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과 창조론에서 가장 큰 관심의 촛점은 역시 인류의 조상, 즉 인류의 기원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자 우스트라는 주교 부인이 "맙소사, 인간이 유인원의 자손이라니, 사실이 아니길 바랄 수 밖에, 그러나 만일 사실이라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진화론자들이 창조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악성 루머이다. 과학사에는 이런 진원을 알 수 없는 소문들이 사실인 것처럼 일반인들 사이에 퍼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생물이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진화하냐는 가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밝혔으나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원숭이로부터 진화한 것은 많은 중간상태 화석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진화론에서는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했거나 원숭이와 동일한 조상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는 화석 증거들을 라마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직립원인 등으로 분류해서 제시하고 있다.
사람은 과연 진화론의 주장처럼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인간은 여타의 동물들과는 다르게 창조되어 근본적으로 동물과 완전히 구별된 존재인가? 아래에서는 근래에 와서 화석이 대량으로 발굴되고 화석의 절대연대측정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종래의 화석해석이 변해가고 있는 것을 소개하며 이들을 어떻게 진화론적 입장에서 재조명할 수 잇는지를 살펴 본다.
1. 인류화석에 대한 해석
진화론에서는 원숭이로부터 현대인까지의 모든 형태들을 유인원(류인원,Anthropoid)이라 부른다. 이들 유인원의 화석자료는 비료적 많이 발굴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측정이 어려워 인류 진화론자나 화석학자들 간에 이견이 많다.
(분류 단위 명칭)
계 (Kingdom) 동물계 (Animalia)
문 (phylum) 동물문(Chordata)
강 (class) 포유류강(Mannalia)
목 (order) 영장목 (Primates)
과 (family) 호미니데과(Hominidae)
속 (genus) 인류속 (Homo)
종 (species) 슬기사람 (Homo sapiens)
1) 진화의 기준
사람과 동물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골격학적, 형태학적 차이점은 사람만이 직립보행한다는 것인데 현재까지 직립보행의 진화과정을 보여주는 화석상의 증거는 없다. 그래서 원숭이로부터 사람으로의 진화과정을 설명할 때에는 치아의 배열형태, 두개골의 용적, 또는 안면 경사각 등이 중요한 해석기준이 되어왔다.
먼저 치아를 살펴보면 원숭이의 치아 배열 형태가 말굽형(U자형)인데 반해 사람은 포물선 형이므로 이것이 턱뼈의 화석이 나올 때 원숭이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판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치차의 숫자가 오나전하지 못하면 판단이 어렵게 된다. 실제로 오래된 치아의 화석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발굴되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여러조각으로 부서져서 발굴되기 때문에 이들을 재구성할 때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며 따라서 부정확하게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다음으로 유인원의 진화순서는 안면의 경사각에 따라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즉 원숭이에 가까울수록 안명경사가 완만하며 사람에 가까울수록 수직 형태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발굴되는 대부분의 유인원 화석의 안면 경사각은 현존하는 사람이나 원숭이들의 무리로부터 찾아낼 수 있는 변이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눈두덩이의 두끼로 진화의 기준으로 사용되건 한다. 즉, 원숭이에 가까울수록 눈두덩이 두툼하고 사람에 가까울수록 눈두덩이 두툼하고 사람에 가까울수록 눈두덩이의 변화도 현존하는 인종들 간에 존재하는 정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예를들면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유난히 눈두덩이가 두텁다. 눈두덩이 두터울 수록 덜 진화되었다는 해석은 백인들의 편견에서 나온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눈두덩이 역시 진화의 절대적인 척도는 될 수가 없다.
또 화석은 골격만을 보여주고 생존시 실제 형태와 근육 및 신경 계통은 보여주지 못하므로 화석을 보고 생물의 나이, 성별등을 추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특히 오래되어서 신체의 일부분만이 화석으로 나올 때 그것으로 화석의 생전 모습을재구성하는 데는 상당한 오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두개골의 한조각으로부터 두개골의 용적, 두개골 윗부분과 턱벼의 조합관계, 털의 존재 정도 등을 유추하는데는 상당한 오차가 있을 수 밖에 없다.
2) 진화론적 분류
그러면 과연 인류는 진화했는가? 아니 진화의 증거가 있는가? 이를 위해 먼저 현대 생물학에서 인류에 대한 분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 진화론에 따르면 인류는 고릴라, 침팬지, 원숭이와 함께 영장목 (Primate)에 속한다. 목(order) 은 생물의 분류 단위로서 강(class)과 과(family) 사이에 있다. 영장목은 진원아목(Anthroppidea)과 원원아목(prosimii)으로 나눈다. 진원아목은 다시 코의 넓고 좁음에 따라 광비원류와 협비원류로 나눈다. 진화론에서는 원숭이 등 다른 모든 영장류들은 원원아목 중의 하나에서 진화했다고 본다. 현존하는 원원아목에서는 여우원숭이(lemur),늘보원숭이(loris), 안경원숭이(tarsier)등이 있다.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진화된 계통도 자료가 충분치 않아 학자들 간에도 여러가지 설이 있다.
3) 화석에 대한 상반되는 견해
진화론에서는 여러 유인원을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형태로 본다. 계속적으로 변하는 유동적인 진화론에서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명체로부터 어류, 양서류, 파충류, 조류 및 포유류로 그리고 포유류에 속하는 원숭이는 최후의 진화단계인 사람으로 점진적이고 연속적인 진화를 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화석으로 볼 때 불연속이 없어야 하므로 진화론에서는 원숭이와 사람을 이어주는 중간형태가 있어야 한다는 가정 아래 화석을 찾고 있다. 이에 반해 창조론에서는 처음부터 사람은 사람대로, 원숭이는 원숭이의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보고 사람과 원숭이 사이에는 중간형태 화석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예측한다. 창조론에서는 오늘날 중간형태라고 제시되는 화석들은 원숭이 또는 사람 중 어느 한편이지 중간형태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면 전세계적으로 화석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화석은 과연 진화의 "빠진 고리" 즉 중간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가? 1859년 다윈의 진화론을 발표했을 때 다윈은 그 당시까지 발굴된 화석들이 자기의 학설을 지지하기에 충분치 못함을 시인하였는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 화석이 발견된 오늘날 역시 사정은 그 당시와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한 뉴스워크(Newsweek)는 "화석기록에서 빠진 고리(missing link) G 황째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과학자들이 종과 종사이를 이어주는 전이형태의 화석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찾지 못하고 설명한다."고 오늘날의 현실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 즉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형태뿐 아니라 모든 생물의 종사이를 연결하는 중간형태도 없는 것이 화석 기록상의 법칙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점진적인 진화를 주장하는 진화론보다는 모든 종이 처음부터 각각 종류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창조론적 주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제까지 진화론에서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형태라고 주장해온 유인원 화석에 대하여 살표본다.인류의 기원에 대한 수 많은 화석들이 발굴되어있으니 아래에서는 대표적인 몇몇 화석들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라마피테쿠스(Remapithecus)
1960년대 이전까지 진호론자들이 인류와 비슷한 특징들을 가졌다고 생각한 첫 유인원은 인도에서 최초로 발견되 라마피테쿠스였다. "라마"는 인도어로 "크다"는 의미이고 "피테쿠스"는 "원인"이라는 의미이다.
라마피테쿠스가 원숭이로부터 인류가되는 최초의 혈통에 속히 있었다는 주장을 학계 퍼지게한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하바드 대학의 필빔(David pilbeam)교수와 예일 대학의 시몬즈(El-wyn Simons)교수를 비롯한 몇몇 진화론자들을 들 수 있다. 라마 피테쿠스는 이빨 몇개와 턱조각등 아주 단편적인 화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최초의 라마피테쿠스 화석은 1934년 예일대학의 연구학생 루이스(G.Edwrd Lewis)가 인도 서북쪽에 이는 시왈링 언덕(Wiwalik Hills)을 탐사 하면서 발견하였다. 인도에서는 약 12-20명의 것으로 보이는 턱뼈조각 15개와 이빨 40개가 출토되었다. 라마피테쿠스에 속한 화석들은 케냐의 포트 테르난(Fort Teman)에서도 발견되었으며, 그후 라마피테쿠스라고 할 수 있는 화석들이 중국 스페인, 남부 독일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중에서 특히 케냐에서 발굴된 화석은 그 화석이 포함된 지층의 연대가 K-Ar 연대측정법으로 1400만년전의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라마피테쿠스의 대체적인 연대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라마피테쿠스에 대하여 처음에는 필빔과 시몬즈를 비롯한 몇몇 진화론자들만이 그것을 인류의 진화 첫 조상이라고 믿었지만 1960년대에서 와서 인류진화론자들은 대부분 라마피테쿠스를 최초의 호미니드로 인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라마피테쿠스를 최초의 호미니드로 인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그 이유는 라마피테쿠스의 턱 모양과 앞니와 송곳니가 지금의 원숭이의 것보다 작기 때문이었다. 필빔의 말을 빌면 "이 조각난 아래턱에서 우리가 얻었던 라마피테쿠스의 모습은 인류와 아주 닮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 화석이 포물선 형의 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빨은 앞쪽에서 둥그렇게 열을 지어있고, 뒤쪽으로 가면서 차음 넓어지는 모양이 슬기사람을 닮은 형태라고 믿엄싶다. 이 화석은 또한 커다란 이뿌리를 가진 유인원에 비해 인류처럼 작은 송곳니와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라마피테쿠스는 정말 인류의 최초의 진화조상인가? 최근에 라마피투쿠스의 화석을 검토한 과학자들은 라마피테쿠스가 멸종된 원숭이에 불고하며 그들의 치아가 독특한 이유는 사람과의 어떤 진화론적 혈족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서식하고 있었던 지방의 특이한 음식물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라마피테쿠스를 인류의 진화조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대한 반대는 아이로니칼하게도 이것을 처음 인류의 조상이라고 주장한 필빔에 의해 제기되었다. 필빔은 1976년 파키스탄에서 라마피테쿠스의 많은 화석을 발굴하여 턱뼈와 이빨 등을 조사한 결과 라마피테쿠스가 인류의 조상이라면 종전의 자기의 학설을 번복했다. 그는 라마피테쿠스는 인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새로운 독립적 존재인 유인원의 일종이라고 발표하여 진화론 학계에 큰 충격을주었다. 그는 말하기를 과거에는 진화론이라는 선입견에 따라서 소수의 화석만 가지고 인류의 조상이라고 단정하였으나 파키스탄에서 발굴한 많은 화석으로 턱뼈와 이빨을 조립해 볼 결과 자기가 주장한 과거의 학설이 틀렸다는 사실이 판명되었기에, 인류 진화에 대한 종전의 학설을 변경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의 말대로 "(라마피테쿠스) 화석들에서 우리가 실제로 확인한 것은 작은 송곳니들이었으며 나머지들은 그럴저럭 서로 연결된 것이다. 다윈의 설명은 오랫동안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필빔의 종전의 새고운 학설을 비교해 보면 종적 학설에서는 라마피테쿠스와 인류는 한 조상을 갖는 것으로 표시되어 이어서 진화론 계통수와 비슷하지만, 새로운 학설은 원숭이와 사람은 처음부터 서로 별개의 조상을 갖고 있어서 결과적으로 창조론 모델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필빔과 더불어 레빈(Roger Lewin)도 라마피테쿠스를 인류의 조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한다. 미국 스미스소니안 연구소의 고생물학자인 레빈은 초기에 라마피테쿠스의 치아배열을 사람과 비슷한 포물선으로 본것은 잘못된 것이며 도리어 사람도, 유인원도 닮지 않는 V자형이라고 주장했다. 처음에 사람들이 라마피테쿠스의 송곳니가 작은 것을 연모와 무기를 만들고 사용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그는 반대한다."작은 송곳니는 연모사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의미하는 것으로, 질긴 식물성 음식을 씹기 위해 턱을 움직이여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최근 중국의 오여강은 중국 운남성 녹풍현에서 8백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라마피테쿠스의 두개골을 발견하고 이것을 인류와 원숭이의 중간형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을 라마피테쿠스는 근본적으로 인류와 다른 기원을 갖는다는 학설을 제시한 필빔의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어느 이론이 더 타당한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라마피테쿠스를 현 인류와 연결시켜주는 믿을만한 중간형태의 두개골이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 레빈이 말한 것과 같이 "지난 40여년간 축적된 해부학상 그리고 생화학상의 연구결고, 라마피테쿠스는 더 이상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없으며 단지 시바피테쿠스와 더불어 중신세에 번성했던 유인원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3.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lopithecus)
1) 다아트의 발견
인류 진화론자들은 연대로 볼때 라마피테쿠스 다음의 인류조상은 오스트랄피테쿠스(Australopithecus)로 추측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는 이름은 "남쪽의"라는 의미의 "스트라"와 "원인'을 의미하는 "피테쿠스"라는 말이 결합되어 '남쪽에서 온 원인'이라는 것. 이것은 1924년, 동아프라리카에서 디아트(Raymoond a. Dart) 가 최초로 발견하엿으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Africanus) 라는 이름을 붙였다.
디아트는 런던에서 의학과 해부학, 그리고 형질인류학을 공부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위트와터스란드(Witwatersrand) 의과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는 다윈이 "아프리카가 인류진화의 초기 단계 유물이 나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한 것을 믿고 잠비아(이전 로데지아 남부가로 가서 카브웨(Kabwe)의 한광산 갱 내에서 모양을 네안데르탈린을 닮았으나 연대를 알 수 없는 조그만 두개골을 하나 발견했다. 디아트가 발견한 조그만 두개골은 현대인으로 치면 여섯살 정도의 어린이 두개골이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두개골은 전반적으로 원숭이와 비슷하며, 두개골의 몇가지 특징들과 치아는 사람과 비슷하였다. 192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디아트는 이 두개골의 용적은 성장한 고길라의 것과 같으며 머리가 앞으로 매어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척추끝에 평행으로 달려있음을 지적하였다.또한 입천장이 유인원보다 오히려 인간의 것을 닮았고, 비록 치아는 인간의 것보다 크지만 송곳니가 다른 이빨선에서 튀어나오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인간을 닮은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두개골을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본 후에 그는 오스티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를 유인원이라고 결정했다.
그후 이와 유사한 두개골이 몇개 더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치열이 원숭이의 U자형과 사람의 포물선형 중간형태이며 보통 원숭이의 것보다 작았기 때문에 원인이라고 주장되어 왔다.
2) 리키 부부의 발견 - 오스트랄피테쿠스 로부스투스(Robustus)
이것이 발표되자 이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반대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몇년 후에 내과의사이자 고생물학자인 브룸(Robert Broom)과 디아트는 오스트랄피테쿠스 화석을 추가로 더 발견했다. 몇년 후 루이스 리키 부부(Louis and Mary Leakey)는 탄자니아의 올두바이 협곡(Olduvzi Gorge)에서 진잔트로 푸스 보세이(Zinjanthropus bosei) 또는 "동아프리카인"이라고 하는 화석을 발견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그후 이것은 몇년전에 디아트가 발견한 것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리키 부부의 연구는 미국지리학협회(National Geographic Society) 의 후원을 받았고 그 결과를 미국지질학협회지(National Geographic)에 게재하였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리키 조차도 자기들이 발견한 진잔트로푸스 보세이는 몇년 전 디아트 등이 남아프리카에서 발견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변종임을 시인했다.
3) 아프리카누스와 로부스루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하는 것들은 크게 두 종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다소 작은 턱과 치아를 가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이고, 다른 하나는 좀 큰 치아와 턱, 그리고 고릴라와 오랑우탄에서 발견되는 화살촉처럼 뾰족한 목덜미, 앙상한 뼈등을 가진 오스타랄로피테쿠스로부스루스이다. 이 동물들은 두개골 용적이 평균 500cc 정도로서 고릴띵라와 비슷하고 사람의 약3분의 1에 해당한다. 아프리카누스의 두개골과 턱은 원숭이와 비스한데 로부스투스의 경우는 더욱 비슷하다.
로부스투스는 무엇보다도 치열 때문에 보통 원숭이들에 비해 특이하게 보였으며 고생물학자들은 그것들을 유인원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로부스투스의 앞니와 송곳니는 비교적 작고 치열 또는 턱의 곡선이 전형적인 현대의 원숭이보다 더 포물선형이며 U자형이 아니다. 치아의 형태나 모양이 여러가지 면에서 원숭이보다는 사람과 더 비슷하다고 한다. 앞어금니와 어금니는 아프리카누스보다 크다. 아프리카누스는 몸무게가 60-70파운드 정도의 조그마한 챔팬지 정도지만 침팬지와 오랑우탄보다 어금니가 더 크고 어떤 것은 400파운드가 되는 고릴라의 어금니만큼 크다. 따라서 턱이 큰 셈인데 로버스투스의 경우는 특히 더 크다.
이 동물들의 골반과 팔다리와 발의 뼈조각 중 일부가 발견되었고 이들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진화론에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하는 것들은 직립 습관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특시 부름과 클라크(Legros Clark) 는 이 결론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러나 그후 영국의 유명한 해부학자인 쥬커만(Solly Lord Zuckerman) 경과 시카고 대학의 해부학 및 인류학 교수인 옥스나드(Charles Oxnard)박사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하였다.
4)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대한 해석
쥬커만이 이끄는 연구팀은 15년 이상 꼬리 있는 원숭이, 꼬리없는 원숭이 및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속하는 화석들의 해부학적 특징들을 연구했다. 실제로 수백개의 꼬리잇는 원숭이와 꼬리 없는 원숭이, 인류의 해바학적 표본들과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 관해 쥬커만경 보다 더 철저하게 세밀하게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클락과 다른 학자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사람을 닮은 원숭이라기 보다 인류과에 속한 하나의 속으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쥬커만경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혀 납득할 수 없다. 내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진화론적 지위에 관한 해부학적 주장을 검토할 때마다 거의 실패로 끝났다."
쥬커만경의 결론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에 불과하여 인류의 기원과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옥스나드는 이것에 관해 연구한 후 이렇게 말했다. "비록 대부분의 연구가 현생 인류와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의 유사성을 강조하여 이것들이 연장을 만들어 쓰는 두발 동물, 즉 호모 하발리스(Homo Habilis)라는 것과 적어도 이들 중 한 형태인 오스타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는 거의 직접적으로 인류의 조상이라는 점을 주장한다해도 여러두개골의 후부조각들에 대한 통계학적 연구는 다른 결론을 제시한다"고 말했다.
옥스나드는 그의 연구로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결코 사람처럼 직립보행하지 않았으며 오랑우탄과 비슷하게 걸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현재 오스트랄로피테무스에 대해서는 해부학적인 여러 부분 죽, 어깨골반, 발목, 발,발꿈치 및 손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되어 있다. 사실 대부분의 화석들은 현생인류나 혹은 유전학적으로 인류와 가장 가깝다는 침팬지, 고릴라와 완전히 다르다.현존하는 형태로는 오랑우탄과 비슷한 경향이 있따."고 말했다. 즉, 옥스나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오늘날 현존하는 인류나 원숭이와 아주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옥스나드는 쥬커만경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는 확실이 인류의 조상도 아니며 원숭 인류사이의 중간형태도 아니다고 할 수 있다.
쥬커만경은 옥스나드 외에도 여러 학자들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분화된 원숭이에 불과하다고 말했었다. 진화론자 몬태규(Ashley montagu)는 ".. 모든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두개골 형태는 원숭이와 극히 비슷하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류는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 혹은 인류에 이르는 계통의 조상이 되기에는 너무 낳이 분화되었으며 여러면에서 원숭이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다"고 했다. 창조론자 기쉬(Duane T.Gish) 박사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작은 앞니, 넓고 큰 어금니, 큰 턱뼈와 치아의 수, 얼굴 모양 및 두개골 용적으로 보아 현존하는 비비(Baboon)와 매우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빈슨 (J.T.Robinson)과 그밖의 몇 사람은 호모 하빌리스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와 똑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보우텐(Boten)은 오스트랄피테쿠스의 화석이 주로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채 발견되며 다른 동물들의 화석과 섞여서 부엌 쓰레기장 같은 데서 발견되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보우텐은 이 화석이 발견되는 곳에서 그물에 사용되는 매우 정교한 둥근 돌이 발견된다는 사실로부터 이미 이 때 현대인과 같은 지적인 인류가 살았다고 할 수 있음으로 이 화석이 다른 포유동물들의 화석과 함께 섞여 나오는 점으로 미루어 사람들이 잡아먹은 동물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클리(okley)는 같은 계곡에서 박쥐 똥에 의해 저절로 불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 자연화석이라고 했다. 다아트 자신도 1959년에 발견된 빠진고리를 찾는 모험"(Adventures with the Mission Links) 에서 극미량 발견된 탄소로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불을 사용했으리라는 추측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5) 그러므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이미 살펴 본 바대로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유인원으로 인류의 혈통에 속한다는 주장은 치열과 직립보행했을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치열을 살펴보면 앞니는 비교적 작지만 어금니는 넓고 크며, 턱도 크고 현존하는 개코 원숭이, 테로피테쿠스 갈라다는 치아와 하악골과 얼굴의 수많은 특징들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비슷하다. 이 사실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유인원이었다는 증거에 반대된다.
위에서 설명한 모든 사실들을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원숭이와 같은 크기의 뇌를 가졌다는 사실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의 변종과 다를 바 없으며 상태학상으로 갈라다 개코원숭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여러 논의로부터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원숭이와 비슷한 동물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인간의 진화조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
4. 직립원인(Homo Erectus)
일반적으로 자바인. 북경인, 하이델베르그인, 메간트로푸스 등의 두개골들이 직립원인으로 분류된다.
1) 자바인(Java Man)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을 때 네덜란드 의사인 유진 듀보이스(Eugene Dubois)는 그의 존경하는 독일인 스승 헥켈(Ernst Haeckel) 로부터 인류진화에 대한 매력적인 이론을 듣고 인류 진화에서 "빠진 고리"(missing link) 찾기고 결심하고 인도네시아로 갔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너무나 터무니 없이 보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 연구비를 지원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네덜란드 군에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1887년 수마트라로 갔다. 그는 거기서 수년동안 화석을 찾았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자바의 환경이 다양하여 수마트라 보다 원시인의 뼈를 찾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1889년 자바로 옮겨갔다.
그는 자바에서 5년간 머물면서 발굴을 계속했다. 자바섬에서 화석 발굴 작업을 시작한지 1년 뒤인 1890년, 드디어 그는 트리닐(Trinil)마을 가까이에 있는 솔로강(Solo River) 언덕에서 조그만 하악골 조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91년에는 그 주변에서 어금니 하나를, 다음 달에는 1m 떨어진 곳에서 두개골 윗부분을 발견했다. 발견된 두개골은 이마가 높고 경사졌으며 눈두덩이 두터우며 뇌껍질사이가 분명히 압축된 것이었다. 듀보이스는 그 두개골 용적을 현대이의 약 3분의2가량이 되는 900cc로 추정했으며, 침팬지의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1892년 8월에는 두개골 윗부분을 발견했던 곳으로부터 15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람의 골반과 무릎관절을 연결하는 대퇴뼈(넙적다리뼈)를 발견하였다. 대퇴뼈는 직립보행을 한,5피트, 7인치의 키를 가진 평균적인 현대인의 것과 흡사했다. 10월에는 또 다른 어금니를 발견했으며, 이어 동시에 두개의 어금니를 더 발견하였다. 그후 1898년에 그는 먼저 발견했던 동물의 어금니에 해당한다고 추측되는 앞어금니에 해당한다고 추측되는 앞어금니 하나를 더 발견했다. 이런 방법으로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 자바인이며 이 발견으로 인해 듀보이스는 암스테르담 대학의 지질학 및 고생물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듀보이스는 두개골과 대퇴뼈가 15m(50ff)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지만 뚜렷한 근거없이 같은 생물의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두개골 윗부분이 침팬지의 것고 흡사하고 대퇴뼈는 직립하는 현대인과 흡사한 점을 들어 1894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그것들을 직립원인의 일종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 thropus erectus)라는 이름을 붙쳤다. 이 이름은 1868년 독일의 핵켈(Ernst Haeckel)이 아시아의 열대지방에서 인류 진화의 중간 형태가 발견되리라고 예상하여 가상적으로 붙쳐놓은 것이었다.
K-Ar 방사성 동위원소법으로 절대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화석이 발련된 트리닐 지층의 상부는 50만년, 바닥은 70만년이었으며 이는 인류 진화론자들의 기대와 잘 부합하였다.
2) 자바인에 대한 해석
듀보이스는 이 화석들을 1895년 라이덴(Leyden)에서 열린 국제동물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f Zoology)에 발표했다. 이때 참석한 전문가들은 듀보이스의 화석을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토론에 참여한 논쟁을 벌였다. 토론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화석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으며 이견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해부학자인 비코우(--)는 대퇴뼈와 두개골이 너무 멀리 떠러진 거리에서 발견되었으므로 한 동물의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듀보이스가 발견한 자바인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영국의 동
물학자들은 인류의 화석으로 독일학자들은 원숭이의 것으로 불란서인들은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형태의 것으로 서로 다르게 보았다.
발로아(H.M.Vallois) 와 불란서 고생물학 연구소(French institute of Paleontology) 소장이었으며 두개골 화석의 권위자인 불(Mar cellin Boule)은 듀보이스가 발견한 두개골 윗부분을 자세히 연구한 후 "전체적으로 이들의 구조는 침팬지나 긴팔원숭이(Gibbons)와 매우 비슷하다"고 말했다. 후에 트리닐 근처에서 방대한 발굴작업을 했던 네덜란드 고생물학자 퀘니그스발트(G.H.R.von Koenigswald)는 그 두개의 어금니는 오랑우탄의 것이고 앞어금니는 완전한 사람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듀보이스가 발견했던 치아들이 두개골 윗부분의 원래 주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1906년 원정대가 듀보이스의 발굴 유적지에서 흙을 10,000입방 야드나 파내었는데도 비슷한 것은 한 조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후에는 1936년까지 거듭 탐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유인원 화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퀘니그스발트는 트리닐에서 약 40마일 떠러진 산지란 (Sangir an)에서 더욱 자세히 조사를 했다. 그래서 치아를 포함한 턱뼈 조각과 두개골 조각 및 두개골의 윗부분을 발견했다. 그러나 팔다리의 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퀘니그스발트는 그가 발견한 것들을 피테칸트로푸스 II,III,IV, 라고 불렀다. 부울과 발로아는 산지란에서 발견된 두개골들을 조사해본 결과 듀보아의 것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대퇴뼈는 틀림없은 사람의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들이 발견한 치아들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하악골에서 붙어 있었다. 부울과 발로아가 제시한 이 치아들의 모든 특징들은 사람보다는 원숭이와 비슷하였다.
3) 듀보이스의 결론
여러사람들에 의해 자바인에 대한 회의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자바인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은 아이로니칼게 듀보이스 자신에 의해 제기되었다. 듀보이스는 자바인을 발견했던 듀보이스는 자바인을 발견했던 곳과 가까운 와드잭(Wadjac)이라는 곳에서 현생인류의 두개골 용적 평균치를 조금 넘는 1550-1650cc의 용적을 가진 두개골(Wadjac skullh 로 알려져 있음)을 두개 발견했으나 이는 이 사실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 당시에 이 사실을 발표했다면 그가 발견한 자바인이 "빠진 고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듀보이스가 와드잭 두개골을 공개한 것은 자의적이라기 보다는 타의적인 것이었다.1922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비슷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발표되자 1923년에 비로소 듀보이스는 자기가 30년동안이나 와드잭 두개골을 감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와드잭 두개골의 발표를 고의적으로 회피한 것은 고생물학계에 자바 원인, 즉 피테칸트로푸스를 유인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듀보이스는 죽기 전, 이미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이 피테칸트로푸스 즉 자바인을 사람이라고 믿게 되자 돌연 그가 발견한 자바인이 단지 커다란 긴팔원숭이에 불과했다고 선언했다.
4) 그러므로 자바인은..
듀보이스가 트리닐에서 발견한 대퇴뼈는 그가 후에 발견하여 추가한 몇개의 다른 대퇴뼈들과 함께 사람의 것과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피테칸트로푸스를 원숭이 이상의 것으로 보는 이유는 단지 사람의 대퇴골이 유인원 유해들과 비슷한 장소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듀보이스가 수집했던 두개의 어금니와 한개의 앞어금니가 각각 우랑우찬과 사람의 것이라고 판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계속해서 대퇴뼈와 두개골 윗부분을 같은 생물의 것으로 연관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었던 듀보이스가 결국 피테칸트로푸스는 유인원이 아니고 긴팔원숭이의 것으로 결론지었다. 결국 자바인은 사람의 대퇴뼈와 원숭이의 두개골을 결합시킨 것으로 사람과 원숭이의 중간 형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5. 북경인 (Peking Man)
북경인의 화석은 1920년대에 북경에서 서남쪽으로 25마일 가량 떨어진 주구점(Chouk outien)의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것은 두개골 30개, 아래턱뼈 11개, 치아 147개였다. 처음 발견한 치아 중 하나에 대해 북경에 있는 유니온 의과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블랙(Davidson Black) 박사는 이 치아를 중국의 고대 유인원, 혹은 사람과 유사한 동물이 존재한 증거로 제시했다. 그는 이 동물을 시난트로푸스 페키넨시스(Sinanthropus Pekinensis)라고 이름 붙였으며 이것이 곧 북경인으로 알려졌다.
이 북경인 자료를 평가하는데 가장 치명적인 사실은 치아 두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자료가 1941년 12월 7일,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미국으로 이송되는 중국 진앙부두에서 선적하기 직전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이 자료들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이들을 북경으로부터 미해군 부대로 옮기다가 잃어버렸거나 탈취당했다는 것이다. 사실 아무도 이 자료가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모른다. 1990년 초에는 이 화석을 되찾기 위한 범세계적인 캠페인을 벌리고 있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경인에 대한 연구는 전적으로 그 당시에 연구한 사람들이 남겨둔 기록과 모형 등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독일의 바이덴라이히(Franz Weidenreic)였다. 그는 북경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것은 오늘날까지 북경인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학자들이 모두 진화론자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학자들은 그 당시 진화론자들로만 구성된 북경인 연구학자들이 남긴 자료에만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경인은 인류의 기원에 관한 증거들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6. 하이델베르그인 (Heidelberg Man)
하이델베르그인은 1907년 독일 하에델베르그 근교에 있는 마우어(Mauer) 지방의 라인강변 모래구덩이에서 발견된 턱뼈로부터 재구성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며, 지금부터 50-150만년 전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퍼져 살았던 직립원인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듀보아의 자바원인도 이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였다. 그후 진화론자들은 하이델베르그인의 연대를 좀 더 줄여 25만년전으로 잡고 인류진화를 증명하는 중요한 빠진 고리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는 턱뼈의 크기로 보아서는 매우 큰 유인원의 것이나 치아의 배열이나 형태로 보아서는 전형적인 사람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그인도 진화의 중간형태로 받아들이기에는 몇가지 어려움이 있다. 한가지 이유는 그 턱뼈와 똑같은 구조의 턱을 가진 종족이 오늘날에도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지방에 살고 있으며, 그 턱뼈에 대응하는 두개골 형태는 오늘날 흑인들 중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이델베르그인의 치아는 현대인의 치아와 완전히 같다. 그래서 유명한 진화론적 인류학자 허들리카(A.Herdlicka)는 "마우어인 즉, 하이델베르그인의 턱뼈와 치아는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람이 치아이다. 이 치아들로 인해 그들의 주인은 사람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하이델베르그인 역사 중간 형태라고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