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리랑에서 국창 임방울명창의 불후의 명곡인 '추억'을 강습합니다.
산호주라는 사랑했던 여인의 뜻밖의 죽음으로 충격이 컷던 임방울 명창이
연인을 기리기 위해 단가 '추억'을 작곡,작사하여 불렀다고 하는 애절한
단가를 소리랑에서 이남행 명창의 소리로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 강습 일시 : 2014년 12월 19일 (금) 오후 7시 30분
(매주 금요일 7시 30분~ 9시)
■ 강습 기간 : 4주
■ 장 소 : 종로구 와룡동 150번지 '한국국악동호회 소리랑'
창덕궁 앞 국악로 ( 전철역 1호선, 3호선, 5호선 종로 3가역)
■ 수 강 료 : 55,000원
■ 강습 대상 : 국악을 좋아하는 모든 분
- 상담 대표전화 010-9805-9861 또는 02-3672-8404
- 소리랑카페 http://cafe.daum.net/sorirang06
■ 지도 선생 소개

■ 이남행 선생님
- 김일구, 김영자, 조상현, 김수연 선생께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적벽가 사사
- 김영자, 김수연, 신영희 선생께 민요 수업
- 경주 전국국악대전 판소리부분 장원
- 영광법성포단오제 전국국악경연대회 명창부 최우수상
- (사)한국국악협회 창악분과 정회원
- 현 '이남행 민요판소리 전수원' 대표
- 현 한국국악동호회'소리랑' 설립 및 운영이사, 지도교수
- 전주'사단법인 온고을소리청'(이사장-김일구명창) 부이사장
- 현 순천향대학교 겸임교수

단가 '추억' -이남행
■ 임방울 명창과 '추억' 탄생의 배경

- '추억'을 낳게 한 열정적 기생 '산호', 시인 김영랑과의 우정.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50대에 생을 마감한 국창(國唱)소리꾼 임방울.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불행한 시대를 살며 뼈를 깎는 독공으로 소리를 완성하고자 한 예술가에 대해 짧게 소개한다.
-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조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세습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함.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고 한다.
-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다.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한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느데,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 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얘기도 있다.
-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느데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다.그 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寂寞獄房) 찬 자리에
생각나는 것이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한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다.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이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다.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느데,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것이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우게 되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엇다.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린 것이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다.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던 것이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또하나의 명곡<추억>이라는 노래이다.