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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꿈의 표현을 하였다. 꿈 속에 나타나는 우리의 인체를 표현하였다.
뭉크는 인간 내면의 표현을 인체를 빌어서 표현하였다. 이때의 인체는 인간의 내면이다.
키르히너는 인간의 성적 욕망을 여체를 빌어서 표현하였다. 욕망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인체는 과장되고 왜곡되었다.
에곤 쉴레는 성족 욕망을 즐거움이 아닌 것으로 표현하였다. 성과 어두움 표정을 대비하였다.
루시먼 프로이트는 인간의 외면을 덕지덕지 물감을 칠함으로 내면의 어두운 면까지 표현하려 하였다.
프란시시 베이컨은 인간의 몸을 갈기 갈기 쨎어서 표현하였다.
장 포트리에는 독일 수용소의 생활에서 인간의 생명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인간의 몸을 고깃 덩어리로 표현하였다. '인질 연작'에서 인간에게 내면의 의식 세계는 존재하ㄴ지 않는 -- 그렇게 표현하였다.
드 쿠닝은 여인의 아름다움과 추함의 이중성에서 추함을 여체를 빌어서 표현하였다.
20세기의 몸, 망가진 몸(1)
서양의 문화를 일으키고, 유지시켜 준 것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였다. 이성주의로 무장한 의식 세계가 만들어 낸 문화가 바로 서양문화의 본질이고 뿌리였다. 19세기에 이르면 이성주의 문화가 모순을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자신들의 문화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때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의식과는 전혀 다른 무의식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주장하였다. 우리의 삶, 더 나아가서 문화에 영향을 주는 것은 무의식의 역할이 의식보다 훨씬 더 크다는 주장을 하였다.
많은 화가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였다. 미술이 인체의 묘사를 매개로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의식세계를 표현한 미술은 잘못 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정신세계가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서양의 아카데미즘 미술에서 그림을 그릴 때 미리 계획을 세워서 구상을 하고, 구도를 잡아서 그리는 것은 의식 세계의 표현이므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무의식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유연상을 하듯이 생각은 배제하고(의식을 배제하고) 손이 가는 데로 그려야 한다.(자동기술법이라고 한다.) 이럴 때 묘사되는 인체는 실물과 닮은 그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무의식의 욕망이 시키는 데로 손을 움직이다 보면 우리의 몸은 비틀어지고, 과장되고, 찢어진 형태가 될 것이다. 의식으로 가공하지 않는 이런 형태의 몸이 진정한 우리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프로이트는 말하였다. 꿈은 무의식을 나타내는 표상이다. 살바돌 달리는 여기에 착안하여 꿈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렸다. 꿈에서는 이야기의 내용이 뒤죽박죽이지만 인체의 형상도 제 멋대로 바뀌어 정상의 인체가 아니다. 달리의 그림에는 변형된 인체가 많이 그려져 있다. 달리는 영국에 피난 와서 머물고 있던 프로이트를 찾아가서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프로이트가 말하기를 ‘이것은 선생님의 무의식 세계가 아닙니다. 당신이 무의식이라고 믿고 있는 의식 세계를 그린 것입니다.’라는 일화가 있다.
미술에서 전통적으로 표현하던 인체를 변형하여서 표현하는 것은 인체를 사실적으로 그려왔던 서양의 전통을 부정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서양의 모순된 사회를 비판하는 방법에 차용당한 우리의 몸은 또 한 번 수난을 당한다.
일차 대전을 겪고 난 독일의 화가들은 우리의 몸을 멋대로 비틀고, 과장하였을 뿐 아니라. 혐오감을 느끼도록 그렸다. 몸을 매개로 하여 인간의 반문화적인 정신세계를 표현한다고 하였다. 뭉크가 그린 ‘절규’''는 몸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매개물로서 몸이었다.
키르히너는 ‘일본 우산 밑의 여인’에서 인체의 왜곡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을 강조하여 그린 누드화이다. 욕망이 곧 내면이고, 진정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였다 키르히너의 누드는 전통적인 서양회화의 누드화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인간의 형태를 비정상적으로 과장하였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여 관람자에게 긴장감을 일으킨다. 성적으로 유혹하는 자세의 여인상은 야만적이고, 불건전한 느낌을 준다. 우아한 여인상에 익숙해 있던 관람자에게 불편한 심기를 일으킨다. 전통 문화에 대한 도전의 방법으로 관람자를 불편하게 함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화가는 성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한 인간 욕망이라고 하였다.
누드의 여인은 얼굴의 표정과 자세에서 관람자를 노골적인 성적 유혹을 하는 것을 보여준다. 원초적인 성을 그림에 담는 것은 의식적으로 우아한 자신을 드러내려 하는, 가면을 쓴 부르주아지의 허위에 대하여 반항의 표현인 것이다. 이처럼 여성의 몸을 존중받는 한 인간으로서의 몸이 아니고, 가슴과 엉덩이를 과장하고, 강조함으로 동물적인 성의 대상으로 표현하였다. 20세기의 서양 미술에 동물적인 성의 표현이 많아지는 것은 전통 사회에 대한 도전이 많았음을 나타낸다. 오늘의 여성주의자들은 키르히너의 그림을 무척 싫어한다. 남성 우월주의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였고, 여성을 성의 대상으로 표현하였다는 또 다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19세기를 일컬어서 흔히 빅토리아 시대라고 한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던 영국의 여왕이 빅토리아였다. 빅토리아 시대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성에 대한 엄격한 통제이다. 부부간의 성 관계도 아기 생산이라는 목적에 위배되면 비도덕적이다, 고 비난하였다. 소설 ‘차타레이 부인의 사랑’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배경에는 빅토리아조의 엄격한 성 윤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배경은 매독이 유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또 한 사람의 화가로 에곤 쉴레를 꼽을 수 있다. 에곤 쉴레라는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림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인기 있는 이름이다. 빈 분리파라고 하는 오스트리아 화가로서 클림트와 쉴레는 아주 유명하다. (이번에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빈 분리파 전시회가 있었다.)
쉴레가 그린 인간의 몸은 마르고, 뼈마디가 뒤틀리는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인물상이다. 여자와 남자의 성기와 음모를 강조한 누드 작품을 주로 그렸다. 쉴레가 그린 인간의 군상은 성을 추구하는 동물적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성으로 인하여 고통과 파멸로 치달으면서도 점점 더 성에 빠져드는 인간의 숙명을 그렸다고 하였다. 짧은 생애이었고 오랜 방황을 한 후에, 겨우 안정하여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일차 대전이 끝나던 해에 독감에 걸려서 그의 약혼녀와 함께 2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빈 분리파 화가의 또 한 사람인 코코슈카는 쉴레보다 거의 60년을 더 살았다. 그가 그린 연작 포스터를 보면 팔다리와 얼굴이 왜곡되어 있고, 고통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 뿐 아니고 정신적 고뇌와 절규를 그리므로 관람자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처럼 20세기를 살았던 화가들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인간의 몸은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였다.
피카소가 인간의 몸을 좀 더 분석하여 표현하기 위해서 조각조각으로 분해하여 그린 그림은 여기서 생략하겠다.
2차 세계대전의 회오리가 유럽 대륙을 휘몰아 칠 때 장 포트리에는 그 바람을 고스란히 정면으로 맞았다. 게슈타포에서 풀려 난 뒤에 파리 근교에 숨어서 지냈다. 이웃에 있던 정신병원에서 독일군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포로를 고문하고, 총살하였다. 전쟁 동안 내내 밤마다 고통으로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면서 두려움에 떨었다. 전쟁이 끝 난 후에 두려움과 불안과 고통으로 조각조각 찢어진 마음을 담은 그림을 발표하였다. 인간의 잔인성 앞에 그대로 노출된 포로를 푸줏간에 걸려있는 고기 덩어리로 표현하였다.(인질 연작에서) 전쟁의 와중에서 인간에게 정신이라는 사치스런 가치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였다. 전쟁 전에 표현주의 작가들이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도 사치스럽다고 생각하였을까? 그가 그린 인간의 몸은 하나의 살덩이에 불과하였다. (장 포트리에의 인질 연작에서 보듯이 형체를 없애버리는 그림 양식이 프랑스에 나타났다. 이것을 앵포르멜 이라고 한다.)
전쟁의 잔혹성을 체험하고 나서 인간의 비극을 화폭에 담아내기는 영국의 화가들도 마찬가지 이었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전쟁이 끝 난 해에 발표한 인체상을 보고 존 러셀은 이렇게 썼다. ‘아주 괴상망측한 세 폭 화가 관람자에게 아무 경고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너무나 무시무시하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앞에 멈춰 서서 발길이 옮겨지지 않았다. 그의 인체상은 창백한 피부와 비틀어진 몸,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다. 피부는 찢어지고, 내장은 드러나 있다. 메스껍고, 혐오스러운 형상은 관람자에게 두려움과 추함을 주는 동시에 묘한 환상을 일으킨다.
밀란 쿤데라는 베이컨을 평하여 ‘화가의 잔인한 손이 그려낸 인체는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자아를 찾아내어서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귀한 정신의 표현을 위하여 인체적인 이상적인 아름다움으로 변형하여 그리던 서구 회화의 전통은 무너져 버리고, 인체가 욕망의 상징 언어로 바뀐 것은 아이러니이다. 따지고 보면 몸은 보이는 그대로의 육체일 뿐이다. 그런데도 정신성이니, 자아니, 하는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기표가 되었다. (기표가 되었다는 것은 몸이 정신읋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는 뜻이다.)
전쟁을 피해서 미국으로 건너 간 유럽의 화가 중에 드 쿠닝이 있었다. 알아보기 어렵도록 불분명한 형상의 여인을 그렸다. 여인상의 머리 부분은 마치 해골 같은 몰골을 하고 있다. 유방을 엄청나게 크게 그리므로 오히려 두려움을 유발한다. 뚜렷하지 않는 윤곽선을 가진 여체는 아름다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드 쿠닝은 여인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면을 부각 시키면서 인도의 칼리 여신에 견주어서 표현하였다. 칼리 여신은 해골로 만든 목걸이를 걸고 있는 무서운 존재이다. 인간에게 시혜를 베풀기도 하지만 해꼬지도 서슴지 않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이다. 드 쿠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몸을 통하여 한없이 사악해질 수도 있는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하였다. 드 쿠닝의 그림은 키르히너의 표현주의 기법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여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몸소 치른 유럽에서는 인간의 잔학성을 뼈저리게 경험하였다. 고귀한 정신성을 부르짖던 유럽의 가치관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허망한 것인가를 가슴이 사무치도록 겪었다. 정의라는 위선을 방패막이로 숨어 있던 욕망이 전쟁을 통해서 얼마나 잔악한 모습으로 드러났는가를 깨달았다. 전쟁을 겪은 화가들은 인간의 의식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의 덩어리가 얼마나 단단한가를 확인하였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고 이름 붙인 인간의 실체를 전쟁이라는 악마들의 놀이를 통하여 체험하였다.
프로이트의 친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친구이다. 베이컨과 함께 영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할아버지가 주장한 잠재된 욕망을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처음에는 친구인 베이컨에 가려져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 하였다. 유럽의 미술이 형태를 포기하고 추상이라는 장르로 줄달음칠 때 프로이트는 전통의 구상 미술에 매달려서 인간의 몸을 그렸다. 인간의 피부를 표현하면서 물감을 거듭 덧칠 하였다. 물감으로 더덕더덕 칠한 인간의 피부는 한없이 추하게 보였다. 그는 인간의 피부를 통하여 내면의 추한 욕망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1980년 대에 이태리에서는 트랜스 아방가르드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는 화가들 중에 클레멘트가 있다. 그는 몸을 통하여 자신의 자아를 찾아간다고 하였다. 우리의 몸은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라캉이 말한 ‘사랑의 뒤에는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명제를 수용하였다. 사랑과 욕망이라는 이중 구조에서 자아를 욕망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가 그린 몸은 사랑의 몸이 아니다. 가면으로 덧 쒸어진 몸이 아니다.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욕망의 몸을 그렸다. 성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추한 모습의 우리 몸은 혐오감을 일으킨다. 우리는 이중 구조의 우리 몸에서 경계선을 넘나드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몸의 그림은 관람자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래서 클레멘트 그림을 ‘나쁜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실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그의 그림을 무조건 거부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림은 다음의 장에 올리겠다)
인간의 몸은 살과 핏줄과 뼈로 구성된 해부학적인 구조인 동시에 물리적인 물질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에는 사회적인 여러 요소들이 스며들어 와서 사회구조적인 구성물인 동시에 사회적인 가치가 머무는 장소이다. 사회 권력이 작용하기도 하고, 문화적 관습이 지배하기도 한다. 행위를 하는 예술가의 몸은 삶이 수행되는 장소인 동시에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규범이 가해지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하는 상징과 은유이다. 예술가이든, 삶을 지속하는 단순한 생활인이든 몸은 결국 어느 개인의 몸으로서 나는 누구이냐, 는 정체성의 문제로 귀결한다. 그래서 요즘은 정신보다는 오히려 몸에 더 무게를 두는 철학자들이 있다.
첫댓글 전쟁을 겪으며 아름답게만 표현할 수 없는 삶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