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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사람의 부엌
류지현
-냉장고가 없던 시절
인도 사람들의 지혜는 또 어떤가.
마른 짚 더미가 깔린 들판 위로 물이 담긴 테라코타 단지들이 가득하다. 이 춥고 건조한 겨울의 혹독함을 두고두고 쓸 수 있는 얼음으로 만들 마술 단지들이다. 테라코타 단지의 표면을 통해 수분이 증발하면서 단지 내부의 온도가 떨어져 얼음이 생긴다. 새벽빛이 깊이 들기 전 이 단지 얼음들을 땅을 파서 만든 웅덩이로 옮긴다. 짚단으로 덮은 웅덩이 안에서 단지 얼음은 한낮의 태양을 어느 정도 버텨 냈다. 끝까지 살아남은 얼음은 숨이 턱턱 막혀 오는 뜨거운 인도의 여름날, 식사 후 가족끼리 둘러 앉아 먹던 인도 전통 아이스크림 쿨피로 그 달콤함을 뽐낸다.
얼음이 소금을 만나면 어느 점이 낮아지면서 녹는데 이때 주변의 열을 흡수해 단지 안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물과 공기, 사람이 만든 테라코타, 얼음과 소금이 어우러져 탄생한, 그야말로 초자연 급속 냉장고다.
인도네시아인 에스티 누르나니의 할아버지는 아직까지도 테라코타 물 단지를 귀하게 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일 듯하다. 테라코타는 유약 없이 낮은 온도로 구워 표면에 구멍이 많다. 특별한 유약 덕에 구멍은 많지만 액체는 통과하지 않는 우리나라 옹기와는 다르게 유약을 바르지 않은 테라코타는 물이 샌다. 불편할 수도 있는 이 특징을 기발하게 이용한 것이 테라코타 물 단지다. 바깥 공기가 따뜻할수록 표면을 통한 물의 증발이 잘 일어나 단지 안 온도가 더 많이 떨어진다. 시원한 물이 그리워지는 여름날, 물을 담은 보티호(테라코타 물 단지를 뜻하는 스페인어)를 적셔 메달아 두면 어느 정도 청량해진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로마 시대부터 사용된 똑똑한 물 단지이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물을 언제든지 쉽게 마실 수 있는 지금, 이 보티호들은 지중해 식당의 장식용으로나 종종 만날 수 있다.
우리 손으로 보듬고 우리 눈과 입으로 확인하던 시절에는 우리와 식재료들이 함께 했다. 하지만 이제는 냉장고라는 다리를 건너야만 만날 수 있다. 멀어진 거리만큼 눈에 잘 보이지 않고 소식을 확인하기도 어렵다. 시들지 않고 며칠을 그 속에서 버텨 준 채소보다는, 채소의 유통기한을 늘려 준 냉장고가 고마울 뿐이다. 당근이, 감자가, 호박이 시간과 환경에 따라 인간처럼 쇠해가는 생명이라는 것을 느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신기술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 원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문제 처리 과정이 숨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오감으로 경험하는 자연의 원리를 기초로 한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한다기보다는 개별 문제를 개별적으로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둔다. 반면 전통 지식은 자연의 원리를 따르기에 의도한 게 아니라도 문제 해결에 총체적인 접근을 한다. 또한 그 원리가 간단해 일정한 관찰과 노력이 따라 준다면 얼마든지 나의 지식으로 응용할 수도 있다. 일상생활이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일 때 자연이 주는 것들에 감사랄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더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어떤 낱낱의 지식보다도 지속 가능한 지구 위의 삶을 위한 중요한 열쇠이다.
-우리에게 냉장고는 무엇일까
한국 환경 공단에 따르면 한국에서 버려지는 쓰레기 중 28.7%가 음식물 쓰레기다. 이중 70%가 가정 및 소형 음식점에서 발생하며 그 음식물 쓰레기 중 약 10%는 건들지도 않은 채 보관만 하다가 버린 것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국내에서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는 하루 1만 4천여 톤이고, 이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비용은 2010년 기준 연간 8천억 원 이상이 든다고 한다. 쓰레기로 버려질 식재료를 사는 데 돈을 썼을 뿐만 아니라, 쓰레기 처리 비용이 국민 세금으로 충당되니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면서 또 한 번 돈을 내는 셈이다. 농부의 땀으로 애써 길러 낸 식재료들도, 매일매일 힘들게 일해 번 나의 돈도 함께 낭비되고 있다.
네덜란드 청년 요하킴의 말처럼 심지어 수퍼마켓에서도 실온에 판매하는 식재료들까지 가정에선 냉장고로 직행한다. 오늘날 대부분 주택에는 식재료를 보관할 마땅한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식재료들을 더 깊숙이 밀어 넣으며 새로 장 봐 온 식재료들을 냉장고 안으로 욱여넣는다. 냉장고 안쪽에 자리 잡은 식재료나 음식들은 앞줄에 있는 것들이 소진되기 전에는 좀처럼 밖으로 나올 일이 없다. 결국 손도 안 대고 버릴 음식을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전기를 가동하여 보관하는 셈이다.
냉장고는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 기구 중 전력 소모량이 가장 많다. 먹을거리를 버리는 것만도 낭비인데, 거기에다 전기까지 불필요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전기 생산을 위해 자원도 낭비하지만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 1kw를 생산하며 발전소는 607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이 밖에도 음식물 쓰레기가 썩으면서 발생하는 메탄가수 등 영양 섭취와 관련된 온실가스는 세계 전체 온실가스 발생량의 30%에 이른다.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13%임을 감안하면 우리의 식생활과 식습관이 환경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부엌 손을 덜어 주는 이 편리한 기술 앞에서 그들의 경험과 지식은 하찮고 변변찮은 것이 되어 버렸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정보가 쓸모 있는 지식이나 지혜라고 생각지 않았기에 자식들에게 물려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고, 자식들 역시 애써 알려고 들지 않았다.
부뚜막에 정화수를 떠다 놓고 모시던 조왕신의 자리는 어느덧 냉장고로 대체되었다. 냉장고만 있으면 우리 가족의 식탁은 문제없을 것이다. 더 크고 더 좋은 냉장고가 더 나은 부엌을 만든다. 이것이 사람들의 믿음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지난 세기에 작물 유전자 다양성의 3/4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세계 곳곳의 농부들이 자연재해와 병충해에 맞서 싸워 가며 개발해 온 품종의 70%가 100년이란 짧은 시간 동안 현대 소비 문명 이래 사라졌다. 단지 먹을 음식의 종류가 줄어든 것만이 아니다. 식량 안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연재해나 병충해와 맞서 싸울 선수의 3/4이 줄었으니 길게 보자면 인류의 식탁은 풍요한 기근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셈이다. 유전자 연구로 병충해에 강한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만큼 또 진화하는 병충해를 어디까지 따라잡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냉장고 없는 부엌을 찾아서
이탈리아에서는 호박꽃을 음식 재료로 종종 이용한다고 한다. 달걀에 적셔 부쳐 먹는 전뿐만 아니라 그들 특유의 쌀 음식인 리조또에도 넣어 먹는다고. 그들은 버리는 호박잎을 우리는 먹고 우리가 버리는 호박꽃을 그들은 먹는다. 서로 요리법을 교환해 보는 건 어떨까. 색다른 음식 문화를 경험할 수도 있고, 우리가 재배한 채소를 남김없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서로에게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토마토가 많이 생겼으니 하루 빨리 파사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파사타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토마토소스의 기본으로, 토마토를 이용하는 요리가 많은 이탈리아에서는 잔뜩 만들어 두고 토마토가 나지 않는 계절에도 사용한다. 파사타는 적어도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간가고 하니 우리가 겨울을 대비해 김장을 담그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다. 김치 담그는 법이 집집마다 다른 것처럼 토마토소스 만드는 법도 제각각이지만 렌자네 비법을 들어 보자.
우선 토마토를 숭덩숭덩 썰어 냄비에 올려 물러지면 껍질을 벗겨 내고 다시 냄비에 넣어 걸쭉해질 때까지 익힌다. 소스에 점성이 생기면 바질리코 잎 약간과 소금을 원하는 만큼 넣어 준다. 설탕을 조금 넣으면 토마토의 시큼한 맛을 없앨 수 있다고 렌자가 귀띔한다. 그리고 소독한 병에 담아 밀폐 보관하면 끝. 올리브 오일에 양파, 당근, 마늘 다진 것에 쇠고기 간 것을 넣고 볶다가 재료가 익었을 때 파사타를 넣어 끓이면 우리가 흔히 먹는 미트 소스가 되는 셈이다. 그야말로 김치찌개 끓이듯 미트 소스가 뚝딱 만들어지니 앞으로 화학 첨가물이 들어간 시판 소스에 손이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토마토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되는 대표적인 채소로, 10도 이하면 냉방병에 걸린다. 냉장고 온도가 1~4도이므로 토마토가 냉장고 안에 들어가는 건 사람이 냉동고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셈이다. 우리 눈에 확인도지 않지만 냉장고에 있는 동안 토마토는 영양소가 파괴되고 그 맛도 잃는다. 맛있는 토마토의 비밀은 다름이 아니라 냉장고 밖에 보관하는 것이다. 또한 토마토는 단단한 겉껍질이 없는 까닭에 되도록 서로 닿지 않게 보관하는 게 좋다. 토마토에서 나오는 에틸렌 가스가 잘 빠져나가도록 해 준다면 좀 더 오랫동안 맛있게 보관할 수 있다.
소토 올리오는 말린 토마토라든가 가지, 호박, 올리브 등 채소나 소금에 절인 멸치를 기름에 재우는 경우가 많다. 소토 올리오는 여러 가지 음식 재료들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올리브 오일에 담근 것으로, 식초에 담근 소토 아체토와 함께 이탈리아 저장 음식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올리브 오일이 음식물과 산소의 접촉을 막아서 저장 기간을 늘려 주며 재료에 올리브의 풍미를 더한다. 게다가 올리브 오일은 토마토, 김치, 낫또 등과 함께 세계 건간 식품 중 하나로 꼽히니, 그야말로 똑똑한 음식 저장 방법이다. 우리나라 장아찌처럼 손이 좀 갈 뿐이지 만드는 방법도 어렵지 않아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알리오 소토 올리오 만드는 방법을 한번 보자. 같은 비율로 섞은 물과 식초를 팔팔 끓이다가 적당량의 소금과 후추를 넣고 주재료인 마늘을 넣고 10분 정도 끓인다. 마늘을 건져 천에 올려놓고 말린 뒤 살균한 유리병에 넣고 올리브 오일을 부어 주면 끝이다. 어둡고 시원한 곳에 보관하면 일 년은 거뜬히 난다고 한다. 마늘 장아찌 국물로 고추 장아찌를 담는 지혜처럼 알리오 소토 올리오의 기름은 빵에 뿌려 먹어도 되고 삶은 파스타에 소금을 섞어 뿌려 먹으면 간간한 마늘 파스타가 완성된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그리운 한국 음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 귀한 줄 알게 된 요리 재료가 참기름과 들기름이다. 여기서도 중국산 참기름은 구할 수 있지만 볶은 참깨로 만든 한국 참기름과 견주면 생참깨로 만든 중국 참기름은 고소하고 진한 향과 맛이 훨씬 덜하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 갈 때마다 이 기름병들은 필수 구매 품목이다. 하지만 한국을 매달 가는 것도 아닌지라 갈 때마다 여러 병을 사들고 오곤 하는데, 사실 이걸 다 어떻게 보관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그 맛과 향을 잃을 테니 덥석 냉장고에 넣을 수 없어 그저 찬장에 놓고 쓰는데 겨울이면 집 안에 난방이 들어오고 여름이면 날씨 자체가 더우니 부엌에 설 때마다 기름 걱정이다.
전통적으로 기름 보관에는 소금 단지가 유용하게 쓰였다. 소금은 기름이 산소와 접촉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기름이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소금 단지 안에 넣은 기름은 1년 내내 고소한 향과 맛을 유지한다고 한다. 소금 단지가 없다면 소금이 담긴 그릇에 병을 꽂아 두어도 된다.
질 좋은 올리브 오일이나 국내산 수제 참기름 등 귀한 기름을 얻었다면 소금 단지에 넣어 두자. 통풍이 잘 되고 빛이 들지 않는 곳에 소금 단지를 두면 소금도 그 안에서 오래 보관되고 기름도 그만큼 더 맛있게 보관할 수 있다. 유리병에 담긴 소토 올리오들도 소금 단지 안에 넣어 놓으면 더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거라고 렌자에게도 슬쩍 귀뜀해 줘야겠다.
토미노 치즈는 살찔 걱정이 없는 몇 안 되는 치즈 중 하나라고 한다. 보스코네로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토미노 치즈는 매우 가볍고 신선한 치즈다. 토미노 치즈에 올리브 오일과 고춧가루를 뿌리면 토미니 알 페페론치나가 탄생하는데 치즈 특유의 맛이 매콤한 맛과 어우러져 한국의 어르신들도 한 번쯤 맛보며 즐길 만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고춧가루가 들어 있는 치즈가 더 오래 보존된다고 하니,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우리네 김치의 비법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치즈를 보관하는 특별한 장이 유럽 곳곳에서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벌레가 꼬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치즈뿐만 아니라 남은 음식들을 망사로 된 문을 단 나무 장에 넣어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보관하곤 했다. 과거에는 음식 종류별로 저장 방법이 달랐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이 그에 맞춰 간단하면서도 맞춤한 도구들을 이요하곤 했는데, 지금 우리에게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냉장고가 바로 그것이다. 고작 100년 만에 이 냉장 기술은 우리의 손과 눈으로 쌓아 온 지식들을 모조리 빼앗아 버렸다.
몽텐블로와 센 강 사이의 작은 마을 토메리는 와인용 포도가 아닌 식탁용 포도로 유명하다. 와인 마을과는 다르게 이 마을 농부들의 과제는 포도 그 자체를 가능하면 오래도록 보관하는 것이었다. 오랜 자연 관찰,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특별한 저장법이 만들어졌다.
농부들 집의 어두컴컴한 창고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일정한 각도로 줄을 맞춰 빼곡이 차 있고 각각의 유리병에는 포도가 한 송이씩 담겨 있다. 가지만 병 속 물에 담겨 있고 포도송이는 병 밖으로 나와 있어서 물러지거나 으깨질 염려가 없다. 또한 유리병에서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수분은 포도의 싱싱함을 더 오래 유지시킨다. 이 방법으로 토메리 농부들은 9월쯤 수확한 포도를 크리스마스 지나 그 다음 4월인 부활절까지 보관하여 판매할 수 있다고 한다.
꽃병에 꽃을 꽂듯이 유리병에 포도송이를 꽂아보자. 보기에도 좋거니와 냉장고에 보관할 때와 달리 단맛을 유지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토메리 농부들의 마지막 팁은 유리병 물속에 숯 한 조각을 꼭 넣으라는 것. 숯의 여러 효능은 한국에서도 익히 알려져 있지만, 이 마을에서는 포도 병의 물을 오래도록 깨끗이 유지하는 데 이용해 왔다고 한다.
햇볕이 가득 내리쬐는 곳에 작은 건조대가 자리 잡고 있다. 아래로 공기가 통하도록 돌로 다리를 세우고 그 위에 철판으로 감싼 나무 건조대를 올려 사용한다. 건조대의 양쪽 면을 망으로 만들면 공기가 더 잘 통해 효과적이다. 유리판 아래로 햇볕을 잔뜩 머금은 공기는 바나나를 단 하루 만에 맛있는 간식으로 만든다. 반만 말려서 보관이 가능할까 싶었는데 햇볕에 직접 말린 것들은 강렬한 볕이 살균 작용을 해서 꽤 오랜 시간도 끄떡없단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소나 과일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바짝 말려야 한다. 우기인 6월부터 11월까지는 한 일주일 정도가 지나야 마르지만, 그렇지 않은 계절에는 2, 3일이면 바짝 마른다. 그녀가 말려 먹기를 가장 좋아하는 채소는 가지이다. 안헬라 말에 따르면 가지의 보라색 껍질에는 안토시아닌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이 성분은 세포의 노화를 예방하는 항산화 물질 가운데 가장 강력한 효과를 내며 간에도 좋다고 한다. 특히 가지는 말리면 맛이 완전히 바뀌는데, 안헬라는 그 맛이 좋아서 말린 것을 더 즐긴다. 가지를 하나 집어 든 그녀가 이렇게 듬성듬성 잘라서 말리는 거라며 손 칼질을 한다. 얇게 자르면 후딱 말라 더 편할 것 같은데 그러면 가지가 태양의 맛을 담기도 전에 말라 버려 다 부서진다고 한다.
냉장 보관하면 가지는 그 맛과 영양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모조리 잃게 된다. 가지는 인도가 원산지로, 태양을 많이 받고 자라야 그 맛이 제대로 들며 저온에 약하다. 냉장고 속에는 가지는 오히려 시들거나 딱딱해질 수 있다. 냉장고 밖 볕이 직접 들지 않는 곳에 가지를 하나하나 천으로 싸거나 비닐봉지, 종이봉투 등에 담아 보관하면 일주일은 거뜬히 견뎌 낸다.
가지를 더 오래 보관하고 싶다면, 8, 9월 서리가 내리기 전에 꼭지 째 가지를 따서 그 꼭지에 밀랍을 녹여 발라 두면 된다. 꼭지를 통해 수분이 날아가는 것을 막아 열매를 더 오랫동안 간수할 수 있다. 유럽 시장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빨간 밀랍으로 꼭지를 굳힌 서양배 또한 같은 원리이다. 방법이 매우 간단한데, 밀랍을 중탕으로 녹인 뒤 가지 꼭지를 잠깐 담갔다 빼내어 굳히면 끝이다.
나무를 때지 않는 도시에서는 적용하기 어려운 방법이지만, 속이 깊은 광주리에 재 한 겹, 가지 한 겹씩을 넣어 다 찰 때까지 쌓아 올린 후 마지막으로 재를 두껍게 덮어 놓으면 가지를 오래도록 보관할 수 있다. 특히 서리가 내리기 전에 딴 가지 꼭지를 뽕나무 재를 넣은 독에 꽂아 반만 묻으면 색도, 맛도 변하지 않고 본래의 신선함이 유지된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는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할 방법으로 식재료들을 보관해 왔다.
감자는 현재 세계 4대 주요 작물로 한국에는 19세기 초에 들어왔다. 안데스 산지에서는 2,3월에 수확한 크기가 큰 감자들은 저장고 바닥에 깔아 말리듯이 보관하는데 재를 그 위에 뿌리고, 무나(민트과 식물)라는 약초로 덮어서 보관한다. 이렇게 하면 벌레들이 감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따금 감자를 위아래로 섞어주면 몇 개월은 거뜬하다. 감자뿐만 아니라 고구마나 오카 등도 같은 방법으로 보관한다. 또한 티티카카 호수 물속에서 자라는 토토라라는 식물을 말려 만든 바구니 속에 이런 뿌리채소들을 넣고 재를 가득 채운 후 무나로 그 위를 덮어 보관하기도 한다.
당근이나 감자는 2mm로 얇게 썰어 끓는 물에 30초 정도 살짝 익힌 후 찬물에 식혀 2, 3일 동안 햇볕에 바삭해질 때까지 말리면 된다. 튀겨서 감자 칩이나 당근 칩을 만들어 먹어도 되고, 국이나 고기 요리 등에 넣어 먹어도 된다. 고구마, 호박 등도 마찬가지다. 부추나 파 같은 잎채소들은 1cm로 잘라서 햇볕에 말리면 그만이다. 말린 것을 그대로 사용해도 되지만, 갈아 주면 한국에서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천연 조미료가 된다. 파파야, 망고 등의 과일도 얇게 썰어서 아무런 첨가물 없이 2, 3일간 햇볕과 바람에 건조하면 보관 준비 끝이다. 이렇게 햇볕에서 말린 채소와 과일들은 적어도 1년은 실온에서 보관할 수 있다.
채소와 과일을 건조하면 비타민이 손실된다고 하는데 그 지적이 어불성설이다. 손실은 겨우 20%고 나머지 80%는 그대로 남아 있으니 전혀 안 먹어서 0%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사실, 태양 건조를 하면 비타민 D가 생성되기 때문에 잃는 것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 비타민D는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비타민으로, 칼슘 흡수를 돕고 암 예방에도 좋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몸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 일조량이 적은 북유럽 사람들이 우울증에 잘 걸리는 이유도 비타민 D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내 생활이 많아 비타민 D가 부족한 현대인들도 태양 건조식품을 먹는 것이 도움이 된다.
한국에서 흔히 먹는 호박고지, 무말랭이, 시래기 등은 싱싱한 제철 재료를 장기간 보관하기 위한 방법인 동시에, 일조량이 줄어드는 겨울철, 태양의 에너지를 담고 있는 식재료를 섭취함으로써 몸속에 양기를 유지하고자 했던 옛 사람들의 지혜이다.
양배추 절임은 채 썬 양배추 한 켜, 소금 한 켜를 층층이 담고 물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그 위에 올려놓아 양배추의 물을 뺀다. 후에 물이 다 빠진 양배추를 병에 담아 보관한다. 여기서 울금 가루를 병에 함께 넣으면 빛깔도 예뻐질뿐더러, 울금이 자연산 항산화 물질인 까닭에 저장 음식의 생명도 연장시킨다.
건강에도 좋고 맵기도 한 발효 고추는 줄기차게 만드는 저장 음식 중 하나다. 고추 꼭지를 떼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 후 소독된 병에 담고 5% 농도(1리터 물에 12 숟가락의 소금)의 소금물을 고추가 다 잠길 때까지 부어 준다. 뚜껑을 잠근 뒤 약 1주일 정도 병을 뒤집어 가며 보관하면 새콤하면서도 매콤한 발효 고추가 만들어진다. 한국에서 고추 장아찌를 만들 때는 고추를 자르지 않고 이쑤시개로 몸통에 구멍을 하나씩 뚫어 준다고 했더니, 이렇게 서로 지식을 나누는 거라며 웃는다.
기본적으로 양배추 절임과 같은 방식으로 발효 채소들을 준비하는 페페는, 고추뿐만 아니라, 호박, 당근, 파프리카, 비트 등도 발효해 먹는다. 소금에 절여 놔두면 유산균이 잔치를 벌이며 맛있는 발효 음식이 탄생한다. 한국에서나 갖가지 채소를 김치로 만들어 먹는 줄 알았는데 지구 반대쪽 쿠바, 페페의 연구실에서도 김치, 즉 발효 채소들이 잔뜩이다. 특히 그린 토마토는 그대로는 보통 먹지 않는데, 발효가 되면 맛이 좋아져서 즐겨 찾는 채소 중 하나란다. 발효는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이기에 원재료의 특성이 변화한다. 그래서 마늘을 먹지 않는 외국 친구들 중에도 김치에서는 마늘 냄새가 나지 않는다며 먹는 친구들이 있다. 발효는 산소 없이도 살 수 있는 미생물이 벌이는 요리 과정이다. 미생물의 종류에 따라 발효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게 펼쳐진다. 이중 맥주, 막걸리, 와인 등의 알코올 발효와 김치, 요구르트, 치즈 등의 젖산 발효가 우리에게 친숙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 음식인 김치와 간장, 된장 등은 젖산 발효의 결과로 요구르트와 그 맛은 다르지만 똑같이 유산균의 보고이다. 김치나 요구르트의 역사를 넘어 술의 역사까지 찾아 올라가면 발효법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파스퇴르가 그 원리를 밝혀낸 뒤 발효법은 다양한 발효 음식을 상업용으로 제조하는 데 이용되어 왔다.
달걀을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니 달걀을 왜 냉장고에 보관해요? 그래 본 적 없는데 반문하며 달걀이 차가우면 케이크 하나도 제대로 구울 수 없어요 말하고는 테레지나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달걀은 특별히 냉장고에 보관할 필요가 없는 대표적인 식재료 중 하나이다. 주변 온도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실온, 즉, 20도 안팎에서는 냉장고 밖에서도 한 달 정도는 문제없이 보관할 수 있다.
달걀 바구니 뒤편 선반에는 기름에 재운 파프리카와 가지가 있고, 식초에 담근 오이, 시금치 같은 잎채소가 가득 든 병조림이 보인다. 그 아래쪽에는 천에 싸인 유리병들이 파란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담겨 있다. 뭔가 싶어 다가가니 테레지나가 병조림을 선반에 올려 놓기 전에 거치는 단계란다. 병조림을 끓여 수건으로 싸 놓으면 천천히 식으면서 더 오래 보관이 되더란다. 테레지나는 경험에서 나온 습관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이는 과학의 힘이다. 소독된 유리병 안에 음식 내용물을 넣은 병조림을 끓인다. 병 뚜껑은 헐겁게 조여서 닫는다. 물이 끓으면 병 속 내용물이 위로 떠오르는데, 이때 물을 끄고 행주나 전용 집게를 이용해 병 뚜껑을 확실하게 조여 밀봉한 뒤 뚜껑이 바닥으로 가도록 거꾸로 뒤집어 둔다. 테레지나처럼 수건으로 싸 놓으면 열이 천천히 식으면서 병 속 공기가 수축해 서서히 내부 압력이 낮아지면서 진공 상태가 된다. 병 뚜껑이 오목하게 들어가는 것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병조림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이렇게 두면 최대 1년까지 장기 보관이 가능해진다.
빼곡이 들어서 있는 유리병들 사이로 테라코타 단지도 눈에 띈다. 그 속에는 마른 콩이 잔뜩 들어 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굽기 때문에 공기가 드나들어 콩이 썩지 않고 적당히 마르면서 오랫동안 보관된다. 한국에서 옹기에 쌀이며 다른 곡식을 보관하던 것과 비슷한 원리다.
이번에는 테레지나가 비닐봉지로 덮인 양동이 하나를 선반에서 끌어내렸다. 무게가 꽤 되는지 쿵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놓인 양동이에는 하얀색 크림이 가득 차 있다. 그 속에는 테레지나가 무언가를 쑥 빼내는데, 바로 살라미다. 어라? 크림 속에 빠진 소시지라니,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니 테레지나는 그런 내가 더 신기한 듯 바라본다. 자기는 일상적으로 하는 일들을 꼬치꼬치 캐묻고 받아 적기까지 하니 그럴 수밖에.
돼지기름이에요. 하얀색 크림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돼지기름이었다. 기름이 산소를 차단해 살라미를 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살라미를 꺼내 먹을 만큼 잘라 내고 다시 집어넣으면 된다. 집에서 돼지기름 단지를 마련하기 어렵다면 살라미의 잘린 면을 굵은 소금을 잔뜩 담은 알루미늄 포일에 감싸 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창이 없고 바닥이 조금 낮은 것이 아까 본 그 창고 방과 다를 게 별로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이 건물이 냉장고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아리송하고 있는데 테레지나가 손짓을 한다. 테레지나가 가리키는 곳에 작은 도랑이 있다. 건물 옆으로 흐르는 이 물 덕에 이곳을 냉장고처럼 이용할 수 있었단다.
한여름에 계곡에 놀러 가면 수박이나 음료수 따위를 계곡물에 담가 차갑게 만들 듯, 집 옆으로 흐르는 물이 곳간의 한쪽 벽을 시원하게 해 주는 건가 짐작해 보고 있는데, 테레지나가 도랑과 맞닿아 있는 집 벽에 뚫린 구멍을 가리킨다. 도랑의 차가운 물이 이 구멍을 통해 건물 아래를 지나면서 공간을 시원하게 유지하고 적당한 습도도 제공해 준단다. 애초에 도랑물을 이용하기 위해 이 자리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게 되어 바닥을 좀 더 올렸는데, 예전에는 바닥이 더 낮았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바닥이 물에 젖어 있다. 이건 그야말로 천연 냉장고가 아닌가.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어 내던 인간의 지혜가 테레지나의 집에서 꽃피웠다.
그때는 매일 동네 어디에선가 꼭 빵을 굽는 냄새가 났어요. 빵을 굽거나 피자를 만들 때 효모가 필요하잖아요. 예전에는 요즘처럼 파는 게 어디 있어. 밀가루 반죽을 놔두면 발효가 되거든, 그걸 리에비토 마드레라고 하는데 그 리에비토 마드레로 빵을 만든 집에서 빵 반죽을 조금 떼서 남겨 둬요. 그러면 다음날 다른 집에서 빵을 구울 대 그 집에 가서 그 떼어 놓은 덩어리를 얻어서는 빵 반죽을 만드는 거예요. 그 떼어 놓은 빵 반죽이 효모 역할을 하는 거죠. 새로 만든 빵 반죽을 다시 조금 떼어 놓고 빵을 굽고, 다음날 또 다른 집에서 오면 또 떼어 놓았던 반죽 덩어리를 주고 그때는 그랬죠. 어느 집에서 빵을 구웠는지 훤히 아니까 가능했어요.
뜨거운 커피가 싫어 남은 커피들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차갑게 마신다고 한다. 역시나 알뜰한 살림꾼. 지난번 멜란자나 소토 올리오가 벼에 조금 남았을 때 버리지 않고 그 위에 올리브 오일을 좀 더 부어서 다시 보관했던 게 떠올랐다. 올리브 오일에 재워 두는 것들은 먹은 후에 올리브 오일을 더 넣어서 재료들이 공기와 만나지 않도록 덮어 주기만 하면 따로 냉장고에 넣지 않아도 계속 보관할 수 있다.
찬 커피를 손에 들고 밈마는 부엌 앞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자리를 잡는다. 한낮에는 너무 더워 형광등도 안 켜는 이곳. 옅은 어둠 속에서 그녀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계단 옆 창가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감자, 호박, 토마토, 양파 등등 채소에 자꾸 눈이 간다.
창문을 닫아 놓으면 빛도 안 들어오거든, 대리석 계단 옆이라 좀 더 시원하잖아요. 이런 채소들은 이 정도만 시원해도 충분하지요. 따로 냉장고가 필요 없어요.
보여 줄게 있다며 부엌으로 다시 들어선 밈마는 냉장고가 놓인 나무 바닥을 가리킨다. 부엌 바닥이 타일인데 유독 그곳만 나무로 되어 있어 안 그래도 궁금했다.
이건 바닥이 아니라 문이에요. 냉장고를 쓰지 않던 시절, 지하 창고에 필요한 식재료들을 보관하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썼지요.
나무 바닥인가 했던 것이 사실은 지하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었던 것. 지금은 밑으로 내려가는 사다리도 치우고 냉장고가 문을 막고 있어서 집 밖으로 돌아 나가야 창고에 들어 갈 수 있단다.
이번에는 레오나르도가 바구니에 담겨 있던 달걀을 집어 든다. 자기만의 비밀 하나를 알려 주겠단다. 달걀 표면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나 있는데 그 구멍으로 호흡도 하고 냄새도 흡수한다고 한다. 냉장고에 달걀을 보관하면 맛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걸 역으로 이용해서 달걀을 값비싼 송로버섯과 함께 주머니에 넣고 보관하면 달걀이 그 향을 흡수해 송로버섯 향 달걀을 값싸게 먹을 수 있다며, 레오나르도 하얀 콧수염을 싱끗 움직인다.
시계는커녕 작은 전구 외에 전기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이 집에 냉장고에게 내줄 자리는 없다. 볕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탁자 밑에는 오랫동안 두고 쓰는 식재료를 주로 보관한다. 한쪽에 잘 여며져 있는 자루에는 감자가 잔뜩 들어 있다. 감자를 보관할 때 햇빛에 노출되면 맛이 쌉쌀해진다며 감자 자루는 잘 덮어 놔야 한단다. 반면 울루코(안데스가 원산지로 감자와 유사)나 막 따 온 옥수수, 양파 등은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먹을 만큼씩만 보관한다. 나머지 식재료들은 그때그때 밭에서 따거나 부엌 옆 작은 창고에 두고 쓴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