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감독이나 배우를 인터뷰하든 설레임과 동시 부담감에 시달리지만, 이번엔 특히 더 했다. 장.예.모. 첸 카이거와 함께 중국 5세대 감독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한편, 문화혁명 세대의 감수성에서 독특하게 빚어진 자기 반성과 철저한 작가정신으로 6세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까지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감독. 이에 아시아권을 훌쩍 벗어나 베니스, 베를린, 칸과 같은 국제영화제에서도 이름을 날리며, 세계적인 감독으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장예모 감독.
그의 수많은 영화들 속에 담긴 생각들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겠지만, 뭔가 심중을 찌르는 얘기나 흥미로워할만한 색다른 감상을 넌지시 제시하면서, 이런 저런 생산적인 얘기들을 나눠보고 싶었던 게, 그를 만나기 전에 품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밖에 물어볼 수 없는 걸까라는 푸념이 절로 뱉어지는 질문지를 들고, 기자는 갖가지 자괴감에 휩싸였다.
특히 넘치는 C.G와 강렬한 색감으로 주조된 전작 <영웅>은 ‘진시황’에 대한 그의 정치적 해석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논란의 화두를 던져줬다. 그 상업적인 몸짓이 왠지 모를 낯섬과 다음 영화에 대한 조심스런 전망을 던져줬던 기억이 흐릿흐릿해질 찰나, 그가 신작 <연인>을 들고 한국을 찾아왔다.
인터뷰장에서 만난 그는, 나이가 들수록 그 내면의 형상대로 외모가 바뀌어진다는 말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깊은 분위기의 감독이었다. 공간을 제압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기자의 감정까지 묘하게 침잠시켰던 장예모와의 길지 않은 대화. 형식적인 대답 이상의 무언가를 얻고 싶었던 기자의 바람은 기약없는 다음으로 미뤄야 했지만, 그 느낌은 곱씹을수록 매력적이었다...
전작 <영웅>의 경우 한국에서 230만명의 관객을 모아 중국영화로서는 최고 기록을 세웠거든요. 그래서 이번 <연인>의 경우도 무척 기대하는 관객들이 많을 것 같아요. 음, 스토리를 봐선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영웅>의 속편이라는 얘기도 있어서요. 그런가요? 처음엔 <영웅 2>로 찍을 생각도 있었는데, <영웅>을 촬영할 때 <연인> 시나리오 작업을 이미 진행중이었어요. 진행하다 보니까 완전히 다른 영화가 돼 버렸구요. <영웅>은 대의를 위해서 개인이 자신의 사랑 등을 희생하는 것이었다면, <연인>은 개인이 자신의 사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어요. 엄격히 말하면 연인은 멜로의 성격이 강한 영화죠.
우리나라나 일본에선‘lovers’, 즉 ‘연인’으로 제목이 바뀌었는데 원래는 ‘십면매복’이라고 알고 있거든요. 제목이 함축하는 의미가 있나요? ‘십면매복’은 그 유래가 중국의 아주 유명한 악곡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초한>, 즉 항우와 유방의 전쟁에서 항우가 유방에게 포위당했을때, 어디 도망갈 곳이 없이 몰린 상황을 악곡으로 만든 하나의 비파독주곡이에요. 아주 유명한 곡이라 중국에선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시피 하죠.‘십면매복’을 영화 제목으로 딴 이유는, <연인>의 스토리상 진실과 거짓이 계속 교차하고 사람의 심리가 곳곳에 매복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말그대로 ‘십면매복’의 상황이자, 인간 심리의 매복을 담고 있는 영화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죠. 아마 일본에선 그 한자가 읽기 힘들기 때문에 ‘연인’으로 바꾼 것 같고, 한국도 일본을 따라간 것 같은데, 제목이 바뀐 것에 대해선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전작 <영웅 >이 두 글자의 제목이었고, <연인>도 두 글자니 그렇게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요. 어차피 중요한 건 영화 자체니까요.
<영웅>의 경우 붉은색, 푸른색, 흰색, 녹색같은 색감이 주는 강렬함과 매력이 적지 않았어요. 이번 <연인>에서도 그렇게 인상적인 색감으로 주조됐나요? 또, <영웅>은 굉장히 화려한 C.G가 들어갔는데, 이번에도 그런지 궁금하거든요. 이번에는 색감을 주된 것으로 사용하진 않았어요. 그냥 스토리에 맞는 색채를 따라갔을 뿐이죠. <연인>에서 사용한 색감은 당나라 시대의 돈황 벽화에서 따온 색깔들이에요. 주로 당나라 태평성대 시절의 화려한 색깔들을 많이 차용한 것이죠. 음, C.G의 경우 무협영화니까 꼭 사용할 수밖에 없었구요. 이번엔 장쯔이가 비도를 무기로 사용하는 장면에서 많이 사용했어요.
<연인>은 촬영 내내 중국 매체의 연예면을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채울 정도로 높은 관심을 얻었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돼 촬영장에 몰래 잠입한 기자들이 카메라를 뺏겼다고 주장하는 등 몇몇 사건도 있었는데요. 그렇게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고 주로 배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죠. 아무래도 일정이 공개되거나 하면 언론이나 팬들이 자꾸 오게 돼 영화 촬영도 늦어지고, 몰입에도 방해가 되니까요. <연인>의 경우 배급사의 투자가 꽤 높았기 때문에, 언론에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졌던 것 같아요. 정말 대량의 기사들을 쏟아냈구요. 개봉 이후엔 전작 <영웅>처럼 칭찬하는 글도 많고, 비판하는 글도 많은 상황이죠.
<연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매염방이 출연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큰 이슈였거든요. 매염방이 출연했다면, 그녀가 맡게 될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원래 비도문의 두목 역할을 맡길려고 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못하게 됐으니까 시나리오를 수정하게 됐죠.
촬영 중 에피소드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어요. 금성무씨가 우크라이나에서 촬영 중,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기도 하는 등 주연 배우들의 부상 소식 등이 이어졌구요. 촬영 중 에피소드랄지 특히 힘들었던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영화 작업은 저에게는 일이기 때문에 에피소드라는 게 별로 없어요. 일일이 얘기하자면 너무 많구요. 촬영 중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실수 등 어려움은 항상 따르기 마련이구요. 아마 다른 감독들에게 물어봐도 영화 작업이라는 건 하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거에요. 모든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고, 전 그 어려움도 일에 있어 하나의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연인>의 경우 어려움이 꽤 많았는데,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사스를 들 수 있어요. 우크라이나 촬영을 계획했었는데 사스 때문에 못 가게 됐었어요. 영화를 찍기 위해 미리 꽃밭에 꽃을 심어놨는데, 나중에 사스가 해제된 뒤 가보니까 꽃이 다 시들어버렸더군요. 또 배우들의 부상 문제나 가을 풍경을 찍어야 하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리는 바람에 곤란이 생기기도 하구요. 매염방의 경우도 어려움 중의 하나였구요.
전작 <영웅>에서 양조위, 장만옥 등이나 이번 <연인>에선 유덕화, 금성무 등 정말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했거든요. 특히 눈에 띄는 건 장쯔이의 연이은 캐스팅인데,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어떤 건가요? 현재 중국에서 무협영화도 찍으면서 연기력도 갖춘 여배우를 찾는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선택의 폭이 아주 좁다고 할 수 있죠. 또, 무협이나 연기 이외에도 상업적인 동원력도 고려해야 하구요. 게다가 <연인>에선 역할상 무용까지 소화해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장쯔이를 염두에 두게 됐죠.
중국 5세대 감독으로서, 감독님은 화려한 형식주의 영화에서 리얼리즘 영화, 또 상업적인 영화에서 예술성이 뛰어난 작품까지 모든 방면에 뛰어나신데요. <연인>은 감독님이 뭔가 변화해 가는 와중에 있는 영화인가요? 또, 영화 속에 드러내려는 세계관 내지 철학이 있다면요? <연인>은 특별한 변화의 산물이라고 할 순 없어요. 그냥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고,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한번 찍어보고 싶었죠. 영화감독으로서 계속 신선한 것, 새로운 걸 좇고 싶었어요. 상업적인 영화든 예술적인 영화든 앞으로도 전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시도할 예정이에요.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연인>은 세계관이랄지 철학은 없고, 단순히 러브 스토리일뿐이에요. 그냥 사랑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하는 정신을 한번 찍어보고 싶었고, 자유를 추구하는 한 개인의 이상(理想)을 얘기해 보고 싶었어요. 영화에서 장쯔이가 바람과 같은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렇게 바람과 같이, 속박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거죠.
<황토지>, <귀주이야기>, <인생>, <진용> 등 감독님의 많은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특히 비극적인 시대 상황과 그 속의 개인들이 발산하는 슬픔이 개인적으로는 무척 매력적인데, 감독님이 매력을 느끼는 인물들이 그런가요? 지난 수십년간 중국은 시대가 변화해오면서 많은 고난을 겪었는데, 그런 시대적인 배경이 모든 사람들의 인생에 어떤 낙인처럼 찍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런 시대적인 배경 아래 생활하고 있는 인물들이 제겐 매력이 있구요. 전 개인들이 시대적 상황을 모두 자기 인생에 농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건 영화의 좋은 소재라고 생각하죠. 앞으로도 그런 영화들을 계속 찍을 생각이에요. 중국의 영화 제작 환경이 좀더 좋아진다면, 훨씬 좋은 영화들이 나올 거구요.
중국에서 영화를 찍는 것은 첫 번째가 정치(검열), 두 번째가 경제(제작비), 세 번째가 예술이라는 말이 있는데요. 감독님이 생각하시기에 아직도 그렇다고 생각하시나요? 물론, 아직도 그런 상황이라고 생각해요. 중국에선 검열이 상당히 엄격하게 진행되는데, 예전의 한국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중국의 경우, 우선 시나리오를 정부에서 검열하고, 시나리오가 통과돼 영화를 찍고 나면, 그 영화에 대한 검열을 하는 상황이죠.
전작 <영웅>에 이어 또 시대극을 선택하셨는데, 시대극이 자칫 위험한 건 감독님의 정치적 성향,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를 영화 속에서 추출해내려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인 것 같거든요. <영웅>에서도 그런 부분에서 비판을 받으시기도 했구요. 또 시대극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연인>의 시나리오는 <영웅> 때 이미 써놓은 거니, 시나리오를 낭비할 순 없었어요. <영웅>을 찍을 때만 해도, 두 영화를 동시에 진행해 볼까라는 생각도 있었지만요. 글쎄요, 영화는 영화일뿐 그 속에서 감독의 이데올로기, 정치적 성향 등을 재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영화는 하나의 교재같은 게 아니고, 그냥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중국은 오랫동안 영화를 통해서 하나의 정치적인 사상을 표현하려고 했었는데, 우리도 그런 부분에서 피해를 받았다고 할 수 있죠. 전 어떤 배경에서든지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내는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