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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선택
집단 선택을 적용한 설명들 –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에서.. 2
집단 선택과 관련된 논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들은 우선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도킨스는 집단 선택에 대해 매우 읽기 쉽게 반박했다. 만약 좀 더 엄밀한 학문적 논쟁을 접하고 싶은 사람들은 도킨스의 책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 세 권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ur(1962)』, Vero Copner Wynne-Edwards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 A Critique of Some Current Evolutionary Thought(1966)』, George Christopher Williams
『Unto Others: The Evolution and Psychology of Unselfish Behavior(1998)』, Elliott Sober & David Sloan Wilson
집단 선택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다. 이 책 이전에는 집단 선택설이 저명한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유행했다. 『Animal Dispersion in Relation to Social Behaviour』는 그런 유행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을 읽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은 어떻게 생물학자가 바보가 될 수 있나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는 당시에 유행했던 집단 선택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며 여전히 여러 가지 면에서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이 책이 나온 이후로 집단 선택설은 너무나 큰 타격을 받아서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집단 선택 이야기만 꺼내면 바보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았고 한다.
『Unto Others』는 집단 선택설의 부활을
천명한 책이다. 이 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과거의 순진했던 집단 선택설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 선택설을 거의 몽땅 버려야 한다는 윌리엄스(George
Williams)나 도킨스의 생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신집단
선택(new group selection) 또는 다수준 선택(multi-level
selection)이라고 부른다. 이들에 따르면 과거의 집단 선택설 거의 아무 생각 없이
그럴 듯한 이야기 만들기에 만족해서 문제가 되었지만 집단 선택의 논리는 엄연히 상당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집단 선택설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이 출간될 당시에 어떤 집단 선택적 설명이 유행했는지 살펴보자. 아래에 나오는 사례들 중 대다수는 당대의 저명한 생물학자들의 주장이다.
첫째, 노화와 죽음. 생물이 늙어서 죽는 것은 다음 세대의 더 건강한 생물들에게 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다.
둘째, 돌연변이.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은 자연 선택을 통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셋째, 지렁이와 땅. 지렁이가 땅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땅을 비옥하게 해서 다른 생물들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넷째, 유성 생식. 유성 생식이 존재하는 것은 진화적 유연성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유성 생식의 경우에는 부모의 유전자가 혼합되어 자식이 생긴다. 따라서 돌연변이보다 훨씬 빠르게 유전적 다양성이 만들어지며 그만큼 빠르게 진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화된 환경에 더 빠르게 적응할 수 있다.
다섯째, 영역 다툼. 영역 다툼을 벌이는 것은 개체의 수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해서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여섯째, 독성이 있는 생물. 일부 종의 생물들이 몸에 독소를 품고 있는 것은 자신이 속한 종이 독이 있음을 포식자에게 알려서 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일곱째, 레밍(lemming)의 집단 자살. 개체 밀도(인간으로 따지면 인구 밀도)가 높아지면 일부 레밍들이 다른 레밍들의 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집단 자살한다.
여덟째, 서열. 서열이 존재하는 것은 맨날 싸움을 벌이지 않고 질서가 유지되도록 해서 집단 전체가 더 평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홉째, 자식수 조절. 개체 밀도가 높아지면 어미는 낳는 자식의 수를 줄인다. 이것은 개체 밀도가 너무 높아져서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열째, 자식 낳기. 자식을 낳는 이유는 종의 보존을 위해서다. 이런 식의 생각은 프로이트 같은 사람들이 성욕을 종족 보존 본능이라고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외에도 집단 선택을 이용한 온갖 설명들이 있어왔으며 여전히 자연 다큐멘터리 등에서 유행하고 있다.
옛날부터 자연의 섭리 또는 자연의 조화에 대한 낭만적 믿음이 있었다.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막연한 믿음을 러브록(James Lovelock)은 가이아 가설(Gaia hypothesis)이라는 과학적으로 보이는 체계로 발전시켰다.
가이아 가설에 따르면 지구 생태계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한 포유류 동물의 각 부분들 즉 심장, 허파, 눈, 다리, 코 등이 서로 협력하여 그 동물 전체의 생존과 번식에 기여하듯이 지구 생태계의 각 부분들이 서로 협력한다는 것이다.
이런 믿음에 따르면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 먹는 이유는 건강하지 못한 개체를 솎아 냄으로 초식 동물들 전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꾸준히 잡아 먹음으로써 초식 동물이 너무 많아지는 것을 막는다. 개체수가 너무 많아지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 생물들은 때가 되면 죽음으로써 다른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준다. 각 생물의 행동은 다른 생물을 이롭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가이아 가설에서는 이런 이타 행위의 수혜자가 전체 생태계다. 반면 기독교의 창세기에 나오는 세계관에 따르면 이런 이타 행위의 수혜자는 바로 인간이다. 신은 인간을 가장 사랑하여 인간을 위해 온갖 생물들을 창조했다. 물고기와 대형 초식 동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잡아 먹거나 길들이도록 하기 위함이고, 과일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따 먹도록 하기 위함이고, 꽃이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예쁜 꽃을 보고 즐겁도록 하기 위함이고, 새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것은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그럴 듯한 이야기(just so story)의 전형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이 나온 이후로 이런 식의 ‘설명’들은 퇴출되기 시작했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핵심은 번식 경쟁이다. 따라서 만약 자신의 번식에 불리한 방향으로 행동하는 동물이 있다면 그 동물은 도태된다.
육식 동물이 초식 동물을 잡아 먹는 것은 초식 동물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초식 동물을 잡아 먹음으로써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다. 물론 건강하지 못한 개체를 잡아 먹을 확률이 높지만 그것은 단지 잡기 쉽기 때문이다. 부실한 동물도 잡기 쉽지만 아기 동물도 잡기 쉽다. 물론 육식 동물들은 초식 동물 아기들을 매우 좋아한다. 육식 동물이 전염병에 걸린 초식 동물을 잡아 먹음으로써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면 그것은 순전히 부작용(side effect)일 뿐이다.
생물은 가이아 가설 옹호자의 생각과는 달리 생태계 전체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번식에 유리한 행동이면 한다. 또한 생물은 창세기의 저자인 야훼의 생각과는 달리 인간의 유익함을 위해 창조되지 않았다. 새의 ‘노래 소리’를 듣고 인간이 기분이 좋아진다면 그것은 부작용일 뿐이다. 새는 짝을 구하기 위해 또는 경쟁자를 쫓아내기 위해 소리를 낼 뿐이다. 물고기는 인간에게 잡아 먹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나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힌 물고기가 있다면 그것은 그 물고기의 무능 때문이다. 물고기는 최대한 잡아 먹히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가이아 가설은 집단 선택적 사고의 극한이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극단적이어서 집단 선택설이라고 볼 수도 없다. 집단 선택의 경우에는 집단끼리 경쟁한다는 말인데 도대체 지구의 생태계는 누구와 경쟁한단 말인가? 먼 외계의 어떤 행성의 생태계와? 그럴 리가 없다. 왜냐하면 설사 먼 외계에 어떤 행성에 생태계가 있더라도 지구와의 상호작용이 사실상 없어서 서로 경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이아 가설 또는 창세기 가설에 충실한 동물과 이기적 유전자론에 충실한 동물이 있다고 하자. 누가 번식에 더 성공할까? 육식 동물 중 “어떻게 하면 초식 동물의 삶에 도움이 될까?”라고 ‘고민’하면서 사냥을 하는 동물과 그냥 잡기 쉬운 동물을 골라서 사냥하는 동물 중 누가 더 사냥에 성공할 확률이 클까? 물고기 중에 “어떻게 하면 인간에에 잡아 먹혀서 인간을 이롭게 할까?”라고 ‘고민’하면서 사는 물고기와 어떻게 하면 다른 동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을지 ‘궁리’하는 물기기 중에 누가 살아남아서 번식할 가능성이 클까? 답은 뻔하다. 자기 잇속을 챙기는 쪽이 성공한다. 이것이 다윈의 자연 선택 이론의 핵심적 메시지다. 생태계는 선한 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무지막지한 번식 경쟁의 논리가 쉬지 않고 작동하고 있을 뿐이다.
종 또는 무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개체와 자기 잇속을 챙기는 개체 중에 누가 더 번식에 성공할 가능성이 클까? 이것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종 또는 무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때(그럴 리가 없지만 그렇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개체가 자기의 번식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결국 성공하는 쪽은 그런 이기적 개체 즉 배신자다. 이것이 배신자 효과의 핵심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남들이 다 자기의 번식을 위해 최선을 다할 때 자기 혼자 종과 무리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면 그 개체는 결국 도태된다.
예를 들어 보자. 레밍의 개체수가 많아졌을 때 일부 레밍들이 자발적으로 집단 자살한다는 것이 집단 선택론자의 설명이다. 논의의 편의상 실제로 레밍이 그렇게 설계되었다고 가정하자. 이 때 개체수가 많아져도 집단 자살에 절대 동참하지 않도록 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겼다고 하자. 그럼 그 돌연변이 유전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그 유전자는 세대가 지날수록 개체군에 내에서 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남들이 자살할 때 자살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개체군 내의 모든 개체가 그 돌연변이 유전자 즉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유전자를 보유하게 될 것이고 집단을 위한 자살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나는 종 선택이 일어난다는 점을 부정할 생각이 없다. 지난 수십억 년의 생물의 진화 역사는 종 분화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멸종의 역사이기도 했다. 수 많은 종들이 온갖 이유 때문에 멸종한다. 다른 종과의 경쟁에 밀려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가 멸종하기도 하고 공룡들처럼 지구에 박치기한 커다란 돌멩이 때문에 갑자기 멸종하기도 한다.
문제는 그런 종 선택이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부다. 이것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체 선택이 어떻게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연에 의해 돌연변이가 생긴다. 그 돌연변이 대다수는 해롭다. 소수의 돌연변이만 번식에 이득을 준다. 그러면 그 돌연변이는 개체군 내에서 퍼지게 되어 결국 종 표준이 된다. 이런 작은 변화가 쌓여서 결국 눈이나 뇌 같은 복잡하고 정교한 적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연은 엄청난 수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런 교묘한 적응들을 만들어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의 ‘실험’이 필요하다.
이 엄청난 숫자는 두 가지 때문에 가능하다. 첫째, 한 종의 개체의 수가 매우 많다. 둘째, 엄청난 세대 수가 있다. 어떤 종의 한 세대의 개체의 수가 1000만 마리이고, 1년이 한 세대라고 하자. 그러면 1000만 년 동안 100조(1000만 * 1000만, 엄밀하게 계산하자면 더 복잡하겠지만 넘어가자) 마리의 개체가 살다가 죽은 것이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개체 선택이 우연적 돌연변이들을 바탕으로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종 수준의 선택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만큼 많은 종들이 그만큼 많은 멸종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 선택이 일어나느냐 여부와 종 선택이 정교한 적응을 만들어낼 수 있느냐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따라서 종 선택론자가 생물의 정교한 메커니즘의 존재를 종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윌리엄스의 책 이전에는 저명한 생물학자들도 이로운 효과(beneficial effect)와 기능(function)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화 생물학적 의미의 기능은 일상적 의미의 기능과는 뜻이 다르다. 어떤 개체 또는 무리 또는 종에 이로운 어떤 효과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어떤 적응의 기능인 것은 아니다. 둘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진화 생물학에서 적응 개념과 기능 개념은 어떤 표현형의 기원과 연결되어 있다. 생물학자들은 눈이 적응이며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단지 눈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해당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눈이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고 보기 때문에 눈의 기능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더 잘 볼 수 있었던 개체가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눈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진화했다는 설명이 성립해야 “눈의 기능은 보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진화 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적응인지 여부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만약 번식에 이로운 효과라는 측면만 본다면 강간이 적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강간 중 일부는 임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번식에 이로운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로운 효과(번식에 이롭다는 것을 뜻할 뿐이다)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런 이로운 효과 때문에 강간이라는 행동이 진화했다는 것을 밝혀야 강간이 적응이며 강간의 기능은 여자를 임신시키는 것이라는 명제가 입증되는 것이다.
포유류 어미는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이것은 여러 효과로 이어진다. 첫째, 어미 자신의 번식에 이롭다. 둘째, 어미가 속해 있는 무리의 번성에 이롭다. 셋째, 어미가 속해 있는 종이 멸종하지 않도록 하는 방향의 효과가 있다. 넷째, 어미가 속해 있는 포유류 전체의 멸종을 막는 효과가 있다. 만약 효과와 기능을 혼동한다면 어미의 자식 돌보기의 기능이 “포유류 전체의 멸종을 막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런 결론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한다면 어미의 자식 돌보기의 기능이 무리의 번성을 위한 것이라는 결론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대체로 집단 선택을 적용한 이야기 만들기가 개체 선택을 적용한 이야기 만들기보다 훨씬 쉽다. 이것이 집단 선택이 과거에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유행한 이유이며 여전히 진화 생물학을 잘 모르는 대중들이 집단 선택을 받아들이는 이유인 것 같다.
집단 선택을 적용하면 노화에 대한 그럴 듯한 이야기가 쉽게 만들어진다. 노화는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일어난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반면 개체 선택적 관점에서 보면 노화는 진화론과 모순되어 보인다. 불로장생하면서 계속 자식을 낳는 개체와 금방 죽는 개체가 번식 경쟁을 벌인다면 누가 이길 것인가? 뻔하다. 불로장생해서 자식을 훨씬 더 많이 낳는 개체가 승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은 늙는다.
집단 선택적 설명은 만들어내기 쉽다. 반면 개체 선택적 설명은 가설 검증은 고사하고 가설 설정 자체가 훨씬 더 어렵다. 하지만 과학은 쉬운 설명을 찾아내는 과정이 아니라 옳은 설명을 찾아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개체 선택에 입각한 노화에 대한 설명이 궁금한 사람은 『노화의 과학 - 사람은 왜 늙는가?』나 『인간은 왜 늙는가 - 진화로 풀어보는 노화의 수수께끼』를 참조하기 바란다. 요약하면, 개체는 늙고 싶어서 늙는다기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늙는 것이다. 이것은 초식 동물이 잡아 먹히는 이유는 육식 동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잡아 먹히는 것과 같다.
윌리엄스는 돌연변이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돌연변이의 정의 자체가 유전자가 바뀌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대한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 돌연변이 때문에 진화가 일어나서 종이 더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된 것은 돌연변이의 부작용일 뿐이다.
독성이 있는 동물의 예를 들어보자. 집단 선택설에서는 종 전체를 위해 독성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배신자 돌연변이 유전자가 생겨서 독성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한다면 그 돌연변이 유전자는 어떻게 될까? 그 돌연변이 유전자를 품고 있는 개체는 다른 개체가 독을 만들어내서 생기는 이득을 챙긴다. 그 개체도 그 종에 속하기 때문에 포식자가 그 종을 잡아 먹지 않으려고 하는 것에서 생기는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반면 그 개체는 독을 만드는 비용을 치르지 않는다. 그 비용을 번식을 위해 다른 곳에 쓸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개체가 번식 경쟁에서 더 성공한다. 결국 모든 개체가 그런 식으로 바뀔 때까지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독성이 있는 동물의 진화는 개체 선택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예컨대 피부에 독성이 있으면 포식자는 삼키기 전부터 독성에 반응하여 뱉어낼 것이다. 그러면 그 개체는 피부의 독성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장 깊숙히 있는 독성의 진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친족 선택을 이용해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이 잡혀 먹어서 희생을 하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친족을 구할 수 있다면 내장 깊숙히 있는 독성이 진화할 수 있다. 개체 선택의 관점에서 설명하다보면 하나의 예측이 나온다. 내장 깊숙히 독성이 진화하는 동물은 친족들이 모여 사는 동물일 것이다. 반면 “종의 보호를 위해서”라는 설명에 따르면 그럴 이유가 없다.
자식수 조절의 경우에도 개체 선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개체수가 많아지면 그만큼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해진다. 자원이 부족한 시기에는 자식을 많이 낳는 것보다 적게 낳거나 아예 낳지 않고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더 낫다. 왜냐하면 자원이 부족한데도 자식을 많이 낳으면 결국 그 많은 자식들을 다 먹여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윈은 집단 선택설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덕성의 진화의 경우에는 집단 선택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다윈에 따르면 도덕적인 개인으로 이루어진 부족은 부도덕한 개인으로 이루어진 부족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더 잘 협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집단 선택설이 거의 망했다. 하지만 도덕성의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 윤리학에서 집단 선택설은 여전히 성업 중이다. 『Unto Others』가 핵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이타성과 도덕성이다. 다른 때에는 집단 선택을
거부하는 알렉산더(Richard Alexander)도 『The
Biology of Moral Systems(1987)』에서는 다윈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과학적 윤리학을 위하여 – 진화론적 접근』)에서 다룰 생각이다.
나는 아직 신집단 선택설의 논리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신집단 선택설에 대한 더 상세한 비판은 나중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 신집단 선택설 옹호자와 집단 선택이 거의 영향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은 의미론적(semantic) 논쟁이다. 수학적 모델은 같은데 서로 다른 식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장된 표현형』에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의 관점과 포괄 적응도의 관점이 네커 육면체(Necker cube)처럼 하나의 실체를 두 가지
다른 시각에서 본 것과 같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기적 유전자의 눈으로 보면 자연 선택은
유전자의 생존을 위한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포괄 적응도의 측면에서 보면 자연 선택은 개체가
포괄 적응도를 최대화 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
해밀턴(William Hamilton)의 친족 선택 이론을 개체의 관점에서 보면 개체가 포괄 적응도를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같은 모델을 신집단 선택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떨까? 만약 친족으로 이루어진 무리를 집단으로 본다면 집단 수준의 선택 즉 친족 집단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의 경우에도 친구들로 이루어진 무리를 집단으로 본다면 친구 집단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신집단 선택설은 틀렸다기 보다는 재탕이다. 이미 해밀턴이 이루어놓은 친족 선택 이론과 트리버스(Robert Trivers)의 상호적 이타성 이론을 집단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재해석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집단 개념을 정의하면 집단 개념이 너무 지저분해진다.
인간의 경우 개체군(population)이 친족 집단들로 깔끔하게 나뉘어지지 않는다. A와 B 사이의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가 너무 낮아서 친족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하자. 이 때 한편으로 A는 C의 친가쪽 사촌이고, 다른 한편으로 B는 C의 외가쪽 사촌일 수 있다. 그렇다면 C는 어느 친족 집단에 속하는 것일까? 친족의 경우에는 이분법적이지 않다. 가까운 친족과 먼 친족이 있을 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다 친족이다. 따라서 집단 개념이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다.
신집단 선택론자와 개체 선택론자의 논쟁이 실제로 내용을 둘러싼 논쟁일 때도 있다. 이 문제는 신집단 선택론에 대해 더 공부한 다음에 다룰 생각이다. 이 문제를 상세히 파헤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골치 아픈 수학적 모델을 다루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