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장 대환 수호신문(大桓 守護神門)
황산 대변고(大變故).
한달 전에 있었던 그 일은 세간에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굳이 누구도 세상에
알리고자 하지 않았지만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그 일은 천하를 털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진실된 내막이 어찌 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석양이 뉘엿하게 황산을 물들일 때에, 노인 한 사람과 삼십 대의 젊은이 하나가
황산에 나타났다. 산에서 밤을 맞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익숙한 걸음걸이로 산을 타고 있었다.
제각기 등에다 멘 바랑에는 풀포기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약초꾼들인듯한
모습.
노인은 작달막한 체구였지만 단단해보이는 모습이었고, 열리지 않을 듯 꽉 다문
입술은 매우 고집스럽게 보였다. 앞만 보고 걸음을 옮기는 그의 나이는 육십쯤
되었을까.
『 다 와 가는군요』
그의 옆을 따르는 무명 옷을 입은 젊은이가 송글송글 땀이 밴 이마를 소매로
씻으며 웃었다. 집에 다왔다는 안도감이 스며든 얼굴이다.
하지만 노인의 얼굴은 석고상 같았다.
그의 걸음이 조금 더 빨라지는가 싶더니 마치 나는듯이 산을 타기 시작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르던 무명 옷을 입은 젊은이의 얼굴도 얼마가지
않아서 굳어졌다.
그들의 시야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은제곡의 입구가 드러났다.
『용아!』
무명옷의 젊은이가 갑자기 소리치면서 달려갔다.
무섭게 굳은 얼굴로 노인은 주변을 살펴보다가 지난날 자신이 설치해두었던
오행미리진을 넘어갔다. 진은 이미 파괴된 지 오래였다.
『이럴 수가…』
무명옷의 젊은이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 되어 휘청거렸다.
그의 앞에는 폐허가 있었다.
산을 오르기 전까지 집에 돌아가 막내사제가 해놓은 저녁밥을 먹고 씻지도 않고
길게 늘어져 자리라던 그 소박한 꿈을 산산조각내면서.
달이 구름을 헤치고 고개를 내밀었다.
우워어…
어디선가 늑대의 울음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사부와 제자, 두 사람은 납덩이와 같이 굳은 표정으로 반쯤 무너진 모옥을
바라보면서 그 앞에 자리한 바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용아가 약고에 있던 독까지 뿌렸던 것
같은데요』
『…』
사부는 말이 없다.
눈을 감고 마치 잠에라도 빠진 듯이. 하지만 잠든 것이 아님을 말하듯, 그의
눈꼬리는 끊임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내가 만들어두었던 약과 저술하고 있던 약경(藥經)은 어찌 되었더냐?』
『하나도 없었습니다』
『가자!』
갑자기 사부가 벌떡 일어났다.
『어디를?』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를…!』
말을 하던 사부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제자 해부루는 그의 시선을 따라 앞을 보다가 안색이 변했다.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인가.
검은복면을 한 자가 그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들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눈빛만이 야수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너희가 이 은제곡의 주인이냐?』
『당신은 누구요?』
해부루가 물었다.
『맞군!』
복면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좌우로 흑의인들이 서넛이나 더 불었다.
펑!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그것과 같은 순간이었다.
갑자기 사부의 앞에서 폭음과 함께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일대를 단숨에
휘감아버렸던 것이다.
『쫓아! 놓치면 안된다!』
연기 속에서 복면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이 깃든 황산.
달빛만이 사위를 아우르고 있는 산자락은 여전히 절경(絶景)이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도주하는 사람에게는 절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쿠쿠쿠쿠…
저 멀리 폭포소리가 지진이 난 듯 울려온다.
『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한참 가쁘게 숨을 몰아쉰 제자 해부루가 주위를 살피고 있는 사부에게 물었다.
심산에서 맹수나 뱀을 만났을 때 쓰기 위해서 만든 웅황탄(雄黃彈)을 터뜨리고
흑의복면인들의 수중에서 간신히 벗어난 사부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대꾸했다.
『 놈들은 우리를 노리고 있다』
『 왜요? 누가, 무엇 때문에 우리를…』
『 위험하다!』
갑자기 사부가 고함치면서 해부루를 덮쳤다.
검빛이 그들을 쓸고 지나갔다. 그처럼 빠르게 몸을 던졌음에도 사부의 등을 검은
할퀴고 지나갔고 당연히 피가 튀었다.
『 제법이군!』
싸늘한 음성.
대체 언제 따라왔는지 은제곡에 나타났던 복면인이 두 사람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 사부님!』
사부가 대신 검을 맞은 것을 보자 해부루는 놀라 소리쳤다.
『 나, 나는 괜찮다…』
『 대체 무슨 일이오?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릴 죽이려는거요?』
해부루는 사부를 부둥켜안고 소리쳤다.
『 죽일 생각은 없다. 우리와 같이 가기만 하면 된다. 가서 당신이 저술하던
약경을 완성하고, 우리가 요구하는 일을 하면 당신은 해치지 않겠다』
복면인이 그 앞에서 차갑게 말했다.
은제곡에서 보았던 흑의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도주할 길은 없다.
『 당신들이 곡을 그렇게 만들었나?』
해부루가 복면인을 노려보면서 외쳐물었다.
복면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 그렇지 않다. 데려가라』
그의 말에 흑의인들이 바람처럼 달려들어 해부루와 사부의 팔을 움켜잡았다.
무공을 지니지 않은 사도(師徒) 두 사람을 제압한다는 것은 여반장이다.
한데,
『 꺼져라!』
갑자기 해부루가 고함치자 그의 팔을 깍지끼듯이 움켜잡았던 흑의인 둘이 목을
움켜잡고서 뒤로 넘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사부를 제압했던 흑의인도
마찬가지였다.
『 독?』
복면인의 눈빛이 굳어졌다.
찰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예의 누런연기가 무섭게 일어나 주위를 휘감았다.
『 그따위 짓거리가 계속해서 통할 줄 알았더냐?』
복면인이 냉소를 터뜨리면서 검을 쳐들어 앞으로 무찔러갔다.
『 으악!』
해부루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복면인의 검이 연기속에서도 정확히 그의 가슴을 꿰뚫어버렸기 때문이다.
『 해부루!』
사부가 두눈을 부릅떴다.
『 사, 사부님… 어서 이곳을 벗어나…』
해부루가 복면인에게 매달리면서 부르짖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복면인이
사정없이 검을 휘젓자 구슬픈 비명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고 피분수와 함께
해부루는 쓰러지고 말았다.
『 해, 해부루…!』
사부는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연기 속에서 복면인이 검을 사부의 목에다 겨누었다. 서릿발 같은 검끝이 그의
목젖을 눌러 피를 스며나오게 했다.
『 한번만 더 수작을 부리면 너도 죽는다』
산골의 초부라면 이런 정도면 공포에 질려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틀린 사람이었다.
사부는 무섭게 부릅뜬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나보다 네놈이 먼저 죽는다!』
그 말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복면인은 문득 눈앞이 침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별안간 허공에 둥둥 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독?』
한 생각이 머리를 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그의 검이 앞으로 무찔러나갔다.
『으아앗!』
사부의 입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는 평생을 독의 연구에 바친 사람이었다. 무공이라고는 간단한 권각 밖에는
몰랐지만 십 보 밖의 사람도 마음만 먹는다면 중독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였다.
복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중독된 것은 당연했다.
사부 또한 살기 위해서였으므로 거기에 조금도 사정이 있을리 없었다. 극독이
살포되었던 것이다.
복면인의 마지막 발작을 그가 예상치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복면인이 검을
쳐내자마자 땅바닥에다 몸을 굴렸다.
자연히 복면인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그의 몸은 허공에 훌쩍 떠올랐다.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를
깨닫게 되는 순간, 그의 신형은 누가 잡아당기듯이 무서운 속도로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가 몸을 굴린 곳은 절벽이었던 것이다.
그가 사라짐과 함께 누런 연기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크흐윽…!』
복면인은 괴로운 신음을 흘리면서 비틀거리며 물러나다가 바위에 등을 기댔다.
하늘과 땅이 검게 변하고 있는 듯했다.
『무슨 일이냐?』
그의 앞에서 냉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복면인이 억지로 눈을 떠 살펴보니 그의 앞에는 회의를 입은 자가 한 사람 나타나
있었다.
『호, 호법…』
그의 설명에 의해서 사정을 알게 된 회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멍청한… 그래서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절벽으로 떨어뜨렸단 말이냐?』
『어, 어쩔 수 없는…으악!』
독이 발작해 고통스러운 빛으로 말을 하던 복면인은 회의인의 일장에 의해
가랑잎처럼 절벽으로 떨어졌다.
『쓸모없는 놈 같으니…』
낮게 중얼거린 회의인은 절벽 가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밤안개로 인해 아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과과과과…
밤이라 그런지 폭포의 울림은 더 거대했다.
『하필이면 또 이 폭포란 말인가? 떨어지면 찾을 수 없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해부루의 시신을 힐끗 보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는 백무결에 의해 각라라 불리던 사람이었다.
* * *
끔찍한 고통.
해부루의 사부는 고통과 악몽에서 시달리고 있었다. 언제나 정겨웠던 삶의 터전이
귀신의 놀이터가 되고 그처럼 사랑했던 제자 둘이 그의 앞에서 차례로 피투성이로
난도질 당하여 죽어간다.
어둠과 피와 고통이 한꺼번에 뒤섞여 그를 짓눌렀다.
『으-으악!』
고함 소리와 함께 그는 눈을 떴다.
『정신이 듭니까?』
어디선가 침착한 음성이 들리는 것 같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소리도 정말 들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시 정신이 아득한 나락으로 떨어진다.
……
그가 정신을 다시 차린 것은 얼마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난 다음이다.
눈을 뜬 그는 희미한 기억 속에 계속해서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그 얼굴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봉두난발의 괴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침착했고 또한 매우 젊어 보였다. 검붉은 피부색이 괴이했지만
자신을 보는 눈빛은 순수했다.
『여긴…?』
사부는 눈을 뜨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정신을 잃은 다음 얼마나 지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말소리가 쇳소리처럼 갈라져 들렸다.
『운무곡(雲霧谷)이라 합니다. 폭포 뒤에 숨겨진 일종의 수렴동(水簾洞)이라 할 수
있지요』
봉두난발의 청년이 말했다.
시야가 흐릿했다.
한참을 망연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봉두난발의 괴인을 바라보고 있던 사부가
입을 열어 물었다.
『 수렴동이라면… 설마, 여기가… 폭포 안이란 말이오?』
『 그렇습니다』
봉두난발의 괴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쿵쿵… 하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고 있었다.
은은한 햇살이 그를 어루만지고 있는데, 묘하게 시야는 흐릿하여 마치
환경(幻境)에 든 듯했다. 하지만 그 흐릿한 시야에도 깎아지른 절벽이 좌우로
병풍처럼 둘러져 있음은 보였다.
사부가 누워 있는 곳은 바위 아래인데, 마른풀들이 잔뜩 깔려 있고 몸위에도 덮여
있었다. 아마도 괴인이 그를 위해 수고를 한 모양이다.
『 여기서… 사시오?』
사부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하자 가슴으로 고통이 밀려왔다.
『 잠시… 그렇게 되었습니다』
괴인이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물을만한 계제가 아니다.
차츰 정신이 들게 되자 뇌리를 치는 것은 자신이 그처럼 아끼던 제자의 마지막
모습!
『 해부루!』
사부는 부르짖으며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 말 것을.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문득 전신이 산산조각나는 듯한 지독한 고통이 엄습해 절로 입이 딱 벌어졌다.
『 움직이지 마십시오. 갈빗대가 몇군데 부러진 것 같고, 다리 하나가 부러진데다,
어깨도 아마 탈골이 되신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날려 들어오실 때 심하게
부딪치셨는지 전신에 상처가 심합니다』
괴인이 그를 일어나지 못하게 말리면서 말했다.
이제 보니 사부의 다리에는 부목이 대어져 있었다.
『 제가 응급조치는 했지만 이곳이 절지(絶地)인지라, 약도 없고 능력도 모자라…』
괴인이 말끝을 흐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몰랐었지만 일단 아픔이 느껴지자, 견디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 전신으로 엄습해왔다. 가슴을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에 사부는 견디지
못하고 나직한 신음과 함께 다시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괴인은 그러한 그를 보고는 나직히 탄식했다. 바로 얼마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돌봐주는 사람조차 없어서 얼마를 그냥 바닥에 팽개쳐진 채로
신음했었는지 모른다.
왕승고.
사부를 구한 괴인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시체조차 찾지 못했던 바로 그였다.
백무결의 일격에 의해 절벽에서 추락한 그는 가히 전신이 부서지는 충격을
계속해서 받아야 했다. 바위에 부딪치고 노송에 받혀서 이리 퉁겨지고 저리
거꾸러져 나중에는 아예 정신을 잃어버렸다.
정신을 잃기 전, 그는 갑자기 자신이 팔랑개비처럼 돌고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까닭은 알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고막을 울리는 폭포의 굉음 속에서였다.
시야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죽은 듯 있던 왕승고가 주위를 살펴볼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간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정신을 차린 시간이 밤이었던 까닭이다.
전신이 모조리 부서져버린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고자 하면 절로 신음이 새어나왔다. 은은한 빛이 주위에
비쳐들자 왕승고는 자신이 쓰러져 있는 곳이 거대한 동굴의 입구인 것을 알게
되었다.
동굴 속에서는 희뿌연 물줄기가 수벽(水壁)을 형성하고서 크게 고함치고 있었다.
물방울이 그가 있는 곳까지 튀었다.
그 물벽이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보았던 폭포임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이 누워 있었지만 살아있음은 분명했다.
백무결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의 태도로 보건대, 누군가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자신을 죽이고자 한 것이
분명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천부신공을 떠올린 그가 천부신공을 운기하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한번, 두번…
사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의 시간이 지나게 되자 천부신공의 덕으로 왕승고는 조금씩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어차피 한쪽 팔은 성하지 못했던 상태였지만 팔은
그런대로 움직일 만했다. 그러나 다리가 문제였다. 왼쪽 다리가 완전히 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뼈를 깎는 고통이 엄습했다.
물이 튀겨 나오니 간신히 목은 축일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겨우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된 왕승고는 기어서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굴 바깥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구름과 안개가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뒤엉겨 있었다. 그리고 시야를 가리며
좌우로 하늘을 가리면서 치솟아 오른 산봉이 그 구름과 안개 가운데 환상처럼
자리했다.
그야말로 구름 위에 올라선 것 같았다.
거기에 햇살이 비치니 그 광경을 뭐라고 형언할까.
한참 넋을 잃고 있던 왕승고는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동굴에서
흘러나온 물이 시내를 이루고 흘러가고 그 시냇가에 숲이 우거져 있음을 발견했다.
황산답게 소나무들이 그 뒤로 키를 다투고 있었다.
거기서 왕승고는 과일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뭔지도 모를 과일이다. 하지만 그처럼 맛있는 과일은 맹세코 세상에 태어나 먹어본
일이 없다.
그렇게 허겁지겁 배를 채운 뒤에 그는 나뭇가지를 찾아 부러진 다리에 대고 자신의
옷자락을 찢어 묶은 다음,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 지팡이 삼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절벽에서 떨어진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동굴 밖을 둘러본 왕승고는 이곳이 일종의 호리병 같이 생긴 절곡(絶谷)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사방이 안개로 가득해서 대낮이라 할지라도 그 전체를 알기는
힘들었다.
그때, 묘한 느낌이 그에게 달려왔다.
고개를 돌린 왕승고의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누런 빛이 번쩍 하더니 사라졌기 때문이다.
따라 몸을 날렸다.
비록 지팡이를 짚고 있고 한쪽 다리가 부러져 있다고는 하나, 절룩거리면서도 이젠
제법 움직일 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뿐, 누런 그림자는 다시 볼 수 없었다.
잘못 본 것인가?
그때, 왕승고의 전신이 굳어졌다.
참으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운무곡(雲霧谷)」
눈앞에 드러난 높다란 초벽. 높이가 얼마인지도 모를 그 까마득히 올라간 가파른
절벽의 중턱에 햇살을 받아 흩어진 안개를 헤치고 「운무곡」이라는 세 글자가
도장을 찍듯이 커다랗게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황산 운무곡…!
지난날 토지묘에서 그에게 천부신공을 전해주었던 그 괴노인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다.
고통으로 처절하게 전신을 떨면서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그의 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말이 이제 떠오른 것이다.
『 어떻게 이런 일이…』
왕승고는 그대로 굳어져 인연의 무서움을 절감한다. 이렇게 은비(隱秘)한 곳에
숨겨져 있는 운무곡이다. 만약 그가 백무결에 의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이곳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이곳을 그에게 이야기한 것일까.
꽉꽉!
갑자기 뭔가가 고함을 친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와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누런 털을 가진 원숭이 한 마리가
그를 보고 소리를 치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 저놈이었군…』
비로소 조금 전에 있었던 그 누런 그림자의 정체를 알게 된 왕승고가 실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번쩍 하는 사이에 그 원숭이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빨라도 저럴 수는 없다.
그곳으로 다가가 살펴본 왕승고는 칡덩굴이 천년의 세월로 얽혀 늘어진 그 절벽에
동굴 하나가 있음을 찾아낼 수 있었다.
왕승고가 안을 들여다보자 원숭이는 그 안에서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내면서 인상을
확 긁어보였다. 자못 기세가 흉흉하다.
놈이 이를 드러내놓고 위협을 하자 왕승고는 피식 웃었다. 가소로웠기 때문이다.
누런 원숭이는 대여섯살 먹은 어린아이만해서 덩치로 보나 뭐로 보나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나오기도 전에 들어가야했다.
원숭이가 갑자기 공격을 해왔던 것이다.
캑!
달려들던 놈이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왕승고가 달려들던 원숭이의 얼굴을 지팡이삼아 짚고 있던 굵은 나뭇가지로 한대
패주었던 것이다. 장군부의 책벌레 시절부터 곽천수장군의 훈도로 도검을
다루어왔던 그였다.
그 이후, 그처럼 참혹한 일들을 겪으며 순간순간을 칼날 위를 살아오듯이 실전에서
단련된 그였으니 원숭이를 물리치는 것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원숭이는 나동그라졌다가 노발대발해서 이를 갈아붙이면서 벌떡 일어나
다시 덤벼들었다.
캐액!
이번에는 좀 과했던 모양이다.
원숭이는 머리를 움켜쥐고서 한참 일어나지 못했다. 그를 쳐다보는 눈에 은은히
공포가 어렸다.
왕승고가 쓴웃음을 지었다.
『 공연히 힘쓰지마. 봐주느라고 지팡이로 때린거야. 널 내가 주먹으로 치면 그
순간, 너는 죽게 돼. 무슨 소린지 알겠냐?』
무슨 소린지 알 리가 없다.
원숭이는 왕승고가 지팡이를 한번 더 치켜들자 ▦! 하고 놀란 외침을 토해내더니
바람처럼 동굴 안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피식, 웃고 돌아가려던 왕승고는 문득 등뒤에서 귀를 찢는 고함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와서 고개를 돌려보고는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아까의 그 원숭이가 기세등등하게 달려오고 있는데, 그 뒤로 그보다 덩치 큰
원숭이들이 십여마리나 흉흉한 기세로 팔을 걷어붙이면서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를 다시 또 십여마리의 작은 원숭이들이 구경이라도 난 듯이 몰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왕승고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입을 벌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원숭이들의 손톱은 간단치 않은 위력이 있다. 더구나 그는 지금 성한 몸이 아닌
것이다.
원숭이떼와 왕승고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고전을 면할 길이 없었다.
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하독공을 써서 원숭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 것은 너무도 잔인한
일이라 차마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있자니 놈들은 사정이란걸 보지 않는다. 원숭이 한 놈에게 등을
할퀴어 피가 튀게되자 왕승고는 정신이 번쩍 났다.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에
출혈이 심해서 몸의 움직임이 전과 같지 않았다.
한쪽 다리까지 부러진 마당이 아닌가.
왕승고는 돌연 천부신공을 운기하여 벽력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원숭이들이 깜짝 놀라서 주춤 물러났다.
왕승고는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바람처럼 지팡이를 휘둘러 대번에
서너마리의 원숭이를 때려눕혔다. 그리고는 쉴새없이 처음 나타났던 원숭이의 곁에
서서 호시탐탐 그를 노려보고 있는 덩치가 큰 원숭이를 덮쳐갔다.
그는 박식했으므로, 이런 무리중에는 반드시 대장이 있기 마련이고 그놈을 누이게
되면 사태를 수습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싸우면서 주위를 둘러본 결과, 꼬리를 빳빳하게 세운채 팔짱을 낀채로
거드름을 부리는 덩치가 큰 원숭이 한놈을 발견했던 것이다.
놈은 왕승고가 펄쩍펄쩍 뛰면서 -한쪽 다리가 부러졌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이날 이후, 왕승고는 사흘쯤은 누워 다시 앓아야 했다. -달려들자 약세를 보이지
않고 마주 달려들었다.
과연 다른 놈과 달랐다.
한 두 대를 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놈의 손톱에 눈을 빼일뻔 한 왕승고는 간담이 서늘해져서
원숭이라고 얕보던 생각을 아예 버려야 했다. 덩치가 큰 놈이 동작조차 민활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다고 자하독공으로 놈을 죽이기는 차마…
하지만 승부는 엉뚱한 곳에서 났다.
바람처럼 빠르게 왕승고 주위를 돌며 공격을 하던 놈이 갑자기 비실거리며 헤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아했지만 일단 물실호기(勿失好機)!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승고는 놈을 때려뉘었다.
승리는 그에게 돌아온 셈이었다.
10장 대한수호신문
왕승고가 놈을 때려누이자 원숭이들은 모조리 사색이 되었다.
그가 짐짓 눈을 부릅뜨고서 지팡이를 치켜들자 원숭이들이 혼비백산하여 일제히
머리를 감싸쥐고서 동굴 안으로 도망쳤다.
간신히 한숨을 돌리게 된 왕승고는 비틀거리는 신형을 가누기 위해서 곁에 있는
바위에 등을 기댔다. 전신이 마치 솜처럼 늘어졌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그
자리에서 흘러내릴 듯했다.
원숭이에게 할퀸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쓰라린 듯 그것을 손으로 누르던 왕승고는 자신의 그 검은 피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문득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황급히 자신의 일격을 머리에 맞고 그대로 인사불성, 쓰러진 원숭이에게 가
살펴보았다.
과연이었다.
대장 원숭이는 기식이 엄엄하여 쓰러져 있었는데 자신을 할퀴었던 손가락뿐만
아니라, 그 팔뚝 전체가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처럼 흉포하던 놈이 갑자기
비실거린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독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가 막혀 잠시 대장 원숭이를 내려다보던 왕승고는 한숨을 쉬고는 품속을
뒤적거렸다.
신기하게도 품속에 있던 물품들은 대개 그대로 있는 것 같았다. 지난날 의선의
제자 운지룡이 그에게 주었던 벽응환이 든 병도 있었다.
원숭이에게 효과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어가는 것을 그냥 두기도 뭐했다.
입에다 벽응환 한 알을 넣어준 왕승고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물을 떠다가 놈의
입에다 넣어주었다.
그 광경을 동굴안에서 원숭이 몇놈이 고개를 내밀고서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일단 약을 먹였으니 그냥 가기도 그런지라 깨어나는 것을 보기로 하고 왕승고는 그
자리에서 운기조식하기 시작했다. 성치 않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진쯤이 지나자 켁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물을 한 대야나 토해내면서
대장 원숭이가 깨어났다.
한참을 게워내고는 정신이 휑한 듯 주저앉아있던 대장 원숭이는 그 앞에 앉아있는
왕승고를 발견하자 험악하게 인상을 긁었다.
하지만 왕승고는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지라 대뜸 사정을 두지 않고 놈의 머리통을
지팡이로 후려갈겼다.
펑!
머리가 안깨졌으면 다행이다.
비명과 함께 대장 원숭이가 머리를 감싸쥐고 나뒹굴었다. 중독으로 인해 거의 죽을
뻔했던 놈이 무슨 기운으로 더 덤빌 수 있겠는가?
꼬리를 말고 동굴 안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것이 왕승고가 이 운무곡에 들어 온 첫날의 일이었다.
조금씩 기운을 차리면서 운무곡을 살펴본 왕승고는 난감해졌다.
사방이 단애절학(斷崖絶壑)으로 막혀있는데다가 걸핏하면 운무가 시야를 가리니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운무곡인데, 어쩌면 절벽에 얽힌 칡덩굴을 타고 위로 올라가봄직도
하지만 지금의 왕승고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던 며칠 후, 햇살에 드러난 운무곡이라는 글자를 무심히 보고 있던 왕승고는
문득 생각이 미쳤다.
대체 그 괴노인이 운무곡이라고 외친 이유가 무엇일까?
세살 먹은 아이라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운무곡을 찾아가라는 것일 터였다. 하면
무엇 때문에?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뭔가 거기 있다는 소리일 것이다.
불현 듯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강(講)해준 천부신공이 실로 놀라운 효능이 있음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소한 왕승고에게만은 그 괴노인이 미친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절룩거리면서 운무곡을 사방 더듬어 보아도 뭐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문득 뇌리에 스치는 남은 곳 하나.
왕승고는 두 말도 하지 않고서 원숭이들의 굴로 향했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서
보무도 당당하게 동굴 안으로 절룩거리며 들어서자 그를 알아본 원숭이들에게서
난리가 났다.
대장 원숭이가 쫓아나왔다.
그리곤 입을 벌리고 이를 드러내보였다.
또 싸워야 한단 말인가?
벽을 가득 메운 신지문을 거의 다 읽어낸 왕승고는 어느 날, 그 끝에 전혀 다른
내용이 있음을 발견해내게 되었다.
「나는 일맥단전(一脈單傳)하는 대한수호신문(大桓守護神門)의 172대 제자인
한호국(桓護國)이라 한다… 나는 내 민족인 동이부흥(東夷復興)의 사명(師命)을
받고 수호신문을 떠나왔다.
하지만 고려는 명운(命運)을 다하여 나는 그 마지막 왕인 우왕의 왕비를 구해…」
글은 갑자기 흐트러져 거기서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승고를 경악케 하기에 족한 놀라운 의미를 그 글은 담고
있었다.
『 우왕의 왕비를 구하다니…』
부지중에 왕승고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되뇌임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그가 설마 어머니인 영비가 말하던 그 은공(恩公)이란 말인가?
안타까워진 왕승고가 벽에 새겨진 글자를 읽기 위해서 애를 썼지만 더 이상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몇자 다음에는 급격히 흐트러져 있는데다가 그 뒤에는 아예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만약 그 사람이라면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여기에다 이런 기록을
남겨두고 그런 모습으로 세상을 떠돌고 있단 말인가.
대답을 지금 얻을 수는 없다.
왕승고는 그날부터 천부신공을 수습하기 시작했고, 겸해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그에게 전수한 무공들을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뼈저리게 힘의 필요성을 느낀 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는 거의 아문 다리를 확인할 겸하여 신법을 펼쳐 곡내를 돌아다니고
있던 왕승고는 자신이 들어왔던 곳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상처는 실로 심했다. 다리가 부러진거나 전신을 난도질하듯 난 상처야
차치하고, 부러진 갈빗대가 그의 내부를 찔러 내출혈이 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쨌든 그는 왕승고의 보살핌으로 일단 정신은 차렸다.
사부는 따스한 양광에 전신을 맡긴 채 왕승고의 말을 듣고 있었다.
『 폭포에서 생기는 물보라의 힘과 일대의 계곡에서 이는 돌개바람이 만나게 되면
그 와중에 휩쓸린 물체가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말하던 왕승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 다시 말하면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사부는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 자네의 몸은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나?』
왕승고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 의아하게 생각할 것 없다. 노부는 평생을 해독에만 매달렸던 사람이니까, 그
정도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의 말에 잠시 그를 쳐다보고 있던 왕승고가 물었다.
『 황산에 사십니까?』
『 ……』
대답 대신 사부는 고개를 끄떡였다.
원래의 괴팍함을 생각한다면 이런 대답도 하지 않았을 그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 그럼… 혹시 목우충(木雨忠), 목노선생이십니까?』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왕승고의 말에 사부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그, 그걸… 어떻게 아나?』
격동하여 몸을 일으키던 사부, 목우충이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그의 말에 왕승고는 나직이 신음을 토했다.
하늘의 장난은 참으로 심하다.
자신과 이 노인이 만날 인연이라면 그냥 만나게 하면 될 것을, 하필이면 이런
모습, 이런 상황으로 만나게 한단 말인가.
왕승고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목우충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 그, 그런…』
해독에 평생을 바쳤다는 말에서 그의 신분을 짐작해낸 왕승고는 그의 참혹한
처경에 말을 잃었다.
그는 아마도 살아나기 힘들 것이다.
사부, 목우충은 말을 잃었다.
그는 한참을 넋을 잃은 듯 그렇게 앉아있더니 갑자기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 대체, 내가 무슨 죄가 있으며 우리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대체 우리
민족이 무슨 죄가 있기에 이렇게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괴롭히는 것이냐! 이
빌어먹을 하늘 놈아!!』
하늘을 향해 주먹질하는 목우충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 노사(老師)!』
왕승고가 놀라 그를 부축했다.
쿨룩쿨룩… 목우충의 입에서 거품이 이는 피가 덩어리로 올라왔다. 피에서 거품이
인다는 것은 상세가 치명적인 것을 의미한다.
왕승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쓰러지는 목우충의 가슴팍
중정혈(中庭穴) 위에 손을 올려놓고 천부신공을 운기했다. 피부에 손을 댄다면
바로 중독이 되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를 부축할 때에도 직접 손을 대지
않았던 터였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탁한 숨을 불어내면서 목우충이 눈을 떴다.
『 정신이 드십니까?』
왕승고가 손을 떼며 조용히 묻자, 목우충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추태를 보였군. 그만 두게. 어차피 나는 얼마 살지 못할터이니…』
『 무슨 말씀을. 잘 조리하시면…』
쓴 웃음이 목우충의 얼굴에 떠올랐다.
『 평생을 의도에 바친 나인데, 내 몸이 어떤 처경인 것을 어찌 모를 리 있겠나?』
왕승고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이런 봉변을…』
『 그게 어찌 자네 때문인가? 자네가 은제곡에 갔을 때에는 이미 육노괴가 와
있었다면서? 점창파의 육노괴(陸老怪)는 나와 이십년 친구이니 그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나를 찾은 것 또한 무리가 아니지. 이 모든 것이 다 하늘의 장난인
것을…』
목우충은 다시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끝을 흐렸다.
『 그만 하십시오. 무리하시면…』
『 무리하지 않아도 어차피 길지 못할 목숨…』
고통이 있는 듯 괴로운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린 목우충은 왕승고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 어쩌다가 그렇게 괴이한 상태가 된 것인지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왕승고가 지난 사정을 대강 간추리자 목우충은 고집스러운 얼굴에 흥미로운 빛을
보였다.
『 어디 맥을 좀 보세』
『 제 몸을 만지면…』
『 그까짓 중독이 어찌 나를 어렵게 할 수 있겠나?』
목우충은 코웃음치면서 성한 한쪽 팔로 왕승고의 맥을 짚었다.
쿵쿵…
은은히 울리는 폭포의 외침소리, 그리고 새들과 짐승들의 소리등이 고요로서
갑자기 그 자리에 찾아왔다.
『 참으로 특이하군!』
무려 한식경 이상을 왕승고의 맥을 짚고 있던 목우충이 손을 떼면서 한 말이다.
『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것이 사람의 독이라 하거니와, 자네 몸의 독은 이미
그러한 인독(人毒)이 되어 골수에 스며들기 시작하였으니 아마 당금 천하의 어떠한
사람이 와도 해독은 불가능할걸세. 의선은 생명을 연장시킬 생각만 했지, 해독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군』
역시….
최후의 보루와도 같았던 그의 말에 왕승고는 맥이 탁 풀렸다.
다시 고통이 밀려오는지 목우충은 눈을 감고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조용히 있던 왕승고가 입을 열어 물었다.
『 얼마나 살 수 있겠습니까?』
목우충이 묘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 그를 보았다.
『 글쎄… 체내의 독기가 계속 강해지고 있으니까 길면 석달 정도겠지』
석 달! 그것도 길면….
왕승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을 보고 있던 목우충이 물었다.
『 살고 싶은가?』
쓴 웃음이 왕승고의 입가에 스쳐갔다.
『 한낱 미물도 생을 탐하는데 어찌 사람으로서… 하지만 방도가 없는 이상,
구차한 모습을 보이면 또 무엇하겠습니까?』
『 살 수 없다고 누가 그러던가?』
목우충이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느닷없는 목우충의 말에 왕승고의 전신이 떨렸다.
『무슨…? 그럼 해독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내 숨이 붙어있는 한, 천하에 해독하지 못할 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나무를 끊어내는 듯한 말.
고집스러운 그 어조에는 목우충의 자부가 깃들어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말에 왕승고는 말을 잃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조건?』
『그렇다. 내가 시키는 일을 하나 해야 한다!』
왕승고는 목우충을 보았다.
그의 눈빛은 강하고 굳었다. 평생을 한길로 살아온 사람. 그 괴팍함이 눈에서
느껴졌다. 채노야는 말했었다. 특별한 연(緣)이 없다면 곁에서 누가 죽어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괴인이 그라고.
『어떤 일입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목우충이 미간을 찡그리고서 그를 보았다.
『그건 알아서 뭐해? 어차피 살려면 내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할텐데… 일이 마음에
안들면 삶을 포기라도 할 셈인가?』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뜻밖에도 왕승고의 말은 침착하고도 단호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목우충은 냉소를 터뜨렸다.
『할 수 없는 일을 내가 시킬 것 같은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해서는 안될 일도 있을 겁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한다면 의(義)가 아니지요. 그것은 또한 노사를
기만함이 될터이니 어찌 존장에 대한 예(禮)라고 하겠습니까?』
어이없는 듯 목우충은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왕승고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깊은 물과
같다고나 할까. 전혀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 거기 있었다.
비로소 목우충은 왕승고의 실체를 본 듯했다.
『그렇군… 독성이 강해지면 살인귀 하나를 만들게 될 것이 분명한데도 의선이
그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자네를 살려놓은 까닭이 있었군!』
한참만에 목우충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원래 그의 성미라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내 평생에 가장 싫어하는 놈들이 바로 너 같이 말만 번드레하게 하는 놈이다….
그렇게 코웃음치면서 대뜸 낯짝을 갈겨주었을 것이지만 왕승고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가 한 말이 진실임을 느끼게 하는 힘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쉽지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님을 목우충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떡이고 만 것이다.
『무덤을 말입니까?』
왕승고가 놀라 물었다.
목우충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셨던 분의 무덤을 찾으라는 것이 나의 요구다!』
『그럼, 의자왕(義慈王)의…』
『그렇… 윽!』
갑자기 목우충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격렬한 기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피가 튄다. 격렬한 기침이라고는 하지만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전신을 떨기만 하는
참혹한 형상이다.
『노사!』
당황한 왕승고가 소리치자 목우충이 손을 흔들었다.
『기, 기문혈(氣門穴)을…!』
기문이라면 36개 대혈중 9개의 사혈 가운데 하나다. 그런 자리를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하지만 망설이고 있을 계제가 아니었다.
목우충은 말을 하지 못하고 치라는 시늉만 한쪽 손으로 계속 보내고 있다. 눈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기침은 계속되고 거품 피가 입에서 나온다.
더 이상 망설일 수 없게 된 왕승고는 천부신공을 운기하여 그의 기문혈을 쳤다.
천부신공을 운기하는 까닭은 혹시라도 자신의 체내에 있는 독기가 그의 숨을
끊어놓을까 저어한 까닭이다.
캑!
순간, 목우충은 덩어리 피를 토해냈다.
『노사!』
왕승고가 긴장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목우충의 기침은 멎고 그의 얼굴에는 평온이 돌아오고
있었다.
의자왕은 비운(悲運)의 왕이다.
어느 왕조(王朝)나 그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왕은 처참하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더욱 참혹했다. 자신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31대 678년간이나 이어져 오던 사직이 종언을 고한 것으로도 모자랐다.
백제를 쳐 이겼다는 승전보에 접한 김춘추와 그 아들은 급히 말을 달려 부여성에
입성했고, 그해 8월2일자로 대대적인 승전잔치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김춘추는
의자왕과 그 아들인 태자 융(隆)을 마루 아래에 꿇어앉히고 의자왕에게 술을 치게
하면서 즐기니, 본인은 물론이고 항복한 백제의 여러 신하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패자에 대한 아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인간적인 기품조차 찾아볼 수 없는
상황. 그것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거품을 무는 신라의 태종무열왕이자 사대주의자인
김춘추의 본색이었다.
거기에 더해 의자왕은 태자 융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마쳤다.
대체 언제부터 이 안개는 이곳에 있었던 것일까.
인간이 생각지 못했을 그 오랜 세월을 존재해왔을 안개로 덮인 운무곡은 은은히
울리는 폭포소리 외에는 고요한 평온이 감돌고 있었다.
가쁜 숨을 내쉬고 있던 목우충이 말했다.
『내가 백제인이라는 말은 들었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도 그 정도밖에는 모르지. 나는 백제말기 부여윤충(夫餘允忠) 장군의
부장이었던 목다우(木多雨)란 분의 후예다』
『부여윤충이라면 백제의 마지막 충신이셨던 성충(成忠) 장군의 동생이셨던 그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잘아는군!』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목우충이 그를 보자 왕승고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저 또한 동이족이니까요. 전 고려인입니다』
『고려?』
되묻는 목우충의 눈에 묘한 빛이 돌았다.
내가 고려의 마지막 왕손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그렇고 숨기기도 그렇다. 왕승고는
결국 먼저 입을 열어 그의 물음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듣기로는 백제가 경영하던 해외거점중 마지막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월주(越州)의 진장(鎭將)이 그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노사께서는…』
『마지막까지 남아 월주를 사수하다 죽어간 분들의 후손이라고 하면 맞겠지…』
목우충이 말끝을 흐렸다.
월주(越州)라고 하면 바로 오늘날의 남경부근이다. 바로 얼마전까지 왕승고가
살았던 그 명의 수도인 경사(京師)를 말한다.
백제가 해외경영을 시작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이군(二郡)을 산동반도에
설치하여 200년이나 유지했던 것이고, 그 세(勢)를 더욱 떨치게 되자 남경일대까지
공취하여 상부두를 설치하고서 대륙의 남방과 교역을 했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삼국사기에도 일러, 「백제(百濟). 남침(南侵) 오월(吳越). 북요(北搖)
유(幽).연(燕).제(齊).노(魯)」라 하여 백제가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산동일대를 흔들었다고 하지 않았으랴.
그 다음이 후일, 백제가 무너지면서 그 유민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지금의
만세일계(萬歲一係)라고 하는 일본의 천황가(天皇家)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윤충 장군이 간신들의 모함에 걸려 본국으로 소환되신 다음, 월주에 남았던
백제인들은 당인(唐人)들의 공격에 거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왕께서 놈들에 의해 바다를 건너 압송되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유신(遺臣)들은 의자왕을 구하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의자왕은 이역만리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유해만이라도 본국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었지만… 그도 쉽지 않았다. 이미
나라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승냥이와 같은 신라인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승고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나라 잃은 설움은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했다.
백제의 찬란했던 영화는 이미 덧없이 사라진 구름과 같이 흩어졌다.
경사 어디를 가더라도 지난날 백제가 그곳을 점유하고 있었던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연왕이 자리한 북평 일대를 손아귀에 넣고 흔들던 백제의 그
숨결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백제의 웅비(雄飛)가 시작된 것은 고이왕(古爾王) 때였다. 그는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의 환도성(오늘날의 남만주桓因지방)에까지
쳐들어감을 보자 때를 놓치지 않고 군사를 몰아 낙랑군의 서현(西縣.지금의
톈진지방)을 습취하였다.(246)
(古爾王十三年 秋八月. 魏幽州刺史 口十丘儉 與樂浪太守 劉茂.朔方太守 王遵
伐高句麗. 王乘虛遺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삼국사기」)
이후, 백제는 분서왕(汾西王) 등 몇명의 왕이 전사하는 노력을 경주한 끝에
산동반도에 요서.진평의 2개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晉時, 百濟亦據有 遼西.晉平二郡. 今柳城.北京之間.-宋書.梁書.資治通鑑등 9개서)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백제가 요서.진평을 점유한 것이 근초고왕(서기
346∼374년)때에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그러한 웅비기에 빛나는 일은 서기 285년대까지 만주일대에 남아있던 부여가
모용괴에게 망하게 되자 그 왕인 의라(依羅)를 도와 일본에서 응신조(應神朝)
왜국을 건설하게 한 일이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세력분포에 따라 계속해서 왕조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남구주
신무(神武)의 왜국과 기내(畿內)에 위치한 숭신(崇神)왕의 왜국, 그리고
북구주지방에 자리한 비미호(卑彌呼.신공왕후)의 야마대국 등이 위치하는 복잡한
형세였다.
분서왕은 나라를 잃은 형제국 부여의 왕 의라를 도와 야마대국을 흡수하여
오늘날의 오사카(大阪)에서 왜국 최초의 중앙정부인 응신조 왜국을 건설할 수
있게끔 물심양면으로 협력했다. 그 유명한 오경박사 왕인 등이 건너가 나라의
정치조직과 산업개발, 문화향상 등을 도모케 한 것도 그때요, 아직기(阿直岐) 등을
보내어 말을 기를 수 있게 한 것도 그때다.
백제의 웅비는 제24대왕인 동성왕(東城王)때까지 그후 2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뜻밖에도 왜국에서였다』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던 목우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국이라면…』
목우충이 왕승고를 보았다. 희미한 웃음이 그의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젊은이답지 않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했더니 백제가 멸망한 뒤의 일은 잘
모르는 모양이군?』
『복국운동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夫餘勇)이
왜국으로 건너가 세운 현재의 일본국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금도 망설이지 않는 왕승고의 물음에 목우충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참으로 박학하군! 누가 자네를 가르쳤나?』
『어릴 때부터 우리 민족의 위대함을 알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라난 덕분입니다』
『……』
목우충은 말없이 왕승고를 한참 바라보더니 탄식하듯이 말했다.
『조용하니 태산과 같고, 박식하되 드러내지 않으니 참으로 그 나이답지 않군!
노부가 죽기 전에 자네 같은 걸물을 만나게 된 것으로 보아 하늘이 무심하지만은
아니한 모양이군… 그래, 맞아. 내가 말하는 것은 일본국이네』
잠시 해라가 되었던 말투가 다시 하게로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라가 무너짐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상대의 박해가 심하다면 기필코 반발이 일어나게 됨은 정해진 이치와 같다.
대관사(大官寺)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다섯 발 넓이로
피가 흘렀다(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삼국사기」 신라본기)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흐르는 피의 너비가 다섯 발이나 되었다 함은 엄청난
대살육이 감행되었음을 의미한다.
반군을 이끌던 복신(福信)은 『 죽음을 당하기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결사항전이었다.
상황은 심상치 않게 전개되고 있었다.
오죽하면 당나라에서 잡아갔던 태자 융을 다시 백제로 보내 그를 백제의 왕으로
삼았을까.
(乃授扶余隆 熊津都督. 遺還本國. 共新羅與親. 以招輯其余衆.-「구당서 열전」
동이 백제전)
하지만 그러한 복국운동은 결국 당의 승리로 마감되고 복국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은 모두 왜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용(夫餘勇)이 이룩한
천지정권(天智政權)이다. 처음에는 지방정권에 불과했던 천지정권은 중앙정부라 할
수 있는 응신조를 대신하여 결국 서기 668년 1월13일에는 부여용이 스스로를
천지천황(天智天皇)이라 자호하면서 국호를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오늘날의 일본은 바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주(註);여기서 일본이 한반도의 남부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을 두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주장이 허구임이 드러난다.
일본이 임나일본부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에 있는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位臣民』이라는 조목이다. 이것은 끊어 읽는
것에 따라 상당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해석하면 『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말이 된다.
아예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 점에 대해 논하자면 너무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한가지만 짚고자 한다. 임나일본부라는 이름이다.
임나가 한반도가 아닌 대마도 일대에 있었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지만 그외에
중요한 것은 일본이라는 이름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일본이라는 이름을 처음 쓴
것은 천지왕 부여용이다.(咸亨元年(670) 遺使賀平高麗…要倭名更號日本
-「신당서」 일본전) 그런데, 무려 300년 전의 사람인 광개토대왕 시절에 일본이란
이름을 썼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임나일본부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한 역사교육은
명치유신때에 일본사를 새로 만들고 한일합방을 하여 우리나라 역사를
조작하면서부터 일관되게 추진해온 저들의 역사관이다.
1922년 조선의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조선에서의 교육 시책의
요결」에서 지시한 내용을 보면 그것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 조선인 청소년으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 전통 문화를 모르게 하라.
동시에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무능(無爲無能)한 행적
악행(惡行) 및 폐풍 등의 사례, 예컨대 외침을 당하여 항복한 수난사, 중국에
조공을 바쳤던 사실, 당파싸움 등을 들추어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에게 자국의
역사와 조상, 전통 문화에 경멸감을 일으키게 하여 자국(自國)의 모든 것에
혐오감을 느끼게 하라.
그때 일본의 역사와 전통.문화.인물.사적 등을 가르치면 자연히 그들이 일본을
흠모하게 되어 그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이 나라에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심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교육은 이러한 그들의 생각을 아주 충실히
받들어왔다. 최소한 고대사에서만은 분명히 그러했다. 사학의 태두라는 사람들이
그 식민사관에 물든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공할만큼 끈질긴 식민주의의 망령(亡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또한 잘못된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인가를 웅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찾아야 한다. 그 망령을 떨쳐버리고 우리의 참된 역사를 찾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 새롭게 왜를 통치하게 된 백제의 후손들은 그 조상인 의자왕의 유해가 당나라에
있음을 통분하게 생각해서 일본으로 모시고 가려는 계획을 세웠다네. 어차피
본국으로 모시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목우충의 말에 왕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그런데, 제 기억이 맞다면 의자왕의 유해는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것을 아직까지 못 찾으셨다는 말입니까?」
무려 6, 7백년 전의 일이다. 그 오랜 세월을 두고 찾아도 못찾았다면 말이 안된다.
『처음에는 쉽게 찾았지만, 일본 국내에서 변고가 있어서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되고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잊혀져 버린 탓이지. 이제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어지고…』
목우충의 노안(老顔)에 그늘이 덮였다.
목우충의 이번 나들이도 약초를 캐기보다는 기실, 의자왕의 묘를 찾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의 평생은 그 일을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거기에 정력을 쏟았다.
소재가 비밀에 부쳐질 까닭이 없는 묘를 찾는 것이 그처럼 힘든 이유를 왕승고가
알게 된 것은 목우충의 죽음이 임박해서였다.
어쨌든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자신을 해독시키는 것이 아니라도 그러한 부탁이라면 들어주었을 왕승고였다.
해독을 하기 위해서는 약초가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승고가 목우충이 지고
있었던 약초배낭을 가져다 놓자 그는 기쁜 빛을 띠었다.
『 그 와중에도 이것이 남아있었군!』
『 등에 메고 계셨었습니다』
『 너무 급하게 쫓기느라 이것을 벗어놓을 여가도 없었던 것이 자네에게는
천행이로군!』
왕승고가 의아한 빛으로 바라보자 목우충은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 이번 길에서 해독에 필요한 몇가지 귀한 약재를 구했었는데, 그게 모두 여기에
들어 있었기에 하는 말일세. 어디 보자…』
목우충이 약초배낭을 한손으로 뒤적거렸다.
왕승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것을 보자
더 참지 못하고 말했다.
『 좀 쉬시지요』
목우충은 문득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다.
다시 눈의 마주침.
희미한 웃음이 그의 눈에 떠올라왔다.
『 겁나지 않나? 내가 갑자기 덜컥 죽어버리지 않을는지?』
『 그렇다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목우충은 기가 막힌 듯이 다시 왕승고를 보았다.
『 누가 늙은이인지 모르겠군…』
어느 사이인지 모르게 그렇게 사람 사이에는 정(情)이라는 것이 생겨나는 법인
듯했다.
약초배낭에서 약초를 잔뜩 꺼내놓은 목우충이 갑자기 물었다.
『 이곳에 곰 같은 큰 동물이 있나?』
『 곰? 보지 못했습니다만…』
『 음… 있어야 하는…』
그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 대장 원숭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대장 원숭이는 품에다 과일을 잔뜩 안고서 왕승고의 앞에 와서 히쭉 웃어보이며 그
과일을 내려놓았다. 저만치 꼬마 원숭이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수고했다. 가보아라』
왕승고가 고개를 끄떡이자 대장 원숭이가 훌쩍 사라졌다.
목우충이 흥미로운 빛으로 그 광경을 보고 있음을 본 왕승고가 그에게 웃어 보였다.
『 싸움이 붙었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놈들의 대장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 곰 대신 그놈이면 되겠군!』
목우충이 불쑥 말했다.
『 무슨 소리십니까?」
의아한 왕승고가 물었다.
『 자네 몸의 독기는 유례가 없던 거네. 사실상 나도 반드시 해독이 될는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이지. 체내의 독기를 해소한 다음에는 반드시 여독(餘毒)을
배출해야만 하는데, 그때 덩치가 큰 동물이 필요하네. 쉽게 말하면 그 동물의 배를
갈라 그 속에 들어가서 자신의 나머지 독기를 그 동물에게 배출하게 되는 것이지』
목우충은 긴말을 하자 힘이 드는지 기침을 시작했다. 그가 간신히 기침을 멈추었을
때, 그는 무거운 얼굴을 한 왕승고를 볼 수 있었다.
『 꼭 그래야만 됩니까?」
왕승고의 말에 그는 그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 인정으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자네의 목숨이 달린 일이네. 다른 방도는
없어!』
『 ……』
왕승고는 무거운 빛이 되어 원숭이들이 있는 곳을 보았다. 아예 졸개처럼 따라
다니는 놈을 자신의 삶을 위해서 죽인단 말인가….
목우충의 말대로라면 선택의 여지는 없다.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목우충의 의술은 과연 놀라웠다.
그는 금세 숨이 끊어질 중상을 입고서도 왕승고를 시켜 자신을 치료하도록 하여
이젠 거의 보통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은 왕승고의 치료시점이 가까웠음을 의미했다.
『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왕승고를 향해 목우충이 물었다.
『 준비랄 것이 있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면 되겠지요』
왕승고의 대답에 목우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해독이란 쉬운 거라네. 최악의 경우에도 본전에 불과한 법이니까』
『 본전이오?』
왕승고의 물음에 목우충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지!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으니까 손해날 것이 없지 않겠나?』
『 ……』
왕승고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보았다.
목우충은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본다면 아마 먼저 간 그의
제자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것이었다. 하루종일 가도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그였으니까.
『 좋아, 그럼 그 원숭이를 잡아오게』
목우충의 말에 왕승고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 그 놈이 없으면 안되네. 어쩌면 두어 놈 있어야 할 거야. 원래 그 놈보다
덩치가 좀 더 큰 놈이 좋을 터인데…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으니까』
곽곽….
이젠 익숙해진 원숭이들의 소리가 요란했다. 왕승고가 원숭이들의 동굴, 천부경이
새겨진 그 동굴에 도달하자 원숭이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그를 반겨주었다.
눈앞에서 안개가 바람결에 흩어졌다 모였다 한다. 눈을 둘러 대장 원숭이를
찾았으나 오늘따라 보이지 않았다.
그때다.
곽!
한 소리, 외침과 함께 대장 원숭이가 덩굴을 타고 절벽에서 안개를 헤치며 빠르게
내려왔다. 한손만 사용하고 있어서 보니, 한손에는 보지 못하던 과일을 한아름
안고 있었다.
놈은 왕승고를 보더니 히쭉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곤 안고 있던 과일을
왕승고에게 내밀었다.
난감해졌다.
모양을 보니 왕승고를 위해 절벽을 타고 올라가서 과일을 따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차마 못할 짓이다.
암중에 공력을 모으고 있던 왕승고는 대장 원숭이의 새끼가 훌쩍 뛰어올라 그 놈의
목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는 내심 탄식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우충이 지팡이를 짚고서 그의 뒤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부러진 다리는 부목을
댔다. 탈골이 되었던 어깨는 맞추었으니 그런데로 목우충이 움직이는데는 지장이
없는 셈이었다. 외형상은 그렇지만 참으로 기이한 것이 그의 상세였다. 분명히
얼마 버티지 못할 치명적인 상세를 입은 그였는데, 지금은 거의 정상인처럼 보인다.
『 이럴줄 알고 쫓아왔지! 무독불장부(無毒不丈夫)! 독하지 않으면 사내가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인정에 연연하여 삶을
포기하겠단 말인가? 그건 송양지인(宋襄之仁)에 다름이 아닐세!』
쓴 웃음이 왕승고의 입가에 번져갔다.
『 뭐라 하셔도 좋습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과일을 통째 내밀었다.
『 좀 드셔보시겠습니까? 저 놈이 절 위해 따온 겁니다』
목우충의 눈길에 대장 원숭이가 그를 보며 히쭉 웃어보였다.
그 모양을 본 목우충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더니 왕승고의 어깨를 툭 쳤다.
『 가세!』
『 어딜?』
『 어디긴 어딘가? 해독하지 않을텐가?』
『 해독은…』
왕승고가 주춤거리자 목우충이 씩, 웃었다.
『 다른 방도가 있을 거 같네. 어쩌면 난 자네가 자신의 삶을 위해서 저놈을
잡았다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르겠네. 제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다 하는
놈들과 결국은 하나도 다를 바 없구나라고…』
『 그런…』
얼떨떨한 빛으로 왕승고가 그를 보았다.
『 마지막 시험이었다고 해두지!』
목우충이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들을 대장 원숭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이 왔다갔다 한
것을 어찌 알까.
안개가 더 짙었다.
운무곡의 안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정오가 되면 거의 흩어지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 다른 듯 했다. 몇번 와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곳보다 더 습하고 그런
탓인지 안개가 더 짙었다.
거기에 왕승고와 목우충이 서 있었다.
『 지난 이틀간 쉬면서 산세를 봤네. 왜 이곳이 이렇게 짙은 안개가 끼는 것일까
하고…』
『 지세상으로는 안개가 낄 곳이 아니지요』
『 지세도 볼 줄 아나?』
『 아닙니다. 그저 책에서 조금 읽은 정도지요』
목우충은 더 따지지 않고 힘이 드는지 옆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 내 결론은 화산지맥이 이곳에 흐른다는거네』
『 맞습니다. 여기 온천이 있는 것 같더군요』
『 자네의 앞에 있네』
왕승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열기가 은은히 느껴졌다.
『 그런데 그게 무슨…』
『 이곳의 온천은 평범하지 않아. 간헐천(間歇泉)인데다 황산의 영기(靈氣)를 받고
있어서 거기에 몸을 씻는다면 충분히 원숭이의 대신을 하고도 남음이 있네』
해독의 과정은 온천의 옆에서 이루어졌다.
목우충이 만든 해독약을 며칠간에 걸쳐서 복용을 하자 체내에 있는 독기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는 것을 왕승고는 느낄 수 있었다.
노도(怒濤)가 끓어 오르는 것 같다고 할까.
누워있는 왕승고를 내려다 보는 목우충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었다. 그의
옆에는 바랑에서 꺼내놓은 금침이 벌여져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정오가 되자 왕승고의 전신은 마치 먹칠을 한 듯이 검게 변했다.
피부만 그렇게 변한 것이 아니었다. 전신이 가만히 있어도 절로 파동을 치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 이제 벌모세수지법(伐毛洗髓之法)을 전개하겠네. 고통스럽더라도 소리를 지르면
안된다는 것을 명심하게』
말과 함께 목우충이 수중의 금침을 왕승고의 전신에다 꽂기 시작했다.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참아야 할 일이었다.
목우충이 침을 놓는 것은 아주 느려서 한식경가량이나 걸렸다. 의선이
성라금침술로 침을 놓던 것과는 달랐다. 의선은 내공으로 침을 놓았지만 그런
내공을 지니지 못한 목우충은 손으로 침을 놓았다.
목우충이 마지막 금침을 왕승고의 백회에다 놓는 순간, 왕승고는 눈을 부릅떴다.
예의 공포스러운 자광이 마치 형체가 있는 불꽃처럼 눈에서 작열하며 일어나고
있었다.
전신이 부풀어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핏줄이 지렁이처럼 툭툭 살갗을
뚫고 불거져 나왔다.
머리카락마저 벌벌 떨면서 곤두섰다.
그 모습을 목우충은 긴장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팍!
뭔가가 터지는 것 같은 음향이 일었다.
놀랍게도 왕승고의 전신에 꽂혀있던 금침이 저절로 그의 몸에서 퉁겨져 나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누가 잡아당기듯이 그렇게 거의 한순간에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를 통해서 검은피가 분수처럼 용출(湧出)하기 시작했다.
칙, 치이익!
피는 마치 화살처럼 일, 이 장 밖에까지 뿜어져 나갔고 그 피가 닿는 곳에서는
공포스러운 음향과 함께 바위건 나무건 모든 것이 그대로 녹아내렸다.
사람의 몸에 저러한 독기가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가공할 독기였다.
목우충은 이미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바위 뒤에서 몸을 피하고 있었다.
검은 피분수를 전신으로 쏟아내기를 얼마나 했을까? 대체 인간의 몸에는
얼마만큼의 피가 있는지 재보기라도 할 듯이 쏟아지던 그 검은 핏줄기가 드디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독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흐를 피가 없기
때문이었다.
『 온천으로!』
목우충이 소리치자 왕승고가 몸을 굴러 온천으로 들어갔다. 과도한 출혈로 기력이
쇠잔해져서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왕승고는 온천가에 마치 시체처럼 쓰러져 있었다. 그의 발밑으로는 검은 온천물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희미한 눈을 들자 그 앞에 목우충이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다.
『 잘되었네』
그 말을 끝으로 왕승고는 정신을 놓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그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목우충과 옆에서 국국거리고 있는 원숭이들이었다.
『 노사…』
『 자, 자네의 손을 한번 보게』
목우충의 말에 손을 들어올리던 왕승고의 눈이 빛났다. 거무스름하던 피부가
예전의 피부처럼 살빛이 돌고 있었다. 비록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 이, 이건! 그럼 제가 이젠!』
흥분해 외치며 벌떡 일어나던 왕승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고
주춤했다.
『 조심하게. 출혈이 심해서 현기증이 심할거야. 앞으로 며칠은 조섭을 하면서
잃어버린 피를 보충해야 하네』
『 제 몸속에 피가 남아있긴 한겁니까?』
『 조금. 그나마 내가 먹인 약이 아니었다면 사실상 지금 살아있을 수 없었겠지.
독기 때문이 아니라, 출혈과다로… 자, 먹게. 빨리 피를 만들어야 다시 시술을 할
수 있네』
목우충이 나무로 만든 사발에 낸 즙을 내밀었다.
『 다시 시술이라면?』
『 그럼 그걸로 끝인 줄 알았나? 그렇게 쉽다면 누구나 다 해독을 할 수
있었을거네. 체내의 여독을 마저 뽑아내야만 비로소 해독을 했다 할 수 있지!』
닷새가 흐른 뒤에야 왕승고는 2차시술을 받을 수 있었다.
같은 과정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끝없이 검게 뿜어져 나오던 피가 정신을 잃기 전에 붉은빛으로
변하는 것을 드디어 보았다는 것.
전신의 피는 다 사라진 것과 같았다.
온천에서 간신히 기어나온 왕승고는 목우충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왕승고는 묘한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 움직이지 말게』
가라앉은 목우충의 음성이 들렸다. 그 음성은 매우 낮아 곁에서가 아니라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그는 곁에 있었다.
그것도 나란히 누운 상태.
왕승고는 그의 팔뚝에 대롱 하나가 꽂혀있고, 그 대롱 한쪽이 자신의 팔뚝에
꽂혀있음을 보았다.
『 수혈이 끝나고… 부작용이 생기지 않는다면 자네의 해독은 성공… 한거네.
나머지는… 온천에 들어 계속 몸을 씻는다면 별게 아닐거야…』
낮은 음성으로 목우충이 말했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결코 말을 더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말을 더듬는 것이
아니라 쉬고 있었다.
수혈(輸血)?
그 말에 왕승고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목우충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그의 몸에 있던 피를 대신 자신에게 옮겨주고 있는
것이다.
『 왜 이런 짓을!』
왕승고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왼쪽 팔에 꽂혀있던 대롱을 뽑았다.
대롱이 뽑혔음에도 거기에서는 피가 아주 조금밖에 흐르지 않았다. 그것은 수혈이
시작된지 오래되었음을 의미했다.
『 노사, 어쩌자고 이런 일을!』
왕승고가 그를 부축하자 목우충은 그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 어차피 살지 못할… 목숨이었네. 내가 금방 죽지 않고… 버틴 것은… 자네를
살리기 위해서 체내의 잠력을 격동시킨 때문이네… 이러지 않았더라도 결국 죽었을
목숨이야』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계속 말했다.
『 늙은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죽을 목숨으로 자네를 구했으니 그 또한
보람이겠지… 출혈이 너무 심해서 다른 방법이 없었네. 약으로는 한계가 있지…』
왕승고는 그의 눈에서 빛이 꺼져감을 보았다.
그는 기름이 다한 등잔과 같았다. 무엇으로도 그를 되살릴 수 없었다.
하루도 버티기 힘든 목숨을 십여일이나 연장시킨 것은 그의 의술이었다. 어차피
죽을 자신의 생을 대신 왕승고에게 이어준 것은 성인(成仁)이다.
하지만 왕승고로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를 위했던 또 한 사람이 다시 그의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목우충은 왕승고의 손을 잡았다.
『 넓게 보게. 내 나라 내 민족 전체를… 결코 지난날 신라가 행했던 반민족적인
작태를 따르지 말고…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이니…』
『 명심하겠습니다』
왕승고가 갈라진 음성으로 대꾸했다.
신라의 왕자 법민(法敏)은 백제의 태자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기세등등해 했었다. 항복한 나라의 태자에게 할 짓이 아니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 대해서라도 그러한 일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 다행이군… 부작용이 없으니… 전에 한번… 시술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수혈
즉시 죽었었네. 피가 응고되어… 능을… 찾거든 그 분의 영혼을… 위로해드리게』
『 일본으로 모셔가면 어디로…』
『 아니, 그대로… 그대로 두게. 일본은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있어… 조상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그분이 가신들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능을 찾게 되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니…』
『 노사! 정신 차리십시오!』
그의 눈이 감기는 것을 보고 왕승고가 다급히 천부신공을 일으켜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럼에도 반응이 없었다.
『 아이들… 아이들의 시신을…』
의미 모를 소리를 남긴 채 평생을 외길로 살아왔던 백제의 유민(遺民) 목우충은
눈을 감았다.
왕승고는 오열(嗚咽)했다.
가슴이 끓어오르는 오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였다.
그의 의술이라면,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면 스스로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그는 스스로의 생을 포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제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어야 했다.
다시는 힘이 없어 이러한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일이 없게 하리라.
왕승고는 피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 피는 자신의 것일까, 아니면 목우충의 것일까.
왕승고는 그를 부둥켜 안은 채 오열하다가 기운이 진(盡)하여 정신을 잃어버렸다.
무덤 하나가 생겨났다.
「백제유민 목우충지묘(百濟遺民 木雨忠之墓)」
그렇게 새겨진 목비가 선 무덤이다.
무덤은 운무곡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마련되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원숭이들이 따온 과일들이 한아름 놓여있었다.
안개는 여전히 무심히 흐르고 있다.
왕승고는 석상처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날 이후.
온천에 몸을 담그고 내공을 단련하고 무공을 수련하는 정해진 일과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며칠간은 내공의 운기(運氣)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내부가 텅빈 듯하여
진기가 제마음대로 치달리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속도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 조절을 할 수 있게 되자 왕승고는 체내의 내공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氣)와 혈(血)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전신의
피를 거의 다 잃어버리고 겨우 목우충의 피를 받은 상태에서 오히려 기력이
강해지다니….
온천에 들어앉아 운공을 하면서 체내의 여독을 배출하고 있던 왕승고는 전신의
내력이 다른 경지에 들어서는 것 같자 의혹이 일었다.
하지만 미륵존자에게서 얻은 자하독공의 기세는 눈에 띄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있는 듯 없는 듯… 그것은 그의 체내의 독기가 사라진 것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 까닭을 왕승고가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원래, 그의 체내에는 여러 가지의 힘들이 한데 어울려 있었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경로의 것이라 한마디로 순수하지 못했다. 중독 때문이 아니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
충돌로 위험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의 전신에 자리한 독의 힘에다 미륵존자에게서 옮아온 독공, 거기에 천부신공이
자리했고 마지막에는 은제곡에서 구대문파의 수뇌들에게 물려받은 힘들이 자리하니
그것만으로도 사실상 주화입마되지 않는 것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에 목우충이 시술한 벌모세수지법은 원래 체내의 독기를 배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뜻밖에도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섞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전신으로 독기가 미친 듯이 날뛰면서 치달리자 그 힘이 너무 거세어 전신의 모든
힘이 그 독기에 휩쓸려 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가공할 힘은 전신의 모든 세맥(細脈)을 다 터뜨리면서 그의 체외로
배출되었으니, 그 와중에 그의 몸에 닫혀있던 임독이맥(任督二脈), 무가(武家)에서
이야기하는 생사현관(生死玄關)마저 그대로 타통되어 버린 것은 아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목우충조차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은 생각지 못했었다.
원래 이 벌모세수지법을 시술받게 되면 전신의 기력이 탕진된다. 모든 힘이 다
밖으로 빠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당기간 조리를 하면서 몸을 보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원래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일이년의 기간으로도 힘든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혀 뜻밖의 결과가 나타났다.
왕승고의 전신은 너른 대지와 같이 변했고 체내의 진기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다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남아있던 진기가 그의 전신을 돌게되자 새로운 힘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천부신공이었다.
천부신공은 세상에 드문 선천지류(先天之流)의 신공으로서 여타의 무공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대(古代)의 전승(傳承)이다.
하루 하루 왕승고는 체내의 진기가 힘을 얻고 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도랑물이 개울물이 되고, 개울이 강이 되고, 드디어는 거대한 바다가 되고 있음을…
낙엽이 떨어지더니 찬바람이 불었다.
구름처럼 운무곡을 덮고 있는 안개도 차가운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 계절은 쉼없이 흘러 눈이 오더니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은 영원히 녹지
않을 듯이 운무곡을 백설곡(白雪谷)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세월의 힘은 위대했다.
눈이 녹고 원숭이들이 깍깍거리며 다시 힘차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새로
태어난 새끼들까지 있었다. 그놈들이 뛰어놀아도 좋을 정도로 기운은 봄빛을 띠고
있었다.
눈이 녹아 시내를 이루었다.
그 시내를 이룬 물은 다시 세차게 귓전을 울리는 폭포소리로 바뀌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폭포가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던 것이다.
왕승고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서 있었다.
머리는 여전히 산발이다. 하지만 질끈 동여매었는지라 봉두난발은 아니었다. 그
얼굴 또한 전과 달랐다. 이제 방약란이 그의 얼굴을 본다면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지난 겨울 동안 왕승고의 전신 피부는 마치 말라 비틀어지는 껍질처럼 그렇게
몇꺼풀이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는 그의 원래 면목이 거의 제대로 돌아왔다.
물에 얼굴을 비춰본 왕승고가 확인한 일이었다.
어둔했던 손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
『 하압!』
왕승고는 길게 호통치면서 별안간 일장을 앞으로 쳐냈다. 번개같은 움직임이었다.
쾅!
벼락치는 폭음이 일어났다.
그의 앞에 있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서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손과의 거리는
반장이나 되었다. 결국 일장가량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바위가 허공을 격한 그의
일격에 박살이 난 것이다.
그것은 소림사의 공도선사가 전해준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이었다.
『 끄악!』
바위가 박살이 난 것과 함께 괴성이 터졌다.
대장 원숭이가 펄쩍펄쩍 뛰면서 도망가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놈이 가지고 오던
과일이 풍비박산하여 흩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하하하…!』
통쾌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왕승고는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사방에서 메아리가 웅웅 울렸다.
자신의 앞에 대여섯 조각이 난 아름드리 바위를 보고 웃던 왕승고는 그중 하나의
바위를 골라 손에 공력을 모아 내리쳤다.
쩡!
바위가 정을 맞은 듯이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일컬어 비석을 쪼갠다는 개비수(開碑手)다.
몇번의 손질이 이루어지자 그 바위조각은 높이가 오척이나 되는 비석이 되었다.
왕승고는 그 비석을 잡고 발을 굴렀다.
휙!
그 자리에 일진의 미풍이 일어나면서 그의 신형이 훌쩍 사라졌다.
점창파의 독보라는 유운신법(流雲身法)이었다.
점창의 절기인 분광검법을 펼쳐내기 위해서는 불가분으로 필요한 일대절기.
목우충과 친분이 있었다던 점창파의 장문인 열화신검 육수웅이 그에게 전해준
절기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왕승고가 나타난 곳은 목우충의 무덤이었다.
거기에 서 있는 목비는 이미 빛이 바랜 상태. 왕승고는 미련없이 그 목비를
뽑아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이 들고 온 석비를 박아넣었다.
연전에 목비를 세우기 위해서 끙끙거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석비에다 손가락으로 글씨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이 붓筆처럼 움직임에 따라 「백제인 일대명의 목우충지묘(百濟人
一代名醫 木雨忠之墓)」라는 열두자가 정교하게 새겨졌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바윗면에서 돌가루가 튀면서 글씨가 새겨지는 모습은 바로 감동, 그 자체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렇게 석비를 세운 왕승고는 그 자리에서 무공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도 빠짐없이 행해온 일과다.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그에게 전해준 무공이 하나하나 그의 몸에서 펼쳐졌다.
스승도 없이 스스로 구결만으로 익혀온 무공이다.
원래 무공이라고 하는 것은 유파마다 다 갈래가 있고 힘이 다르다.
그러므로 단순히 구결만으로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고
과연 자신이 익힌 것이 올바른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는 법이다. 자세가
바로되어야 비로소 힘이 실리게 되고 힘이 실려야 그 무공이 원래 지니고 있던
위력이 나타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상승무공(上乘武功)을 배우기 위해서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명사(名師)에 고제(高弟)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왕승고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해가고 있었다.
한바탕, 마치 춤사위와 같이 두어시진을 쉬지 않고 무공을 연습한 왕승고는
잘보셨느냐는 듯이 목우충의 무덤을 향해 조용히 포권을 하는 것으로 연습을
마쳤다.
하루도 빠짐없는 일이었다.
그가 시선을 들자 그의 눈에 지난 몇 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본 것이 보였다.
절벽에 날카로운 돌로 긁어서 새긴 글자였다.
그것은 왕승고가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에 목우충이 그에게 남긴 약방(藥方)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배움이 실전됨을 안타까이 여겨 그가 가장 자랑하던 해독의
비전(秘傳)을 거기에 남겨두었었다. 그것을 발견한 왕승고는 그 절벽의 앞에다
목우충의 무덤을 만들었었다.
서서히 어둠이 찾아들었다.
스스로 천부지동(天府之洞)이라 이름 붙인 원숭이들의 동굴에서 천부경을 보면서
천부신공을 연습하고 난 왕승고는 품에서 몇가지의 물건들을 꺼냈다.
구대문파의 수뇌들이 그에게 남긴 것이었다.
그중 몇가지, 점창파의 사일령과 종남파의 장문신부인 천하령은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다. 나머지는 서신 두어통과 역시 각자의 신물이다.
거기에 더해 책 한 권.
그것을 그가 만박서제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정말 끈질기게도 그와 운명을
같이 하는 원세조밀기라는 제목의 그 책은 이제 걸레처럼 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간 그것을 살펴본 왕승고는 거기에 담겨있는 내용이 세상을 놀라게 하기에
족함을 알고 있었다.
그때다.
「원세조밀기(元世祖密記)」
이 책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원의 세조 쿠빌라이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로서 몽고제국의 5대 황제였지만 실제로는 원제국(元帝國)의 초대황제라고 할
수 있다. 북경을 대도(大都)로 정한 것도 그였고, 몽고제국의 이름을 원이라고
정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고 할 수
있었다. 더더구나 그가 죽고 난 다음에는 그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던 중국인들의
보복 도굴(盜掘)을 두려워하여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마저도 비밀에 감추어졌었다.
그처럼 거대했던 원제국도 그의 사후 100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가 죽은 것이 서기
1294년이니, 왕승고의 입장에서 보면 무려 105년 전의 일이다.
「원세조밀기」에서는 여러 가지 쿠빌라이의 감추어진 비밀을 다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밀기의 말미에 적힌 그의 무덤 위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자세한 도면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원세조밀기」를 만든 사람이 그 무덤을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왕왕 제왕의 무덤을 만든 사람은 그 왕의 무덤과 함께 죽어야 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쿠빌라이의 무덤을 만들게 된 사람 또한 그러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자신의 운명을 짐작한 그가 그 내용을 기록으로 은밀히 남겼다는 것
뿐이었다.
그때, 문득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전해왔다.
왕승고의 감각은 이미 그가 이 운무곡에 떨어지던 때의 그가 아니었다. 바람이
부는 느낌마저도 느낄 수 있는 감각이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
왕승고는 꺼냈던 물건들을 갈무리하면서 일어섰다.
그러고보니 대장 원숭이가 보이지 않았다.
이맘때 즈음이면 원숭이들은 돌아다니지 않는다. 이 동네 원숭이들은 야행성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어딜 갔단 말인가?
곽곽!
밖에서 갑자기 외침이 들려왔다.
대장 원숭이의 소리임을 금세 알수 있었다. 이미 같이 지낸 것이 해를 넘긴 상태인
것이다.
바람처럼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소리는 폭포쪽에서 들려왔다.
들어올 수는 있되, 나가기는 힘든 곳. 지금이라면 어쩌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힘을 가지기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않으리라 맹세했기에 그는 굳이
그곳으로 나갈 시도는 하지 않았었다.
왕승고가 주위를 둘러볼 때, 그 앞에 대장 원숭이가 나타났다.
그 표정이 묘한 것을 본 왕승고가 물었다.
『 무슨 일이냐?』
곽곽!
대장 원숭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모양새를 볼 때, 뭔가 딴청을 부리는 듯 했다. 눈알이 좌우로 구르는 것이 어딘지
불안한 모습임을 왕승고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때,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소리지? 무슨 일이야?』
대장 원숭이의 뒤에서 그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낀 왕승고가 대장 원숭이를 스쳐
지나고자 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대장 원숭이가 다급하게 소리치면서 두 팔을 벌려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이다.
『 무슨 짓이냐?』
곽곽….
대장 원숭이가 벌린 두 팔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다급한 빛이
역력했다.
이쯤되면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 비켜봐라』
왕승고가 발을 떼었다.
대장 원숭이가 다급하게 그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그의 신형은 허깨비처럼 대장
원숭이를 스쳐 지난 다음이었다.
그왁! 곽과악!
일순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리던 대장 원숭이는 자신의 뒤에 왕승고가 있음을
발견하고 다급하게 그를 쫓아갔다.
왕승고는 굳어져 있었다.
쿠쿠쿠…
고막을 울리는 폭포의 굉음.
물방울이 튀겨 나오는 그곳, 왕승고가 들어왔고 목우충이 들어왔던 그곳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거의 걸레와 같은 옷을 걸친 노인.
왕승고가 놀라 굳어진 것은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상한 기억력을 지니고 있는 그는 첫눈에 그가 눈에 익은 사람임을 알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팔에 외다리, 그리고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진 지팡이 하나.
하지만 엎어져 있는터라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왕승고가 손을 내미는 순간에 대장 원숭이가 그의 팔을 잡았다.
곽곽! 과아악!
대장 원숭이가 그를 밀쳐내며 소리쳤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왕승고가 머리를 흔들었다.
『 그만둬. 해치려는게 아니야』
웬만큼 말이 통하는 사이인데도 이번에는 막무가내다. 죽어라고 매달려 손을
잡아당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처음 운무곡에 들어올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왕승고를 대장 원숭이가 어찌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했다.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가볍게 손을 떨치자 대장 원숭이가 그대로 훌쩍 이삼장 밖으로 나동그라졌다.
원숭이는 팔랑개비처럼 뒹굴더니 벌떡 일어나 다시 쫓아왔다. 다칠까봐서 경력을
과도하게 쓰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그때는 왕승고가 이미 그 노인을 바로 누인 다음이었다.
『 역시…』
노인의 얼굴을 본 왕승고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그는 왕승고의 짐작대로
그에게 천부신공을 전해주었던 그 괴노인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노인이 눈을 번쩍 떴다.
눈에서 광포한 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왕승고를 본 그는 괴이한 외침과 함께 느닷없이 일장을 쳐왔다.
팡!
한 소리, 폭음이 일어났다.
놀란 왕승고가 부지간에 손을 들어 그것을 막아냈지만 괴노인의 일장은 너무
막강했다. 답답한 신음을 토하면서 그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왁!』
하지만 그 순간에 괴노인은 선혈을 분수처럼 토하고는 그대로 벌렁 나뒹굴고
있었다.
『 노인장!』
놀란 왕승고가 그를 부축했지만 그는 이미 기식이 엄엄했다.
곽곽곽…
대장 원숭이가 다급하게 왔다갔다 왕승고의 주변을 서성거렸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는 늙은 원숭이들까지 잔뜩 몰려들어 노인을 지켜보고 있었다.
왕승고가 천부신공을 일으켜 전력을 다해 그를 치료했지만 그가 깨어난 것은 한
시진이나 지나서였다.
왕승고는 그를 돌보면서 그의 상세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알수 있었다. 그의
일신 경맥은 가닥가닥 끊어지다시피 된 상태였다. 그것은 그와의 부딪침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된 것이었다. 이러고도 살아서 그렇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고, 그것은 그의 공부(功夫)가 얼마나 깊고 두터운 것인가를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노인이 눈을 뜨자 원숭이들이 환성을 질렀다.
『 너는…?』
소란스러움에 잠시 얼떨떨한 듯 멍청하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왕승고를 보고
있던 노인이 눈을 꿈벅거렸다.
왕승고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나이답지 않은 넉넉한 웃음이었다.
『 알아 보실 수 있겠습니까?』
『 설마 네가…?』
『 그때 말씀하신대로 여기 황산 운무곡에 와서 노인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왕승고의 말에 노인은 그래도 믿기지 않는 듯 확인이라도 하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하늘의 뜻이로군!』
왕승고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그에게서는
미친 빛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 죽음을 눈앞에 두고 뼈를 묻고자 이곳을 찾았는데, 여기에서 너를 만나게
되다니… 윽!』
격동하여 몸을 일으키려던 노인이 얼굴을 으그러뜨렸다.
『 아직 움직이시면 안됩니다』
『 아직…』
왕승고의 말을 되뇌인 노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 이미 죽었을 목숨이 욕된 삶을 지속한 것은 염원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거늘,
이제 그 삶을 물려줄 사람을 만났거니 무슨 미련이 남아 있을까…』
그는 왕승고를 보면서 말했다.
『 내게 천부신공을 보여줄 수 있겠나?』
『 그렇게 하겠습니다』
왕승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 아래 제일.
일컬어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으뜸을 의미함과 다름없다. 천부신공은 바로 무공중에서
으뜸이라 할만했다. 그것은 단순한 무공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승고의 신형이 달빛과 안개를 헤치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춤사위가 아니었다.
한 손짓에 대해가 출렁이고 어깨의 추스름에 대기가 흔들리며 내딛는 발걸음에
대지가 하나되어 돌아간다.
일, 이, 삼… 천부신공의 단계가 하나하나 노인의 앞에서 펼쳐졌다.
당…!
마지막으로 쭉 뻗은 왕승고 손길의 앞, 일장여의 거리에 있던 거대한 바위 하나가
마치 북과 같이 전신을 떨면서 커다랗게 반응했다.
소리를 토해내었으되, 놀랍게도 바위 자체는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였다.
그것을 보는 노인의 얼굴에는 달빛과 같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 격산타우(隔山打牛)… 좋군! 스승없이 혼자서 그렇게 수련할 수 있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격산타우라고 하는 것은 산을 격하고 소를 때린다는 것이니, 창호지 건너에 있는
촛불을 꺼뜨리는 것같은 상승의 내가공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위를 치고 소리가 났음에 노인이 왜 격산타우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까.
칭찬을 하던 노인이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 노인장!』
왕승고가 그를 부축하자 노인은 그를 보았다. 그 얼굴은 굳어 있었다.
『 아직은 괜찮다. 죽기전까지 한나절 정도는 온전한 정신으로 너와 이야기할 수
있겠지… 어떠냐? 내 제자가 되겠느냐?』
『 ……』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아주 닮은 눈빛이었다. 두 사람의 눈은….
『 꼭 제자가 필요하십니까?』
『 나 때문이 아니다. 나의 죽음으로 인해서 수호신문의 후예가 단절됨이
두려워서이지. 일맥단전인 수호신문이 이어지지 못하게 된다면 그 죄를 나로서는
죽어서라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말끝을 흐리는 노인의 얼굴에 아주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 대한수호신문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 수호신문은 대한(大桓)의 정기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문파다. 동이의
후손이 아닌 자가 제자가 된 적은 한번도 없지만 사정이 이러하니, 우선은 너를
기명제자(記名弟子)로 받아들이고 후일 다른 방도를 강구해볼밖에…』
기명(記名)이라 함은 이름만 올린, 정식의 제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승고는 정중히 그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일배(一拜) 또 일배….
아홉번, 가장 큰 수라는 아홉번의 절이 끝나고 왕승고는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 고려의 후예 왕승고가 사부님을 뵙습니다』
그의 말에 노인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 고, 고려의 후예라니?』
왕승고의 설명에 노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천하에 이렇게 공교로울데가…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을 앞에
두고 얻은 제자가 바로 너라니, 그때의 그 갓난아이가 너라니…』
운무곡을 가득 메운 안개가 사방을 환경(幻境)처럼 만들고 있는 가운데 달빛이
안개를 어루만지며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상념들이 그 달빛과 함께 흘렀다.
『 사부님께서 저와 어머님을 구해주신 그 은공이 맞습니까?』
『 그렇다. 나였지…』
괴노인, 한호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때…』
왕승고의 어머니인 영비에게 은공으로 불리는 한호국이 지난 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의 몸은 이미 기름이 다한 등잔과 같았다. 심지에 남아있는 마지막 기름이
다하는 순간, 그의 생은 삶과 이별할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이야기 할 시간이 길지 않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의 이야기 또한
빠르고 간결했다.
그가 구대부인에게 찾겠다고 한 사람은 중원에 있다고 하는 그의 사형이었다. 그의
사부는 말했었다. 사정이 여의치 않게되면 사형을 찾으라고….
이미 이씨조선이 득세하여 상황을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된 그는 사부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뜻이 있었음을 알고는 영비와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자리를
잡으며 일방 사형의 행방을 찾았다.
그가 영비를 떠난 것은 그의 사형을 찾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사형을 만났다.
『 대한수호신문은… 일맥단전이다. 나는… 사부께서 왜 한 사람만으로
전승되어오던 우리 사문의 전통을 깨뜨리셨는지 그를 만나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이었다.
그는 천재였다.
그리고 거대한 야망을 품고 그것을 실천해가고 있었다.
『 그것은 중국의 재정복이었다』
『 중국의 재정복?』
왕승고의 눈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 그렇다… 지난 세월, 은상(殷商)이래 잃어버렸던 중원을 되찾는 작업이었다.
비로소 나는 사부께서 사형을 중국에 보내신 뜻을 알 수 있었다…』
한호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상이란 후일 은허(殷墟)라는 폐허로서 발견되어 전설로 되어 있던 존재를 증명한
은나라를 의미한다. 성탕(成湯)이 하(夏)의 걸왕(桀王)을 멸하고 세운 나라이다.
상(商)이란 은의 국명으로, 은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상의 제19대왕인
반경(盤庚)이 언사(偃師)로 천도하면서 고친 다음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중국의 역사를 널리 알린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실존을
믿을 수 없다 하여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사기」를 시작했다.
오제란
황제헌원(黃帝軒轅).전욱고양(전頊高陽).제곡고신(帝곡高辛).제요방훈(帝堯放勳).제?
平常?帝舜重華)의 다섯을 의미한다.
그 오제가 모두 동이의 일맥임은 다시 설명하겠거니와, 은이 동이가 세운 나라임은
중국이 전하는 갖가지 서적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수유억조이인(受有億兆夷人) 이심이덕(離心離德) 여유난신십인(予有亂臣十人)
동심동덕(同心同德)
-수(受:주왕)에게는 수많은 이인(夷人)이 있으나 마음과 덕은 그로부터 떠났다.
-그러나 나(予)에게는 변변치 못한 신하 열이 있을 뿐이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요,
덕 또한 하나이다.
「서경(書經)」 태서(泰書)에 있는 유명한 말이다.
주의 무왕이 은의 폭군인 주왕을 정벌하기에 앞서 각처 제후들과 장졸들을
모아놓고 정벌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그들을 격려한 내용 중 일부이다.
여기서의 이인(夷人)은 난신(亂臣)의 대(對)로서 똑똑한 사람이라는 해석이
중국측의 주장이다. 하지만 그들이 오랑캐라고 일컫는 이름인 이(夷)라는 글자를
굳이 똑똑한 사람, 혹은 백성이라는 뜻으로 쓴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시 은나라를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동이였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후한(後漢)의 학자인 채옹(蔡邕)은 조정의 제도와 칭호등을 기록한 독단(獨斷)에서
『 천자지호칭(天子之呼稱) 시어동이(始於東夷) 부천모지(父天母地)
고왈천자(故曰天子)』라고 하여 『 천자의 호칭은 동이에서 시작되어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천자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과연 오랑캐의 나라에서 그러한 칭호를 만들었으면 중국인들이 그 말을 받아 썼을
것인가?
설명되어질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다.
당시 중원을 지배하던 민족이 바로 동이였다는….
한호국의 참혹하게 뭉뚱그려진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깃들기 시작했다.
『 그것은 실로 거대한 포부였고, 또한 상당한 가능성마저 있었다』
『 문제가 생겼습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그를 쳐다보던 한호국이 고개를 끄떡였다.
『 대한수호신문은 역대로 한가지의 원칙을 지켜왔다. 지닌바의 능력으로 민족을
지키되… 결코 전면에 나서지 않아야 한다는….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이 그 주체(主體)가 되고자 했다.
『 주체라니요?』
괴로운 빛이 한호국의 얼굴에 떠올랐다.
『 스스로 제왕(帝王)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제왕이라면, 그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는 뜻입니까? 나라를 세워서?』
『 그렇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 그럼, 사부님을 이렇게 만든 것이…』
『 그다』
한호국은 고개를 끄떡였다.
사형은 그를 회유코자 하였지만 한호국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충돌이
일어났다.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그는 혼자였고, 사형에게는
수많은 고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이미 사형이 쓴 암수(暗手)에 당해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그리고 대추격전.
피를 뿌린 수백 리의 추적을 당한 끝에 결국 그는 황산에 이르러 사형과 마주하게
되었다.
『 온전했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대가 그였다. 나는 그에 의해
절벽밑으로 떨어졌다…』
우연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도 큰 우연.
그가 떨어진 절벽도 이곳이라니…
목숨은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운은 왕승고처럼 좋지 못했다.
폭포를 뚫고 날아들어오면서 심하게 머리를 다쳤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명재경각(命在頃刻)의 지독한 내상은 그를 혹독한 시련속으로 몰아넣기에 족했다.
하루의 반을 혼수상태로 지내면서 조금씩 생기를 회복하는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는 바로 이곳에 살고 있는 원숭이들이었다. 늙은 원숭이들이 그를 기억함이
무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어느정도 몸을 추스를 수 있게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오년,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 이곳을 떠나셨으면서 왜 어머님을 찾지 않으셨습니까?』
괴로운 빛이 한호국의 얼굴에 떠올랐다.
『 제 정신을 찾는 것은 일년중 하루이틀… 그나마 잠시 뿐이다. 토지묘에서 너를
만났던 것도 그러한 시간… 연락을 하고자 생각을 하고 움직이면 그때는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연경, 북평에 가고자 생각한 다음에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는 남해 해변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거기서 서신을 작성하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어느 이름모를
산속에서 풀뿌리를 씹으며 뒹굴고 있다.
그나마 제정신을 차릴 때에는 경맥이 뒤틀리는 고통 때문에 운기조식하여 내상을
다스려야 했다.
그러니 어떻게 연락이 가능했으랴.
당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승고는 사부의 참혹한 처경에 말을 잃었다.
『 그를 막아야 한다…』
한호국이 힘겹게 말을 꺼냈다.
『 대한수호신문은 민족정기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사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호국은 외팔을 들어 왕승고의 손을 잡았다. 수수깡처럼 마른 손이었다.
『 백두산으로 가거라」
『 백두산이요?』
『 그렇다. 민족의 성산(聖山). 거기에… 내 사부님이신 네 사조(師祖)께서
계신다. 만에 하나, 그 분이 타계하셨다면… 호법존자(護法尊子)를 찾아야 하는데
그 일은… 지난(至難)한 것이라…』
한호국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그는 왕승고가 어딘지 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 무슨 문제가 있느냐?』
『 문제라기 보다는…』
왕승고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침묵이 흘렀다.
『그렇군…』
한호국이 침음했다.
왕승고의 말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는데, 또한 너무 당연한 것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의 신분은 고려의 마지막 적자(嫡子)이다. 그런 그가 해야 할 일은 나라를
되찾는 일. 그런데 대한수호신문은 제자가 직접적으로 세상 일에 간섭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렇다면 왕승고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결정은 네게 맡기겠다』
한참만에 한호국이 말했다.
『네게 이런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아야 했을 것이지만…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할
수 없구나. 나는 너를 제자로 맞아들였으니, 문호를 계승하는 것은 네가
결정하도록 하거라. 그리고 네 생각을 백두산에 계신 네 사조께 말씀드리면 될
것이다』
달빛(月光)!
그 아래에서 왕승고는 한바탕의 춤사위를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천부신공이 아니었다.
그가 구대문파의 수뇌들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하나하나 시전하고 있었다. 그러면
바위에 기대앉은 한호국이 그가 펼친 무공의 장단점을 일러주는, 사부와 제자의
가르침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문파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이 이룬 무공 또한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공을 배우는데에는 일정한 격(格)과 식(式)이 있어, 단계를 밟아
올라가야 성취가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왕승고가 배운 것은 그러한 공부중에서 각각 그 문파의 최고절학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그런 상승절학을 왕승고에게 전한 것은 그들이 그 절학 가운데에서
나름대로 깨달은 바가 있어 혹시라도 왕승고가 살아나게 된다면 그것을 자신의
문파에 전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치도 못했다.
설마, 왕승고가 그 무공을 이렇게 하나도 남김없이 수련할 수 있을 것임은….
일반적으로 그것은 가능치 않은 일이었다.
무공이란 결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구대문파의 무공은 제각기 내공의 운용방법이 다르고 노수(路數)가 달라
그것을 한 사람이 모두 익힌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과 같았다. 설사, 한 사람의
천재가 있어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오랜 시일이 걸려야 할 일이었다.
가르치는 사람조차 없는 백면서생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제 아무리 왕승고가 천재라 할지라도 그에게 천부신공이 있지 않았다면 가능치
않았을 그 일은, 이제 사부 한호국의 가르침을 통해 완연한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왕승고가 구결(口訣)을 외우며 무공을 펼치면 한호국은 그것을 보면서 왕승고가
깨달은 것에 대한 잘잘못과 자세의 시비(是非)를 잡아주었다.
소림사의 대력금강장이 청성파의 숭양대구수(嵩陽大九手)의 식으로 펼쳐질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암향표의 경공이 점창파의 절기 분광검법을
펼칠 때에 유운신법 대신 곁들여 사용됨을 보고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왕승고는 그러한 절학의 연결은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했었다.
진기운행의 노수가 틀려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제로 무공을 전개하게 된다면
전신기혈이 흔들려 잘못될 위험마저 있었다. 하지만 천부신공이 거기에 가세하자
그러한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호국의 넓고 큰 가르침에 의해 왕승고 혼자서 십년을 노력한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이 되어 그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따아앙!
왕승고의 춤사위는 그의 손에 쥐인 목검이 얼마전 천부신공을 전개하며 때렸던
바위를 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비명을 지르며 움찔했던 바위는 아무렇게나 대강 깎아 만든 그 목검의 일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치 거짓말처럼 두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돌가루가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 바위의 내부는 이미 천부신공에 의해 가루가 되어 있었다.
왕승고는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사부, 한호국은 그를 바라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숨진 다음이었다.
운무곡에는 무덤 하나가 더 생겨났다.
그 무덤은 먼저 생긴 목우충의 무덤 옆에 나란히 「대한 수호신문
제백칠십이대장문제자 한호국지묘(大桓 守護神門 第百七十二代掌門弟子
桓護國之墓)」의 21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란한 두 무덤의 앞에는 과일이 놓여있다.
원숭이들은 변함없이 설치고 다닌다.
하지만 이슬을 머금은 과일을 그 앞에 가져다 놓고, 경건한 태도로 그 무덤에
차례로 절을 하던 사람의 모습은 이제 그곳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마침내 힘을 얻고 운무곡을 떠나간 것이다.
아침 안개가 황산을 자욱이 뒤덮고 있을 때, 그 안개보다 더 짙은 검은연기가 산속
어디선가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은제곡.
악몽과도 같던 그날 이후, 죽음의 골짜기로 변한 그곳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독으로 죽은 시체들을 산짐승들이 뜯어 그 자리에서 죽어 넘어지니,
세월이 흐르면서 곡 전체가 독으로 물들어 짐승들의 자취조차 사라져 죽음만이
숨쉬고 있던 곳.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모든 것을 태우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 불길이 참혹한 모습으로 남아있던 모옥을 삼킬 때, 그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긴 머리를 바람에 날리며….
* * * 주원장의 사후, 다음 해인 건문원년(建文元年:1399).
전대의 황제가 죽게되면 당해년에는 그 연호가 그대로 유지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
당해년은 상기(喪期)에 해당되어 천하에 대사면령이 내리고 새로 등극한 황제는
자신의 연호를 쓰게되는 다음 해까지 자신의 치세를 준비하게 된다.
주왕 숙의 폐서인 이후, 어느 정도 물밑의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천하의 정세는
건문원년 4월에 들어서면서 점점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주원장의 열두번째 아들인 상왕(湘王) 주백(朱栢)이 분사(焚死)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스스로 불타 죽었으니 천하에 아연 긴장이 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뒤를 이어 제왕(齊王) 부(부)와 대왕(代王) 계(桂)가 죄를 얻어 경사로 소환되어
봉작을 삭탈당하고 금고(禁錮)되면서 폐서인되었다.
태조의 스무명이 넘는 아들 개개인이 모두 영명하고 뛰어날 리는 없다. 그중에는
권세만 믿고 두려운 것이 없는 불법무도한 자들이 많아 죄를 주자고 마음 먹게
되면 사실상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더구나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삭번의 폭풍은 천하를 휩쓸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제태가 눈살을 찌푸렸다.
『 연왕의 말을 들어줌이 좋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외다』
황자징의 말에 제태가 기막힌 빛이 되었다.
『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지금 이 마당에 연왕이 청원한다고 해서 그 아들들을
돌려보내자니…』
『 그러기 때문에 보내자는 거요』
황자징은 제태와 방효유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 연왕은 극도로 불안해하고 있소. 그의 주위에는 이미 우리가 파견한 포정사와
도지휘사사가 감시의 눈을 번뜩이고 있는 마당이니 당연한 일이오. 그로서는
옴치고 뛸 수가 없는 게지. 그가 세 아들을 북평으로 돌려보내달라고 탄원을 한
것은 그 막돼먹은 고후라는 놈이 더 실수를 할까봐 두렵기 때문이오』
『 그걸 알면서도?』
『 그렇소. 책을 잡힐까봐 전전긍긍하는 자에게 그의 원을 들어준다면, 연왕은
아마 의아하여 아직까지는 자신이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오』
『 방심시키자는 말씀이오?』
듣고 있던 방효유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 그렇소. 그가 시간이 남아있음을 알고 방심할 때에 그를 들이칠 생각이오!』
『 흠…』
제태와 방효유가 낮게 침음했다.
급박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연 긴장이 흘렀다.
황자징과 제태, 방효유가 모여있는 곳은 황자징의 거처였다.
오늘 북평에서 보낸 연왕의 상소가 올라왔었다.
자신이 병을 얻어 그러하니 경사에 있는 아들들을 돌려보내달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세 사람은 과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의논하던 중이었다.
당연히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오지 말라는 명을 내려둔 상태였다. 그런데 누가
다급하게 달려와서 불러대기까지 한다면 무엇인가 일이 터진 것이다.
『 무슨 일이냐?』
황자징의 물음에 나타난 황부(黃府)의 집사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 병부의 시랑(侍郞) 추대인께서 오셨습니다』
『 추시랑이?』
추인기(秋仁基)는 제태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 당대의 최고 권신들에게 말했다.
『 조금 전의 일입니다. 위사들이 추격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훔쳐타고 간 말이
워낙 명마인지라 추격이 쉽지 않는 모양입니다」
『 휘조의 말이라면 쉽지 않겠지!』
제태가 중얼거렸다.
『 어이가 없군! 아무리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따위 짓을
하다니…』
황자징조차도 어이가 없는 듯이 중얼거렸다.
상황은 급전직하, 참으로 뜻밖으로 변하고 있었다.
원래 서휘조(徐輝祖)는 서달의 아들로서 주고후의 외삼촌이 된다. 그는 상황이
점점 어렵게 되어가는데 주고후의 행동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음을 보자 암중에
그를 불러 훈계를 했었다.
한데, 상상도 할 수 없게 그 말에 반발한 주고후가 다음날 서휘조가 가장 아끼던
천리마를 훔쳐 타고는 경사를 빠져나갔다는 첩보가 도착한 것이다.
『 정말 연왕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군…』
방효유조차도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 뭐라고?』
황자징의 되물음에 추인기가 굳은 얼굴로 다시 반복했다.
『 앞을 가로막던 관리 하나를 베어 죽였습니다. 두어 명이 상처를 입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려주셔야 대처할 수가 있을 겁니다』
『 …』
세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상황은 엄중해진 것이다.
『 무덤을 파는군…』
추인기가 물러난 다음에 제태가 중얼거렸다.
『 이 마당에도 그들을 돌려보내자고 하실 작정이오?』
제태가 황자징을 보았다.
『 그렇소!』
하지만 황자징은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 이런 상황이니 오히려 그 허허실실의 계략은 더 효과가 크게 될 것이오.
방학사의 생각은 어떠시오?』
『 뭐라고 하기 어려운 상황인 듯 하군요』
방효유의 대답에 제태가 고개를 흔들었다.
『 결정적인 꼬투리를 잡은 상황이오! 연왕에게 틈을 주지말고 죄를 물어야 할
상황에서 오히려 그를 버려둔다면 장차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오!』
『 으음…』
황자징은 나직이 신음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아직도 굳어 있었다.
* * * 『 이런 미친 놈 같으니!』
주고치는 손이 부서져라 탁자를 쳤다.
그가 즐겨마시던 찻잔이 탁자에서 튀어올라 땅에 떨어지면서 마지막 비명을 질렀다.
그 앞에는 주고수가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 대체 넌 무엇을 했기에 고후가 그따위 짓을 하도록 그냥 두었단 말이냐?』
『 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
『 그걸 말이라고 해? 늘 그처럼 붙어다녔으면서 결정적인 상황에서 모른다고 하면
끝이야?』
『 전 정말 아무것도…』
주고수가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렸다.
아무리 제멋대로라고는 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 근자에 이르러 조금 잠잠해서
방심했던 것이 잘못일까.
주고치는 바람이 빠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그 앞에서 주고수가 엉거주춤, 어쩔줄을 모르고 눈치만 살핀다. 남이 하고픈 것은
다 하고자 하면서도 정작 일이 터지면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주고수다. 차라리
그런 면에서는 직선적이고 과단성있는 주고후가 나을는지도 몰랐다.
『 가자!』
주고치가 일어났다.
『 어, 어디를?』
『 외삼촌에게 가서 사죄를 해야할게 아니냐! 어떻게 하든지 사태 수습을
해봐야지! 어차피 일은 터졌으니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할 수밖에…』
『 그, 그렇군요』
주고치의 뒤를 주고수가 따라나섰다.
* * * 침묵.
주고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앞에 있는 서휘조, 그의 외삼촌도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주고수는 당연히
할 말이 없었다.
『 이미 사태는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집안의 사람들을 풀어 뒤를
쫓게 했지만 고후가 타고간 말이 워낙 빠른지라 잡기 힘들고…』
『 관리까지 죽였다면 수습이 불가능하겠군요…』
서휘조의 말에 주고치가 신음했다.
『 그렇다. 이미 대내에 황태상경과 제상서등이 모여 황상을 뵙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황상과 말입니까?』
『 그렇다』
『 결과가 어떻게 나올는지 모르겠구나. 어저께 네 아버님께서 너희들을
돌려보내달라고 청원하셔서 대내의 분위기가 잘하면 그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더니…』
서휘조가 말끝을 흐렸다.
연왕이 어찌될 것인지야 알 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의 누이동생이 그의 비이니,
이젠 당연히 상관이 있는 사람이다. 그도 사태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주고후를
훈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살은 이미 시위를 떠난 뒤였다.
사태는 그들의 영향력 밖에서 모두 결정될 것이고 그들은 그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엄중해지고 있었다.
* * * 두두두….
미친 듯이 황진이 인다.
주고후는 그동안 참고 참았던 울화가 모조리 발산되는 것 같았다.
한 놈을 베어 넘겼을 때에는 속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되먹지 않은 훈계를 하는 외삼촌에게서 이 빌어먹을 정도로 잘 달리는
천리마를 훔쳐타고 길을 재촉하니 가히 구름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산이 뒤로 달리고 시내가 발아래로 냅다 도망쳤다. 관도에서 일어나는 흙먼지로
인해서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욕지거리를 하건말건 상관할 일도 아니었다.
평소라면 말을 돌려서 놈들의 주리를 틀어줄 것이지만 지금은 제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그럴만한 마음의 여유까지는 없었다.
조금전에도 병사들의 추격을 뿌리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탁주(탁州)다.
그곳만 통과하면 막힐 곳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채찍을 치켜드는 순간에 관도 저쪽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꺾어드는 모퉁이에서 비로소 발견해 피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피하려면 말을 틀어 숲속으로 뛰쳐 들어가서 처박히는 수밖에.
그럴 주고후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정없이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천리마는 채찍을 견디지 못하고 네발굽을 놓았다. 황소도 그 발굽으로
깔아죽였다는 천리마 백운(白雲)이다. 덩치도 다른 말에 비해서 배나 컸다. 그러니
나타난 사람은 횡액을 면할 수 없는 상황.
두두두두….
급박한 말발굽 소리에 앞서 걸어가던 사람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그는 형편없이 낡은 옷을 걸치고 있어 신분이 평범한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깔아죽여도 말썽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백운의 질주하는 속도는 과연 대단하여 주고후가 말을 채찍으로 후려치는 순간에
벌써 그를 덮치고 있을 정도였다.
두두두두….
누런 흙먼지가 하늘을 가리며 일어나는 순간, 엇! 하는 놀람에 찬 소리가 그속에서
흘러나왔다.
찰나간에 이미 십여 장을 달려나간 백운의 위에서 주고후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그가 그처럼 사납게 백운을 몰아 지나온 곳에 그 걸인과 같은 자가 그대로
서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몸을 날려 피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도 아니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는데도 저렇게
태연히 서있을 수 있단 말인가? 백운이 네 굽을 모아 달려온 곳인데 유령이 아닌
다음에야….
하지만 더이상 보려해도 볼 수가 없다.
백운이 달리는 속도가 워낙 질풍과 같아서 이미 그 자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굳이 말을 멈추어보았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다만 힐끗 그자의 허리춤에 검과 비슷한 것이 꽂혀있는
것을 보긴 했다.
그가 본 것은 과연 검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의 검이 아니라 나무로 만들어진 목검이다. 황산의 심곡에서
오랫동안 습기에 절고 절어 생성된 침향목(沈香木)을 깎아 만든 목검. 바위를
부수던 그 목검이었다.
왕승고는 사라지는 주고후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상황에서도 주고후를 알아볼 수 있었다.
『 아직도 여전하군…』
왕승고는 나직이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급할 것이 없는 것 같은
걸음걸이. 하지만 그가 걸어가는 속도는 지난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빨랐다.
황산을 떠난 그는 경사를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한참
생각한 끝에 일단 어머니를 찾아 자신의 무사를 알리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무곡을 떠나기 전에 걸쳤던 옷을 깨끗이 빨아 입었다. 하지만 단벌로 거의
일년을 보냈으니 그것이 어찌 제대로 된 옷이 될까.
더구나 길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한번 질끈 동여매었으니 그 모습은 영낙없이
낭인의 형상이다.
얼마 가지 않아 탁주가 나타났다.
경사를 들고 나기 위해서 필히 거쳐야 할 교통의 요충. 당연히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다.
나라에서 설치한 역참(驛站)도 있다.
수중에 돈이 없어서 눈앞에 보이는 주루에 들지 못하고 길가에 자리한 국수집을
바라보던 왕승고의 귓전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 저건?』
왕승고의 눈이 빛났다.
눈에 익은 백마.
바로 주고후가 타고 가던 그 백마였다.
* * * 『 못내놓겠다?』
주고후가 눈을 부릅떴다.
탁주의 역승(驛丞) 유인귀(劉仁貴)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 못내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의 말은 조정의 관리만이 사용할 수 있고
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조건 내놓으라시면… 윽!』
철썩!
그는 사납게 따귀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따귀를 올려붙여 그를 패대기쳐버린 주고후는 사나운 표정으로 검을 움켜잡았다.
『 내놓을 테냐? 죽을 테냐?』
역승 유인귀가 뺨을 움켜쥐고서 일어났다. 그의 뒤에서 부하들이 검과 창을
곧추세웠다.
팽팽한 긴장감이 일기 시작했다.
『 평소라면 얼마든지 말을 내놓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전하께서는 조정에서
경사를 떠나는 것을 금지한 분입니다. 통과할 수 있다는 증표를 내보이신다면 말을
내드리겠습니다!』
『 으핫하하하…!』
갑자기 주고후가 광소를 터뜨렸다.
『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한낱 역의 졸개 나부랭이가 다 본 왕자에게 반항을
하는구나! 네 이놈! 네가 죽을 죄를 지은 것을 알렸다?』
웃음을 그친 주고후가 눈을 부릅떴다.
『 그것은…』
유인귀의 말은 채 끝나지도 못했다.
주고후의 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으므로. 그것은 그가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빨랐다.
『 악!』
『 아앗!』
사방에서 비명이 일었다.
누구도 제대로 볼 여가가 없었다.
주고후는 번개처럼 발검하여 단숨에 역승 유인귀의 목을 잘라버렸던 것이다.
사람의 목이 잘려 굴러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허무할 정도였다.
피분수를 뿜어 올리던 유인귀의 몸은 자신의 처경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허우적거리며 피바다에 쓰러졌다.
사방에서 경악의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주고후는 내친 김에 자신에게 창을 겨누고 있는 역졸 몇도 베어넘겼다. 그들의
지닌바 창술 찌르기 몇번의 재간으로는 눈을 뜨고 있어도 주고후의 용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가히 도살(屠殺)!
싸움 구경 났나보다 하고 몰려왔던 사람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상황이 따로 없었다.
땅!
주고후의 칼질이 멎었다.
멈추고자 하여 멈춘 것이 아니라 누가 그의 검세를 막아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들던 주고후의 검이 옆으로 퉁겨져 나가자 역졸은
혼비백산하여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가 벌벌거리며 기어나갔다. 갑자기 비가
온 것인지 물이 흥건하게 그가 기어간 자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 너는?』
주고후의 눈빛이 굳어졌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낡은 옷에 길게 휘날리는 머리카락.
바로 관도에서 자신이 깔아뭉개고 달려온 그 사람, 왕승고였다.
그가 보다 못해 목검을 들어 주고후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 손속이 너무 과하오』
왕승고의 말에 주고후가 냉소를 터뜨렸다.
『 네놈이 본 왕자를 따라왔다는 말인가? 어쩐지 다르다 했더니 한가락 있단
말이지? 좋아!』
다음 순간, 그의 수중에 있던 장검이 사나운 기세로 발동하여 왕승고를 덮쳐갔다.
왕승고의 눈에 일순 긴장이 스쳐갔다.
슬쩍, 그의 왼발이 옆으로 비켜나는가 싶더니 그의 목검이 일직선으로 주고후의
손목을 찔러갔다.
주고후의 눈에 놀람이 일었다.
상대의 반응이 너무도 빨라 찰나간에 이미 그가 피동이 되어버렸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옆으로 한걸음 돌아가자 자신의 왼쪽은 이미 열린 꼴이 되어
그것을 메우기 위해서 자신이 몸을 틀게 되면 이미 날아들고 있는 왕승고의 목검에
자신을 내놓는 꼴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야아압!』
주고후는 갑자기 고함을 치면서 오히려 불쑥 질풍과 같이 앞으로 두어걸음
전진했다. 그리고 검을 쓸어 연달아 십여 검을 왕승고를 향해 쳐냈다.
서릿발 같은 검광이 일어났다.
목검에 한 두 대 맞더라도 자신의 보검으로 그의 피를 볼 작정인 검세.
이른바 살을 주고 뼈를 깎는 수법이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던 왕승고인지라 흠칫하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일단 물러나게 되면 선기는 넘어가는 법이다.
『 목을 내놔라!』
주고후는 고함과 함께 잇따라 검을 휘둘러 왕승고를 핍박해 들어갔다.
사실상 남과의 동수(同手)는 처음인 왕승고다.
당황하여 잇따라 뒤로 물러나는 가운데 핏줄기가 그의 가슴에서 솟구쳤다.
그리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검!
이것은 연습이 아니었다.
비로소 왕승고는 지난날 주고후가 장군충을 종산에서 공격할 때에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간의 일.
땅!
한소리 울림과 함께 주고후는 휘청하면서 한걸음 물러났다. 그의 눈에 떠오른 것은
놀람의 빛.
상대는 위기의 상황에서 믿을 수 없게도 그의 검을 손으로 막아냈던 것이다.
틈을 얻자 상대는 훌쩍 뒤로 물러났다.
『 이쯤에서 그만 둠이 좋겠소』
왕승고가 말하자 주고후는 냉소를 터뜨렸다. 그 소리보다 그의 검은 더 빨랐다.
검이 날아드는 것을 보자 왕승고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 조금전의 당황함과는 달리
조용한 태도였다.
그리고는 상대의 검이 찰나간에 눈앞에 도달함을 보자 슬쩍 땅을 밀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반바퀴를 도는 순간에 주고후의 검을 스쳐 보내게 되었다. 수중의
목검이 그 검을 내리쳤다.
땅!
보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져 나갔다.
주고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왕승고의 목검이 그의 보검을 잘라버리고는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사납다고는 하지만 바보도 아니고 무공이 약한 그도 아니었다.
저 낭인의 목검이 지금에 이르러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목을 취할 수 있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표요(飄窈)한, 있는지 없는지 모를 묘한 검기가 그의 목검에서
일어나 그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 이유없이 살생을 하지마시오』
왕승고는 검을 거두었다.
그가 이렇듯 쉽게 검을 거둘 것은 몰랐던 주고후는 뜻밖인 듯 눈을 크게 뜨고
왕승고를 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조용한 눈이 거기 있었다.
『 흥!』
코웃음.
동시에 주고후는 검을 내팽개치고는 훌쩍 몸을 날려 백운의 등위로 올랐다.
『 기억해두지! 다시 만날때까지…!』
이히힝-
백운이 길게 울음을 터뜨리고는 굽을 놓아 달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질풍과 같은
속도였다.
『 귀찮은 일을 하나 만든 것 같군』
나직이 중얼거린 왕승고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됨을 보고 그 자리를
떠났다.
주고후가 행패를 부린 이유는 간단했다. 역에서 역마 몇필을 얻어 쉼없이 말을
달리기 위해서였다. 백운이 제아무리 천리마일지라도 계속해서 달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추격대에게 잡히게 될 것인즉, 말을 바꿔타고 계속 달릴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역의 책임자를 죽인 일은 조정에 상주되어 파란이 일게 되었다. 결국,
이후 3년에 걸친 정난(靖難)의 변(變)은 주고후의 이 행동에 의해 촉발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 * 사월이 저물고 오월이 다가오자 날이 서서히 더워지고 있었다.
만금전장 경사분점.
밤에는 아직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다.
왕승고는 감회어린 빛으로 만금전장의 경사분점을 보고 있었다.
지난날 려조약포에서 백련교의 공격을 받아 잠시 몸을 피했던 교외의 저택은 이미
다녀오는 길이었다. 묘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연락선은 만금전장 뿐이다.
『 그러니까 뭐냐? 그런 사고가 났는데도 연왕의 세아들을 모두 북평으로
돌려보낸단 말인가?』
『 그렇습니다』
경사의 만금전장 책임자인 전수국(錢守國)의 물음에 관사인 이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묘한 일을 하는군…』
『 그렇죠. 역시 문관들이라 되지도 않을 머리를 굴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 하긴…』
더 말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일이다.
대내에 대놓고 있는 선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다듣고 있다. 자연히 연왕의 방심을
노린다는 것쯤은 이곳에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효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관사가 물러나자 전수국은 붓을 들어 무엇인가를 적더니 뒷문을 열고 나갔다.
거기에는 비둘기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가 거기서 막 비둘기 한 마리를 꺼내 발에 달린 대롱에 자신이 쓴 쪽지를
매달때였다.
『 그것이 구대부인께 가는 서신이오?』
느닷없이 들려온 음성에 전수국은 혼비백산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뒤에는 낡은 옷을 입은 긴머리의 사내가 한 사람 우뚝 서 있었다.
『 누, 누구요?』
사내가 손을 쳐들자 그의 손에서 무엇인가가 날아올라 전수국에게 날아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철패였다.
사내, 왕승고가 내놓은 것은 승국패였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것을 받아든 전수국의 미간에는 미혹의 빛이 돌 뿐이었다.
『 무엇 때문에 내게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오?』
전수국이 얼떨떨한 빛으로 왕승고를 바라보는 순간, 그의 손이 진동하더니 손에
있던 철패가 어느새 앞에 다가온 왕승고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그의 안색이 돌변했다.
왕승고는 그의 수중에서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는 비둘기를 보며 침착히 말했다.
『 알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 전서구가 구대부인에게 가는 것이라면
전하시오. 당신이 본 이 철패의 주인이 살아있다고…』
그리고 그는 표연히 몸을 돌렸다.
달빛을 받는 그의 등은 유난히도 넓고 커보였다.
『 자, 잠깐!』
전수국이 소리쳤다.
왕승고의 걸음이 멎었다.
『 누, 누구라고 해야 하오?』
왕승고가 그를 돌아보았다.
『 말대로 전하면 되오』
『 만약 그분께서 당신을 찾고자 하신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소?』
전수국의 말에 왕승고는 그를 보았다. 여전히 조용한 눈이었지만 그 눈은 웃고
있었다.
『 사람을 잘 두셨군…. 패를 가지고 전장을 찾겠다고 말씀드려 주시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홀린 듯 사라진 왕승고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고 있던 전수국은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 아무래도 뭔가 일을 잘못 처리한 느낌이군…』
그는 입술을 물더니 비둘기를 손에 든 채 안채로 들어갔다.
비둘기를 통해 보내려던 서신에 추가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 * * 『 쯧쯔…!』
환영신창 목천중(幻影神槍 穆川重)은 혀를 찼다.
그의 앞에서 마치 생사대적을 만난 듯이 격렬하게 창을 휘둘러대고 있는 제자
다섯의 창솜씨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첫째인 관충(關沖)이 가르친 바를 이었을 뿐, 나머지 넷은 그저 겉멋만이
들었다.
창이 백병지조(百兵之祖)라 불리는 것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무기를
처음 쓴 것이 몽둥이(棍)였다면 거기서 발전한 것이 바로 창이다. 그러한 역사를
지닌 창이기에 거기에는 모든 무기의 근본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그저 찌르고
휘두른다고 해서 창의 본령(本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저 바보들을
제자라고 가르치고 있단 말인가.
『 그만!』
목천중의 말에 연무장에서 대련하고 있던 제자들이 손을 멈추었다.
『 무슨 일인가?』
느닷없는 목천중의 말에 의아해 했던 제자들은 비로소 연무장의 한쪽에 낯선 사람
하나가 서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웬놈이냐!』
질타가 터졌다.
그들의 눈에서 험악한 빛이 일어났다.
무림중에서 가장 금기(禁忌)로 삼는 것이 바로 남이 무공을 수련할 때 엿보는
것이니 설사 죽인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이러한 상황이다.
사내.
베옷에, 길게 늘어진 머리는 뒤에서 한번 묶었을 뿐이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지만 그 가운데 자리한 두눈은 조용한 느낌을 그의 전신으로 퍼뜨리고
있음이 한눈에 느껴졌다.
사내의 허리춤에는 목검 한자루가 꽂혀 있었다.
목천중의 제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내는 그 가운데서 목천중을 향해 정중히 손을
마주잡아 포권을 해보였다.
『 허락없이 찾아와 결례를…. 한 수 가르침을 받고자 목노사를 찾아왔습니다』
『 이런 건방진 놈!』
『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즉각 분노한 외침이 터졌다.
『 나와 싸워보겠다는 뜻인가?』
손을 들어 제자들을 만류한 목천중이 사내에게 물었다.
『 비무(比武)코자 할 뿐, 싸움이 아닙니다』
사내의 대답은 간단했다.
『 비무라…. 관충!』
나직히 중얼거린 목천중은 관충을 불렀다.
『 예, 사부님!』
관충이 그에게 허리를 굽혔다.
『 네가 상대해주거라』
사내의 앞에 있던 관충은 흠칫하며 목천중을 바라보았다.
『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창을 고쳐잡았다. 사부가 시키는 일이니 까닭이
있으리라. 그는 부지중에 눈앞에 선 사내를 다시금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몰랐으되, 다시 보니 이 자에게는 묘한 기운이 있었다. 고요하게
가라앉은… 형언하기 어려운 조용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봉양(鳳陽)에 자리한지 벌써 이십 년.
봉양 제일의 세력을 가졌다 할 수 있는 목천중의 환영무관(幻影武館)은 자연히
이름을 얻고자 하는 떠돌이 낭인들이 찾아드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봉양에서 오대천왕(五大天王)이라 일컫는 그의 다섯 제자들이 상대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한번 창을 휘둘러 시야를 가리고 두 번 휘둘러 세상을 창빛 아래 가둔다는
환영창법(幻影槍法)으로 인해 안휘의 명숙(名宿)이 된 이래,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관충은 그중 제일이었다.
그러한 관충을 나서게 하는 것은 사내의 기도(氣度)가 일견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무기를 들라!』
관충이 창을 든채로 소리쳤다.
『 손을 쓰시오』
사내의 말에 관충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 맨손으로 나를 상대하겠단 말인가?』
『 ……』
사내는 말없이 그를 보았다.
『 건방진!』
관충이 냉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그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사정을 볼 필요가 없었다. 이따위 행태를 하는 자들을 이미 수없이 봐온 그였다.
약은 하나 뿐이다. 개패듯 패서 문밖으로 내치는 것이다.
창이 북어를 꿰듯, 일직선으로 사내를 향해 뻗어왔다. 섬광과도 같은 빠르기다.
수없는 찌르기의 연습없이는 이와같이 흔들림 없는 속도를 얻을 수 없다.
『 좋군』
나직한 중얼거림.
하지만 그것과 함께 사내는 이미 슬쩍 반걸음 물러섬으로써 그 창세의 예봉에서
벗어나 있었다.
불과 반걸음의 움직임으로.
『 흥!』
하지만 관충은 그것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이 코웃음치면서 벼락같이 창을
잇달아 찔러대기 시작했다. 창빛이 눈부시게 일어났고 삽시간에 수십 개의 창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 좋은 환영개천(幻影蓋天)이다!』
목천중의 입가에 웃음이 그어졌다.
하지만 그 웃음은 다 피기도 전에 사라져야 했다.
관충이 창을 놓치고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것을 보아야 했으므로.
그로서도 과연 어떻게 된 것인지 제대로 보지 못했다. 다만 사내가 환영개천의
일초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다가서면서 찔러오는 창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까지 보았는데 그 순간에 관충이 그에게 창을 빼앗기면서 물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 내 창을 가져오너라』
목천중이 굳은 얼굴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연무장의 가운데 섰다.
제자에게서 일장 다섯 자나 되는 자신의 창을 받아든 목천중이 사내를 보며 물었다.
『 이름을 알아도 되겠소?』
『 왕승고라 합니다』
『 왕승고…』
이름을 되뇌었지만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일 리 없다.
『 시작합시다』
『 그럼…』
사내, 왕승고는 그에게 가볍게 포권을 취해보였다. 존장에 대한 예의.
그리고 그는 땅을 박차고 목천중에게 달려들었다. 움직이지 않을때는 고요하더니
일단 발동하자 그 움직임은 마치 비호와 같았다.
동시에 목천중의 창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창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창은 한 순간에 수십 개로 변한 듯 했다.
창의 그림자가 수없이 생겨나고 바람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찔렀다. 햇살을 받는
창날의 빛이 연무장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왕승고의 눈에 일순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산중에서의 수련과 실제 대적(對敵)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상대가
고수라면 더더구나.
이러한 경험은 이미 주고후와의 일돌(一突)에서도 겪은 바 있었다.
그것이 그가 여기에 나타난 이유이기도 했다.
깊게 숨을 들이킨 왕승고는 옆으로 몸을 날렸다.
창이 영활한 뱀과 같이 그를 따라 쫓아왔다.
무기가 길면 유리한 것은 자명하다. 상대의 창은 일장 반이나 되니 이런 식이라면
아예 곁으로 다가갈 수조차 없는 것이다.
목검이 그의 허리춤을 벗어났다.
땅!
그의 신형이 빙글 도는 사이에 창이 그를 스쳐갔고 목검이 목천중의 창대를 때렸다.
하지만 꿈틀, 튀는 것 같았던 창이 빙글빙글 돌면서 갑자기 십여개의 환영을
쏟아내면서 왕승고를 덮칠 것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
이 일격으로 주고후의 보검이 부러진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이것은 예상밖의
일이었다.
왕승고가 깊게 숨쉬며 불쑥, 목검을 내밀었다.
동시에 그의 검세가 무섭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빠름은 대단하기 이를
데 없어서 오히려 목천중의 환영창을 압도하는 듯 했다.
『 분광검법(分光劍法)?!』
경호성이 목천중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마치 가위로 비단폭을 째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왕승고의 목검은 번개처럼
전진했다.
찰나에 목천중은 십여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것을 보는 관충등 제자들은 안타까워 발을 굴렀다. 그의 사부는 일반적으로
무관을 열고 있는 사람들과는 틀린 강호상의 실제적인 고수였다. 그러니 일개
낭인을 맞아 밀리는 대결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목천중이 빙글 몸을 돌렸다.
동시에 그의 창이 절반으로 짧아졌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앞까지 전진해온 왕승고의 눈앞으로 창날이 불쑥 날아왔다.
가히 출기불의(出其不意)!
『 태극반전(太極反轉)이다!』
관충이 소리쳤다.
그것이야말로 목천중이 자랑하는 절기였다.
상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일순 신법을 바꾸면서 창의 중단을 쥔다. 그럼 장창은
단창이 되는 것이다. 창으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봉으로 상대를
후릴 수도 있어 목천중의 성명(盛名)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쉿!
창날이 왕승고의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잘려 흩어짐은 창날의
기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의미함에 다름이 아니다.
『 타앗!』
왕승고의 입에서 터져나온 기합.
땅!
뒤를 이은 둔탁한 음향 하나.
…
목천중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의 손에 들린 일장 가웃의 장창은 두 개로 변해 있었다. 가운데가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의 앞에는 왕승고가 조용한 태도로 서 있다.
『 많이 배웠습니다』
왕승고가 목검을 거꾸로 쥔 손으로 그에게 포권했다.
정중한 태도.
어디에도 이겼다는 교만은 없다.
그리고 그는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 저…!』
오대천왕을 포함한 그의 제자 삼십여 명이 그를 막으려 했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목천중이 꾸짖었다.
『 저자가 이대로 떠나면 우리 무관의 체면은…』
관충의 말에 목천중이 혀를 찼다.
『 못난 놈. 그것밖에 못보느냐?』
그는 수중에 들고 있던 부러진 창을 훌쩍 관충에게로 던져주고는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의아한 빛이었던 관충은 문득, 사부의 창을 보고는 놀라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너무도 깨끗했다.
부러진 창대의 단면이 마치 수수깡을 잘 드는 보검으로 정성들여 잘라놓은 것
같았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관충은 신음했다.
목검이 단목(檀木.박달나무)으로 만들어진 창대를 쳐서 그것도 이렇게 잘라놓을 수
있다는 것은 검의 기세를 의미한다.
관충은 부지중에 왕승고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한줄기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을 뿐, 그의 모습은 이미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돌연히 나타난 낭인 한 사람의 비무행(比武行)은.
* * *
북평 연왕부.
어스름한 잔양(殘陽)이 광대한 궁궐을 덮고 있다.
전보다 더 허전해 보이는 연왕부의 너른 대지. 그리고 그 위에 솟아있는 궁궐들.
어디선가 오리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후원에 있는 연못에 오리들이라도 날아든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자니 너무 시끄럽다.
곽곽! 곽….
후원에는 정말 오리들이 있었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고 거위까지 섞여서 홰를 치면서 후원을 덮었다. 떼를 지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오리들의 무리.
곽! 곽과아악!!
오리들이 날갯짓을 하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귀가 따가웠다.
나름대로 이유는 충분했다.
병사와 궁녀 몇이 오리들에게 저녁밥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둘이라야 어느
정도지 후원을 가득 메우다시피 돌아다니는 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그
소란스러움은 고막이 터질 지경이다.
그 후원의 한쪽 구석.
숲으로 둘러싸인 가산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땅! 따앙….
망치가 떨어져 불똥을 튀긴다.
불꽃이 일 때마다 쇳덩이가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그 위에 다시 망치가 떨어져
쇳덩이는 서서히 형체를 갖춘다.
주위에는 그렇게 해서 형체를 갖춘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검과 도. 창….
연왕부의 지하에 자리한 이곳은 정말 뜻밖에도 대장간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전쟁에 소용될 병장기였다.
도연은 만들어진 검을 한자루 들어보았다.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정련된 강철의 느낌. 한번 휘둘러보자 세상을 발 아래로 둘 수 있을 듯한 호기가
인다.
『언제까지 다 될 수 있겠나?』
그의 물음에 대장간을 책임지고 있는 유노대(柳老大)가 대답했다.
『밤을 도와 작업을 하면 한달이면… 하지만 소리를 낼 수 없는 입장이라 어떻게
될지…』
『음…』
도연이 신음했다.
소리를 내고 남의 눈을 거리끼지 않을 처지라면 이렇게 대궐의 후원에다 오리를
기르면서까지 일을 추진할 리가 없는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때, 장옥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 그런 일이…』
도연의 안색이 창백히 질렸다.
그의 앞에는 연왕 주태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마치 사자가 웅크린 듯한
모습이었다.
『둘째저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나도 모르겠소. 지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이라는 보고만 받았소』
『큰일이로군요…』
도연이 신음했다.
마침내 주고후가 사고를 친 일이 이곳까지 알려진 것이다.
『어쩌면, 예정보다 일을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겠소』
『알겠습니다!』
도연이 머리를 숙였다.
제남(濟南).
산동의 수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산자수명(山紫水明)함으로 이름높은 곳.
하지만 상인들에게는 만금전장의 본점인 제남총호가 여기에 있기에 더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 제남이다. 각종의 무역에서부터 모든 만금전장의 사업들이
거기서 비롯되니 제남의 문물은 만금전장에서 시작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제남을 둘러싼 산중에는 천불산(千佛山)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제남의 남쪽으로
육리쯤 떨어진 곳이다.
그곳에 있는 천불사는 유명했다.
산에 육조시대에 조성된 무수한 석불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험함으로 인해 늘 신도들이 끊이지 않는 곳.
그 천불을 향해 구대부인은 삼천배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호위무사 몇과
시녀 둘이 보인다. 하지만 암중에 숨어 그녀를 호위하는 고수들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하루, 하루….
초조히 기다리던 그녀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왕승고를 무사히 귀환시켜주십사,
갈구하는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절을 올렸다.
오늘이 그 백일기도의 마지막 날.
이제 삼천배는 불과 마흔번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처럼
아름답고 윤택있던 얼굴이 까칠하게 말라버린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 비나이다. 비나이다… 부처님전에 비나이다.! 제발 우리 승고가 무사히
살아있기만을 일심으로 비나이다…』
애절한 어머니의 바람.
『 나무참제업장보승장불(南無懺除業障寶勝藏佛),
보광왕화염조불(寶光王火염照佛), 일체향화(一切香華)…』
그녀의 뒤에서 지난 백일간 같이 고생한 시녀들이 두손 모아 빌면서 염불한다.
마침내 삼천배가 끝이 났다.
그리고 구대부인은 무너지듯이 쓰러졌다.
『 대부인!』
시녀들이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 괜찮다. 잠시 쉬면 된다』
구대부인이 손을 들어 자신을 부축하는 시녀들을 안심시켰다. 설사 쇠라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고행과도 다름없는 지난 백일간의 기도였다.
그 모든 것을 젖혀둔 채로, 오로지 자식의 생환을 바라는 어미의 일념만으로
빌었다.
고려는 예로부터 불교가 성했다.
비록 그 폐해가 컸지만 그 가운데 자란 구대부인인지라 독실한 신앙은 여전할
수밖에 없었다.
『 돌아가자』
눈앞에서 부처님이 웃고 있었다.
웃는 듯 마는 듯….
언제나처럼 그렇게 웃고 계셨다. 돌에 이끼가 끼고, 코의 한쪽이 떨어져 나가도 저
얼굴에 서린 웃음은 변치 않았다.
대체 나는 언제나 아무런 바람없이 저 위대한 분 앞에 서 볼 것인가.
구대부인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백일만에 천불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잠시 쉰
다음, 그녀는 그간 밀렸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제남총호로 달려가야만 했다.
그런데.
『 이, 이것이 언제 온 것이냐?』
구대부인은 자신의 거처인 선방에 이르러 소리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인 것은
전수국이 보낸 서신이었다.
『 이틀 전입니다』
『 이틀? 전서구로 날아온 서신은 바로 전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더냐!』
『 어제부터 거의 기진하셔서…』
더 이상 책망할 순 없었다.
이미 사흘 전부터 거의 비몽사몽으로 지냈다. 오로지 기도만을 위해 미친 듯이
절을 했다. 그것만이 삶의 목표인 듯이. 그들이 전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황제가 연왕의 세아들을 돌려보내기로 했다는 글귀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말미에 추가된 철패의 주인이 살아있다는 것만이 둥둥 눈앞에서
떠올라 소리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천천히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처음에는 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름모를 낭인이 하나 나타났는데, 그 무공이 봉양의 환영신창 목천중을
일거에 패퇴시킬만큼 고강하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신권(神拳) 사마구(司馬鷗)를 패퇴시키고 날수검객(辣手劍客)마저
쓰러뜨렸다는 소문이 돌자 세상은 그 낭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허름한 베옷에 긴 머리, 목검을 지닌 그를.
왕승고는 조용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가 비무행을 하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는 황산 운무곡에서 가히 피나는
고련(苦練)을 했다. 그것은 그가 그의 능력에 대해서 자신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산하여 처음 상대한 주고후에게 일검을 허용하게되자 그
자신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비무행의 이유였다.
자신의 실력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알고픈….
그의 비무는 무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행선지는 낙양이었고, 비무는 낙양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고수들을 찾아
이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찾아가는 목적지에는 귀왕혈의 본거지가 있었다. 앙천사독이 말한
곳이 귀왕혈의 본거지가 분명하다면….
눈앞에 장원(莊園) 한 채가 나타났다.
당시의 장원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담이 둘러진 커다란 집이라는 개념이 아니다.
호장하(護莊河)라 이름하는 물이 넘실거리는 못이 장원을 두르고 있고 장원으로
들어가려면 다리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장원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집으로 이루어진 거리가 나타난다. 일종의 성인 것이다.
난세를 겪다보니 스스로 자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방위기구인 셈이다.
그러한 장원은 도시를 벗어난다면 흔히 보인다. 하지만 도시에서는 그런 규모를
찾아볼 수 없고 교외로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런 거대함보다는 커다란 저택이라는
것이 더 어울릴 형태가 일반적이다.
개봉성의 교외에 있는 이 방가장(方家莊) 또한 크다고 할 수 없는 규모였지만 이
일대에서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누대에 걸친 부자이자 무림고수인 방대원(方大元)이 이곳에 살기 때문이다.
소림사의 속가제자인 그의 철장(鐵掌)은 지난 십여년간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왕승고가 거기 도달한 것은 밤이 으슥해서였다.
그가 목적한 것이 철장 방대원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제 그의 비무행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음을, 어제 주루에 들었다가
사람들이 침을 튀기며 화제에 올림을 듣고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그의 비무는
스스로를 닦기 위해서였지 이름을 날리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이미 십여차례의 비무를 했고 산속에서 도적들을 대여섯차례나
만났다. 그 결과, 혼자 고련한 것과 움직이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어 그는 좀 더 고수와의 비무를 원하고 있었다. 철장 방대원은 바로 그런
고수였다.
『 예는 아니지만…』
왕승고는 나직히 중얼거리고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 방가장의 높다란 담장을
날아넘었다. 높이가 이장이나 되는 담이니 전이라면 어림도 없는 곳이다.
「이상하군…」
담을 넘어 방가장의 안으로 들어선 왕승고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내심 긴장했다.
사방에 대낮과 같은 관솔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는데, 묘하게도 어디에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천색을 살펴보니, 곧 이경이 될 모양이었다.
암중으로 사방을 살펴보니 과연 사람들이 곳곳에 몸을 숨긴채 긴장된 표정으로
경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제각기 무기를 손에 쥐고 검은옷을 차려입은
것으로 보아 방가장에서는 무엇인가를 대비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했다.
「싸움이 있을 모양인가?」
이런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이 마당에 불쑥 나타나서 비무하겠소, 한다면 미친 놈이 될 수밖에 다른
무슨 말로도 형용할 수가 없다.
그 생각은 잠시일 뿐이었다.
갑자기 가마 하나가 허공을 날아 방가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마가 허공을 날다니!
|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즐독입니다
감사합니다
즐감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