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외 7편 / 윤순호
나들이
한 자락 봄볕에 아롱아롱 길을 물어
하얗게 쪽찐 봄 할머니가
지팡이에 꼬부랑 허리를 짚고
기계총 정수리가 까맣게 번진
깨금발 꼬막손 앞세워
바람만바람만 꽃구경 가는 길
높새바람에 짓무른 눈이 괴로워도
천국으로 드는 상엿소리엔
귀가 열려서
-워매워매 아가 어디서 생이 나간갑다!
만장 따라 요령도 구슬피 우는데
남실대는 청보리 물결 위에
아스라이 너울거리는 설운 곡소리
졸고 있는 용마름 길게 돌아가는
흙담 해바라기 좇아
초록 쑥은 보송보송 돋고
가게
고층상가 그늘 등쌀에
할머니채소가
미닫이 유리에 점포정리를 붙였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끊임없이 껍질만 벗기더니
손톱 밑 까만 더께는 어떻게 하나
이제 굽은 등이 멈출까
땅거미 밀려오는 시간
불콰하게 귀가한 바깥노인의
뱀 대가리 손 끝에
콜록콜록 형광등이 살아난다
소박한 욕심이 무심하게 번지는데
길 건너
LED가 강강술래를 도는 배밭골갈비에선
입소문 긴 행렬이 꼬리를 물었다
등 굽은 노파의 개다리소반 저녁에
노릇노릇 고등어자반이
투박한 사랑을 발라내고 있다
빨래집게
흡사 북어가 재갈을 물고 왔다
어금니가 어긋날 때까지
빨랫줄만 씹어야 하므로
장마철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줄줄이 허공에 원망을 걸어야 했다
오늘에야 햇볕이 세탁한
수줍은 속옷이며 로즈향 타월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사이
‘아이스케키’로 가랑이를 들추는 바람
아랫도리 짧은 스커트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석양이 다가오자
줄타기의 달인 거미가 올라와
끈끈한 그물을 동그랗게 절고 있다
날개가 이슬 털러 온 아침으로
땟거리를 붙이려는 속셈이다
일과가 끝난 빨래집게는
거미의 부탁으로 한 가닥 날실을 물고
달무리가 된 거미집을 물끄러미 살피는 것이다
잔치
익숙한 화장술로
주름살 다스리는 솜씨가 남다른
국악원장님은 혈혈단신이다
화환보다 고운
나울나울 치맛자락들이
‘파노라마’홀을 화려하게 점령했다
원장님 무자식 팔자가
자유로운 만학의 꿈을 이루자
여기저기
또래 소문이 끼들을 불러들였다
팔랑개비 같은 부채춤이 도는 동안
식탁은 연신 도가니 접시를 바꾼다
낮술이 부추긴 여흥에
몸살 난 디스코가 엉키는데
한껏 들뜬 원장님
게슴츠레한 흥을 돋아 판을 키운다
달아오른 칠순에 한낮이 기울었다
거나한 건망증이 외투 깃에 붙은 뷔페식권을
전철 시선들이 흘금흘금 떼 내고 있다
전어
어장에서도
아마 회오리처럼 뭉쳤을 것이다
그들이 사는 방식은 무리를 짓는 것,
날 때부터 떠돌이였던
그들이 의지할 곳이란 또래 이웃이었다
뭉쳐야 산다는 걸 체험에게 배웠으므로
먹이 품을 팔 때도 떼를 이루었겠지
고소한 맛을 한 뼘이나 키우기까지
얼마나 잦은 울력을 부쳤을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뱃속에 돔배젓을 곰삭게 한 건 공포였다
다투어,
기름 저장고를 채우느라
풍랑 속 요동도 아랑곳없었을 터
때가 되어
만을 타고 뭍으로 올라온 무리들
가을을 구우려고
무더기 무더기 어물전을 점령하고 있다
수작酬酌
백구두 영감님,
슈퍼 앞 파라솔을 찾은 속내가
립스틱 두툼한 여인 앞에서
짐짓 사설이 거나해졌다
말갛게 엿듣고 있는 종이컵 막걸리를
새끼손가락이 휘휘 훼방을 놓는다
술버릇이 쏟은 잔
맥없이 받아 마신 전봇대 밑동이
얼기설기 사방으로 입소문을 퍼트린다
긴장을 풀지 못한 하얀 구두코에
저녁놀이 번질 때까지
컵 입술만 매만지던 알반지가
손지갑 지퍼로 마음을 열었다
갑상선암이 문 닫고 간 현대슈퍼
강아지풀만 무성하게 키운 전봇대가
까치를 불러 알반지 소식을 염탐 중이다
고무줄
은밀한 곳을 감싸기 위해
속곳의 주름관을 파고든 탄력이
꽉,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조인다
팽팽하던 승부가 갈리는 건
나이가 늘어지는 것
느슨해진 수명은 돌이킬 수가 없다
쳐진 뱃살 탓은 핑계일 뿐
드러난 허리는 새로운 고무줄에 집착한다
고무가 실오라기가 된 세상
사방으로 뻗은 탄력이 요철을 만들고
부드러운 감촉을 입혔다
바야흐로 모든 속옷은 늘어나는 시대
고탄력이 체형을 바꾸는 것도
보정이 미인을 만든다는 믿음 때문이다
살아 있는 남성의 탄력도
고무줄이 탱탱하게 당기고 있다
슬그머니 사라진 까만 고무줄
좌판에 길게 늘어져 졸음이 깊다
백발이 다가와 가닥가닥 추억을 깨운다
축복
초여름이 짙은 버드나무에서
물총새 날랜 눈초리가 갸우뚱
물보라 흩어지는 웅덩이를 훑고 있다
순식간
파닥거리는 은빛 몸부림을 낚아채
미루나무 언덕 벼랑으로 쏜살같다
소리 먼저 익힌 새끼에게
눈까지 맞추려면 서둘러야 한다
위치가 들통 난 침침한 황토굴엔
볼 수 없는 세상이 아직 꼼지락거릴 뿐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핏덩이들은 보채는 법부터 터득했다
턱을 괴고 바짝 엎드린 식탐이
스치는 바람에도 고개는 오뚝이가 된다
낌새에 노란 주둥이를 찢는 어린 장님들
아우성이 한바탕 굴속을 메운다
탈피가 힘드는지
매미는 미루나무에도 아직 기별이 없다
■ 시작노트 ------------------
정녕 나도 몰래 시가 다가왔다
당연히 시인을 만날 수 있었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이제는 시도 시인도 사랑할 수 있어서 좋다
도시의 골목은 항상 활기차다
할머니의 가게가 미닫이를 열고
노점이 트럭을 받치고
이따금 교회가 길로 나와 차를 끓이는가 하면
점포정리가 새로운 간판에 불을 밝힌다
낯익은 얼굴이 늘어나고 삶을 사랑하는 열정이 샘솟는다
거기에
가슴 뭉클한 시가 배어 있다
내려놓지 못하면
무겁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랴
시에게 치열할 필요가 있는가?
가슴으로 쓰고 또한 가슴으로 읽을 일이다
시가 가르쳐준 막걸리에 정을 붙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잔을 부딪치고 싶다
골목과 더불어 살고
시를 읽는 사람에게 기꺼이 다가갈 것이다
두 말할 것 없이 시인, 그들을 존경한다.
ㅡ『우리詩』2018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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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들이 외 7편 / 윤순호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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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22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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