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전* 가는 길
유 동 애
두 바위 사이로 난 길이 아니라
한 개의 바위 속으로
길을 만든 건
한마음
제대로 가져보라는
내 안 부처님의
또렷한 말씀
*전남 여수에 있는 암자
길을 일러 주려고
유 동 애
역병이 들불처럼 번져
고향 가는 길을 잃어버린 날
구름이 열사흘 달을 열어 주고
서성거리는 섬진강변
달을 품고 흐르는 강은
어디쯤에선가 멀어져서 흐르네
저 멀리 보이는
붉은 불빛의 초막속에는
오늘 밤쯤 송아지를 낳는 날인가
지금쯤 누군가가
먼 길을 오고 있을 것이다
고향 가는 길을 일러주려고
(2022.12.)
수필
연필 한 자루의 위대함
유 동 애
엊그제 그녀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버스를 3시간여를 타고 서울로 가야 했다. 그녀를 봉사단체에서 만난 지 20여 년, 막역하게 지내 온 사이이다. 누구보다 신실하고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내가 마음이 메말라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을 때 그녀를 만나면 마음이 촉촉해져 오는 친구라서 세 시간여를 버스 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만나러 가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가슴 깊이 간직한 이야기 하나를 건네는 것이었다. 그녀는 화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교도소에 갔다. 그곳의 수형자들을 위하여 종교행사를 하고 그들에게 필요하고 절실한 물품을 구해주기도 하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어느 날 그녀는 000라는 사형수를 만났다.
아래에 그녀의 이야기를 옮겨 본다.
처음 만난 날은 그가 사형 언도를 받은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였다. 눈동자를 아래위로 움직이며 불안한 표정을 잔뜩 움켜쥔 채 나를 만났다. 그 이후로 일주일에 두 번씩 종교모임에서 만났다. 석 달이 지났는가 어느 날 종교 모임이 끝난 뒤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첨 있는 일이었다. 연필과 종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 주 화요일 구치소에 갈 때는 그에게 건네줄 연필을 챙겼다. 혹 어떨지 몰라 짙은 심의 연필 한 다스와 4B연필 한 다스, 잘 지워지는 말랑말랑한 흰색 지우개 3개, 줄이 쳐진 두꺼운 공책 속칭 대학노트 3권. 줄이 없는 공책 그러니까 도화지를 묶어놓은 국판 크기의 공책을 3권 샀다. 합 3만 원도 되지 않은 금액이다. 이는 순수한 내 돈으로 장만한 것이다. 그렇게 연필 2다스와 공책 6권을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그와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종교모임에서 만났다.
눈이 마주치면 목례를 하고 지냈다. 그렇게 백일쯤 지난 어느 날 종교모임이 끝나고 다과 시간에 그는 공책을 들고 나에게 왔다. 그리고 공책을 펴서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고향마을이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실개천이 흐르고 뒷동산이 있고 아 그리고 사형수 어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가슴이 뭉클해져서 그림 속의 어머니 모습을 보고. . . 그를 보고 . . . 또 그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 . 그를 훔쳐보고... 그는 눈빛이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종종 그림이 그려져 있는 공책을 보여주곤 했다. 나는 도화지를 묶어놓은 자그마한 공책을 서너 권씩 건네주다가 크기가 더 큰 스케치북으로 바꾸어서 건네고, 스케치북을 몇 권씩 건네주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의 요구대로 풍경이 있는 사진, 펜화로(연필로만 그림을 그리므로) 그려진 양산 통도사, 덕수궁 부용정, 고궁과 숭례문, 해인사 일주문, 전통사찰의 전각 등 한국의 소중한 문화재와 전통 건축물의 자연과 자연 풍경들, 또 모네의 연꽃, 밀레의 저녁기도, 성 프란치스코의 성당 등의 사진을 전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좋은 선생님이 계시면 그림 그리는 지도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그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온 날 나는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였다. 이 분이다! <기록 펜화의 대가 김영택 화백>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0.05mm 의 펜 끝으로 우리 건축 문화재를 복원한 분, 한국의 아름다움을 남긴 기록펜화의 거장 김영택 이분을 찾아냈고, 그리고 지인을 통하여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이분에 대하여 알아보기 시작했다. 1945년 인천출생, 1972년 홍익대 미대 졸업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고, 1993년 국제 상표센터가 세계 정상급 그래픽 디자이너에게 주는 디자인 엠버서더 칭호를 받는 등 디자이너로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1994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프랑스 화가이자 삽화가인 키스타프 도레의 펜화를 보고 감명받아 50의 나이에 펜화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이 50이 넘어서도 새로운 분야의 길로 가는구나 이 사형수도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많을지도 모르니 다른 길로 가는 것도 괜찮은 것이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김 화백님은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 미황사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인 몇 사람의 다리를 건너 이루어진 약속 끝에 이 사형수가 전해 준 몇 권의 스케치북을 들고 아들이 운전하는 차로 땅끝마을을 향했다. 장장 6시간도 넘게 걸리는 이 거리를 김 화백님을 만나서 이 연필로 그린 그림을 보여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또 그 사형수의 간절한 몸짓을 전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7시간여의 장거리를 달려갔다. 김 화백님을 뵙고 먼발치로 들어서 알고 계실 이 사연을 말씀드리고 그림을 보여 드렸다. 김 화백님은 내 생애의 마지막 제자로 삼겠다는 말씀과 함께 허락을 하셨다.
그 이후 편지로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교도소에서는 오가는 편지의 내용까지도 모두 검열한다. 사형수는 그림을 그리다가 부딪히는 의문점에 대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우편으로 보내면 그 우편물을 받아본 김화백님은 그림에 대한 가르침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해서 회신으로 보냈다. 그 편지 속에 들어있는 가르침을 받은 사형수의 그림은 날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형수는 펜화를 그리고 싶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나는 우선 교정 당국에 펜촉이 교도소 내에 반입이 허용되는가 여부를 알아보았다. 펜촉은 반입금지 품목이었다. 사형수는 펜촉이 반입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실망스러워 했지만 며칠 후 이내 평정을 찾고 그림에 몰두하였다. 이렇게 십여 년이 족히 흘렀다. 나는 부지런히 연필과 지우개와 스케치북을 반입시키곤 했다. 이러는 게 내 일이거니 하면서. 이러는 중에 나는 해남의 땅끝마을 미황사를 한 번 더 다녀왔다. 미황사는 해남읍에서도 땅끝마을 행 버스를 타고 1시간여를 더 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이 사형수의 그림 보퉁이를 들고 화백님의 가르침을 받아 오려고.
그 화백님은 2021년 1월에 타계하셨다. 사형수는 김 화백님의 말씀대로 김 화백님의 마지막 제자가 된 셈이다. 그 사형수는 정부 시책에 의해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아 사형수 신분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연필로 작품을 하나 완성하려면 50만 번에서 80만 번의 선을 그어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교도소 내의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또는 교정 당국의 허락을 받아 교도소 밖의 각종 미술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곤 한다. 표정은 맑고 밝아서 성직자의 눈빛처럼 잔잔하다. 사십여 년을 구치소를 드나들며 수형자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그녀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세계적인 디자이너에서 나이 오십이 되어 새로운 분야의 길을 성공적으로 가신 김 화백처럼 이 사형수도 연필 하나의 힘으로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기를 바래본다.
나도 버리는 일만 남아있는 나이이지만 연필 한 자루는 마지막까지 남겨 두려고 한다.(문구협회발간지에 수록 작품-구례문학에 재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