 것이었다. 통화 기록을 확인하니 부재중 수신 통화도 여러 건 있었다. 모두 두 시간 전에 준영이 자신에게 건 것이었다.
중현은 어리둥절하게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모든 걸 알아냈다니. 무슨 말일까. 준영은 카페에서 자신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알아볼 것이 있다며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뭘 하고 있었는지는 뻔하다. 누나와 다른 세 명의 여학생을 죽인 살인범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범인이 누군지 알아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텔레비전에서 그가 용의자로 체포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말인가.
인터넷을 켠 중현은 속보 기사의 제목들을 보게 되었다. 그중 추가 증거들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클릭해서 읽어 보았다.
<김준영 용의자 체포……추가 증거들 속속 발견돼>
2010년 12월 2일 오후 7시, 부산 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여고생 연쇄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김준영(33)이 체포되었다. 용의자는 15년 전 살해된 피해자 박 모양과 절친한 사이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경찰은 피해자 주변인들을 조사하면서 그를 잠재적 용의자 리스트에 오래전부터 올려두었었다. 경찰 관계자에 의하면 경찰에 김준영이 범인이라는 익명의 제보가 들어와서 경찰이 조사를 나섰다가 증거들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피해자들을 교살하는데 사용한 끈과, 15년 전 살해당한 박 모양이 입고 있었고 사건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피해자의 옷가지가 함께 발견되었고 경찰은 추가적인 조사를 계속 실시하고 있다.
용의자는 곧 부산 금정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을 예정이며 경찰은 곧 다른 피해자들을 살해한 혐의 등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또한…….
믿을 수 없다. 말도 안 된다. 준영 선배가 그럴 리가 없다. 중현은 그렇게 속으로 읊조렸다.
자신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도 함정에 빠진 것이다. ‘용의자1’이 꾸미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인가. 그는 조만간 범인을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세상 사람들이 김준영을 범인으로 알게 되었다. 준영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리기 직전에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하지만 중현은 준영이 범인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모니터 너머의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용의자1’은 말했었다. 그렇지만 이런 형태로 보여줘 봤자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중현은 자신의 블로그에 접속했다.
“당장 나와. 어디 있어, 이 자식아.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라고!”
중현은 분노하여 외쳤다. 그런 그의 부름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알림 음이 들려왔다. 또다시 ‘용의자1’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중현은 확신했다. 경찰에 잡힌 준영이 자신과 대화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므로, 그가 범인일 리가 없다는 것을.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엉? 무슨 짓이냐고, 이 새끼야!’
중현은 다짜고짜 그에게 덤벼들었다.
[무슨 짓이냐고? 내가 말했던 그대로야. 범인이 누군지 가르쳐주겠다고 했잖아. 증거도 모두 있겠다, 피해자와 가까운 관계이기도 했고, 김준영은 법률적으로 범인이 되는데 전혀 무리가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ㅋㅋ]
‘웃기지 마. 범인은 네 녀석이잖아!’
[그래, 그래. 내가 바로 범인이야. 네 누나와 다른 여학생들을 죽인 건 모두 내 짓이라고. 흉기와 치마를 김준영의 집에 갖다 놓은 것도 나의 짓이고. ㅋㅋㅋㅋㅋㅋ]
“......”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놈을 잡기 위해 어떤 수를 쓰는 것이 좋을까. 중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모든 게 나 때문인가? 너는 나 때문에 이런 짓들을 하는 거야?’
[흐흥.]
그가 짤막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네 누나가 죽은 것도, 그리도 또 다른 여학생이 죽은 것도, 모두 너 때문일지도 몰라. 물론 오해는 하지 마. 너에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지?’
[그런 건 없어. 난 그저 나 자신을 위해서 살인을 저지른 거니까.]
침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적으로 대해봤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를 모니터 밖으로 끌어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중현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래……. 그렇다면 모습을 드러내. 당장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
[뭐라고?]
‘너는 너 스스로를 위해 이 모든 일을 저질렀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오직 나에게만 똑똑히 보여주었지. 대체 왜 그랬던 거지?’
[......?] 그가 물음표를 남겼다.
‘나는 언제나 지켜보는 입장이었어. 누나가 죽고 난 뒤로 줄곧. 지금껏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털보 형사님이 나에게 말했지. 사람은 남의 기분 따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어.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지.’
중현은 거기서 말을 끊고, 곧바로 다시 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자 일을 선택한 거야……. 취재하는 상대의 기분을 완전히 모르더라도 기사는 쓸 수 있어. 남의 마음을 몰라도 할 수 있는 일……. 그저 겉모습만 철저하게 관찰하는 것.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가 다른 이의 마음과 공감하려고 하지…….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을 한다고.’
[그래서?]
‘넌 그런 나를 잘 알고 있었던 거야.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 상관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기자인 나에게 사실들을 털어놓더라도 경찰에 쉽게 붙잡히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만 넌 알고 있었어. 내가 상대방의 기분에 공감하려고 항상 노력한다는 사실을…….’
[......]
‘그러니까 넌 자신의 생각을 내가 조금이라도 공감하기를 바랬던 거겠지. 그래서 너는 말했던 거야.’
-좋은 걸 가르쳐주지
[그래서. 어째서 날 만나려는 거야?]
중현은 ‘용의자1’에게 채팅으로 대답했다.
‘공감해주겠어. 너와 같은 심정을 느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어. 그러니까……. 너를 취재할 수 있게 해줘.’
[뭐라고?]
‘……큰 특종을 쓸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직접 너를 만나서 보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리고 한동안 조용했다. 잠시 뒤 ‘용의자1’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소리가 중현의 귀에 들리는 듯 했다. ㅋㅋㅋ가 아니었다. 용의자1은 정말로 크게 배를 잡고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하하하하하! 굉장해. 정말 굉장해. 그리고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어!]
중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반쯤은 넘어온 것 같았다.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심장 속에서 망치가 쿵쾅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어. 그럼 당장 만나자고. 장소는 네가 지정해.]
‘지금 당장?’
[그래. 나가겠어. 너를 만나주겠다고.]
좋았어! 중현은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용의자1’를 만날 장소를 생각했다. 현재 시간은 7시 30분이었다. 8시에 부산대학교 정문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중현은 백광민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털보 형사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용의자가 니랑 친했던 사이였재. 이런 일이 생겨서 정말 유감스럽데이.”
중현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준영 선배는……. 지금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있다. 뚱한 얼굴로 앉아가지고는 뭔 생각을 그리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구마.”
그는 정말로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 것일까. 중현은 심호흡을 한 뒤 광민에게 말했다.
“형사님. 잘 들으세요……. 그 사람은 범인이 아닙니다.”
“뭐라꼬? 니 무슨 말 하는 기고?”
“자세한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제가 범인이 나타날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30분 뒤, 부산대학교 정문입니다. 빨리 형사들을 보내주세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형사의 말을 뒤로하고 중현은 전화를 끊었다.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벌써 어두컴컴한 밤길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부산대학교 정문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곳의 거리엔 밤이면 밤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중현은 잠시 뒤에 커다란 소동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사람들의 평온한 표정들을 중현은 하나하나 관찰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공원에서와 같은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중현은 당당하게 정문 한가운데에 서서 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모든 것을 끝낼 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들을 무심코 들여다보면서 중현은 생각했다. 평범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살인 사건과 관련을 맺게 될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크게 뒤흔들어 놓을 사건과 마주하게 되면,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떤 식으로 변해가게 될까.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용의자1’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중현은 맞은편 건물로 걸어가, 외벽의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거울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자신의 모습. 그것을 바라보며 중현은 누나가 죽고 나서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시간이 요동쳐왔는지를 떠올려보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중현은 휴대폰을 꺼냈다. K일보의 이영훈 기자였다.
“여보세요?”
“어, 중현이냐? 부탁했던 것들, 다 알아내서 전화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중현은 빠른 눈길로 정문 주변을 살폈다. 그자가 곧 나타날 것이다.
“우선 그 최기혁이라는 사람 말인데…….”
그의 말을 들으면서 중현은 눈을 멈추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혹시 벌써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인파 속에 몸을 숨긴 채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 사람, 지금 한국에 없어.”
“네?” 중현은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되물었다.
“13년 전에 가족들과 함께 외국으로 나갔다는군. 당시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서 살았던 이웃의 말에 의하면 네 누나가 죽고 나서 크게 상심해서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데. 그래서 요양 치료도 받고 하다가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 떠나기로 했단다.”
그의 소재지가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하던 준영의 말이 생각났다. 영훈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 뒤로 한국에 들어온 적은 없다고 하니, 여전히 미국에서 살고 있을 거야.”
“그렇군요…….”
“응. 그런데 말이다. 네 블로그도 조사를 해 봤어……. 네가 말한 대로 방명록에 남겨졌다가 지워진 기록이 있더구나.”
중현은 몸을 긴장시켰다. “말씀하세요.”
“그래. 인증되지 않은 익명의 사용자라도, IP주소는 서버에 남으니까 말이야. 그걸 추적해서 그 글을 남긴 사람의 주소를 알아냈지. 그 주소는…….”
영훈은 주소를 말했다. 그것을 듣고 중현은 한동안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건...저희 집 주소잖아요?”
“......” 영훈은 침묵했다.
“그, 그럼 혹시 채팅을 한 기록은 찾으셨습니까? 지난 한 달간 있었던 채팅 기록 말이에요.”
“채팅?”
영훈이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블로그 아이디로 어떻게 채팅을 한다고 그래? 그리고 그런 기록은 전혀 없었어. 내가 찾은 건 방명록의 글뿐인데……. 도대체 어떻게 된…….”
중현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그자를 찾았다. 시간은 어느덧 약속했던 8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나기로 한, 누나와 세 여학생을 살해한 범인의 모습을 중현은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때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털보 백광민 형사가 그곳에 서 있었다.
“중현아…….”
그의 눈이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중현은 어째서 그가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김준영이 모든 걸 자백했다……. 그는 그동안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알리바이를 조사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카페에서 뛰쳐나간 뒤로 연락이 되지 않던 때. 그때 그는 조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바이라고? 물론 그것은 진범의 알리바이이겠지. 그리고 그 진범은…….
“그는 예전부터 의심해왔다고 했어. 하지만 확신을 할 수 없었지. 그가 가지고 있었던 용의자 리스트 맨 위에 있었던 사람은…….”
준영은 자신과 더불어 누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눈치 챘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현은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돼요. 그런 거, 도저히 말도 안 됀 다구요!”
그럴 리가 없다. 그런 것은 말도 안 된다. 중현은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중현은 생각해보았다. 세 번째로 살해된 소녀를 발견했을 때를. 소녀가 살해당한 건 11월 1일 오전 0시에서 1시 사이. 그날 밤 나는 분명히…….
자신의 이마로 손을 가져갔다. 어라? 나는 그날 밤……. 뭘 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은 하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어머니에게 했던 말. 술 좀 먹어서 기억이 잘 안나.
마찬가지였다. 네 번째로 살해당한 소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것도, 자신이었다. 15년 전, 두 번째 사건이 있었던 날의 기억도 흐릿했다. 하지만 왜? 왜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엔 15년이라는 시간차가 생긴 거지? 이유는 당연히 알 수 있었다. 그 15년 동안, 나는 부산에 있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가 공부를 하고 기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리고 내가 부산으로 돌아오고 난 뒤, 사건은 또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럼 어제 밤에는 뭘 했지? 어제 밤에는 분명 방에 있었다. 대화를 끝내고 난 후에는 그대로 쓰러져서 잠든 기억밖에 나지 않았다. 다른 날들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이 또다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밤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밤에 무엇을 했는지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중현은 떠올릴 수 없었다.
[궁금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자가 직접 말을 걸어왔다. 중현의 머릿속에서, 아주 익숙한 목소리로.
[15년이나 방 안에 누나의 치마를 고이 간직하고 있었어. 누나는 너에게 있어서 무척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왜……. 도대체 왜…….’
[기억해? 나는 누나를 좋아했었어. 물론 남매로써 말이야. 누나는 언제나 하얀 꽃처럼 밝았던 사람이었어. 하지만 어느 날…….]
어느 날……. 중현은 보았다. 어두워진 그녀의 표정을. 누나가 그렇게 슬픈 기분이 된 것을 중현은 참을 수 없었다. 다른 남자 때문에 우울해하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옷이 벗겨지고 겁에 질린 누나의 표정은 무서워하고 있었지만 중현은 그녀가 분명히 기뻐할 거라고 여겼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었다. 중현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다른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불현 듯 눈에 띤 그녀들의 표정에는 어두운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그녀들을 밝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중현 이외의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현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봐, 누나. 일을 하면서 중현은 늘 중얼거렸다.
아직도 날은 밝아, 누나.
중현은 건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백광민 형사가 그에게 수갑을 채우려 한다. 모든 순간들이 천천히 흘러갔다.
이따금 몸이 자기 것 같지 않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었다. 중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뺨을 어루만졌다. 또 다른 자아가 몸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멀찍이서 자신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멍청하게 보일지 상상할 여유는 머릿속에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중현은 드디어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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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다음 추리연구회 카페엔 처음으로 올리는 글입니다.
네이버 카페에서도 글을 올리며 조언을 받고 있는데요...이번에 쓴 글은 분량이 중편이 되어서
여기에도 한번 올려서 여러분들의 귀중한 조언을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만난 익명의 상대방이 살인범이었다...라는 데서 착상을 시작해서
플롯을 써봤는데요. 트릭이 아무래도 리처드 닐리의 작품과 비슷해졌다는 건 인식하고 있습니다...
좋게 보일지, 아니면 식상하게 보일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겠죠...?
최대한 '스릴있고 뒤를 읽어나가게 만드는 이야기'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쓴 건 어떨지 모르겠네요
모쪼록 재밌게 읽으셨기를...
첫댓글 다중인격인 거예요? 글을 시작한 첫문장이 가장 큰 단서였군요. 전 리처드 닐리의 작품을 몰라서 제대로 낚였답니다. ㅎㅎ 잘 봤어요.^^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하지만 화자 본인이 범인으로 드러나게 되는 동기가 얼른 납득되지 않는군요. 본인과 체팅을 하는 과정 도 일방적인 것 같고요...왜 누나를 죽여여서 기쁘게 하려 했는지, 다른 소녀들을 죽이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로...정신병적인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좋은 지적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